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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꼬마 구름
이리될 줄 알고 있었기에 심안영은 더는 몸부림치지 않고 그저 금군이 자신을 어서재로 데려가게 두었다.

길은 멀지 않았지만 몸에 상처가 있는 탓에 몇 걸음 걷는 것만으로도 심안영의 기력을 적지 않게 소모했다.

그녀는 어젯밤처럼 기절할 만큼 허약하진 않았지만 편전에 있을 때보다 얼굴색이 훨씬 나빠져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덕분에 그녀의 몸에는 더욱 연약한 느낌이 더해졌다.

어서방 안.

황제는 용상에 앉아 심안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안영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리고 문안을 드렸다.

"소녀 진국장군부 심안영, 폐하를 뵙습니다."

서경연의 말을 떠올리며 심안영의 목소리에는 더욱더 억울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황제는 눈썹을 치켜떴고 분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느껴졌다.

"너의 죄를 알겠느냐?"

"소녀는 모르옵니다."

"모른다고?"

황제의 안색이 살짝 굳어지더니 목소리 톤이 몇 단 높아졌다.

"너는 사황자를 중상에 입혀 하마터면 목숨을 잃게 할 뻔했다. 황자를 해하려 한 것은 사죄인데, 이를 모른단 말이냐?"

"황자라니요? 소녀가 언제 황자를 중상에 입혔단 말입니까?"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마주한 심안영의 눈빛은 억울함과 함께 망연함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소녀는 변방에서 경성으로 돌아오던 중 북요산 근처에서 산적의 습격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해 소녀의 부하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나이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준 덕분에 소녀는 겨우 도망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지요.”

“그러다 소녀는 북요산 아래의 낡은 사당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상처를 치료하려 했으나, 또다시 산적들이 침입했고 그들은 소녀를 붙잡아 자신들의 두목을 섬기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소녀는 장군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가르침을 받아 그들과 함께 전쟁터에 나섰습니다. 감히 뼈대 있는 가문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결코 모욕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 소녀는 그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사당밖에는 그들을 돕는 자들이 또 있었고 소녀는 도무지 혼자 감당할 수 없겠다 판단하여 산적 두목을 붙잡아 중상을 입힌 후 그의 말을 빼앗아 쉬지 않고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소녀는 사황자를 알지도 못하고 뵌 적도 없는데 소녀가 어찌..."

그녀는 서경연은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중요한 대목에 이르자 잠시 멈칫하더니 무언가를 짐작한 듯이 경악과 함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설마, 소녀가 붙잡은 자가 산적 두목이 아니라 사황자였다는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깊은 밤에 눈발이 흩날리는데 사황자께서 어찌 북요산에 나타나셨으며, 또 어찌 산적들과 어울려 있단 말입니까? 소녀... 소녀... 소녀가 눈을 뜨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경솔하게 행동하여 황자께 폐를 끼쳤으니 소녀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폐하께 용서를 구합니다."

변명하지도 발뺌하지 않은 채 심안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른다'는 세 글자를 극도로 잘 표현했다.

그 모습은 오히려 너무나도 당당해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심안영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서경연의 신호를 받고 그가 우성에서 경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추격을 당했음을 알게 된 황제는 금군을 보내 맞이하게 했다.

그런데 황제의 사람들은 서경연을 만나지 못했고 오히려 말 위에서 중상을 입고 기절해 있는 심안영과 온몸에 상처를 입고 거의 죽어가는 서경율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궁으로 끌려왔고, 금군은 북요산 아래에서 벌어진 일을 대략 조사했다.

심안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심안영은 줄곧 변방에서 살다 보니 그녀가 마지막으로 경성에 돌아온 것은 6년 전이었다.

그때 그녀는 겨우 아홉 살의 어린 나이라 서경율과는 정말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

그녀는 아마도 서경율을 정말 산적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오히려 서경율이...

금군의 보고에 따르면 북요산 아래의 산적들은 모두 사황자부의 호위병들이었기에 심안영이 산적들에게 습격당한 것의 배후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경율이 또다시 북요산으로 서둘러 간 목적이 무엇인지도 황제는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은 사람을 유혹하고 그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너무 성급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짐은 사황자에게 물었다. 사황자의 말로는 일찍이 너에게 마음을 두어 이틀 내로 네가 경성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사람들을 이끌고 맞이하러 갔다고 하더군. 그러다 뜻밖에도 네가 산적들과 충돌하는 것을 발견하고 돕고자 했으나 너에게 산적으로 오해받아 중상을 입었다고 하더구나. 그러나 사황자는 너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너를 오랫동안 연모했다며 너만 무사할 수 있다면 자기는 좀 다쳐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하였다. 사황자는 짐에게 너를 사황자비로 맞이하고자 청하던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심안영의 모습은 황공하고 겸손해 보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녀는 속으로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서경율은 크게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서경율은 손의 힘줄을 다쳐 오른손이 불구가 되었으니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녀를 죽이고 싶을 것이다.

이때의 서경율은 설령 이익을 위해서라도 혼담을 입 밖에 낼 수 없을 것이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황제의 시험이었다.

그녀에게!

그리고 그들의 심씨 가문에게 말이다.

심안영은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녀는 원치 않습니다."

"뭐라? 원치 않는다고?"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심안영에게 다가가 심안영을 내려다보며 목소리에 더욱 차가운 기운을 더했다.

"설마 짐의 황자가 너에게 가당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심안영이 고개를 들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소녀는 어려서부터 변방에서 자라 경성으로 돌아온 일이 적습니다. 소녀는 황자들을 알지 못하오나, 예전에 아버님께서는 황자들은 하나같이 문무를 겸비하여 희대의 영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녀는 비록 사황자를 뵌 적은 없지만 폐하처럼 영명하신 아버님의 가르침 아래, 사황자 또한 풍모와 재덕을 겸비하신 분이실 테니 당연히 누구에게든 과분한 분일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혼인을 원치 않는 것이냐?"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녀의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희 심씨 가문은 장군의 가문으로 병권을 쥐고 있어 황제 폐하의 날카로운 검이라 하셨습니다. 저희는 북쪽 국경을 지키고 나라의 문을 수호하며 백성을 보호하고 천하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본분입니다.”

“폐하께서 명하시면, 심씨 가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목숨을 바쳐 따를 것이며 감히 거역하지 않을 테지만 심씨 가문의 사람들은 오직 폐하의 심복이자 지극한 순수함만을 지닌 신하가 되고자 할 뿐입니다.”

“불경한 말씀이오나 소녀가 생각하건대 사람은 다소간 사심을 지니기 마련입니다. 일단 황자와 혼인하게 되면 이른바 순수함이라는 것도 사심에 물들어 흠이 생길 것이며, 그것은 소녀가 원치 않는 바입니다. 그러니 소녀는 사황자와의 혼인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허나 만약 폐하께서 성지를 내리시어 배필을 정해주신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소녀와 심씨 가문은 마땅히 따를 것입니다. 소녀는 사황자를 불경히 여기는 마음이 없사오며 더욱이 황실을 경시하는 뜻은 없습니다. 폐하께옵서 명찰하여 주시옵소서."

순수한 신하라...

신하들은 모두 충성을 맹세하며 하나같이 청산유수처럼 말해왔기에 황제는 비슷한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말이 막 성년이 된 심안영이라는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오니 조정의 중신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맑고 순수하게 느껴져 그의 마음을 울렸다.

황제의 눈빛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많이 다친 것이냐?"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녀는 일찍이 아버님을 따라 출정하여 전장에 나선 적도 있었고, 중상을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 오늘 입은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니 중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심씨 가문의 여식답구나. 훌륭하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일어나거라. 짐이 사람을 시켜 너를 진국장군부로 보내겠다. 기억해라. 북요산 아래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고, 너는 사황자를 만난 적도 없었다. 알겠느냐?"

황제는 심안영을 벌하지 않았지만 결국 서경율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심안영은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경율을 다치게 하고도 황제를 진정시키고 사황자비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해 서경율의 마음을 끊어냈으니 그녀는 손해 보는 것이 없었다.

남은 일은 이제 천천히 진행하면 될 것이다.

"소녀, 성지를 받들겠습니다."

곧 심안영은 소공공의 안내를 받아 빠르게 어서방을 나섰다.

소공공이 기다리고 있던 사조에게 몇 마디 당부하자 사조는 심안영을 데리고 궁을 나가게 되었다.

아마도 심안영의 몸에 상처가 있는 것을 염려해서였는지 사조는 내내 천천히 걸었고 심안영은 그의 무언의 배려를 받은 덕분에 가는 길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금수교를 막 돌아섰을 때, 심안영은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들었다.

"심안영 이 망할 년! 당장 멈추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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