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정렬 씨!”
“황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유림과 정결만 남아 있던 학교에 정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깨끗하게 청소된 학교 상태를 고려해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들어온 그였다.
“아, 괜찮아요. 비가 진짜 많이 내리죠?” “네, 오늘 일이 좀 바빴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지금 오셨으니 됐죠. 그동안 저도 학교 뒷정리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포터를 운동장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했던 정렬의 머리카락은 거센 빗줄기에 꽤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해봤자 집은 걸어서 1분 남짓이라 퇴근이 급할 것도 없는데요.”에스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 불을 다 끄는 에스더를 지켜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협이 형은요?” “네?”정결의 물음에 우산을 펼치려던 에스더가 멈칫하고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인협이 형,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고 양 목사님께 지난번에 들었거든요.” “아-.”지난번에 목사님이 반찬 전해줄 때 인협이가 집에서 마주쳤다더니.
에스더는 인협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에서 지냈다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녁에 들어오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거든요. 어차피 금방 걸어올 수 있는 거리니까요.” “어? 그럼, 낮에는 물새는 집에서 지내는 거예요?”정렬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한 에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하하하, 낮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인협이 형이 잠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소문이 참 빨리도 퍼지는 동네야.
에스더는 속으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지난번에 이야기 나누는데 악기도 좀 다룰 줄 아신다고 하셔서 잠시 예체능 쪽을 맡길까 하고요. 당장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요.” “그렇군요.”정렬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아, 아무래도 정렬 씨한테 먼저 물어볼걸 그랬나요? 근데 워낙 바쁘셔서-.”적은 봉급 이야기를 꺼내려던 에스더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맞아요. 하루하루 일거리 받아서 사는 저는 매일 아이들 가르치는 건 무리죠.” “그렇다기보단-.” “아무튼, 잘 됐어요. 인협이 형이 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멋지니까 선생님께 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아-.”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대화를 황급히 마무리 지은 정렬은 재빠르게 우산을 펴 들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세워둔 포터로 달려갔다.
“어-.”뭐지, 똥이라도 안 닦은 것 같은 이 찝찝한 마음은.
어딘가 슬퍼 보이던 정렬의 찰나의 표정을 떠올린 에스더는 운동장을 빠르게 떠나는 포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기훈아, 기정아, 주아야. 와서 밥 먹어-.”유진의 부름에 거실에서 놀던 세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기훈과 기정은 영애의 조카들이었다.
5학년인 하얗고 동그란 얼굴의 기훈은 소원 초등학교에서 가장 큰 형이었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머리를 하나로 묶은 기정은 1학년이었다.
철호를 대신해 철물점 일을 봐주는 태욱 대신 유진이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 태욱이 퇴근할 때까지 봐주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주아는 유진의 딸. 초등학교 2학년, 아홉 살배기 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옆집에 살고 교회에서도 매번 만나는 탓에 원래도 셋이서 친남매처럼 가깝게 지내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을 계기로 셋은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셋이서 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은 피식 웃었다.
본의 아니게 실질적인 살림과 육아는 유진의 부모님인 철호와 순옥이 도맡아 하고는 했었는데, 이제야 진짜 엄마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 귀엽다, 너희들.” “어어? 고모는 내가 너무 빨리 커서 무섭대요.”흐뭇한 얼굴을 한 유진에게 기훈이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이제는 제법 통통해진 얼굴에 키가 유진을 넘어선 기훈이었다. 어느새 사춘기의 문턱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너희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기훈이 네가 예솜이만큼 어렸었는데 말이야. 그런 거 보면 시간이 참 빠르긴 하네.”예솜은 종종 할 게 없을 때마다 소원 초등학교를 찾아와 언니오빠들과 어울리고는 했다.
영애의 손을 꼭 붙들고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소원리에 왔던 기훈과 기정은 어느새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다.
“이제 저도 곧 읍내 중학교에 가고, 교복도 입을 거예요.” “그러게, 진짜 큰 형아가 되는 거네.”기훈의 자랑에 유진은 흐뭇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너의 세상은 아주 조금 더 넓어지겠지.
유진은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어렸을 적에는 동해 시내에 살던 그녀라,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진이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면서 받았던 충격은 새로웠다.
중요한 일이나 갈 곳이 있을 때마다 서울을 오갔던 그녀였지만, 그 크나큰 도시에서 산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이렇게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되는지.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새로운 세상이었다.
두 다리 건너면 모두를 아는 동해시에서, 이별을 고하면 누군가를 영영 못 보게 되기도 하는 서울로 옮겨갔을 때의 충격이란.
“아주 조금씩 넓어지는 세상을 한번 잘 봐봐.” “세상이 왜 넓어져요? 지구는 그대로일 텐데요.”사춘기 문턱에 있는 기훈의 특유의 질문에 유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앞으로 한번 쭉 살아봐봐. 나중에 더 크면 이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피, 이모는 맨날 알아듣기 힘든 말만 해.” “그거야 네가 애기니까.” “애기 아니라니까요-.”유진은 장난스럽게 이야기하고는 푸흐흐, 웃어버렸다.
“엄마, 기훈이 오빠는 우리 학교에서 왕 오빠인데. 그리고 엄마보다 키도 크잖아.” “그래, 그래. 알았어.”밥을 먹다 말고 치고 들어온 주아의 말에 유진은 두 손을 들고서 말했다.
주아는 기훈을 매우 좋아했다. 늘 크고 나서는 기훈 오빠와 결혼할 거라며 엄포를 놓는 주아였다.
그런 딸의 마음을 아는 유진은 그 풋사랑을 존중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원리 미친개로 불리는 천하의 박유진이 유일하게 꼼짝 못 하는 존재, 박주아였다.
*** 조용한 6인실의 한쪽 창가 침대. 늦은 밤이라 병실 안의 모든 불이 꺼져있었다. “으음-.” “왜, 어디가 불편해?”순옥의 약간의 뒤척임에 철호의 다정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불이 살짝 걷혀서인지 느껴지는 냉기에 잠에서 깬 순옥이었다.
그걸 단번에 알아차린 철호는 부드러운 손길로 이불을 고쳐 덮어주었다.
“괜찮아?” “응, 그래도 수술만 잘 되면 항암도 안 해도 된다니까-.”이틀 후. 순옥은 암이 퍼져있는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순옥에게 근심이 가득한 줄 알았으나, 이내 철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읽어냈다.
“왜? 주아랑 유진이 걱정 돼?” “아니, 그냥-.” “아까 잘 있다고 영상 통화했잖아. 당신도 참-.”늘 철호를 우선으로, 유진이 나오고서는 두 사람을 우선으로, 그리고 주아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기어이 자신을 4순위로 미뤄두고 살아온 순옥이었다.
어쩌면 그러다가 병이 난지도 모를 그녀였다.
그런 순옥을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철호는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일단 당신만 생각해. 그렇게 해야 더 빨리 회복하고, 회복해야 아이들 보러 가지.” “맞아.”여전히 무거운 순옥의 대답에 유진과 주아도 모자라 소원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담겨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철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에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그 걱정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기라도 해서 순옥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어주고 싶은 철호였다.
“나한테는 당신이 가장 우선이야.” “응.” “그러니까 날 생각해서라도, 당신을 우선으로 둬. 일단 회복을 해야, 뭐든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응….”어쩌면 평생을 남을 배려하면 살아온 사람의 습관이자, 고질병인지도 몰랐다.
“당신이 사랑하는 게 많아서 기뻐할 게 많은 건 너무 좋지만, 지금은 조금만 내려놔. 당신만 돌봐.”철호의 말에 순옥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보기에도 참 미련하지? 이렇게 병상에 누워서 다른 사람들 일이나 걱정하고 있고.” “미련한 건 아니고, 대단한 거지.”철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순옥의 손을 꼭 붙들었다.
아직도 수줍어하며 처음으로 그녀의 부드럽기만 하던 손을 붙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그 곱던 손에 언제 이리도 주름이 졌을까.
속상한 마음에 철호는 순옥 몰래 눈물지었다.
“어째 당신이 더 울적한 거 같아.” “울적한 건 아니고…. 미안해서 그렇지.” “당신이 뭐가 미안해.” “이렇게 아플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아무것도 말을 안 했는데, 당신이 어찌 알아?”철호가 손등으로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자, 순옥도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생이라 하면, 당신이 더 고생했지. 마누라가 늦바람 들어서 시골살이하자고 해서 불편한 시골에 사느라.” “덕분에 좋은 공기 마시며 탁 트인 풍경 보고 사는데, 뭐가 고생이야.” “집 관리도, 집 보수도 다 당신이 하고 마을 사람들한테 붙들려서 맨날 일 도우러 다니고. 그게 다 고생이지, 뭐야.”두 사람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두 사람은 지나온 세월 속 서로의 고생을 헤아리고 있었다.
“내가 여왕님 대접을 더 기깔나게 해줬으면 당신이 이리 아플 일이 있었을까-.” “아휴, 여왕님 대접 당신 만나고 충분히 받아봤으니 걱정하지 말아. 당신이 늘 나 보면서 애달파하는 거 적당히 하라고 내가 맨날 말렸지.”순옥의 말에 철호가 피식 웃었다.
“아무튼, 일단 당신 수술 잘 받는 것부터 생각하자. 수술만 잘 되어서 싹 다 떼어내면 더 이상 치료 안 받아도 된다니까.” “그러게.” “기도하자. 다 잘될 거야.”두 사람은 어두운 병실에서 서로의 손을 굳게 붙들고 미소 지었다.
*** “기훈아, 기정아!” “고모부!!”태욱이 현관문에 들어서며 외치자마자 아이들이 한꺼번에 우다다 뛰어나왔다.
“미안해, 유진아. 아저씨가 많이 늦었지?” “지금 겨우 저녁 8시인데요. 이 정도면 초저녁이죠.” “아저씨가 워낙 일이 익숙지가 않다 보니까 문 닫기 전에 이것저것 확인하느라 늦었어, 미안해. 내일은 약속한 대로 5시에 올게.” “아저씨가 왜 미안해하세요. 우리 아빠 가게 갑자기 맡아주시느라 그러는 건데.”유진의 말에도 태욱의 표정은 도통 풀릴 줄 몰랐다.
“에잇, 그런 표정 금지예요. 그냥 아빠보고 가게 문 좀 닫으라 해야겠어요.” “어어, 아니야. 아저씨가 좋아서 먼저 가게 맡는다고 한 거야. 아저씨 반백수 생활한 지 오래됐잖아. 심심해서 그랬어.” “백수 생활은요. 짬 나면 카페 일 도우시고, 아이들 육아하시잖아요.”유진은 아이들의 짐을 챙겨서 태욱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애들이 셋이서 워낙 잘 놀아서 밥만 챙겨주면 땡인걸요. 저는 오히려 주아가 저만 안 찾아서 좋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줌마도 요새 많이 바쁘신가 봐요.” “너도 알다시피 요새 신메뉴 개발한다고 난리잖아. 이런 거 안 하면 금세 뒤처진다고 난리야. 요새 9시 퇴근이 기본이다.” “영애 아줌마도 쉬엄쉬엄하시라고 전해주세요.”우리 엄마처럼 편찮으시지 않게.
유진은 차마 뒷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부정 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알겠어, 아저씨가 잘 말해볼게.” “엄마가 저 때문에 맘고생을 많이 했나 봐요. 못난 딸이 일하는 엄마 황혼 육아 시켜서 그러나 싶기도 하고….”도통 우는소리 하는 법이 없는 유진의 고백에 아이들을 챙겨서 나가려던 태욱이 잠시 멈칫했다.
“주아가 들으면 섭하겠다. 유진아, 주아 보는 게 고생 같아?” “아뇨.” “그런 거야. 그리고 자식보다 손주가 더 예쁜 법이고. 너희 엄마에게 너희는 기쁨이 되었으면 되었지, 맘고생이 왜 돼.”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제가….”미혼모라는 낙인.
명문 대학 졸업만을 앞두고 있던 시절.
유진은 순진하게도 유일무이한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했었고, 미래를 그리던 남자와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리고 말았다.
남자의 애원 한 번에 유진은 평소에는 늘 굳게 하던 피임을 그날만 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은 그녀에게 오롯이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아이는 넘치도록 예뻤으나, 키워내는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현실이었고, 잔인했다.
작은 생명이 제 안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유진은 나름의 숭고한 생각을 했다.
제 품 안의 생명을 살리기로.
남자 친구였던 남자에게 알리면, 그녀를 사랑하는 그가 당연히 함께해주리라 굳게 믿었다.
당연한 것처럼 두 사람은 미래와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했었으니.
그러나 같은 대학에 다니던 남자는 유진에게 아이를 지울 비용을 쥐여주고는 도망치듯이 휴학했다.
자신은 한 생명을 책임질만한 사람이 아니니 헤어지자는 말만 남기며.
어쩌면 그는 유진이 적당히 고고한 여자라는 걸 알아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에게 추하게 매달리거나, 그를 원망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그의 예상대로 유진은 배가 불러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대학을 마쳐서 졸업장은 얻어내고서 고향인 동해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녀를 무조건 받아줄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모두가 그녀를 손가락질해도, 그녀를 받아줄 그들이었기 때문에.
“유진아, 네가 뭘 했든지 간에 네 부모님에게는 네가 늘 자랑거리이고, 사랑할 상대일 거야.” “…….” “이건 아저씨만의 일방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네 부모님은 널 늘 자랑스러워하시던걸.”태욱의 확신에 찬 말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쉽게 웃지 못했다.
그날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바윗덩어리 하나가 들어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가치와, 의심하는 것조차 미안해지는 부모님의 굳건한 사랑을 저도 모르게 의심하게 되는 바윗덩어리.
“유진아, 어떤 생각이 들 때면 주아를 떠올려봐. 네가 주아를 바라보듯이 네 부모님도 널 늘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거야.”태욱의 말에 유진은 제 다리를 잡고서 옆에 선 주아를 꼭 안아주었다.
주아가 똑같은 상황 속에서 저를 찾아왔더라면, 유진은 그간 마음고생했을 주아를 꼭 안아주고 최선을 다해 주아를 돕고 말 것이었다.
그 모습에 태욱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우리 예쁜 기훈이 기정이도 마찬가지고.”태욱은 제 옆에 선 기훈 기정을 꽉 안아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유진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어느 정도 걷힌 것을 본 그는 그렇게 현관문을 열었다.
“아저씨 간다. 무슨 일 있으면 아저씨한테 언제든지 연락해!” “네, 안녕히 가세요.”태욱의 가벼운 인사에 유진은 마음속 바위의 무게가 약간 나아진 것을 느꼈다.
현관문이 태욱의 등 뒤로 닫히자마자 주아가 동그란 눈을 들어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가 뭘 걱정하는 줄 알고?” “그냥, 나는 잘 모르는데 걱정하지 마.”주아의 맑은 목소리에 유진은 피식 웃고는 주아를 들어서 안았다.
“우리 예쁜 공주님. 고마워.” “사랑해, 엄마.”주아가 부드러운 볼을 제게 비벼오자, 유진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 바위의 무게가 약간 더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