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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식자

Author: 이클리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5 20:43:16

찰싹!

 

르세인이 떠나자마자 라안느 공작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엘라엔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엘라엔! 더는 황태자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거라!”

 

엘라엔은 고개가 돌아간 채 잔디 위로 엎어졌다.

 

공작 부인 이사벨라는 그 모습을 보며 속이 시원하다는 듯 야비한 웃음을 흘렸고, 어린 남동생 하르만과 루시안은 겁에 질린 채 엘라엔을 내려다보았다.

 

‘르세인….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바닥에 엎드린 엘라엔의 시야에 르세인이 짓밟고 간 장미의 잔해가 들어찼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장미를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정원의 흙이 함께 파고들었다.

 

엘라엔은 그 손을 들어 에드먼의 반지에 긁혀 입가에 흐르는 피를 훔쳤다.

 

그녀의 눈은 증오로 타올랐다.

곧 그 붉은 눈에 자각 없이 눈물이 흘렀다.

 

카시안을 지키기 위해 르세인이 설계한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잔인하고 가혹했다.

 

푸르른 하늘은 유리판처럼 깨끗했으나 정오의 장미 향은 이제 죽음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

 

 

에르디엔 황궁의 아르젠트 궁에는 오직 르세인이 서류를 넘기는 건조한 소리와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는 마찰음만이 존재했다.

 

이곳에는 장미의 붉음도, 여름의 녹음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채색의 완벽함만이 질서 아래에 놓였다.

 

르세인은 생명을 가진 것들의 무질서한 번식을 혐오했다.

 

그는 꽃 향이 섞인 미풍이 아닌 깎아지른 절벽에서 불어오는 듯한 건조한 내음을 맡으며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검토했다.

 

제국 남부의 관세 조정안과 북부 요새의 보급로 확충, 그리고 황실 직속 기사단의 재 편성안.

 

그의 손끝에서 제국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지만 르세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슥, 슥.

 

펜촉이 고급 양피지 위를 스치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르세인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바델.”

 

펜을 놓지 않은 채 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전실에서 대기하던 바델은 그의 부름에 소리 없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보고하라.”

“예, 전하. 라안느 영애께서 조금 전 마레즈나의 북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하녀의 옷차림으로 변복하셨다고 합니다.”

“…….”

“북문 근처의 하수도를 통해 탈출하셨으며 추적을 따돌리려 애쓰셨습니다.”

 

바델의 보고에도 르세인은 펜을 멈추지 않았다.

서류 위로 그의 외관을 닮은,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필체가 이어졌다.

 

“전하, 현재 흑색 기사단 소대가 테르시아 주변을 포위 중입니다.”

 

르세인은 그제야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질투가 아닌 섬뜩한 유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신이 설계한 미로 속에서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는 것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흥미였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그러나 결코 다정하지 않은 비릿한 호선이 그려졌다.

 

“내 비가 되기 위해 수업을 받을 때는 그토록 태만하더니. 죽은 나무 같은 놈을 만나러 갈 때는 제법 영리하게 구는군.”

“신병을 확보할까요?”

“아니, 내버려둬.”

“예…? 하지만 전하, 밀회는 황실의 명예에…….”

“명예?”

 

르세인이 눈을 치켜뜨며 바델을 보았다.

 

그 서늘한 안광에 바델은 숨을 들이켰다.

 

“명예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에게나 논하는 것이지. 지금 영애가 하는 짓은 반항이 아니라 마지막 발악이야.”

“…….”

“굶주린 쥐가 독이 든 치즈인 줄 알면서도 구멍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것과 다르지 않아.”

 

르세인은 책상 서랍에 넣어둔 은제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잘 연마된 날 위로 그의 냉혹한 얼굴이 비쳤다.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신기루인지, 카시안의 품이 얼마나 나약한 안식처인지….”

“…….”

“가장 달콤한 꿈을 꾸게 해. 깨어났을 때 마주할 현실이 더욱 지옥 같도록.”

 

그는 나이프 끝으로 한 종이 위에 적힌 카시안이라는 이름을 느릿하게 그어 내렸다.

과거 그녀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그와 처음 얽혔던 그해…

수도 카르네티아의 여름은 잔혹할 만큼 뜨거웠고, 에르디엔 황궁의 후원은 터질 듯 만개한 꽃들의 농익은 향기로 가득 찼다.

 

그 지독한 열기와 색채들 사이에서도 엘라엔 폰 라안느는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그녀의 와인빛 머리카락은 내리쬐는 정오의 햇살을 받아 더욱 짙은 붉음을 쏟아냈다.

생동감 넘치는 루비빛 동공은 호기심 어린 빛을 발산하며 반짝였다.

 

제국의 정점에 선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

 

“영애님, 오늘도 황후 폐하의 다과회가 길어질까요?”

 

하녀 마리의 물음에 엘라엔은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글쎄. 폐하께서는 내 자수 실력보다 내가 얼마나 전하의 취향에 근접한 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시니까 아마 한 시간은 족히 걸리겠지.”

 

엘라엔은 영민했다.

자신이 황궁에 불려오는 이유가 애정 때문이 아님을, 가문과 황실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맞물려 돌아가기 위한 기름칠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후 로잘린의 루미에라 궁 앞의 연못은 끓어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빛났다.

이러한 지독한 열기 속에서도 제국의 귀족가 영애들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테라스에 모였다.

 

화려한 레이스와 겹겹이 쌓인 실크 드레스.

 

그녀들에게 이곳은 가문의 저력을 증명하는 시험대였다.

 

“라안느 영애 입장입니다.”

 

시녀의 목소리가 테라스의 소란을 단숨에 잠재웠다.

 

십여 개의 부채질이 일시에 멈췄고 영애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구로 쏠렸다.

 

엘라엔은 그 모든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오늘 그녀는 유독 얇고 투명한 크림색의 여름 드레스를 선택했다.

소매 끝에 달린 섬세한 레이스는 걸음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흔들렸고 허리에 묶인 붉은 비단 리본은 그녀의 와인빛 머리카락과 어우러졌다.

 

“이 더위에 마레즈나에서 오느라 고생했군요, 라안느 양.”

 

상석에 앉은 황후 로잘린이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엘라엔은 완벽한 각도로 무릎을 굽히며 황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황후 폐하의 부르심인데 어찌 더위를 핑계로 대겠습니까. 궁 안의 시원한 분수 소리가 마레즈나의 매미 소리보다 훨씬 달콤한걸요.”

 

황후는 엘라엔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곁자리를 내어주었다.

 

황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엘라엔을 보며 주변 영애들의 눈빛에는 시기가 가득했다.

 

제국 제일 가문의 영애이며 차기 황태자비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소녀.

 

그녀는 존재 자체로 다른 영애들에게는 거대한 벽이자 치워버리고 싶은 장애물이었다.

 

“라안느 영애는 오늘도 눈이 부시군요. 루비빛 눈동자가 황후 폐하의 궁 이름과 어찌 이리 잘 어울리는지요.”

 

백작가의 한 영애가 칭찬을 건넸지만 그 끝에는 미묘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 소녀는 엘라엔의 눈동자가 지닌 붉은 기운이 불길한 징조라도 되는 양 소문을 퍼뜨리던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제 눈이 폐하의 고귀한 궁의 이름과 잘 어울린다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요?”

 

그럼에도 엘라엔은 상대를 향해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얼음을 띄운 차가운 차와 설탕을 입힌 레몬 슬라이스, 그리고 작은 타르트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엘라엔은 조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 우아한 다과회는 먹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사냥하는 전장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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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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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펜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서 1,2화랑 만나는지 궁금하네요 ㅋㅋㅋㅋ 재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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