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목소리의 주인, 르세인.
자신의 인생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둔 설계자이자, 이 가증스러운 평화를 유지해 준 대가로 모든 것을 예약한 남자. 그의 구두 굽이 정원을 짓누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일정한 보폭과 흐트러짐 없는 박자는 포식자가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때 내는 가장 우아한 소음이었다. “꽃향기가 너무 짙어. 영애 몸에 밴 향이 이 역겨운 정원의 것인지, 본연의 살 냄새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군.”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멈춰 섰다. 엘라엔은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 엘라엔이 입술을 달싹였다. 루비처럼 붉고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는 르세인을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의 긴 손가락이 엘라엔의 턱 끝을 느릿하게 치켜올렸다. 거칠고도 부드러운 악력이 그녀의 여린 피부를 파고들었다. 여름의 매미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정원의 장미들은 열기에 지쳐 고개를 떨구려 했지만 르세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르는 긴장감은 날이 선 채 팽배하게 당겨졌다. 그는 엘라엔의 떨림을 즐겼다. 공포인지, 혹은 금기된 존재를 향한 갈망인지 알 수 없는 그 전율을……. “에르디엔으로 떠날 준비는.” “전하, 전 아직…….” “아직?” 르세인이 짧게 냉소했다. 그의 목소리엔 감정의 고저가 없었다. 잘 닦인 칼날 위로 흐르는 물방울처럼 매끄럽고 냉혹했다. 오묘한 녹색 동공이 그녀의 눈을 꿰뚫었다. 라안느 공작과 거래를 하게 만들었던 그 치명적인 빛은 더욱 짙어진 붉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자신을 무너뜨릴 유일한 위협…. 그는 엘라엔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았다. 르세인은 그것이 불쾌했다. 그는 더욱 서늘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름답군.” “…….” “그 눈으로 다른 것을 보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수만 송이의 장미가 뿜어내는 향기는 어느새 질식할 듯한 압박감으로 변했다. 르세인은 여전히 엘라엔의 얼굴을 탐하듯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자부했으나 이글거리는 루비빛 동공을 마주할 때만큼은 기묘한 질서의 균열을 느꼈다. “전하, 지나치게 무례하십니다.” 엘라엔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뾰족이 날 선 말을 내뱉었다. 르세인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 손을 느릿하게 떼어냈다. 그의 맨손은 차가웠으나 닿았던 자리는 불에 덴 듯한 화끈거림이 남았다. “무례라…. 라안느 공작이 영애에게 예법을 가르칠 때 황실의 권위 위에 가문의 오만을 두라하진 않았을 텐데.” 르세인은 비릿한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구두 굽으로 짓밟았다. 르세인은 그 장미가 마치 엘라엔의 꺾인 자존심인 양 무심하게 뭉개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분명 따스했으나 어쩐지 매섭도록 시린 여름의 바람이었다. 그때, 정원 저편의 회랑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곧 라안느 공작 에드먼과 그의 후처, 공작 부인 이사벨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먼과 이사벨라의 아들들인 하르만과 루시안도 함께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고도 없이 이곳까지 어찌….” 에드먼은 예를 갖추었다. 황실을 떠받치는 손이라 불리는 공작조차 르세인이 뿜어내는 그 서늘하고도 정제된 살기 앞에서는 몸을 사렸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화려한 깃털 부채 뒤로 입술을 깨물며 상황을 살폈다. 그녀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혈통의 전처소생인 엘라엔을 증오했다. 황태자의 정비로 낙점된 건 분명 가문에 더없는 경사스러운 일이나, 이사벨라는 엘라엔이 자신을 내려다볼 미래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영악했다. 미래의 황후가 될 엘라엔의 면전에 대놓고 독설을 내뱉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라안느 공작. 영애에 대한 교육이 다소 소홀한 모양입니다. 내 비가 될 몸이 이토록 무질서하게 피어 있다니.” 르세인의 말에 이사벨라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끼어들었다. “황태자 전하. 엘라엔이 워낙 고집이 세서 제 말은 듣지도 않는답니다. 하르만과 루시안조차 누님의 방종함을 걱정할 정도이지요.” “…….”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엘라엔이 잠시 더위를 먹었나 봅니다.” 이사벨라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르세인의 눈치를 살피며 엘라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르세인은 그 가식적인 연극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이들이 엘라엔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즐겼다. 엘라엔이 기댈 곳이 사라질수록 자신의 품이 유일한 안식처가 될 것임을 알기에. 르세인은 대답 대신 이사벨라를 보았다. 그 서늘한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이사벨라는 목에 칼날이 닿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방종하군.” 르세인의 단 한 마디에 정원이 얼어붙었다. “공작 부인의 자제들은 예법이 훌륭한 듯 보이는데, 어찌하여 영애만은 이토록 무질서하게 방치된 겁니까.” “…황태자 전하! 당장 엘라엔을 방에 가두고 엄히 가르치겠습니다!” 에드먼이 식은땀을 흘리며 외치자, 르세인은 그 비굴한 외침을 비웃듯 시선을 다시 엘라엔에게 돌렸다. 엘라엔은 가족들의 비겁한 모습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 넓은 마레즈나에 자신의 편은 없었다. 오직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자들과 수거하려는 포식자뿐이었다.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르세인은 그런 엘라엔을 보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엘라엔의 가녀린 체구 위로 짙게 드리웠다. 정오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지만 엘라엔은 르세인의 그림자 안에서 기묘한 오한을 느꼈다. 르세인은 허리를 숙여 엘라엔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테르시아.” 엘라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색마저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동요를 르세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 폐허 같은 사저에서 당신이 누구와 밀어를 나누었는지, 그 비천한 품에서 어떤 위안을 얻는지….” “……!”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 효율적이지 않아, 엘라엔.” 르세인의 손이 엘라엔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그 손길은 언제든 그녀의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었다. “제국에서 내 질서를 방해하는 자는 형제라 해도 예외는 없어.” 엘라엔은 그의 말에 카시안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르세인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고 갈 권력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엘라엔의 뒤통수를 그러쥐며 거칠게 끌어안았다. “나는 말이야, 엘라엔. 당신이 제 발로 에르디엔의 아르젠트 궁으로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르세인은 엘라엔의 귓불을 살짝 깨물듯 스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그 오만한 자존심이 꺾이고, 유일한 도피처였던 카시안이 죽음의 문턱에서 허덕일 때….” “……!” “당신이 내 발치에 엎드려 제발 데려가 달라고, 나를 당신의 주인으로 삼아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그 순간을 아주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다고.” 르세인은 자신의 품에 있던 엘라엔을 내동댕이 치듯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안면은 다시 무색무취의 질서로 돌아가 있었다. “라안느 공작,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바델.” “예, 황태자 전하.” “가지.” 르세인은 기사단을 이끌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짓밟힌 장미 꽃잎들이 피비린내 나는 흔적처럼 짓이겨있었다.엘라엔의 낮은 속삭임에 르세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더욱 껴안았다.달빛이 창틀에 머물다 녹아내리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렇게 가장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누구도 넘볼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는 위협적인 소유의 완성.제국의 태양과 달은 그렇게 서로를 집어삼킨 채, 영원히 깨지 않을 아름다운 지옥의 한복판에서 사랑의 감정보다 더 깊은 영원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함께 채웠다.그들을 서로를 구원하지 않았다.대신 서로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체계를 세웠다. ***카르네티아의 겨울은 유독 길었으나 황궁 내부는 엘라엔이 조율한 온기 덕분에 계절을 잊은 듯 평온했다.르세인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불필요한 생명력이라 치부하며 베어냈을 정원수들이 이제는 엘라엔의 취향에 따라 붉은 열매를 맺은 채 햇살을 머금었다.“폐하, 또 정무를 멀리하고 계시는군요.”부드러운 실크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엘라엔이 들어섰다.그녀의 목에는 로잘린이 직접 채워주었던,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파이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 푸른빛은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와 대비되어 기이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품을 뿜어냈다.르세인은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체향을 느꼈다.장미 향기에 섞인 잉크 냄새.그건 이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지적인 포식자의 향이었다.“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짜놓은 이 완벽한 체계가 나를 한가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황후. 남부의 조세권과 북방의 광산 채굴권까지 당신의 인장 아래 움직이니, 내가 검을 휘두를 명분이 사라졌지 않습니까.”르세인이 다가와 엘라엔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이제 그녀의 배는 제법 불러 있었고, 그 안에서 맥동하는 새로운 생명은 르세인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모호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선사했다.“무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니까요. 폐하께서는 그저 상석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 장부 안에서 처리될 테니.”엘라엔은 르세인의 셔츠 깃을 정리해 주며 고개를 들어 그를
황궁의 가장 높은 첨탑 위로 쏟아지는 달빛은 차갑고도 눈부셨다. 대륙의 모든 비명과 환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그 정적의 한복판에 르세인과 엘라엔이 서 있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손등 위로 보이는 흉터들은 그녀라는 안식처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온 훈장이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펼쳐진 제국의 야경을 응시했다.수만 개의 등불이 일렁이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들을 축복하는 빛 같았다.르세인에게 엘라엔은 정복해야 할 영토이자, 결코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심연이었다. 그는 그녀를 옥좌 옆에 앉혔으나 사실 자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가두었고, 엘라엔은 그 위협적인 소유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르세인이라는 괴물의 고삐를 쥐었다.엘라엔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둘은 제국 안팎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엘레니르 제국에는 완연한 평화가 찾아왔다.“고생 많았습니다, 황후.”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엘라엔은 왠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르세인을 올려다보며 하늘에 떠있는 달빛을 품은 것처럼 어둠에서도 환하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당신도… 당신도 고생 많았습니다, 폐하.”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잘 해냈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위로였다.밖으로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겨울밤.소복하게 쌓인 새하얀 눈과 달빛….그 광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눈을 뜨고 있음에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의 그 웃음 하나에 가슴께가 뻐근하게 무거워졌다.그녀가 웃으면 언제부턴가 두 감정이 교차하곤 했다.고마움과 미안함.그러나 그는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엘라엔은 엘레니르 제국의 황후로서 더 없는 황실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고 르세인은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흡족했다. 하지만 그녀의 초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의 논리 안에 가둔 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뒤늦게 깨달
엘라엔의 목소리는 서늘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그녀는 르세인의 겉옷을 받아 시종에게 넘기며 그가 앉은 책상 위로 새로운 포고문을 밀어 넣었다.그건 바로 제국 무역 연합의 창설안이었다.르세인은 포고문을 읽어 내리며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무역 연합이라. 말이 좋아 연합이지, 결국 제국의 화폐를 쓰지 않는 자들은 굶겨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황후.”“폐하, 주변 소국들이 제국의 화폐 가치에 종속되는 순간, 그들은 군대를 일으킬 자금조차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겁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르세인은 그녀의 손길을 황홀하게 느끼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당신은 내 검보다 더 잔인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어. 적들은 서서히 말라죽어가겠죠.”“폐하, 제 지략이 마음에 드십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연합에 가입을 거부하는 속국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특히 동부의 무역 도시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발악하겠지.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엘라엔의 눈매가 매혹적으로 가늘어졌다.“이미 그들 내부의 상인 연합을 매수해 두었습니다. 경제적 파멸은 아주 확실한 통제 수단이죠.”르세인은 고개를 얕게 저었다가 얼굴를 돌리고 엘라엔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추었다. 점차 달아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책상 위에 흩어진 수많은 장부와 채권 증서들이 두 사람의 움직임에 눌려 바스락거렸다.*** 대륙을 뒤덮었던 전쟁의 화마가 잦아들고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는 전례 없는 고요와 풍요에 잠겼다.하지만 황궁의 가장 깊은 곳, 르세인의 집무실만큼은 여전히 지독하게 농밀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르세인은 옥좌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단 한 장의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카르노스의 인장이 찍힌, 그러나 공식적인 외교 문서가 아닌 밀약서였다.[카르노스는 엘레니르 제국의 영구적인 속국임을 자처합니다. 다만, 제국의 검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국을 향
같은 시각, 제국 황궁에서 엘라엔은 사흘 밤낮을 이어진 정무의 피로조차 잊은 듯 마지막 숙청 대상자들의 명단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녀의 책상 위에는 해카테의 문양이 박힌 금고 열쇠들과 남부 상단 연합의 지배권 양도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그때,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기사들의 제지도 뚫고 들어온 이는 태후 로잘린이었다.로잘린은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해카테 파산 보고서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황후, 정말로 한 부족의 숨통을 장부 하나로 끊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가 전장에서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동안, 그대는 그들의 가치 자체를 말소시켰군요.”엘라엔은 펜을 내려놓고 로잘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태후 폐하, 폐하의 제국에는 가난한 속국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폐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생산 기지만이 필요할 뿐이지요. 해카테는 이제 완벽한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로잘린은 엘라엔에게서 르세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위엄 그 자체였다.“황제가 돌아오면 황후를 두려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쥔 이 장부들이 황제의 검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죠.”“폐하께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시겠지요. 태후 폐하, 이제 시작입니다.”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멀리서 승전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탓이었다.르세인의 함대가 개선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엘라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르세인에게 바칠 가장 화려한 전리품인, 파산한 해카테의 항복 문서를 손에 쥐고서.***황궁의 정문, 개선의 가도를 메운 것은 승전의 함성보다 더 무거운 경외였다.칠흑 같은 군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말 안장 곁에는 해카테 족장이 평생을 지켜온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이 볼품없는, 하찮은 물건처럼 매달려 덜렁거렸다.르세인은 고개를 들어 황궁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그곳엔 제국의 휘장을 배경으로 엘라엔이 서 있었다. 그녀는 승전의
엘라엔은 온몸을 떨며 주저앉은 공작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안색이 단번에 창백하게 굳은 공작을 보는 엘라엔은 잔인하게 번들대는 눈으로 웃음을 내보였다.“감히 나를 독살하려 하다니. 그대의 가문은 제국 법에 의해 멸문될 것이며 그대가 아끼던 그 비축 식량과 금괴 모두 전장의 군자금으로 귀속될 것이다.”“화, 황후 폐하…!”“폐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광장에 걸린 그대의 잘린 얼굴은 폐하께 바칠 나의 첫 번째 전리품이 되겠지.”엘라엔은 짙게 웃으며 공작의 떨리는 턱밑을 쓸었다.공작은 엘라엔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쉴 새 없이 같은 말을 토해냈다. 급박하고 절절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어투였다.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은 그 모습을 제대로 목도하며 숨을 편히 쉬지도 못할 만큼 굳어버렸다.무언가에 결박 당한 것처럼 그 어떤 움직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여인의 몸으로 정치를 논하는 황후의 코를 납작하게 해야 한다며 호기롭게 얘기했던 지난날의 제 입들을 마구 잡아 뜯고 싶었다. 지금 엘라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살기였다.모든 것이 음습해서 오싹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둔했었는지를 비소로 깨달았다.***베리튼 공작에서 시작된 피의 숙청은 동이 트기도 전에 제국 전역의 상권으로 번져나갔다.엘라엔은 잠을 자는 대신 집무실의 커다란 책상 위에 대륙의 경제 지도를 펼쳤다.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금권을 쥔 가문들의 몰락이 결정되었다.“황후 폐하, 해카테 부족의 주력 함대가 멈췄다는 소식입니다.”정보 상단의 수장 리논이 나타나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심과 함께 미세한 전율이 섞여 있었다.“채권 매집 소식이 그들의 함대에 닿자마자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기함을 포위했습니다. 해카테 부족이 발행한 어음은 이제 쓰레기 조각이 되었으니까요.”엘라엔은 찻잔을 들어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엘라엔은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르세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기보다 철저히 계산된 확신이었다.르세인이 해카테 부족 함대를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동안, 엘라엔은 해카테의 경제적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제국 내부의 반대파 귀족들, 특히 문제가 아주 많은 파브르 공작 일가의 사유 재산을 몰수해서 그 자금으로 해카테의 채권을 매입하세요. 그들이 돈을 갚아야 할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해카테 족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요.”엘라엔은 펜을 들어 서명을 하고 명령서에 인장을 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금사의 인장이 찍힐 때마다 해카테라는 거대한 부족의 기둥이 하나둘씩 꺾여 나갔다.*** 이틀 뒤, 집무실에 태후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은 엘라엔이 벌이고 있는 이 거대한 경제 전쟁의 규모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장부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황후, 그대는 황제보다 더 지독한 사냥꾼이 아닙니까.”로잘린은 엘라엔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태후 폐하, 오셨습니까.”“남부 귀족들이 그대를 누르기 위해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돈줄을 죄어오는 것에 미쳐버린 모양이지. 어떻게 할 셈입니까, 황후.”엘라엔은 서류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대꾸했다.“제 발로 그 연회장에 가야지요. 남부 전체의 상권 지배권을 완전히 가져올 절호의 기회인 것을요, 태후 폐하.”엘라엔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로잘린은 그런 엘라엔을 보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며칠 뒤, 남부 귀족들이 마련한 연회는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베리튼 공작의 별관에서 열렸다. 겉으로는 황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연회장 곳곳에서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엘라엔은 호위 기사를 최소화한 채, 시녀들만을 대동하고 그 독사들의 굴로 발을 들였다.별관의 연회장은 그녀가 등장함과 동시에 수군거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