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글쎄요. 일단 먼저 카톡부터 추가할까요?”온하랑을 흘끗 쳐다본 젊은 남자는 그녀가 카카오톡을 추가할 생각이 없는 것을 알고는 김시연을 먼저 추가하기로 했다.“그럼 전 먼저 자리로 돌아가 볼게요.”그는 다시 온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누나, 얼룩이 지워지지 않으면 언제든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알았어요.”김시연은 온하랑을 대신해 대답했다.젊은 남자가 떠나자 김시연은 온하랑에게 말했다.“아이고, 하랑 씨.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지 마세요.”온하랑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제가 그랬어요?”“안 그랬어요?”김시연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저 사람은 성의를 잔뜩 보여줬는데 하랑 씨는 끝까지 무표정이었잖아요. 그게 쌀쌀맞은 게 아니면 뭐예요?”온하랑은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요.”온하랑은 자신의 이런 문제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도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서 그런지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고객을 제외하고는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오는 사람을 굳이 막지는 않았지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은 아니었다.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고, 지금처럼 불필요한 사교 활동도 피할 수 있으면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김시연, 주현과 가까워진 것도 두 사람과 일할 때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반면에 부승민은 온하랑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다가갔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김시연이 말했다.“필요하고 불필요한 게 어디 있어요. 그냥 여행 친구로 생각하고 같이 즐기는 거죠.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각자의 길을 가면 되잖아요.”김시연의 말을 들으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그럼 우리도 합류할까요?”온하랑이 물었다.“일정을 먼저 봐야 할 것 같아요. 보통 국내에서 온 사람들 대부분은 바로 트로토와로 가요. 여기서 오래 머물면 비용이 더 많이 들거든요. 게다가 저 사람들은 대학생이라 오베니아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거예요.”김시연은 장난기 가득한
온하랑은 여전히 그녀들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거라 생각했다.“제가 얘기했잖아요. 그냥 저한테 드라이클리닝 비용을 주려는 거라고요.”김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민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제 친구 카톡은 추가해서 뭐 하려고요?]휴대폰 화면 상단에 입력 중... 이 나타나고 한참 후에야 민지훈에게서 문자가 왔다.[제가 누나 옷을 더럽혔으니, 클리닝 비용을 드리는 게 당연하죠.]문자를 본 온하랑은 손사래를 쳤다.“거봐요, 제가 말했잖...”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지훈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그리고 그 누나 정말 예쁘거든요.]김시연은 씨익 웃으며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온하랑 씨, 아직도 할 말이 남았습니까?”온하랑은 시선을 피하고 무심코 민지훈의 일행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다가 우연히 민지훈과 눈이 마주쳤다.이내 시선을 돌렸지만 매우 난처했다. 온하랑은 지금 당장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마음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연하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온하랑은 사랑이 고픈 사람이기에, 자신을 포용해 주고 아버지처럼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성숙하고 듬직한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지금 대학생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어린아이가 천천히 성장하는 걸 옆에서 지켜볼 흥미는 없었다.오베니아에서 삼 일간 머무르고 온하랑 세 사람은 트로토와로 향했다.같은 시각 부승민은 병원에서 퇴원하여 더윈파크힐 별장으로 왔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송이가 발밑에서 그를 맞이했다.부승민은 걸음을 멈추고 송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이를 잃은 온하랑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집에서 몸조리하던 때가 떠올랐다. 만약 그때 송이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상태는 더 악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그토록 소중히 여겼는데, 만약 그녀가 정말로 전에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면 어떻게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송이는 그다지 경계심이 없었고 낑낑거리
한참 동안 반지를 보던 부승민은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는 반지를 다시 상자 안에 넣어 뚜껑을 닫고 위층으로 가져갔다....저녁 8시, 클럽 룸 안.불빛이 희미하고 아주 시끄러웠다. 강민은 룸 문을 열고 들어와 한효건과 다른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구석진 소파로 걸어갔다. 그는 부승민의 곁에 앉아 무심코 물었다.“왜 여기 앉아 있어?”“조용히 있고 싶어서.”부승민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했어?”강민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응.”그를 흘긋 쳐다본 강민은 담배를 건넸다. 부승민은 강민이 건넨 담배에 불을 붙여 피웠다.“하랑 씨는 지금 어디 있어?”강민의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친구들이랑 노르빈으로 여행 갔어.”부승민의 태연한 모습에 강민은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그냥 이렇게 놓아 버릴 거야? 만약 나라면 좋아하는 여자를 그렇게 쉽게 보내지 않았을 거야!”부승민은 아무 말 없이 검지로 담배 재를 털고 다시 입에 가져갔다.어떻게 이렇게 쉽게 놓을 수 있을까?정말 이렇게 쉽게 놓아줄 수 있었다면 애초에 육광태를 시켜 온하랑의 몸에 위치추적기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그는 지금쯤 노르빈에 있었을 것이다.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강민은 부승민이 말이 없자 그가 진짜로 놓으려는 줄 알았다.“이건 너답지 않아.”“시간이 필요할 뿐이야.”부승민은 눈을 감고 소파에 등을 기대어 입술을 살짝 벌렸다. 담배 연기가 입술 사이로 빠져나와 원을 그리며 위로 떠올랐다가 흩어졌다.그 일은 마치 그의 심장을 깊숙이 파고드는 가시가 되어, 똑바로 알아내지 못한다면 시시때때로 그의 심장을 찌르며 온하랑이 다른 남자와 아이를 낳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하지만 부승민은 온하랑을 사랑하게 된 후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예고도 없이 급작스럽게 들이닥쳐 손쓸 겨를이 없었다.내려놓는다고? 그는 할 수 없다.부승민은 온하랑을
사정을 모르는 일부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특히 갖은 수를 써서 부승민에 대한 소식을 알아내 처음으로 이곳에 나타나 그와 돈독한 관계를 다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말이다.노준형은 부승민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승민은 한참 침묵하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럼 당신이 보기엔 내가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데요?”그 사람은 부승민이 자기 말에 대꾸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기분이 들뜬 그 사람은 무심코 한마디를 내뱉었다.“당연히 추서윤 씨 같은 분이죠!”부승민은 아무런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물었다.“당신들도 같은 생각인가요?”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잇따라 고개를 끄덕였다.어두운 그림자 속에 앉아 있는 부승민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술잔을 흔들며 한참 동안 침묵했다.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남자가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아마 대표님과 추서윤 씨의 경사스러운 날도 곧 다가올 테지요?”쾅!갑자기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승민은 앞에 있는 테이블을 걷어차 넘어뜨렸다. 위에 놓인 술이 와르르 깨지며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부승민은 어두운 표정으로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아무 말도 없이 술잔을 집어던지고 큰 보폭으로 자리를 떠났다.남자는 깜짝 놀라 멍하니 부승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이 닫힐 때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 남자의 주위에 있던 몇 사람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침묵을 지켰다. 룸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얼떨떨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반대편에서 카드놀이를 하던 몇 명의 사람들도 무슨 일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카드를 손에서 내려놓고 만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계속하세요.”이때 강민의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깼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부승민을 쫓아갔다.다른 룸 안에서.“화내지 마.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굳이 상대할 필요 없어.”술잔을 들고 잔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던 부승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
부승민은 최근 밤마다 그를 뒤척이게 했던 일을 떠올리며 또다시 술을 연거푸 들이마셨다.아무리 말려봤자 소용이 없었고, 강민은 그저 부승민이 술을 퍼마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부승민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자 강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가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온하랑은 오베니아 공항 대기실에서 트로토와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온하랑은 강민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을 보고 김시연과 주현을 슬쩍 쳐다보고는 일어나 창가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강민 씨? 무슨 일이에요?”“승민이가 지금 술을 마시고 있어요.”그 이름을 들은 온하랑은 심장 박동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무슨 뜻이에요?”그가 술을 마시는 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금방 퇴원하고 아직도 약을 먹고 있어서 술 마시면 안 되는데, 제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아서요.”“지금 저더러 설득하라는 건가요? 강민 씨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전 더더욱 불가능할 거예요. 게다가 애초에 제 말은 듣지도 않을 거고요.”“우선, 효과가 있든 없든 적어도 시도라도 해보세요. 어쨌든 하랑 씨를 구하려다 다친건데, 상처가 재발해 치료도 못하고 죽게 내버려둘 건 아니잖아요.”치료 못하고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온하랑은 미간을 찡그리고 잠시 망설였다.“알았어요. 그럼 전화 바꿔주세요.”룸으로 돌아온 강민은 부승민이 술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만 마셔!”부승민이 눈살을 잔뜩 구기고 쳐다보자, 강민이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네 전화야.”‘벨소리를 못 들은 것 같은데?’이미 눈이 살짝 풀려있던 부승민은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건네받았다.“여보세요?”그는 조금 불안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부승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술을 마셨다는 걸 알아챈 온하랑은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오빠?”익숙한 목소리에 부승민은 몸을 움찔하더니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그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눈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온하랑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김시연은 기분이 다소 가라앉아있는 온하랑을 보고 무심히 물었다.“누구 전화에요?”“친구요.”온하랑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쳇, 하랑 씨 친구를 제가 모를까 봐요. 그 친구가 설마 부승민은 아니겠죠?”자기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챈 김시연이 투덜거렸다.“아직도 전화해서 뭐 한대요? 설마 하랑 씨한테 질척거리는 건 아니죠? 하랑 씨,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 돼요.”“당연하죠.”온하랑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방금 전화한 사람은 승민 씨 친구예요. 지금 승민 씨가 술 마신다고 저더러 설득해 달라고 했어요. 어쨌든 절 구하려다 다친 건데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요.”주현이 말했다.“전 하랑 씨가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그렇지만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에요.”두 시간 뒤, 온하랑 일행은 트로토와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와 그들은 공항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버스 창밖을 내다보니 도로 양쪽이 여전히 눈으로 덮여 있었다.김시연이 예약한 호텔은 오로라클리오였다.“제가 공략을 좀 찾아봤었는데 이 호텔은 부둣가 바로 옆에 있대요. 전망도 좋고, 제일 위층에 야외 온수 풀도 있고요.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거예요.”김시연이 들떠서 말했다.노르빈의 겨울에 최상층의 야외 온수 풀에서 몸을 담그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호텔에 체크인한 세 사람은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호텔 레스토랑은 부두 바로 맞은편에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온하랑이 음식을 담은 접시를 들고 와 김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먹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누나?”고개를 들어 올린 온하랑은 민지훈이 놀란 표정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싱긋 웃었다.김시연은 온하랑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바라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오, 또 만나네요. 여기 머무시나 봐요?”“네
말을 마친 그는 잔뜩 흥분한 채 자리를 떴다.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시연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온하랑에게 말했다.“아무래도 우리 나름대로 인연이 있나 봐요, 이런 데서 다 만나고.”온하랑은 김시연의 말에 그저 웃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그녀도 김시연의 말 속에 담긴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민지훈에게 별생각이 없었을 뿐이었다.식사를 마친 그들은 방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호텔 로비에 모여 함께 스키장으로 향했다.더원파크힐.부승민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숙취로 인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극심한 두통에 저도 모르게 다시 눈을 질끈 감은 부승민은 손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귓가에는 가르릉 거리는 백색소음이 울려 퍼졌다.깨질 듯이 아파오던 머리가 괜찮아질 때쯤에야 부승민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손으로 단잠에 빠져있는 송이를 살며시 어루만지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속에서 부승민은 온하랑의 전화를 받았다. 꿈속에서 받았던 그 수화기 너머의 온하랑은 부승민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차가운 현실에 내쳐진 부승민의 눈빛에는 씁쓸하고도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온하랑이 그렇게 따뜻하고 다정하게 부승민을 대한다니,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부승민은 진심으로 온하랑이 보고 싶었다.부승민의 마음속에서 온하랑이라는 존재가 잊히기는커녕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눈을 감는 순간 머릿속에는 온통 온하랑의 얼굴만 떠올라 쉽사리 잠자리에 들 수도 없었다.이제 부승민은 알코올의 환각 효과에 의지해야만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갑자기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가 깊은 그리움에 잠겨있던 부승민을 다시 현실로 끄집어냈다.부승민은 침대 맡의 탁자 위에 놓여있던 휴대전화로 손을 뻗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이 연민우인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파란색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를 받는 부승민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이 일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운 게 조금 많습니다. 첫 번째로는 사모님께서 그곳에 계실 때 사이가 아주 각별하던 여자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사모님께서 귀국하신 뒤에도 그 여자 동기라는 사람이 사모님께 따로 연락을 해봤더니 사모님께서는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아주 차갑게 대했다는 겁니다.”“두 번째로는 우리 쪽 사람이 사모님께서 계시는 곳은 물론 근처 지역들까지 포함해 모든 병원을 수소문 해봤는데요. 대학 병원이고 작은 클리닉 병원이고 그 어디에서도 사모님의 분만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모님께서는 더 먼 곳으로 가서 아이를 낳으셨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사모님의 병원 기록을 지웠다고 의심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또 하나 이상한 건, 사모님께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결석을 하셨으면 보통은 성적표에도 반영이 돼야 하는 게 보통입니다만, 사모님 성적표를 봤을 때 전공과목을 포함한 모든 과목의 성적에서 아무런 이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좋았습니다.”연민우의 말이 끝났지만 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기다리다 못한 연민우가 다시 한번 부승민을 불렀다.“대표님?”“더 알아봐.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야 하는 거 알지?”“네, 알겠습니다.”부승민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휴대전화를 다시 침대 맡에 있는 탁자 위로 던져놓았다. 한순간에 공허해진 부승민은 손을 뻗어 송이에게 장난을 쳤다.아직 천진난만하기만 한 송이는 부승민의 손가락을 꼭 안은 채 여린 이빨로 힘껏 깨물었다. 그래봤자 부승민에게는 단순한 간지러움으로 느껴지겠지만.부승민은 눈을 꼭 감고 연민우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차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추측이 스쳐 지나갔다. 온하랑도 본인이 출산했다는 걸 아예 모르고 있다면?그게 아니라면 어떠한 이유로 온하랑이 자신의 유학 시절 기억을 아예 잊은 거라면?이럴 경우, 여태껏 그녀가 단 한 번도 유학 시절의 경험을 얘기하지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