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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르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
그곳에 자리한 에르디엔 황궁은 정교한 금박을 두른 화려함의 향연이었다. 에르디엔은 황실의 권위가 하늘에 닿아 있음을 증명하듯 채움과 범람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단 한 곳만은 달랐다. 아르젠트 궁. 황태자의 거처인 이곳은 비움과 질서의 미학이 흐르는, 여름의 열기조차 제 질서 안으로 수렴시키는 거대한 침묵의 공간이었다. 밝은색을 거부한 듯 짙은 회색의 석재로 쌓아 올린 외벽은 불필요한 조각과 장식이 없었다. 정원조차 화려하지 않았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사치스러운 장식이 아닌,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질서에서 기인되었다. 아르젠트 궁은 화려함으로 계절을 선언하지 않는 대신 질서로 계절을 품었다. 황태자. 르세인 폰 루카르디아. 차가운 질서의 정점에 있는 그의 얼굴은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가진, 매서운 아름다움을 지녔다. “바델.” 낮고 매끄러운 음성이 정적을 갈랐다. 대기 중이던 전속 부관 바델은 르세인의 부름에 곧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황태자 전하.” 모든 판단은 감정 이전에 내려져야 한다는 신념이 짙게 내려앉은 르세인의 오묘한 녹색 눈동자가 바델을 직시했다. 바델은 침을 삼켰다. 곧 보고해야 할 말은 그의 손을 미약하게 떨리게 만들었다. “보고.” “어제 오전, 라안느 영애께서 마레즈나를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테르시아입니다.” 바델의 떨리는 음성에도 르세인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생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말을 걸러내는 과정에 가까웠다. “또 카시안이군.” 르세인에게 카시안은 위협의 대상도, 동정의 대상도 아니었다. 자신의 완벽한 소유물에 묻은 불쾌한 얼룩 같은 존재였다. 르세인은 바델의 말을 듣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라안느가의 마레즈나가 있을 곳으로. 라안느 영애. 엘라엔 폰 라안느. 르세인은 그녀가 카시안을 보며 짓는 미소가 진심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카시안의 테르시아가 아니라, 자신의 이 차가운 아르젠트 궁이 될 것이기에. 르세인은 늘 감정을 느끼기 전에 상황을 재단했고 욕망을 품기 전에 손익을 계산했다. 엘레니르 제국에서 라안느 공작가는 단순한 귀족 가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에르디엔 황실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였다. 황후 소생의 적통 황태자인 르세인에게 엘라엔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완벽한 세상이 완성되는 마지막 조각이었다. 훌륭한 가문. 고결한 혈통. 르세인은 엘라엔을 떠올리며 짧게 명령을 내렸다. “마차를 준비하라.” 바델은 고개를 숙였다. 르세인의 결정은 숨을 쉬는 행위처럼 자연스러웠다. 그의 세상은 이미 그를 중심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명령이 없어도,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 라안느 공작저 마레즈나는 장미가 만개했다. 성벽에는 장미 덩굴이 경계를 부드럽게 숨겼고, 정원의 연못을 따라서도 장미가 심어져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장미 향이 겹겹이 쌓이고, 수면 위로 반사된 빛이 흔들릴 때마다 꽃잎의 붉음도 함께 흔들렸다. 이러한 정원 한가운데 장미를 돌보고 있는 그녀는 평범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엘라엔 폰 라안느. 제국 최상위 귀족 영애의 의상이라기엔 지나치게 소박했다. 크림색의 얇은 여름 드레스는 장식 없는 끈으로 허리가 묶여 있었고, 접어 올린 소매 사이로 가녀린 팔목이 드러났다. 엘라엔의 곁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온 하녀 마리가 있었다. “마리. 오늘 햇빛이 너무 좋지?” “네, 영애님.” “장미가 제일 예쁠 시간이야.” 엘라엔은 장미 잎을 살짝 들어 올렸다. 가시를 피하는 손끝의 움직임은 고귀한 태생답게 품위가 흘렀다. “여름은 짧아.” “…….” “그래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 좋아.” 마리는 엘라엔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늘 어딘가 더 깊은 곳을 향해 있었기에. 그러나 그 깊이를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햇빛은 장미 위에 내려앉았고, 분수대의 물소리는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졌다. 정원은 외부의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평온했다. 마리는 엘라엔이 방금 만진 장미를 바라보았다. “장미는… 꼭 영애님 같아요.” 그 말은 어딘가 두려움이 섞인 말이었다. 엘라엔은 대답 대신 꽃잎을 한 번 더 만졌다. 그때, 장미 덩굴 너머로 바깥의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일정한 간격의, 빠르지도 않고 망설임도 없는 발소리가 들렸다. 일순 여름 바람이 방향을 틀었고 검은 군복을 입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레즈나의 분위기는 이 순간부터 라안느 가문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장미의 붉음과 대조되는 차가운 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걷는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르세인. 그가 정원에 들어서자 공간의 중심이 이동한 듯했다. 장미는 여전히 아름답게 만개했으나 더 이상 이 정원의 주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존재가 자연을 압도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건조한 시선이 엘라엔의 발아래부터 느릿하게 이동해 그녀의 머리카락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엘라엔의 하나로 땋아 내린 와인빛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은 붉은 기운을 은근히 살아나게 했다. 마리는 반사적으로 엘라엔 앞에 서려고 했으나 르세인의 최정예 기사가 그 앞을 막았다. 엘라엔은 그를 보며 마리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르세인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거리를 유지한 채 엘라엔을 직시했다. “라안느 영애.” 그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들려왔을 때, 마레즈나의 장미 향기가 그에게로 수렴되는 착각이 들었다. 그의 부름은 확인이었다. 확인이 끝나면 다음은 절차일 것이다. 여름의 장미 향이 더 짙어졌다. 엘라엔은 이 여름이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며 눈을 가늘게 떨었다.르세인은 활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엘라엔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말 위에서 끌어내렸다. 곧, 르세인은 거친 흙바닥 위에 등을 기댄 엘라엔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의 사냥복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전하! 왜 이러세요!”“제국을 제패하고 싶다고 했지? 좋아, 나와 함께 그 정점에 서는 거야. 하지만 그 정점에 서는 건 우리가 아니라 오직 나의 논리 아래 굴복한 당신만이 있을 뿐이야.”르세인은 거칠게 저항하는 엘라엔의 입술을 거칠게 짓뭉갰다. 흙냄새와 시린 겨울바람, 그리고 르세인의 뜨거운 욕망이 뒤섞인 사냥터의 한복판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욕망을 증명하려 들었다.엘라엔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지만 르세인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결박하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그는 소름이 돋을 만큼 매혹적이게 웃으며 속삭였다.“당신이 나를 짐승이라 불렀으니 오늘은 정말 짐승처럼 당신을 유린해 보려고. 제국의 차기 안주인이 사냥터에서 어떤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지 기대가 되는군.”“전하!”르세인의 광기 어린 애정 행각이 극에 달하던 순간, 숲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고의로 떨어뜨린 듯한 은제 단검 하나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그 단검의 자루에는 르세인이 그토록 증오하는 카르노스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숲의 바닥은 얼어붙어 너무나 차가웠고 서늘했다. 르세인은 엘라엔의 손목을 여전히 짓누른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사냥복의 거친 가죽 질감이 그녀의 셔츠 너머로 생경하게 전해졌다. 르세인은 짐승처럼 그녀의 살결을 핥고 짓씹으며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려 들었다.“이곳입니까. 당신이 그 유령과 함께 도망치려 했던 숲 말입니다.”르세인의 낮은 목소리에 엘라엔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은 무자비하게 그녀의 허리선을 더듬어 내려갔다. 엘라엔은 흙바닥의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르세인은 사과 대신 폭력을, 대화 대신 정복을 택했다. 그는 환멸이 나는 남자였지만 우습게도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엘라엔의 본능을
라비엔 궁의 철창이 걷힌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르세인은 사과 한마디 없이 전보다 더 거대하고 눈부신 인장을 벨모어 백작 부인을 통해 엘라엔에게 돌려보냈다.그건 분명 네가 원하는 판을 깔아줄 테니 어디 한번 발버둥 쳐보라는 거만한 초대장이었다.엘라엔은 차가운 우유로 목을 축이며 거울 앞에 섰다. 목에 남은 멍 자국은 옅은 화장으로 가려졌지만 르세인의 손이 닿았던 그 감각은 여전히 살갗 아래에서 맥동했다.그녀는 건조한 표정으로 짙은 녹색의 승마복으로 환복했다.“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접 말을 끌고 오셨습니다.”말리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라엔은 묵묵히 장갑을 꼈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을 가두는 것이 실패하자, 이제 그녀를 제국의 가장 화려한 무대 위로 끌어올려 더 거대한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었다.궁의 정문에는 흑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보였다. 그는 거친 소재가 섞인 사냥복을 입고 있었는데,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선과 탄탄한 가슴 근육은 겨울의 서늘한 공기와 어우러져 지독하게 이질적인 위압감을 선사했다.“황태자비.”르세인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엘라엔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자신이 직접 준비한 백마의 고삐를 잡았다.르세인의 눈썹이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여전히 그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있는 모습… 나쁘지 않습니다.”“전하의 호의는 늘 대가가 뒤따르지 않습니까. 그 대가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나왔을 뿐입니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르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머리를 돌렸다.제국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북부 사냥터로 향하는 길은 르세인의 명령에 따라 황실 근위대만이 삼엄하게 경계태세를 갖췄다.사냥터에 도착하자, 수십 명의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대중 앞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완벽한 모습이었지만 엘라엔의 귓속에 닿는 숨결은 여전히
르세인은 땀에 젖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에메랄드 목걸이를 집어 들어 침대 위에 늘어진 엘라엔의 목에 채웠다.“오늘부터 당신의 구역은 이 방으로 한정됩니다. 베르제든, 라안느든 당신이 기댈 곳은 이제 없어. 오직 나만이 유일한 질서가 될 겁니다.”르세인은 만족스러운 듯 차가운 미소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홀로 남겨진 엘라엔은 차갑게 빛나는 에메랄드를 내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 대신 서늘한 결의가 맺혀 있었다. 르세인은 자신을 가두었다고 믿겠지만, 엘라엔은 이 고립을 이용해 더 거대한 함정을 계획했다.“짐승을 길들이는 법은 간단해. 무질서한 짐승은 결국 제 집을 허무는 법이야.”*** 며칠간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에서 르세인은 모호한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다.엘라엔을 굴복시켰고 그녀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겼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유치한 감정이 아니라, 완벽한 소유에 실패했다는 정복자의 허무라고 자신을 속였다.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그는 독한 술을 잔에 가득 채웠다. 르세인에게 세상은 언제나 명쾌한 체스판이었다. 말이 움직이면 결과가 나왔고, 공포를 심으면 복종이 돌아왔다.하지만… 엘라엔. 그녀만은 달랐다. 그녀는 그가 가장 아끼는 말이었고, 체스판 자체를 뒤흔드는 유일한 균열이었다.‘왜 굴복하지 않은 거지.’르세인은 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아는 사랑이란 완벽한 소유의 의미였다. 그러니 그녀의 모든 것은 자신의 논리 안에서 통제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제에서 그녀의 목을 졸랐을 때 엘라엔의 눈을 통해 보았던 것은 굴복이 아니라 명백한 경멸이었다.그것이 르세인을 미치게 했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그 건조하고 서늘한 멸시.르세인은 술은 단번에 들이켰다. 그는 엘라엔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의 시작이 카시안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는
“…뭐라?”“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과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할 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죠. 하지만 전하께서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신이라 믿는, 미쳐있는 짐승에게 무슨 감정을 소비할까요?”엘라엔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르세인의 안색이 굳어져갔다. 뺨을 얻어맞거나, 독설을 듣는 것보다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취급 당하는 이 감각은 그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모욕이었다.“미친… 짐승이라….”르세인은 낮게 읊조리며 엘라엔의 책을 거칠게 뺏어 바닥에 던졌다. “왜요? 또 제 목을 조르시려고요?”“내가 짐승이라면 당신은 그 짐승의 우리 안에 갇힌 먹잇감일 뿐이야. 내가 당신을 이토록 화려하게 치장하고 제국의 절반을 쥐여준 이유를 잊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완벽함을 증명하는 가장 고귀한 장식품이어야 해.”“장식품은 감정이 없죠. 그러니 앞으로 저를 찾지 마세요. 전하의 그 구역질 나는 논리를 받아내기엔… 제 인내심은 이미 베르제에서 바닥났으니까요.”르세인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는 엘라엔의 목에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거칠게 문질렀다.“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나를 경멸할수록, 나는 당신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고 싶어지거든.”르세인은 엘라엔을 몰아세우며 그녀의 입술을 탐하려 들었다. 엘라엔은 피하지 않았다. 눈조차 감지 않은 채 죽은 인형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그를 받아냈다.반항도, 순종도 없는 그저 의무 같은 것. 르세인은 되레 그 허무함에 질려버린 듯 그녀를 밀쳐내고 라비엔 궁을 빠져나갔다.“이거였구나.”엘라엔은 한쪽 입매를 치켜들며 웃은 뒤, 그가 던진 책을 주워 읽기 시작했다. 콧노래와 함께.*** 아르젠트 궁 집무실로 돌아온 르세인은 바델에게 광기 섞인 명령을 내렸다.“라비엔 궁의 모든 창문에 철창을 둘러라. 그리고 베르제 대공저로 향하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해. 자신의 오만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지 뼛속까지 새기게 만들 테니!”르세인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그는
시어드가 소리쳤고, 엘라엔의 얼굴은 점차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르세인의 손을 떼어내려 버둥거렸지만 광기에 휩싸인 르세인의 악력은 보통 힘이 아니었다.엘라엔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공포 속에서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사랑이 아닌, 오직 상대를 파괴해서라도 소유하겠다는 야만적인 욕망만이 가득했다. 엘라엔은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말해봐. 당신의 그 결백한 눈동자 뒤에 내가 모르는 오답이 숨어 있는지.”“이게… 이게 전하가 말한 논리입니까! 하아. 고작… 고작… 목을 조르는 게… 하아. 하. 전하의 위대한 질서냐고요!”엘라엔이 마지막 힘을 다해 일침을 놓자, 르세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어드는 엘라엔의 발갛게 충혈된 눈을 보며 르세인을 향해 경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전하! 당장 그 손 놓으십시오! 베르제의 혈통을 죽이시려 한다면 이 자리에서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르세인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멈칫하다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삭인 뒤 손을 풀어냈다. 엘라엔이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상체를 숙일 때 그는 이번에 엘라엔의 턱을 잡아 올려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르세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하아, 하아.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아. 당신은 그저 논리의 탈을 쓴 짐승일 뿐이야!”엘라엔은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르세인을 지나쳐 마차로 향했다.르세인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고, 엘라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말을 덧붙였다.“따라오지 마세요! 궁으로 가긴 하겠지만 이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전하를 볼 때마다 짐승의 썩은 냄새가 나는 듯해 구역질이 나니까!” ***라비엔 궁으로 돌아온 엘라엔은 철저하게 르세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궁 문은 굳게 닫혔고, 르세인이 보내는 그 어떤 것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벨모어 백작 부인과 시녀들은 르세인이 집무실에서 물건을 부수며 폭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전전
한편,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르세인은 엘라엔이 궁 밖으로 나갔다는 보고를 뒤늦게 받았다.“라안느 공작저로 갔다고?”르세인의 입가에 야비한 웃음이 걸렸다. 그는 엘라엔이 자신을 피하기 위해 부린 꼼수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아버지가 보고 싶어 도망을 가다니. 숨어봤자 내 손바닥 안인 것을.”르세인은 직접 말을 몰아 라안느 공작저로 향했다. 그는 공작저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에드먼을 보며 날카롭게 물었다.“황태자비는 어디 있습니까. 효심 지극한 딸이 아버지를 보러 왔다던데.”“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엘라엔… 아니,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이곳에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습니다!”에드먼의 호소에 르세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지독한 정적이 거실을 감쌌다. 르세인은 에드먼의 얼굴에서 거짓을 찾아내려 했으나 돌아온 것은 진실뿐이었다.엘라엔이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도망쳤다는 것.르세인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공작저를 나왔다. 초겨울 칼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기이한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그는 자신이 고작 엘라엔의 행방 하나에 이토록 심장이 날뛰고, 평정심을 잃는다는 사실이 낯설고 역겨웠다.‘감히 나를 속이고 어디로 간 거지? 베르제? 아니면… 아직도 그 유령의 흔적을 쫓고 있는 건가.’르세인은 고삐를 쥔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는 평생 논리와 이성으로 세상을 통치해왔으나, 엘라엔이라는 변수 앞에서는 자신의 모든 법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바델! 테르시아 사저에 기사단을 보내라. 만약 그곳에 없다면 제국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내.”르세인의 외침이 황혼이 깃든 수도 카르네티아의 하늘을 찢었다.그는 분노와 함께 전율을 느꼈다. 속이고 도망을 칠 만큼 자신이 싫은 건가.생각이 거기까지 뻗치자 그는 심장이 미칠 듯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를 잡아와 무릎 꿇리고 자신의 발치를 핥게 만들고 싶다는 가학적인 욕망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