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목소리의 주인, 르세인.
자신의 인생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둔 설계자이자, 이 가증스러운 평화를 유지해 준 대가로 모든 것을 예약한 남자. 그의 구두 굽이 정원을 짓누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일정한 보폭과 흐트러짐 없는 박자는 포식자가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때 내는 가장 우아한 소음이었다. “꽃향기가 너무 짙어. 영애 몸에 밴 향이 이 역겨운 정원의 것인지, 본연의 살 냄새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군.”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멈춰 섰다. 엘라엔은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 엘라엔이 입술을 달싹였다. 루비처럼 붉고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는 르세인을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의 긴 손가락이 엘라엔의 턱 끝을 느릿하게 치켜올렸다. 거칠고도 부드러운 악력이 그녀의 여린 피부를 파고들었다. 여름의 매미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정원의 장미들은 열기에 지쳐 고개를 떨구려 했지만 르세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르는 긴장감은 날이 선 채 팽배하게 당겨졌다. 그는 엘라엔의 떨림을 즐겼다. 공포인지, 혹은 금기된 존재를 향한 갈망인지 알 수 없는 그 전율을……. “에르디엔으로 떠날 준비는.” “전하, 전 아직…….” “아직?” 르세인이 짧게 냉소했다. 그의 목소리엔 감정의 고저가 없었다. 잘 닦인 칼날 위로 흐르는 물방울처럼 매끄럽고 냉혹했다. 오묘한 녹색 동공이 그녀의 눈을 꿰뚫었다. 라안느 공작과 거래를 하게 만들었던 그 치명적인 빛은 더욱 짙어진 붉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자신을 무너뜨릴 유일한 위협…. 그는 엘라엔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았다. 르세인은 그것이 불쾌했다. 그는 더욱 서늘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름답군.” “…….” “그 눈으로 다른 것을 보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수만 송이의 장미가 뿜어내는 향기는 어느새 질식할 듯한 압박감으로 변했다. 르세인은 여전히 엘라엔의 얼굴을 탐하듯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자부했으나 이글거리는 루비빛 동공을 마주할 때만큼은 기묘한 질서의 균열을 느꼈다. “전하, 지나치게 무례하십니다.” 엘라엔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뾰족이 날 선 말을 내뱉었다. 르세인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 손을 느릿하게 떼어냈다. 그의 맨손은 차가웠으나 닿았던 자리는 불에 덴 듯한 화끈거림이 남았다. “무례라…. 라안느 공작이 영애에게 예법을 가르칠 때 황실의 권위 위에 가문의 오만을 두라하진 않았을 텐데.” 르세인은 비릿한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구두 굽으로 짓밟았다. 르세인은 그 장미가 마치 엘라엔의 꺾인 자존심인 양 무심하게 뭉개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분명 따스했으나 어쩐지 매섭도록 시린 여름의 바람이었다. 그때, 정원 저편의 회랑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곧 라안느 공작 에드먼과 그의 후처, 공작 부인 이사벨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먼과 이사벨라의 아들들인 하르만과 루시안도 함께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고도 없이 이곳까지 어찌….” 에드먼은 예를 갖추었다. 황실을 떠받치는 손이라 불리는 공작조차 르세인이 뿜어내는 그 서늘하고도 정제된 살기 앞에서는 몸을 사렸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화려한 깃털 부채 뒤로 입술을 깨물며 상황을 살폈다. 그녀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혈통의 전처소생인 엘라엔을 증오했다. 황태자의 정비로 낙점된 건 분명 가문에 더없는 경사스러운 일이나, 이사벨라는 엘라엔이 자신을 내려다볼 미래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영악했다. 미래의 황후가 될 엘라엔의 면전에 대놓고 독설을 내뱉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라안느 공작. 영애에 대한 교육이 다소 소홀한 모양입니다. 내 비가 될 몸이 이토록 무질서하게 피어 있다니.” 르세인의 말에 이사벨라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끼어들었다. “황태자 전하. 엘라엔이 워낙 고집이 세서 제 말은 듣지도 않는답니다. 하르만과 루시안조차 누님의 방종함을 걱정할 정도이지요.” “…….”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엘라엔이 잠시 더위를 먹었나 봅니다.” 이사벨라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르세인의 눈치를 살피며 엘라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르세인은 그 가식적인 연극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이들이 엘라엔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즐겼다. 엘라엔이 기댈 곳이 사라질수록 자신의 품이 유일한 안식처가 될 것임을 알기에. 르세인은 대답 대신 이사벨라를 보았다. 그 서늘한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이사벨라는 목에 칼날이 닿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방종하군.” 르세인의 단 한 마디에 정원이 얼어붙었다. “공작 부인의 자제들은 예법이 훌륭한 듯 보이는데, 어찌하여 영애만은 이토록 무질서하게 방치된 겁니까.” “…황태자 전하! 당장 엘라엔을 방에 가두고 엄히 가르치겠습니다!” 에드먼이 식은땀을 흘리며 외치자, 르세인은 그 비굴한 외침을 비웃듯 시선을 다시 엘라엔에게 돌렸다. 엘라엔은 가족들의 비겁한 모습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 넓은 마레즈나에 자신의 편은 없었다. 오직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자들과 수거하려는 포식자뿐이었다.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르세인은 그런 엘라엔을 보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엘라엔의 가녀린 체구 위로 짙게 드리웠다. 정오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지만 엘라엔은 르세인의 그림자 안에서 기묘한 오한을 느꼈다. 르세인은 허리를 숙여 엘라엔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테르시아.” 엘라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색마저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동요를 르세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 폐허 같은 사저에서 당신이 누구와 밀어를 나누었는지, 그 비천한 품에서 어떤 위안을 얻는지….” “……!”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 효율적이지 않아, 엘라엔.” 르세인의 손이 엘라엔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그 손길은 언제든 그녀의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었다. “제국에서 내 질서를 방해하는 자는 형제라 해도 예외는 없어.” 엘라엔은 그의 말에 카시안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르세인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고 갈 권력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엘라엔의 뒤통수를 그러쥐며 거칠게 끌어안았다. “나는 말이야, 엘라엔. 당신이 제 발로 에르디엔의 아르젠트 궁으로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르세인은 엘라엔의 귓불을 살짝 깨물듯 스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그 오만한 자존심이 꺾이고, 유일한 도피처였던 카시안이 죽음의 문턱에서 허덕일 때….” “……!” “당신이 내 발치에 엎드려 제발 데려가 달라고, 나를 당신의 주인으로 삼아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그 순간을 아주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다고.” 르세인은 자신의 품에 있던 엘라엔을 내동댕이 치듯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안면은 다시 무색무취의 질서로 돌아가 있었다. “라안느 공작,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바델.” “예, 황태자 전하.” “가지.” 르세인은 기사단을 이끌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짓밟힌 장미 꽃잎들이 피비린내 나는 흔적처럼 짓이겨있었다.르세인은 활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엘라엔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말 위에서 끌어내렸다. 곧, 르세인은 거친 흙바닥 위에 등을 기댄 엘라엔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의 사냥복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전하! 왜 이러세요!”“제국을 제패하고 싶다고 했지? 좋아, 나와 함께 그 정점에 서는 거야. 하지만 그 정점에 서는 건 우리가 아니라 오직 나의 논리 아래 굴복한 당신만이 있을 뿐이야.”르세인은 거칠게 저항하는 엘라엔의 입술을 거칠게 짓뭉갰다. 흙냄새와 시린 겨울바람, 그리고 르세인의 뜨거운 욕망이 뒤섞인 사냥터의 한복판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욕망을 증명하려 들었다.엘라엔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지만 르세인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결박하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그는 소름이 돋을 만큼 매혹적이게 웃으며 속삭였다.“당신이 나를 짐승이라 불렀으니 오늘은 정말 짐승처럼 당신을 유린해 보려고. 제국의 차기 안주인이 사냥터에서 어떤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지 기대가 되는군.”“전하!”르세인의 광기 어린 애정 행각이 극에 달하던 순간, 숲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고의로 떨어뜨린 듯한 은제 단검 하나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그 단검의 자루에는 르세인이 그토록 증오하는 카르노스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숲의 바닥은 얼어붙어 너무나 차가웠고 서늘했다. 르세인은 엘라엔의 손목을 여전히 짓누른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사냥복의 거친 가죽 질감이 그녀의 셔츠 너머로 생경하게 전해졌다. 르세인은 짐승처럼 그녀의 살결을 핥고 짓씹으며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려 들었다.“이곳입니까. 당신이 그 유령과 함께 도망치려 했던 숲 말입니다.”르세인의 낮은 목소리에 엘라엔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은 무자비하게 그녀의 허리선을 더듬어 내려갔다. 엘라엔은 흙바닥의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르세인은 사과 대신 폭력을, 대화 대신 정복을 택했다. 그는 환멸이 나는 남자였지만 우습게도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엘라엔의 본능을
라비엔 궁의 철창이 걷힌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르세인은 사과 한마디 없이 전보다 더 거대하고 눈부신 인장을 벨모어 백작 부인을 통해 엘라엔에게 돌려보냈다.그건 분명 네가 원하는 판을 깔아줄 테니 어디 한번 발버둥 쳐보라는 거만한 초대장이었다.엘라엔은 차가운 우유로 목을 축이며 거울 앞에 섰다. 목에 남은 멍 자국은 옅은 화장으로 가려졌지만 르세인의 손이 닿았던 그 감각은 여전히 살갗 아래에서 맥동했다.그녀는 건조한 표정으로 짙은 녹색의 승마복으로 환복했다.“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접 말을 끌고 오셨습니다.”말리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라엔은 묵묵히 장갑을 꼈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을 가두는 것이 실패하자, 이제 그녀를 제국의 가장 화려한 무대 위로 끌어올려 더 거대한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었다.궁의 정문에는 흑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보였다. 그는 거친 소재가 섞인 사냥복을 입고 있었는데,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선과 탄탄한 가슴 근육은 겨울의 서늘한 공기와 어우러져 지독하게 이질적인 위압감을 선사했다.“황태자비.”르세인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엘라엔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자신이 직접 준비한 백마의 고삐를 잡았다.르세인의 눈썹이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여전히 그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있는 모습… 나쁘지 않습니다.”“전하의 호의는 늘 대가가 뒤따르지 않습니까. 그 대가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나왔을 뿐입니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르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머리를 돌렸다.제국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북부 사냥터로 향하는 길은 르세인의 명령에 따라 황실 근위대만이 삼엄하게 경계태세를 갖췄다.사냥터에 도착하자, 수십 명의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대중 앞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완벽한 모습이었지만 엘라엔의 귓속에 닿는 숨결은 여전히
르세인은 땀에 젖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에메랄드 목걸이를 집어 들어 침대 위에 늘어진 엘라엔의 목에 채웠다.“오늘부터 당신의 구역은 이 방으로 한정됩니다. 베르제든, 라안느든 당신이 기댈 곳은 이제 없어. 오직 나만이 유일한 질서가 될 겁니다.”르세인은 만족스러운 듯 차가운 미소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홀로 남겨진 엘라엔은 차갑게 빛나는 에메랄드를 내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 대신 서늘한 결의가 맺혀 있었다. 르세인은 자신을 가두었다고 믿겠지만, 엘라엔은 이 고립을 이용해 더 거대한 함정을 계획했다.“짐승을 길들이는 법은 간단해. 무질서한 짐승은 결국 제 집을 허무는 법이야.”*** 며칠간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에서 르세인은 모호한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다.엘라엔을 굴복시켰고 그녀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겼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유치한 감정이 아니라, 완벽한 소유에 실패했다는 정복자의 허무라고 자신을 속였다.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그는 독한 술을 잔에 가득 채웠다. 르세인에게 세상은 언제나 명쾌한 체스판이었다. 말이 움직이면 결과가 나왔고, 공포를 심으면 복종이 돌아왔다.하지만… 엘라엔. 그녀만은 달랐다. 그녀는 그가 가장 아끼는 말이었고, 체스판 자체를 뒤흔드는 유일한 균열이었다.‘왜 굴복하지 않은 거지.’르세인은 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아는 사랑이란 완벽한 소유의 의미였다. 그러니 그녀의 모든 것은 자신의 논리 안에서 통제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제에서 그녀의 목을 졸랐을 때 엘라엔의 눈을 통해 보았던 것은 굴복이 아니라 명백한 경멸이었다.그것이 르세인을 미치게 했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그 건조하고 서늘한 멸시.르세인은 술은 단번에 들이켰다. 그는 엘라엔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의 시작이 카시안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는
“…뭐라?”“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과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할 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죠. 하지만 전하께서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신이라 믿는, 미쳐있는 짐승에게 무슨 감정을 소비할까요?”엘라엔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르세인의 안색이 굳어져갔다. 뺨을 얻어맞거나, 독설을 듣는 것보다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취급 당하는 이 감각은 그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모욕이었다.“미친… 짐승이라….”르세인은 낮게 읊조리며 엘라엔의 책을 거칠게 뺏어 바닥에 던졌다. “왜요? 또 제 목을 조르시려고요?”“내가 짐승이라면 당신은 그 짐승의 우리 안에 갇힌 먹잇감일 뿐이야. 내가 당신을 이토록 화려하게 치장하고 제국의 절반을 쥐여준 이유를 잊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완벽함을 증명하는 가장 고귀한 장식품이어야 해.”“장식품은 감정이 없죠. 그러니 앞으로 저를 찾지 마세요. 전하의 그 구역질 나는 논리를 받아내기엔… 제 인내심은 이미 베르제에서 바닥났으니까요.”르세인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는 엘라엔의 목에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거칠게 문질렀다.“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나를 경멸할수록, 나는 당신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고 싶어지거든.”르세인은 엘라엔을 몰아세우며 그녀의 입술을 탐하려 들었다. 엘라엔은 피하지 않았다. 눈조차 감지 않은 채 죽은 인형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그를 받아냈다.반항도, 순종도 없는 그저 의무 같은 것. 르세인은 되레 그 허무함에 질려버린 듯 그녀를 밀쳐내고 라비엔 궁을 빠져나갔다.“이거였구나.”엘라엔은 한쪽 입매를 치켜들며 웃은 뒤, 그가 던진 책을 주워 읽기 시작했다. 콧노래와 함께.*** 아르젠트 궁 집무실로 돌아온 르세인은 바델에게 광기 섞인 명령을 내렸다.“라비엔 궁의 모든 창문에 철창을 둘러라. 그리고 베르제 대공저로 향하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해. 자신의 오만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지 뼛속까지 새기게 만들 테니!”르세인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그는
시어드가 소리쳤고, 엘라엔의 얼굴은 점차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르세인의 손을 떼어내려 버둥거렸지만 광기에 휩싸인 르세인의 악력은 보통 힘이 아니었다.엘라엔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공포 속에서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사랑이 아닌, 오직 상대를 파괴해서라도 소유하겠다는 야만적인 욕망만이 가득했다. 엘라엔은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말해봐. 당신의 그 결백한 눈동자 뒤에 내가 모르는 오답이 숨어 있는지.”“이게… 이게 전하가 말한 논리입니까! 하아. 고작… 고작… 목을 조르는 게… 하아. 하. 전하의 위대한 질서냐고요!”엘라엔이 마지막 힘을 다해 일침을 놓자, 르세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어드는 엘라엔의 발갛게 충혈된 눈을 보며 르세인을 향해 경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전하! 당장 그 손 놓으십시오! 베르제의 혈통을 죽이시려 한다면 이 자리에서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르세인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멈칫하다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삭인 뒤 손을 풀어냈다. 엘라엔이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상체를 숙일 때 그는 이번에 엘라엔의 턱을 잡아 올려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르세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하아, 하아.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아. 당신은 그저 논리의 탈을 쓴 짐승일 뿐이야!”엘라엔은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르세인을 지나쳐 마차로 향했다.르세인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고, 엘라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말을 덧붙였다.“따라오지 마세요! 궁으로 가긴 하겠지만 이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전하를 볼 때마다 짐승의 썩은 냄새가 나는 듯해 구역질이 나니까!” ***라비엔 궁으로 돌아온 엘라엔은 철저하게 르세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궁 문은 굳게 닫혔고, 르세인이 보내는 그 어떤 것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벨모어 백작 부인과 시녀들은 르세인이 집무실에서 물건을 부수며 폭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전전
한편,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르세인은 엘라엔이 궁 밖으로 나갔다는 보고를 뒤늦게 받았다.“라안느 공작저로 갔다고?”르세인의 입가에 야비한 웃음이 걸렸다. 그는 엘라엔이 자신을 피하기 위해 부린 꼼수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아버지가 보고 싶어 도망을 가다니. 숨어봤자 내 손바닥 안인 것을.”르세인은 직접 말을 몰아 라안느 공작저로 향했다. 그는 공작저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에드먼을 보며 날카롭게 물었다.“황태자비는 어디 있습니까. 효심 지극한 딸이 아버지를 보러 왔다던데.”“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엘라엔… 아니,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이곳에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습니다!”에드먼의 호소에 르세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지독한 정적이 거실을 감쌌다. 르세인은 에드먼의 얼굴에서 거짓을 찾아내려 했으나 돌아온 것은 진실뿐이었다.엘라엔이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도망쳤다는 것.르세인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공작저를 나왔다. 초겨울 칼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기이한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그는 자신이 고작 엘라엔의 행방 하나에 이토록 심장이 날뛰고, 평정심을 잃는다는 사실이 낯설고 역겨웠다.‘감히 나를 속이고 어디로 간 거지? 베르제? 아니면… 아직도 그 유령의 흔적을 쫓고 있는 건가.’르세인은 고삐를 쥔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는 평생 논리와 이성으로 세상을 통치해왔으나, 엘라엔이라는 변수 앞에서는 자신의 모든 법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바델! 테르시아 사저에 기사단을 보내라. 만약 그곳에 없다면 제국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내.”르세인의 외침이 황혼이 깃든 수도 카르네티아의 하늘을 찢었다.그는 분노와 함께 전율을 느꼈다. 속이고 도망을 칠 만큼 자신이 싫은 건가.생각이 거기까지 뻗치자 그는 심장이 미칠 듯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를 잡아와 무릎 꿇리고 자신의 발치를 핥게 만들고 싶다는 가학적인 욕망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