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정렬 씨!”
“황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유림과 정결만 남아 있던 학교에 정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깨끗하게 청소된 학교 상태를 고려해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들어온 그였다.
“아, 괜찮아요. 비가 진짜 많이 내리죠?” “네, 오늘 일이 좀 바빴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지금 오셨으니 됐죠. 그동안 저도 학교 뒷정리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포터를 운동장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했던 정렬의 머리카락은 거센 빗줄기에 꽤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해봤자 집은 걸어서 1분 남짓이라 퇴근이 급할 것도 없는데요.”에스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 불을 다 끄는 에스더를 지켜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협이 형은요?” “네?”정결의 물음에 우산을 펼치려던 에스더가 멈칫하고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인협이 형,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고 양 목사님께 지난번에 들었거든요.” “아-.”지난번에 목사님이 반찬 전해줄 때 인협이가 집에서 마주쳤다더니.
에스더는 인협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에서 지냈다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녁에 들어오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거든요. 어차피 금방 걸어올 수 있는 거리니까요.” “어? 그럼, 낮에는 물새는 집에서 지내는 거예요?”정렬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한 에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하하하, 낮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인협이 형이 잠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소문이 참 빨리도 퍼지는 동네야.
에스더는 속으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지난번에 이야기 나누는데 악기도 좀 다룰 줄 아신다고 하셔서 잠시 예체능 쪽을 맡길까 하고요. 당장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요.” “그렇군요.”정렬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아, 아무래도 정렬 씨한테 먼저 물어볼걸 그랬나요? 근데 워낙 바쁘셔서-.”적은 봉급 이야기를 꺼내려던 에스더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맞아요. 하루하루 일거리 받아서 사는 저는 매일 아이들 가르치는 건 무리죠.” “그렇다기보단-.” “아무튼, 잘 됐어요. 인협이 형이 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멋지니까 선생님께 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아-.”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대화를 황급히 마무리 지은 정렬은 재빠르게 우산을 펴 들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세워둔 포터로 달려갔다.
“어-.”뭐지, 똥이라도 안 닦은 것 같은 이 찝찝한 마음은.
어딘가 슬퍼 보이던 정렬의 찰나의 표정을 떠올린 에스더는 운동장을 빠르게 떠나는 포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기훈아, 기정아, 주아야. 와서 밥 먹어-.”유진의 부름에 거실에서 놀던 세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기훈과 기정은 영애의 조카들이었다.
5학년인 하얗고 동그란 얼굴의 기훈은 소원 초등학교에서 가장 큰 형이었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머리를 하나로 묶은 기정은 1학년이었다.
철호를 대신해 철물점 일을 봐주는 태욱 대신 유진이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 태욱이 퇴근할 때까지 봐주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주아는 유진의 딸. 초등학교 2학년, 아홉 살배기 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옆집에 살고 교회에서도 매번 만나는 탓에 원래도 셋이서 친남매처럼 가깝게 지내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을 계기로 셋은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셋이서 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은 피식 웃었다.
본의 아니게 실질적인 살림과 육아는 유진의 부모님인 철호와 순옥이 도맡아 하고는 했었는데, 이제야 진짜 엄마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 귀엽다, 너희들.” “어어? 고모는 내가 너무 빨리 커서 무섭대요.”흐뭇한 얼굴을 한 유진에게 기훈이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이제는 제법 통통해진 얼굴에 키가 유진을 넘어선 기훈이었다. 어느새 사춘기의 문턱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너희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기훈이 네가 예솜이만큼 어렸었는데 말이야. 그런 거 보면 시간이 참 빠르긴 하네.”예솜은 종종 할 게 없을 때마다 소원 초등학교를 찾아와 언니오빠들과 어울리고는 했다.
영애의 손을 꼭 붙들고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소원리에 왔던 기훈과 기정은 어느새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다.
“이제 저도 곧 읍내 중학교에 가고, 교복도 입을 거예요.” “그러게, 진짜 큰 형아가 되는 거네.”기훈의 자랑에 유진은 흐뭇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너의 세상은 아주 조금 더 넓어지겠지.
유진은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어렸을 적에는 동해 시내에 살던 그녀라,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진이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면서 받았던 충격은 새로웠다.
중요한 일이나 갈 곳이 있을 때마다 서울을 오갔던 그녀였지만, 그 크나큰 도시에서 산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이렇게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되는지.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새로운 세상이었다.
두 다리 건너면 모두를 아는 동해시에서, 이별을 고하면 누군가를 영영 못 보게 되기도 하는 서울로 옮겨갔을 때의 충격이란.
“아주 조금씩 넓어지는 세상을 한번 잘 봐봐.” “세상이 왜 넓어져요? 지구는 그대로일 텐데요.”사춘기 문턱에 있는 기훈의 특유의 질문에 유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앞으로 한번 쭉 살아봐봐. 나중에 더 크면 이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피, 이모는 맨날 알아듣기 힘든 말만 해.” “그거야 네가 애기니까.” “애기 아니라니까요-.”유진은 장난스럽게 이야기하고는 푸흐흐, 웃어버렸다.
“엄마, 기훈이 오빠는 우리 학교에서 왕 오빠인데. 그리고 엄마보다 키도 크잖아.” “그래, 그래. 알았어.”밥을 먹다 말고 치고 들어온 주아의 말에 유진은 두 손을 들고서 말했다.
주아는 기훈을 매우 좋아했다. 늘 크고 나서는 기훈 오빠와 결혼할 거라며 엄포를 놓는 주아였다.
그런 딸의 마음을 아는 유진은 그 풋사랑을 존중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원리 미친개로 불리는 천하의 박유진이 유일하게 꼼짝 못 하는 존재, 박주아였다.
*** 조용한 6인실의 한쪽 창가 침대. 늦은 밤이라 병실 안의 모든 불이 꺼져있었다. “으음-.” “왜, 어디가 불편해?”순옥의 약간의 뒤척임에 철호의 다정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불이 살짝 걷혀서인지 느껴지는 냉기에 잠에서 깬 순옥이었다.
그걸 단번에 알아차린 철호는 부드러운 손길로 이불을 고쳐 덮어주었다.
“괜찮아?” “응, 그래도 수술만 잘 되면 항암도 안 해도 된다니까-.”이틀 후. 순옥은 암이 퍼져있는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순옥에게 근심이 가득한 줄 알았으나, 이내 철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읽어냈다.
“왜? 주아랑 유진이 걱정 돼?” “아니, 그냥-.” “아까 잘 있다고 영상 통화했잖아. 당신도 참-.”늘 철호를 우선으로, 유진이 나오고서는 두 사람을 우선으로, 그리고 주아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기어이 자신을 4순위로 미뤄두고 살아온 순옥이었다.
어쩌면 그러다가 병이 난지도 모를 그녀였다.
그런 순옥을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철호는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일단 당신만 생각해. 그렇게 해야 더 빨리 회복하고, 회복해야 아이들 보러 가지.” “맞아.”여전히 무거운 순옥의 대답에 유진과 주아도 모자라 소원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담겨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철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에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그 걱정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기라도 해서 순옥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어주고 싶은 철호였다.
“나한테는 당신이 가장 우선이야.” “응.” “그러니까 날 생각해서라도, 당신을 우선으로 둬. 일단 회복을 해야, 뭐든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응….”어쩌면 평생을 남을 배려하면 살아온 사람의 습관이자, 고질병인지도 몰랐다.
“당신이 사랑하는 게 많아서 기뻐할 게 많은 건 너무 좋지만, 지금은 조금만 내려놔. 당신만 돌봐.”철호의 말에 순옥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보기에도 참 미련하지? 이렇게 병상에 누워서 다른 사람들 일이나 걱정하고 있고.” “미련한 건 아니고, 대단한 거지.”철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순옥의 손을 꼭 붙들었다.
아직도 수줍어하며 처음으로 그녀의 부드럽기만 하던 손을 붙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그 곱던 손에 언제 이리도 주름이 졌을까.
속상한 마음에 철호는 순옥 몰래 눈물지었다.
“어째 당신이 더 울적한 거 같아.” “울적한 건 아니고…. 미안해서 그렇지.” “당신이 뭐가 미안해.” “이렇게 아플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아무것도 말을 안 했는데, 당신이 어찌 알아?”철호가 손등으로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자, 순옥도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생이라 하면, 당신이 더 고생했지. 마누라가 늦바람 들어서 시골살이하자고 해서 불편한 시골에 사느라.” “덕분에 좋은 공기 마시며 탁 트인 풍경 보고 사는데, 뭐가 고생이야.” “집 관리도, 집 보수도 다 당신이 하고 마을 사람들한테 붙들려서 맨날 일 도우러 다니고. 그게 다 고생이지, 뭐야.”두 사람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두 사람은 지나온 세월 속 서로의 고생을 헤아리고 있었다.
“내가 여왕님 대접을 더 기깔나게 해줬으면 당신이 이리 아플 일이 있었을까-.” “아휴, 여왕님 대접 당신 만나고 충분히 받아봤으니 걱정하지 말아. 당신이 늘 나 보면서 애달파하는 거 적당히 하라고 내가 맨날 말렸지.”순옥의 말에 철호가 피식 웃었다.
“아무튼, 일단 당신 수술 잘 받는 것부터 생각하자. 수술만 잘 되어서 싹 다 떼어내면 더 이상 치료 안 받아도 된다니까.” “그러게.” “기도하자. 다 잘될 거야.”두 사람은 어두운 병실에서 서로의 손을 굳게 붙들고 미소 지었다.
*** “기훈아, 기정아!” “고모부!!”태욱이 현관문에 들어서며 외치자마자 아이들이 한꺼번에 우다다 뛰어나왔다.
“미안해, 유진아. 아저씨가 많이 늦었지?” “지금 겨우 저녁 8시인데요. 이 정도면 초저녁이죠.” “아저씨가 워낙 일이 익숙지가 않다 보니까 문 닫기 전에 이것저것 확인하느라 늦었어, 미안해. 내일은 약속한 대로 5시에 올게.” “아저씨가 왜 미안해하세요. 우리 아빠 가게 갑자기 맡아주시느라 그러는 건데.”유진의 말에도 태욱의 표정은 도통 풀릴 줄 몰랐다.
“에잇, 그런 표정 금지예요. 그냥 아빠보고 가게 문 좀 닫으라 해야겠어요.” “어어, 아니야. 아저씨가 좋아서 먼저 가게 맡는다고 한 거야. 아저씨 반백수 생활한 지 오래됐잖아. 심심해서 그랬어.” “백수 생활은요. 짬 나면 카페 일 도우시고, 아이들 육아하시잖아요.”유진은 아이들의 짐을 챙겨서 태욱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애들이 셋이서 워낙 잘 놀아서 밥만 챙겨주면 땡인걸요. 저는 오히려 주아가 저만 안 찾아서 좋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줌마도 요새 많이 바쁘신가 봐요.” “너도 알다시피 요새 신메뉴 개발한다고 난리잖아. 이런 거 안 하면 금세 뒤처진다고 난리야. 요새 9시 퇴근이 기본이다.” “영애 아줌마도 쉬엄쉬엄하시라고 전해주세요.”우리 엄마처럼 편찮으시지 않게.
유진은 차마 뒷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부정 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알겠어, 아저씨가 잘 말해볼게.” “엄마가 저 때문에 맘고생을 많이 했나 봐요. 못난 딸이 일하는 엄마 황혼 육아 시켜서 그러나 싶기도 하고….”도통 우는소리 하는 법이 없는 유진의 고백에 아이들을 챙겨서 나가려던 태욱이 잠시 멈칫했다.
“주아가 들으면 섭하겠다. 유진아, 주아 보는 게 고생 같아?” “아뇨.” “그런 거야. 그리고 자식보다 손주가 더 예쁜 법이고. 너희 엄마에게 너희는 기쁨이 되었으면 되었지, 맘고생이 왜 돼.”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제가….”미혼모라는 낙인.
명문 대학 졸업만을 앞두고 있던 시절.
유진은 순진하게도 유일무이한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했었고, 미래를 그리던 남자와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리고 말았다.
남자의 애원 한 번에 유진은 평소에는 늘 굳게 하던 피임을 그날만 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은 그녀에게 오롯이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아이는 넘치도록 예뻤으나, 키워내는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현실이었고, 잔인했다.
작은 생명이 제 안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유진은 나름의 숭고한 생각을 했다.
제 품 안의 생명을 살리기로.
남자 친구였던 남자에게 알리면, 그녀를 사랑하는 그가 당연히 함께해주리라 굳게 믿었다.
당연한 것처럼 두 사람은 미래와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했었으니.
그러나 같은 대학에 다니던 남자는 유진에게 아이를 지울 비용을 쥐여주고는 도망치듯이 휴학했다.
자신은 한 생명을 책임질만한 사람이 아니니 헤어지자는 말만 남기며.
어쩌면 그는 유진이 적당히 고고한 여자라는 걸 알아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에게 추하게 매달리거나, 그를 원망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그의 예상대로 유진은 배가 불러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대학을 마쳐서 졸업장은 얻어내고서 고향인 동해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녀를 무조건 받아줄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모두가 그녀를 손가락질해도, 그녀를 받아줄 그들이었기 때문에.
“유진아, 네가 뭘 했든지 간에 네 부모님에게는 네가 늘 자랑거리이고, 사랑할 상대일 거야.” “…….” “이건 아저씨만의 일방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네 부모님은 널 늘 자랑스러워하시던걸.”태욱의 확신에 찬 말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쉽게 웃지 못했다.
그날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바윗덩어리 하나가 들어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가치와, 의심하는 것조차 미안해지는 부모님의 굳건한 사랑을 저도 모르게 의심하게 되는 바윗덩어리.
“유진아, 어떤 생각이 들 때면 주아를 떠올려봐. 네가 주아를 바라보듯이 네 부모님도 널 늘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거야.”태욱의 말에 유진은 제 다리를 잡고서 옆에 선 주아를 꼭 안아주었다.
주아가 똑같은 상황 속에서 저를 찾아왔더라면, 유진은 그간 마음고생했을 주아를 꼭 안아주고 최선을 다해 주아를 돕고 말 것이었다.
그 모습에 태욱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우리 예쁜 기훈이 기정이도 마찬가지고.”태욱은 제 옆에 선 기훈 기정을 꽉 안아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유진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어느 정도 걷힌 것을 본 그는 그렇게 현관문을 열었다.
“아저씨 간다. 무슨 일 있으면 아저씨한테 언제든지 연락해!” “네, 안녕히 가세요.”태욱의 가벼운 인사에 유진은 마음속 바위의 무게가 약간 나아진 것을 느꼈다.
현관문이 태욱의 등 뒤로 닫히자마자 주아가 동그란 눈을 들어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가 뭘 걱정하는 줄 알고?” “그냥, 나는 잘 모르는데 걱정하지 마.”주아의 맑은 목소리에 유진은 피식 웃고는 주아를 들어서 안았다.
“우리 예쁜 공주님. 고마워.” “사랑해, 엄마.”주아가 부드러운 볼을 제게 비벼오자, 유진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 바위의 무게가 약간 더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조용한 일식당 안. 18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적당한 체구. 안경을 쓴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조봉길 코치님.” “우겸 씨, 안녕하세요.”마스크를 쓴 우겸의 인사에 봉길이 화답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제게 연락을….” “지난 5년 동안 몸담았던 케이비에서 반 쫓겨나듯이 코치직을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우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봉길이 잠시 흠칫했다. 그런 봉길을 기다려주며 우겸은 잔에 물을 따라서 봉길 앞에 놓아주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갑작스러운 인협 씨 퇴출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을까요?” “…….” “승부조작건 말이에요.” “…….”봉길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리지만, 현재로서는 리그 오브 카오스로 전 세계 1위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우겸이었다. 그의 포커페이스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봉길은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신뢰 혹은 불신.모두가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몇몇은 진실을 알고 있는 승부조작건을 우겸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다.특히나 내부에서 모든 진실을 보고 들었던 봉길의 입장으로선. 게다가 우겸은 케이비의 오랜 천적인 원티드의 수장이었다. “저와 우겸 씨와 오며 가며 인사도 나눴기에 일면식은 어느 정도 있고, 제가 우겸 씨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지만 답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이네요.”그가 택한 전략은 보류였다. 우겸의 반응을 보기 위한 보류. 봉길의 긴장한 시선에 미소 띤 우겸의 얼굴이 담겼다. “아, 제가 중요한 사안인데 너무 다짜고짜 여쭤봤죠?” “사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봉길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우겸이 쿡쿡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일단은 봉길 코치님을 제가 옮겨갈 새 팀으로 영입하고 싶어요.” “네? 저를요?” “네, 그리고 인협 씨도 같은 팀 팀
“정렬 씨!” “황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유림과 정결만 남아 있던 학교에 정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깨끗하게 청소된 학교 상태를 고려해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들어온 그였다. “아, 괜찮아요. 비가 진짜 많이 내리죠?” “네, 오늘 일이 좀 바빴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지금 오셨으니 됐죠. 그동안 저도 학교 뒷정리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포터를 운동장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했던 정렬의 머리카락은 거센 빗줄기에 꽤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해봤자 집은 걸어서 1분 남짓이라 퇴근이 급할 것도 없는데요.”에스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 불을 다 끄는 에스더를 지켜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협이 형은요?” “네?”정결의 물음에 우산을 펼치려던 에스더가 멈칫하고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인협이 형,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고 양 목사님께 지난번에 들었거든요.” “아-.”지난번에 목사님이 반찬 전해줄 때 인협이가 집에서 마주쳤다더니. 에스더는 인협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에서 지냈다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녁에 들어오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거든요. 어차피 금방 걸어올 수 있는 거리니까요.” “어? 그럼, 낮에는 물새는 집에서 지내는 거예요?”정렬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한 에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하하하, 낮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인협이 형이 잠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소문이 참 빨리도 퍼지는 동네야. 에스더는 속으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지난번에 이야기 나누는데 악기도 좀 다룰 줄 아신다고 하셔서 잠시 예체능 쪽을 맡길까 하고요. 당장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요.” “그렇군요.”정렬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아,
“아으, 으으-.”곤히 잠들어있던 에스더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인협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채로 옆에 보이는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도둑을 아프게 만들 수 있겠지.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보이는 거실에는 다른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으으, 아니야. 그만-.” “인협아-.”에스더는 스탠드를 내려놓고서 인협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룩-. 도통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협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인협아, 일어나봐. 야-.”에스더가 인협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인협이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떴다. “괜찮아?”아직도 꿈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인협은 눈이 살짝 풀린 채로 에스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절망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에스더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에스더도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몽 꿨어?”에스더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서 에스더는 인협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그러자 인협이 순순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무슨 악몽이길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줘?”에스더의 음성은 인협을 달래듯이 절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응, 고마워.”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물 한 잔을 준비해 그에게 갖다주었다. 묵묵히 그녀만 기다리던 인협은 그것을 받아서 들자마자 몽땅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에스더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괜찮아?”잔을 내리며 한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