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찰싹!
르세인이 떠나자마자 라안느 공작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엘라엔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엘라엔! 더는 황태자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거라!” 엘라엔은 고개가 돌아간 채 잔디 위로 엎어졌다. 공작 부인 이사벨라는 그 모습을 보며 속이 시원하다는 듯 야비한 웃음을 흘렸고, 어린 남동생 하르만과 루시안은 겁에 질린 채 엘라엔을 내려다보았다. ‘르세인….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바닥에 엎드린 엘라엔의 시야에 르세인이 짓밟고 간 장미의 잔해가 들어찼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장미를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정원의 흙이 함께 파고들었다. 엘라엔은 그 손을 들어 에드먼의 반지에 긁혀 입가에 흐르는 피를 훔쳤다. 그녀의 눈은 증오로 타올랐다. 곧 그 붉은 눈에 자각 없이 눈물이 흘렀다. 카시안을 지키기 위해 르세인이 설계한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잔인하고 가혹했다. 푸르른 하늘은 유리판처럼 깨끗했으나 정오의 장미 향은 이제 죽음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 에르디엔 황궁의 아르젠트 궁에는 오직 르세인이 서류를 넘기는 건조한 소리와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는 마찰음만이 존재했다. 이곳에는 장미의 붉음도, 여름의 녹음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채색의 완벽함만이 질서 아래에 놓였다. 르세인은 생명을 가진 것들의 무질서한 번식을 혐오했다. 그는 꽃 향이 섞인 미풍이 아닌 깎아지른 절벽에서 불어오는 듯한 건조한 내음을 맡으며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검토했다. 제국 남부의 관세 조정안과 북부 요새의 보급로 확충, 그리고 황실 직속 기사단의 재 편성안. 그의 손끝에서 제국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지만 르세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슥, 슥. 펜촉이 고급 양피지 위를 스치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르세인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바델.” 펜을 놓지 않은 채 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전실에서 대기하던 바델은 그의 부름에 소리 없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보고하라.” “예, 전하. 라안느 영애께서 조금 전 마레즈나의 북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하녀의 옷차림으로 변복하셨다고 합니다.” “…….” “북문 근처의 하수도를 통해 탈출하셨으며 추적을 따돌리려 애쓰셨습니다.” 바델의 보고에도 르세인은 펜을 멈추지 않았다. 서류 위로 그의 외관을 닮은,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필체가 이어졌다. “전하, 현재 흑색 기사단 소대가 테르시아 주변을 포위 중입니다.” 르세인은 그제야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질투가 아닌 섬뜩한 유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신이 설계한 미로 속에서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는 것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흥미였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그러나 결코 다정하지 않은 비릿한 호선이 그려졌다. “내 비가 되기 위해 수업을 받을 때는 그토록 태만하더니. 죽은 나무 같은 놈을 만나러 갈 때는 제법 영리하게 구는군.” “신병을 확보할까요?” “아니, 내버려둬.” “예…? 하지만 전하, 밀회는 황실의 명예에…….” “명예?” 르세인이 눈을 치켜뜨며 바델을 보았다. 그 서늘한 안광에 바델은 숨을 들이켰다. “명예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에게나 논하는 것이지. 지금 영애가 하는 짓은 반항이 아니라 마지막 발악이야.” “…….” “굶주린 쥐가 독이 든 치즈인 줄 알면서도 구멍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것과 다르지 않아.” 르세인은 책상 서랍에 넣어둔 은제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잘 연마된 날 위로 그의 냉혹한 얼굴이 비쳤다.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신기루인지, 카시안의 품이 얼마나 나약한 안식처인지….” “…….” “가장 달콤한 꿈을 꾸게 해. 깨어났을 때 마주할 현실이 더욱 지옥 같도록.” 그는 나이프 끝으로 한 종이 위에 적힌 카시안이라는 이름을 느릿하게 그어 내렸다. 과거 그녀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그와 처음 얽혔던 그해… 수도 카르네티아의 여름은 잔혹할 만큼 뜨거웠고, 에르디엔 황궁의 후원은 터질 듯 만개한 꽃들의 농익은 향기로 가득 찼다. 그 지독한 열기와 색채들 사이에서도 엘라엔 폰 라안느는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그녀의 와인빛 머리카락은 내리쬐는 정오의 햇살을 받아 더욱 짙은 붉음을 쏟아냈다. 생동감 넘치는 루비빛 동공은 호기심 어린 빛을 발산하며 반짝였다. 제국의 정점에 선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 “영애님, 오늘도 황후 폐하의 다과회가 길어질까요?” 하녀 마리의 물음에 엘라엔은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글쎄. 폐하께서는 내 자수 실력보다 내가 얼마나 전하의 취향에 근접한 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시니까 아마 한 시간은 족히 걸리겠지.” 엘라엔은 영민했다. 자신이 황궁에 불려오는 이유가 애정 때문이 아님을, 가문과 황실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맞물려 돌아가기 위한 기름칠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후 로잘린의 루미에라 궁 앞의 연못은 끓어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빛났다. 이러한 지독한 열기 속에서도 제국의 귀족가 영애들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테라스에 모였다. 화려한 레이스와 겹겹이 쌓인 실크 드레스. 그녀들에게 이곳은 가문의 저력을 증명하는 시험대였다. “라안느 영애 입장입니다.” 시녀의 목소리가 테라스의 소란을 단숨에 잠재웠다. 십여 개의 부채질이 일시에 멈췄고 영애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구로 쏠렸다. 엘라엔은 그 모든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오늘 그녀는 유독 얇고 투명한 크림색의 여름 드레스를 선택했다. 소매 끝에 달린 섬세한 레이스는 걸음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흔들렸고 허리에 묶인 붉은 비단 리본은 그녀의 와인빛 머리카락과 어우러졌다. “이 더위에 마레즈나에서 오느라 고생했군요, 라안느 양.” 상석에 앉은 황후 로잘린이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엘라엔은 완벽한 각도로 무릎을 굽히며 황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황후 폐하의 부르심인데 어찌 더위를 핑계로 대겠습니까. 궁 안의 시원한 분수 소리가 마레즈나의 매미 소리보다 훨씬 달콤한걸요.” 황후는 엘라엔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곁자리를 내어주었다. 황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엘라엔을 보며 주변 영애들의 눈빛에는 시기가 가득했다. 제국 제일 가문의 영애이며 차기 황태자비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소녀. 그녀는 존재 자체로 다른 영애들에게는 거대한 벽이자 치워버리고 싶은 장애물이었다. “라안느 영애는 오늘도 눈이 부시군요. 루비빛 눈동자가 황후 폐하의 궁 이름과 어찌 이리 잘 어울리는지요.” 백작가의 한 영애가 칭찬을 건넸지만 그 끝에는 미묘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 소녀는 엘라엔의 눈동자가 지닌 붉은 기운이 불길한 징조라도 되는 양 소문을 퍼뜨리던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제 눈이 폐하의 고귀한 궁의 이름과 잘 어울린다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요?” 그럼에도 엘라엔은 상대를 향해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얼음을 띄운 차가운 차와 설탕을 입힌 레몬 슬라이스, 그리고 작은 타르트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엘라엔은 조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 우아한 다과회는 먹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사냥하는 전장이었으니까.엘라엔은 르세인의 목덜미 근처에서 펜대를 느릿하게 돌렸다. 닿지는 않았느나 펜 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긴장감이 르세인의 무언가를 자극했다.“이들을 숙청하여 전하의 질서가 무결함을 증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수족이 썩어 문드러진 것을 묵인하여 전하 스스로 그 오차가 되시겠습니까?”르세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일렁였다.분노가 아니라 자신이 길들였다고 믿었던 사냥개에게 급소를 찔린, 광기가 가득한 희열이었다.그는 엘라엔의 손에 든 만년필을 뺏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가 꽉 내리눌렀다.“…나를 시험하는 겁니까, 영애.”“시험이 아니라 증명이라 해두죠. 전하의 질서가 타인에게만 가혹한 것인지, 아니면 전하 자신에게도 칼을 들이밀 만큼 고결한 것인지.”르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모르게 소름을 돋게 하는 웃음이었다.그는 엘라엔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그어놓은 장부의 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좋아. 기꺼이 내 손을 더럽히지. 내 질서에 완벽을 가하기 위해서라면 내 팔 하나쯤 잘라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르세인은 펜을 뺏어 장부 위에 거칠게 서명했다.즉각적인 숙청의 명령이었다. 기사단 절반이 날아갈 수도 있는 결정이었지만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모든 것은 숨을 쉬는 행위처럼 반사적이었고 또 그만큼 자연스러웠다.그는 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으며 엘라엔의 얼굴에 자신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하지만 영애, 잊지 마십시오. 내 팔을 자르게 만든 그 대가는 당신이 감당해야 할 테니까. 오늘부터 당신을 지킬 기사단이 사라졌으니 이를 어쩌나.”르세인은 그저 그녀의 숨결이 닿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질서에 균열을 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르세인은 그 균열을 이용해 그녀를 겁박하고 있었다.*** 마레즈나로 향하는 카르네티아 숲길은 가을 햇살이 붉게 물든 잎들 사이로 조각난 무늬를 수놓았다. 르세인의 겁박과는 달리 모든 것이 평화로웠으나 엘라엔은 마차 안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르세인과의 숨 막히는 만찬을 끝내고 돌아온 마레즈나는 가을밤이 깊게 내려앉았다.여름의 눅눅함이 가신 공기는 건조하지만 선선했다. 정원의 장미들은 이미 생명력을 잃고 메말라 가며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그건 꼭 르세인의 질서 아래 박제되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영애님, 목욕물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요새에서 돌아오신 뒤로 밤잠을 자꾸 설치시는 듯해 진정에 좋은 라벤더 오일을 섞었어요.”방으로 들어선 엘라엔은 마리의 걱정 가득한 말에 대답 없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드레스의 코르셋을 풀자 억눌려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거울 속의 자신은 요새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고 그의 시선을 받아내는 얼굴은 유독 하얗게 질려 보였다.목욕물 속에 몸을 담갔으나 한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목욕을 마친 엘라엔이 실크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사벨라가 예고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아 카시안 경을 만나다니. 대담해, 정말. 황자 분들의 눈이 무섭지도 않니?”이사벨라는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르세인의 장부를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전하께서 네게 이런 중책을 맡기신 건 너를 믿어서가 아니란다. 네가 감당하지 못할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시는 거지. 라안느가의 가시 돋친 장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사교계 모두가 지켜보고 있어.”“염려 마세요, 어머니. 제가 무너지면 어머니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하르만과 루시안도 함께 무너지는 거예요.”엘라엔의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서늘한 대꾸에 이사벨라는 헛웃음을 치며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섰다.엘라엔은 문 너머를 한참 응시하다 책상 앞에 앉았다.“마리, 오늘은 이만 물러가 봐. 차만 부탁해.”“하지만 영애님, 안색이 너무….”“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마리 역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촛불이 타오르는 미세한 소리와 르세인이 던져준 검은 장부
“바델.”“예, 전하.”“호위의 거리를 좁힐 것을 전하라. 영애가 장부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기사들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도록. 또한….”르세인은 잉크로 더럽혀진 보고서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그는 엘라엔이 카시안과 함께 있는 그 순간조차 자신의 시선이 닿고 있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그녀가 느끼는 그 짧은 안식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모래성이라는 것을… 엘라엔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그것이 르세인이 설계한 가장 우아하고도 잔인한 질서였다.“영애에게는 카시안과 함께 찾아낸 그 오차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논의하겠다고 전하라.”르세인은 다시 펜을 쥐었다. 그의 눈빛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아르젠트 궁의 문턱을 넘는 순간, 하역장에서 느꼈던 그 짧은 해방감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르세인이 보낸 기사들은 돌아오는 내내 엘라엔이 탄 마차를 바짝 뒤쫓았다.말발굽 소리는 마치 르세인의 심장 박동처럼 그녀를 압박해왔다.“전하께서 만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바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화려하지만 온기라고는 없는 식당이었다.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르세인은 엘라엔이 들어서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동공은 한 점 요동도 없었다.“왔습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과, 목선을 보았다. 엘라엔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와 붉은 와인이 놓여 있었지만 식욕이 돋지는 않았다.르세인은 우아하게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어내며 입을 열었다.“그와는 즐거웠습니까. 나누는 대화가 꽤나 다정했을 텐데.”다정하다는 단어를 내뱉는 그의 입술 근육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르세인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엘라엔의 반응을 관찰했다.“…카시안은 전하께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의 흔적 말입니다.”엘라엔
“나갈 생각이군.”“책상에 앉아 이안 전하가 흘려주는 정보나 줍고 있는 건, 전하께서 말씀하신 자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남부의 물류가 모이는 수도 외곽의 하역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그곳의 장부와 전하의 장부가 얼마나 다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르세인은 펜촉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그 규칙적인 소음은 엘라엔의 목선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을 자극했다.“좋습니다.”르세인의 허락에 옆에 있던 이안이 서둘러 끼어들었다.“영애, 혼자 보내지 않겠어요. 내 기사들을 붙여줄 테니….”“아니요, 이황자 전하.”엘라엔은 단호히 거절했다.“전하의 기사들을 배석하는 순간, 그곳의 사람들은 입을 닫고 숫자들을 더 깊이 숨길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움직이겠어요.”“하지만 영애…!”“카시안과 함께 갈 생각이에요. 걱정 마세요.”엘라엔의 폭탄선언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단번에 뒤바뀌었다.르세인은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동공은 모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질투라기엔 너무 우습고, 분노라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못하다는 점이었다.“…그림자를 데리고 나가겠다.”르세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엘라엔의 곁을 지나 창가로 향하며 무심하게 금발을 쓸어넘겼다.“당신의 그 대단한 우정이 이 비릿한 장부 속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켜보도록 하죠.”***다음 날, 수도 카르네티아 외곽의 테이즈 강 하역장.화려한 황궁의 석조 건물 대신 썩은 목재 냄새와 거친 인부들의 고함이 가득한 이곳에 엘라엔과 카시안이 섰다.카시안은 수수한 차림이었음에도 그의 맑고 다정한 눈매는 이 지저분한 하역장에서도 이질적인 기품을 내보였다.비릿한 물 비린내와 거친 인부들의 고함, 그리고 썩어가는 목재의 악취가 진동했지만 엘라엔은 그 불쾌한 공기 속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곁에 선 카시안이 자신의 보폭에 맞춰 느릿하게 걸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엘라엔, 발밑을 조심해. 이쪽은 지반이 고르지
“영애, 너무 겁먹지 마세요. 형님의 방식이 거칠긴 하지만 이 장부는 당신에게 독이 아니라 칼이 될 거예요. 당신이 이 숫자들을 지배하는 순간, 제국의 그 어떤 귀족도 당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이안은 다시금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엘라엔은 이안 역시 르세인과 다른 의미로 자신을 도구로서 탐내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르세인은 자신을 완벽한 부품으로 쓰려 하고, 이안은 제 권력을 빛낼 화려한 트로피로 삼으려 했다.엘라엔은 두 남자 사이의 팽배한 긴장감 속에서 마침내 검은 장부를 집어 들었다.“……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제국의 정세를 꿰뚫는 눈이라면 기꺼이 보여드리지요. 다만, 제가 찾아낸 오차가 전하의 질서에 상처를 입히더라도 원망하지 마세요.”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대었다.“원망이라니. 나는 오차를 증오하지만 당신이 내 질서에 내는 상처라면 꽤 흥미로운 흔적이 될 것 같은데.”르세인은 펜을 쥐었다. 펜대를 만지작거리며 엘라엔의 돌아선 목덜미를 집요하게 눈으로 좇았다. 이안은 그런 엘라엔의 옆에 붙어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겨주며 은밀한 도움을 자처했다.화려한 황궁의 집무실 안에서 세 사람의 뒤틀린 공생이 시작되었다. 엘라엔은 차가운 종이 위에 적힌 비릿한 금전의 흐름을 보며 자신을 옭아매는 두 형제의 올가미를 어떻게 역이용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제국 남부 영지들의 수확량과 그에 따른 세금, 그리고 황실로 귀속되어야 할 비자금의 흐름이 고대 문자와 숫자로 촘촘히 얽힌 것을 보았다.“무엇을 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여기 적힌 수치들은 공정해 보이는걸요.”엘라엔은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엔의 등 뒤로 다가왔다.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이 엘라엔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르세인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엘라엔의 어깨너머로 장부의 한 지점을 지목했다. 그가 든 만년필의 매끄러운 펜촉은 종이 위를 느릿하게 미끄러지며 특정 숫자
엘라엔이 별궁의 문을 나설 때 카시안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카시안과의 재회가 남긴 따스한 향은 별궁의 문을 나서는 순간 가을바람에 흩어졌다.엘라엔은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온기를 애써 지우며 황궁의 질서 정연한 회랑을 걸었다.카시안은 여전히 나약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는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직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이것은 훗날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를, 치명적인 안식의 전조였다.“……!”그때, 그녀의 눈앞에 바델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숙인 뒤 엘라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영애.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아르젠트 궁의 부속 집무실이었다. 르세인의 주된 집무실이 제국의 국방과 행정을 다루는 곳이라면 이곳은 황실의 은밀한 자금과 귀족들의 약점을 보관하는 곳이었다.집무실의 문이 열고 들어서자 그곳엔 르세인뿐만 아니라 이황자 이안이 함께 서 있었다. 평소의 다정한 미소를 지우고 날선 표정으로 서 있는 이안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위압적이었다.“형님. 굳이 영애를 이런 지저분한 일에 끌어들여야겠습니까?”이안의 음성에는 르세인을 향한 노골적인 불만이 섞였다. 그는 엘라엔이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다가왔다.“영애. 별궁에서 돌아오는 길입니까? 형님이 당신을 너무 혹사시키는군요. 폐하의 총애를 받는 당신이 이런 어두운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있을 이유는 없어요.”이안은 엘라엔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르세인의 시선이 그의 손목에 내리꽂혔다.르세인은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리며 이안의 방해를 무심하게 관조했다.“이안, 네가 관리하던 제국 남부의 무역 관세에서 구멍이 발견되었다. 영애는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눈이지. 불만이 있다면 네 무능함을 먼저 탓해야 할 거다.”르세인이 엘라엔의 앞에 두꺼운 검은 장부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자재 수량이나 확인하던 요새에서의 업무는 잊으십시오. 이제부터 영애가 할 일은 제국 전역의 영지 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