LOGIN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
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을 찾아 나서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쏟아내고 이혼하자고 하면 낫겠구먼.”최 씨는 빗소리에 묻히고 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평생 최선을 다해 가정을 책임져왔지만, 다정한 아버지나 남편은 아니었다.
가정을 돌볼만한 시간에 그는 마을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딸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 시간에 최 씨는 티브이를 보며 소파에서 쉬었다.
집안일은 당연히 아내의 몫이었다. 밭일과 가게 운영은 함께 했지만, 집안일은 당연히 여자의 몫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 때의 남자들은 모두 그러고 살았구먼-.”나 정도면 훌륭한 남편이었지.
담배 피우지 말라고 대놓고 눈치 주는 아내도, 딸도 없는 삶은 넘치도록 자유로웠다.
그렇게 원하던 자유가 삶에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싫었다. 싫고 허탈했다.
귀찮아서 좀 사라져 줬으면 하던 존재들이 사라지고 나니, 도리어 그리웠다.
그를 찾아댈 때는 그렇게 성가시더니, 없으니 좀 찾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최 씨는 술잔을 한 손에 들고 반대 손에는 담배를 든 채로 차가 지나다니는 국도만 내다보았다.
이제는 이 낡아빠진 구멍가게를 찾는 사람들도 잘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은 날이면 더더욱.
솨아아-.
할 일도 따로 없어서, 티브이만 가게에 딸린 방 안에서 주야장천 보다가 나온 그였다.
이렇게라도 해야 답답한 속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 “그래요? 인협이 녀석이?”에스더의 말에 본용의 눈이 커졌다.
며칠 전, 원길을 무서워하지도 않고서 눈을 똑바로 뜨고서 그에게 따지던 인협을 떠올린 본용은 고민에 빠졌다.
인협이 한때는 영재라고 불렸던 걸 모르는 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모난 성격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제가 직접 제안했었는데, 꽤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임시로 예체능 쪽만 맡아주는 거면 그래도 문제는 아닐 것 같아서요.” “흐음-.” “그리고 인협 씨 성격에 대한 우려가 있으신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소량의 사례만 해줘도 인협 씨는 이 학교에 충성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더라고요. 성질이 더러운 만큼, 그에 대한 값을 받으면 자알 절제되는 모양이에요.” “…….” “금융 치료, 아시죠?”물론 인협이 학교에서 일하는 걸 승낙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에스더는 일단 밑밥을 깔아두기로 했다.
“소량의 사례비면 달에 몇십이어도 괜찮은 건가-.” “당장 생활비가 좀 급해서 그 정도로도 감지덕지할 거예요.” “그런가요?“에스더의 말에 본용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요! 아, 그리고 선생님 또 한 가지는-.“ ”그래요, 황 선생님.“ ”아무래도 빈 관사를 인협 씨에게 복지 차원에서 내어주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어제 인협 씨 집 상태를 보니, 지붕에서 물이 새는 게 아니라 그냥 흐르더라고요. 집안은 다 물바다가 되어있고.“ ”…….“인협의 집 상태를 모르지 않을 본용은 팔짱을 끼고서 고민에 빠졌다. 일단 당장 거절하지 않고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사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비어 있던 관사를 내어주면 어떨까 해서요. 그러면 인협 씨도 선생님으로 일할 맛도 날 거고요.“에스더의 조심스러운 설득에 본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교장 선생님. 그리고 잘 구슬려서 사무보조도 가능하면 그것도 써먹는 거예요.”에스더는 본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조 선생의 빈자리가 그에게 가장 크게 다가올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꽤 괜찮아 보였다.
”그래요, 그럼 빈 관사 내주고 예산에서 남는 돈으로 월급 주고. 그 이상은 안 돼요.“시골 마을의 장점이자 단점은 절차가 없고 체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무언가를 해야 할 때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렇게 무언갈 해내야 할 때 절차를 어느 정도 건너뛸 수도 있다는 것.
”좋죠! 아마 인협 씨도 아주 만족스러워하실 거예요.“사실상 인협에게 관사만 얻어줄 심산이던 에스더는 달에 몇십만 원의 돈도 덩달아 얻어냈다.
일단 본용이 가장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인 월급을 물어보고, 거절당하면 관사를 부탁해 그걸 얻어낼 심산이었던 에스더다.
“그래요. 일단은 허락하지만, 황 선생이 인협이 잘 지켜봐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험하게 대하면 나한테 보고하고요.” “당연하죠. 인협 씨는 제가 잘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드디어 몇 과목은 덜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희망에 가득한 에스더의 얼굴이 환해졌다.
*** “인협 씨, 아, 인협아!”관사 문이 열리자마자 신난 강아지 같은 에스더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침에 짐을 챙겨온 덕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던 인협이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차, 싶어진 에스더는 관사 문을 살짝 열고서 주변을 둘러보고는 문을 재빠르게 닫았다.
인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너 이제 학교에서 일할 수 있어! 관사도 나오고 조금이지만 월급도 나온대.”꼭 자기의 일인 것처럼 신이 나서 조잘거리는 에스더를 인협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제 표정을 자각하고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괜스레 머쓱함을 느끼고 말았다.
“진짜?”이게 이 정도로 신날 일인가.
에스더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인협은 잠시 생각했다.
“그래, 예체능 세 과목만 맡아주면 달에 50정도 나온다고 하지, 작년에 완전 새롭게 인테리어 된 관사도 나오지. 이게 웬 떡이야?” “…….”에스더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좀 나아지면 태욱이 아저씨한테 부탁드려서 집 보수 도와주실 어르신들도 좀 알아보자. 마음 좋으신 분들이 많으셔서 도와주실 거야.” “어째 나보다 네가 더 좋아하는 거 같아.”인협의 음성에 신나서 조잘거리던 에스더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연히 좋아해야지. 어제 널 저 집에서 구해낸 것도 그렇고, 물이 줄줄 새던 저 집에서 네가 나오게 된 것도 그렇고.”에스더의 말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그 순간, 늘 날이 서 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는 것만 같았던 사람들 틈바구니에 살았던 때. 인협은 늘 불안했었고, 그로 인한 불면이 깊었었다.
이렇게 사소한 행운에 저보다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보니 낯설면서도 기뻤다.
마치 마음이 처음으로 원래 있어야 했던 제자리를 찾아낸 것처럼.
“당연히 좋아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지, 안 그래?”에스더의 순진무구한 미소에 인협은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웃음도 전염이 되는 건가.
웬 도도한 고양이 같던 에스더의 첫인상.
그 위에 떠오른 티 없이 맑은 미소에 인협도 덩달아 녹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네.” “뭐가?”인협의 혼잣말에 에스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그는 조용히 그런 그녀를 응시했다.
“평생 인생이 썩은 웅덩이처럼 고여있다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는데, 너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어.” “썩은 웅덩이?” “응, 아무것도 못 하고 고여만 있다가 썩어버린 물처럼 말이야.”인협의 말에 에스더의 두 눈에 안타까움이 가장 먼저 깃들었다.
썩은 웅덩이. 자신의 인생을 이런 식으로 정의 내리기까지 얼마나 맘고생했었을까 싶었다.
그래봤자 스물다섯일 뿐인데. 그 어떤 걸 다시 시작해도 그럴듯한, 아니, 이른 나이인데.
“썩어버리기에는 우리 아직 스물다섯이야. 그냥 가만히 있으려 해도 에너지가 너무 많은 나이야.”에스더의 말에 인협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스물다섯이면 이스포츠 계에서 끝물이나 마찬가지인 나이였다.
세상의 시선을 따라서 곧 실력이 꺾이고 자연스레 은퇴를 대비해야만 하는 나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게다가 끝에 다다라가는 시점에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오명을 쓰게 되어 선수 생활은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믿었었다.
“뭐든 해. 뭐든 새로 해도 되는 나이야.”자신에 찬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던졌더라면 무책임한 낙관이라고만 느껴졌을 텐데, 신기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굳게 믿고 싶어졌다.
“그래.” “일단 아이들 가르치는 것부터 해봐.” “…….” “아이들이랑 잘 지내면서 가르칠 수 있잖아? 너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어.”어느새 심각해진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에스더를 본 인협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볼게.” “좋아.”무거운 제 짐을 덜어내고 싶어 안달 난 에스더의 몸부림이라는 게 너무나도 잘 보였지만, 이번만큼은 인협은 기꺼이 이용당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도 고이지 않고서 힘차게 잘 흘러갈 곳이 필요했다.
“아침은? 아침은 챙겨 먹었어?” “어-.”흔한 안부 인사에 인협은 순간 멈칫했다.
누가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내 안부를 궁금해해 준 적이 언제였지?
그의 의문에 떠오른 건 그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뿐이었다.
‘우리 강아지, 밥은 먹었나?’늘 직접 식사를 챙겨주다가 밭일이 바쁘거나 무슨 일이 있어서 직접 챙겨주지 못하던 날이면 꼭 할머니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협에게 묻고는 했다.
인협이 한 끼라도 굶으면 큰일이 난다는 듯이.
에스더가 지나가는 인사치레로 물어온 게 아니라서, 진심으로 인협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마음이 절로 와닿은 탓에 그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 물음에 담긴 마음이 너무나도 따스해서.
“응.”인협은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게 목구멍을 막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 먹었어? 냉장고에 있던 거 잘 챙겨 먹었지?” “응, 아까 집에 짐 챙기러 갔다가 목사님 마주쳐서 반찬을 더 얻어오긴 했어.” “어? 양 목사님 만났어?” “응, 반찬 좀 만들었다고 전해주러 오셨더라고.” “어때? 아직도 목사님이 불편해?”에스더의 뼈 있는 질문에 인협은 순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래, 굳이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받아도 되는 호의야.” “…….” “주는 게 기쁨인 분인걸. 그냥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반찬만 잘 받아먹기만 해도 기뻐하실 거야.”이 세상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에스더의 설명에 기탁의 얼굴을 떠올린 인협은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약간의 의심이 들었다.
소원리가 이상한 동네인 건지, 아니면 그가 살아왔던 환경이 이상한 곳이었던 건지.
그 누구를 향해도 아무런 득이 안 되는 인협을 향한 순수한 호의와 응원이 그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저 하나 건사하며 살기도 버겁고 벅찬 세상인데.
“아무튼, 모든 마음의 힘은 밥심에서 나오니까 무조건 잘 챙겨 먹어.”에스더는 인협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치고는 그대로 소파로 향해 그곳에 풀썩 앉았다.
“뭐 보고 있었어?” “그냥.”사실 우연히 튼 너튜브 메인화면에 뜬 리그 오브 카오스 소식을 보고 있었던 인협이다.
인협의 퇴출 후 빠르게 하락세를 보이는 케이비 소식을 보던 와중에 에스더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황급히 티브이 채널로 돌려놓았던 그였다.
어색한 표정을 짓는 인협을 보며 에스더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뭔데?” “뭐어-.”답지 않게 당황해서 꿍얼거리는 인협을 본 에스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씩 웃었다.
“뭐야? 그런 거라도 본거야?” “그런 게 뭔데?” “왜, 혈기 왕성한 남자들이 보는 거.” “야, 너는 나를 뭐로 보고-.”귀가 붉어지며 발끈한 인협을 본 에스더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에스더는 짓궂게도 스마트 티브이 앱을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행여나 너튜브를 틀까 걱정된 인협은 그녀의 손에 들린 리모컨을 뺏기 위해 기를 썼다.
“어어-!”그러다 인협의 무게를 못 이긴 에스더가 뒤로 넘어갔고, 인협이 그녀의 위에 자리하게 됐다.
시끌벅적하던 곳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당황한 인협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에스더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 왜 이래-.”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고, 에스더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아니라니까.” “그럼, 뭐 봤는데?” “그건-.”인협은 얼떨결에 모든 걸 털어놓으려다가 멈칫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달리던 수많은 비난들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걸 알게 되면 너는 뭐라고 할까?
에스더의 맑은 두 눈을 응시하며 인협은 잠시 고민했다.
이 눈에 그를 지나치게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심이 담기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그를 의심하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싫었다.
그저 지금처럼, 그에게 적당히 틱틱대고 적당히 이렇게 안부를 물어봐 주면 좋겠어. 그냥 나를 아무것도 아닌, 옆집에 사는 나인협으로 봐주면서.
“…….”무언가 말하려고 벌려져 있던 인협의 입이 다시 다물어지자, 에스더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뭔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에스더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인협은 몸을 일으켰다. 에스더는 어리둥절해하며 저도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것 같더니만, 또 껍데기 안에 숨어버린 소라게처럼 굴고 있네.
에스더는 어느새 굳은 얼굴로 소파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인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 번 더 놀려볼까, 싶었지만, 에스더는 인협의 눈빛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슬픔 같기도 하면서, 분노 같기도 한 어떠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벼랑 끝에서도 내던져버릴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언젠가 술을 사러 가며, 술을 사 오며 보이던 그 눈빛이었다.
스스로도 스스로를 포기한 얼굴.
도대체 네 가슴에 담겨있는 게 뭐길래, 이런 표정을 지어.
에스더는 묻고 싶었으나, 잔뜩 움츠러든 그를 그만 놓아주기로 했다.
언젠가 저 꽉 닫힌 마음에 약간의 틈새가 보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주기로.
감사합니다 :-)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