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성동민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역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도 소꿉친구를 못 이기네. 선택 존중하지.”온기찬과의 결혼 이야기는 사실 성동민이 한발 물러서는 척하며 던진 수였다.그가 진짜로 원하는 건 성하린이 문강찬을 떠나는 것이었다.문강찬도 그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는 진세린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았다.이번 정략결혼을 통해 그 빚을 갚고 싶었다.단번에, 완전히 갚고 싶었다.성하린은 온건우에게 동화를 읽어 준 뒤에야 성동민에게서 받은 녹음을 들었다.“성하린은 놓아줄 수 있어. 하지만 온기찬이랑 결혼은 안 돼.”그 한 문장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자신과 진세린 사이에서 문강찬은 언제나 조건 없이 진세린을 택했다.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지금은 그저 무뎌진 통증만 느껴졌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체념이자 해방이었다.성동민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을 진창에서 끌어내 준 건 사실이었다.이제 자유였다.그녀는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절반쯤 싸고 나서 온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침 그도 짐을 정리하고 출발하려던 참이었다.성하린은 문강찬이 자신을 놓아주기로 했다고 말하며, 온건우의 짐을 조금 챙겨서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했다.온기찬은 알겠다고 했다.성하린은 손놀림을 더 재촉했다.떠날 수 있다는 기쁨이 쓰디쓴 아픔을 덮어 버렸고,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짐을 다 싸고 난 그녀는 온건우를 깨웠다.“아빠랑 같이 팔리읍 가자.”온건우는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였다.“진짜요?”“응.”성하린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그럼 강찬 아저씨는요? 같이 가요?”“안 가.”“아...”조금 아쉬웠지만 곧 아빠,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는 생각에 다시 기뻐졌다.성하린은 가정부들이 문강찬에게 알릴 걸 알고 있었다.집 안엔 CCTV도 있었다.그래서 온기찬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날 저녁, 문강찬은 성동민과 식사를 했다.성동민은 술을 따라 건네며 느긋하게 웃었다.“그 결혼 때문에 진짜 애쓰네.”그는 자신의 결혼 여부에는 무심한 태도였다.문강찬은 그를 흘끗 볼 뿐 술잔을 들지 않았다.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절친이었다.하지만 성동민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진세린이 도망 결혼을 하며 해외로 떠난 뒤 관계는 멀어졌다.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했지만 문강찬은 그 안에 숨은 날 선 면을 알고 있었다.“세린이랑 결혼해. 그러면 네가 잃은 것을 내가 되찾아 주지.”직설적인 조건 제시에도 성동민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진세린이 설마 문 회장님의 사생아야? 아니지. 그랬으면 벌써 내쫓았겠지.”문강찬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도망 결혼까지 했던 여자인데 아직도 이렇게 챙겨? 나이만 비슷하지, 거의 딸 키우는 수준이네.”농담 같았지만 진심이 섞여 있는 비아냥이었다.문강찬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난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결국 핵심은 성동민의 의지였다.성동민이 원하면 성문수가 반대해도 결혼은 가능했다.하지만 그는 내키지 않아 보였다.“그때 너 때문에 도망까지 쳤잖아. 사랑 없었으면 왜 그랬어?”모두가 진짜 사랑이라 믿었지만 3년 만에 성동민은 이미 그 감정에서 벗어나 있었다.성동민은 눈빛이 흐려진 채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결혼은 할 수 있어. 대신 조건 하나 더 들어줘야겠어.”문강찬은 차갑게 그를 보며 조건이 성하린과 관련 있을 거라 짐작했다.“성하린을 놔줘. 그리고 온기찬이랑 결혼하게 해. 그러면 내가 진세린이랑 결혼하지.”그게 조건이라는 말에 문강찬의 목소리가 얼어붙었다.“성동민.”성하린과 관련 있을 줄은 알았지만 놓아 주라는 조건일 줄은 몰랐다.“내 일에 끼어들지 마.”경고가 실린 문강찬의 말에 성동민도 진지해졌다.몇 초 뒤, 그는 술을 단숨에 비우며 다시 웃었다.“성하린이야, 진세린이야? 하나 골라.”전처냐, 소꿉친구냐는 말이었다.문강찬은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담
겨우 회복되던 손목은 다시 피로 얼룩져 있었고 바닥에도 핏자국이 흩어져 있었다.문강찬을 보자 주아란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매달렸다.“강찬아, 세린이 좀 설득해 줘. 난 얘 없으면 못 살아.”문강찬이 몇 걸음 다가섰다.얼굴이 창백한 진세린은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오빠, 미안해. 나 때문에 체면 다 구겼지?”빛을 다 잃은 사람처럼 초라했다.“기회를 줬는데도 난 번번이 실망만 시켰어. 정략결혼 하나도 제대로 못 해냈어. 오빠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해.”그녀는 손에 쥔 바늘을 손목동맥 쪽으로 세게 찔렀다.주삿바늘은 피부를 겨우 뚫고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문강찬이 손목을 붙잡았다.목소리는 유난히 엄했다.“그만 좀 해.”몇 초간 팽팽한 긴장이 흐르다가 진세린이 힘을 풀었다.작게 흐느끼는 소리는 무척이나 애처로웠다.주아란이 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세린아, 됐어. 그만해.”“엄마, 저 진짜 쓸모없어요.”주아란은 눈물을 닦으며 문강찬을 바라봤다.“예전 그 일 생각해서라도, 세린 한 번만 더 도와줘. 성동민이랑 이어지게 해 줘.”결국 또 정략결혼 문제였다.이번에는 성문수가 방환기 어르신의 제자 사건과 옷이 벗겨졌던 일까지 빌미로 파혼할 충분한 명분을 얻었다.게다가 파혼 조건으로 이익을 1% 더 양보하겠다고까지 했다.진세린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컸다.진세린이 성동민과 무사히 결혼하려면 결국 문강찬이 나서야 했다.문강찬은 눈살을 찌푸렸다.연민도 있었지만 실망도 있었다.“정말 성동민 아니면 안 돼?”누가 봐도 성동민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억지로 이어진 결혼은 결국 고통뿐일 것이다.진세린의 울음이 잦아들었다.문강찬이 말했다.“다람시에 결혼 상대로 적합한 사람은 많아. 네가 원하면 내가 다 알아볼 수 있어. 내가 뒤에 있으면 아무도 널 함부로 못 해.”하지만 성씨 가문은 문씨 가문과 거의 대등했다.진세린이 상처받아도, 그가 반드시 막아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불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바깥 빛만 희미하게 스며들었다.성하린은 몸을 움직였지만 그의 힘을 벗어날 수 없었다.“뭐 하는 거야?”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입술 위에 닿았다.어둠 속 그의 눈동자에는 불꽃 같은 것이 일렁였다.“키스했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속엔 불안과 고통이 숨어 있었다.놀이공원에서 보였던 각도는 분명 키스처럼 보였다.그래서 확인해야 했다.성하린은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비웃듯 말했다.“그게 강찬 씨랑 무슨 상관이야?”이미 이혼한 사이였다.지금은 뱃속 아이 때문에 억지로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그런데 질투하는 척은 누구 보여주려는 건가 말이다.문강찬의 손목을 잡은 힘이 더 세졌다.그녀의 냉담한 태도가 그의 속을 긁었다.“먼저 숨긴 건 강찬 씨야.”성하린은 인내심이 바닥이 나 그를 밀어냈다.“강찬 씨, 강찬 씨는 날 간섭할 자격이 없어.”그녀의 다급한 어조는 그가 위험한 존재라도 되는 듯했다.문강찬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분노가 실린 거친 입맞춤이었다.거의 물어뜯듯 해, 곧 그녀는 입술이 얼얼해졌다.몸부림쳤지만 그는 그녀를 침대 위로 밀어 눕혔다.넥타이를 풀어 그녀의 두 손을 묶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성하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수치스러웠다.“강찬 씨, 이 아이 포기할 생각이야?”그는 이성을 조금 되찾고 침대에서 물러나더니 이불을 끌어 올려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성하린, 정말 그렇게까지 온기찬을 좋아해?”성하린은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문강찬은 병들었다.“놔줘.”그의 뒷모습이 쓸쓸했다.담배가 있었다면 또 한 개비 피웠을 것이다.“성하린, 온씨 가문에서 온기찬의 맞선을 알아보고 있어. 앞으로 온기찬은 온씨 가문이 정해 준 길을 가게 될 거야.”그는 돌아서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온씨 가문은 진윤슬도 받아들이지 않았어. 너는 더더욱 아니야.”성하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분노가 한계에
문강찬은 차 안에 앉은 채 무표정했다.30분 전 이곳에서 극도의 고통에 휩싸였던 사람이라고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다.두 어른과 아이 하나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온건우는 한 손으로 성하린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 온기찬의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며 무척이나 즐거워했다.앞서 걷던 두 여학생이 몰래 휴대폰으로 그들을 찍으며 속삭였다.“저 가족, 비주얼 대박이다.”“완전 행복해 보여.”문강찬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겼다.그들이 가까이 오자 그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곧게 선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데리러 왔어.”그의 시선은 성하린을 향해 있었다.성하린은 그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거짓말을 들킨 당황함 따위는 없었다.문강찬의 미소가 굳었다.온건우가 부모의 손을 놓고 달려왔다.“강찬 아저씨! 저 아빠랑 엄마랑 관람차 탔어요!”아이는 해맑게 자랑했다.문강찬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건우가 천진하게 물었다.“강찬 아저씨, 아빠 우리 집 와서 엄마랑 같이 살면 안 돼요?”아이는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엄마가 강찬 아저씨 집에 살고 있으니, 아빠가 오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두 눈에는 기대가 가득했다.문강찬의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듯 아파 말을 할 수 없었다.온기찬이 다가와 온건우를 안아 들고 차분히 설명했다.자신이 잠시 멀리 떠난다는 이야기였다.“강찬 아저씨 말 잘 듣고, 엄마 잘 돌볼 수 있지?”온건우는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강찬 아저씨 말 잘 들을게요. 엄마랑 여동생도 지킬게요.”그리고 문강찬에게 팔을 뻗었다.“강찬 아저씨, 안아 주세요.”문강찬은 잠시 침묵하다가 아이를 안았다.온기찬은 손을 흔들고 떠났다.문강찬은 온건우를 차에 태우고 문을 닫은 뒤 성하린을 바라봤다.“밥 먹는다더니?”그녀가 설명하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성하린은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그녀에게도 자유가 있었다.다른 쪽으로 돌아 차에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온기찬이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성하린 씨나 저나 마음은 같아요. 그러니까 절 설득할 필요 없어요.”기억은 잃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다른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성하린 역시 그 은혜 때문에 온건우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성하린은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온기찬 씨도 못 놓고, 저도 못 놔요.”온기찬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신호등 앞에 차가 멈춰 섰을 때야 입을 열었다.“팔리읍에 가서 한동안 지내려고 해요.”어쩌면 뭔가 떠오를지도 모른다.원지수의 말에서 미묘한 단서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성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건우는 제가 잘 돌볼게요.”온기찬은 떠나기 전,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놀이공원으로 갔다.팔리읍에 얼마나 머물지 알 수 없었다.보름일 수도 있고,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온건우는 이제야 조금 나아져 간단한 놀이기구를 탈 수 있었다.잠에서 깬 온건우는 놀이공원을 보고 신이 나 거의 뛰어오를 듯했다.성하린은 몸이 불편해 계속 기다리기만 했다.마지막으로 남은 건 관람차, 온건우는 아빠, 엄마가 함께 타길 바랐다.성하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관람차가 가장 높은 곳에 멈춰서자 화려한 노을이 하늘 끝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따뜻하고 아름다운 빛이었다.아빠와 엄마 사이에 앉아 있는 온건우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라고 느꼈다.성하린이 다정하게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여 머리 정수리에 입을 맞추려 했다.온기찬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의 이마가 순간 부딪쳤고,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문강찬은 차 안에 앉아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그저 눈이 시릴 만큼 거슬렸다.어둑한 빛이 그의 눈 속에 번지는 고통을 가려 주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담배 있어?”운전기사가 얼른 자신의 담배를 꺼내 건넸다.“좀 싼 건데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강찬은 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