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유혹 속에 피는 독: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율화 원년, 섣달 초아흐레.찬바람이 폐허가 된 냉궁의 창문을 삐걱거리게 흔들며 거위털만큼 굵은 눈송이들이 방 안으로 몰아쳤다.심안영은 몸에 독이 퍼진 탓에 온몸의 힘이 빠진 채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흐릿한 시야 속, 손목과 발목에 감긴 차디찬 쇠사슬이 무겁게 감겨들었고 덕미의 발길질이 닿았던 아랫배는 도려낸 듯한 고통을 토해냈다.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이물감, 선명한 피의 감촉이었다.따뜻해야 할 생명이 서서히 그녀의 몸을 떠나고 있었다.심안영은 떨리는 손으로 배를 감싼 채 몸을 웅크렸고 이마에 맺힌 피는 서서히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바닥 위에 널브러진 마른 짚과 쏟아진 쉰 밥에 핏방울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흥.” 덕미가 코웃음을 쳤다. “황후마마, 저희 마마께서 마지막 참을 보내신 건 저승길에 굶주리지 말란 뜻이지요. 고맙게 받아먹진 못할망정 죄다 엎다니요? 참 눈치도 없으셔라.” “무례하다!”심안영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낙엽처럼 가볍고 힘이 없었다. 오랜 감금과 약물, 그리고 피로는 그녀의 기력을 바닥까지 갉아 먹어버렸다. 덕미는 콧방귀를 뀌며 그녀를 비웃었다.“무례? 황후라고 불러드리니 진정 황후인 줄 아시나 봅니다? 폐하께서 냉궁에 처박아버리신 순간부터 마마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가축보다도 못한 존재지요. 그러니 이년이 무례하게 군다 한들 할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울리더니 금군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섰다. “덕미야, 밥은 먹인 거냐?”“먹질 않습니다.” “됐다. 폐하께서 기다리시니 시간 끌지 말거라.” 선두에 선 금군이 손짓하자 병사는 순식간에 심안영에게 달려들어 마치 죽은 개를 끌어가듯 그녀를 질질 끌고 나갔다.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고 차가운 눈송이들은 얼굴을 후려치듯 내리꽂혀 그녀는 뼛속까지 시렸다. 황궁 서화문, 성루 위.서경율은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고 손을 등진 채 서 있었고 그 곁에는 귀비 사초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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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북요산 아래, 낡은 사당.밤바람에 눈보라가 깨진 창문을 뚫고 들어와 사당 안에는 찬기운이 가득했다. 몸을 웅크린 채 마른 풀 위에 누워 있는 심안영의 배와 다리에는 피가 흥건한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이따금 전해지는 통증은 그녀의 의식을 점차 삼켜가고 있었다. 눈을 깜빡했을 뿐인데 잠시 지금이 언제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머릿속에는 서경율의 포효와 사초령의 웃음소리, 금군의 사나움과 시녀의 모욕이 한 장면씩 선명히 떠올랐다. 심안영은 확신했다.그녀는 돌아왔다. 바로 열다섯 살인 그 해로 말이다. 북요산 아래, 서경율과 만났던 그 낡은 사당으로 돌아왔다. 지금 몸의 상처들은 변방에서 수도로 돌아오던 중 강도와 맞서 싸우다 남긴 것이었다. 죽기 직전, 서경율은 이 모든 것이 자기가 꾸민 일이라며, 그녀는 이미 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생각하니 심안영의 창백한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졌다고?심씨 가문 수백 명의 목숨과 그녀가 임종 직전에 겪었던 모든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까지...이 많은 빚을 어찌 ‘졌다’라는 두 글자로 덮을 수 있겠는가?심안영은 단도를 꽉 쥐었다. 서경율은 이기적이고 위선적이었다. 그는 진국장군부의 권력과 인맥을 빌려 황자들의 권력 쟁탈에서 혈전을 벌이며 고위에 올랐으면서도 마치 진국장군부에 기대는 게 아닌 것처럼 행동했고 그녀가 군대를 이끌고 난세를 평정하며 공을 세웠는데도 백성들이 그녀를 칭송하는 것을 꺼려했다. 안타깝게도 총명하고 계책에 밝다고 자부했던 그녀는 평생 서경율에게 속아 거짓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늘이 그녀를 안타깝게 여겨 다시 기회를 줬으니 더는 바보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강도들이 서경율이 꾸민 일이라면 곧 그도 도착할 것이다. 북요산 아래, 지난 생에 그녀와 서경율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 밤 서경율이 온다면 죽어도 그를 북요산에 묻어버릴 것이다. 쏟아지는 눈보라와 죽음을 맞이했던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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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전에 심안영이 대충 감아두었던 붕대는 이미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서경연이 조심스럽게 그 붕대를 풀어내니 허리 옆에 손바닥 반 정도 되는 상처가 드러났다. 급소는 피했기에 단시간 내에 생명을 잃을 상처는 아니었지만 깊고 출혈이 심했다. 게다가 다친 직후에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방치되다 보니 피부와 흐트러진 살점이 한데 뒤엉켜 보기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했다. 서경연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눈빛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사당 안의 이 냉혹한 추위 속에서, 피부가 훤히 드러난 심안영은 저도 몰래 몸을 떨었다. 서경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상처 소독 좀 할 테니 조금만 참거라.” 그는 두루마기를 다시 심안영의 몸에 꼭 감싸주더니 손수건으로 피 묻은 상처 주변을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이때 명진이 들어왔고 그의 코끝에 짙은 피 냄새가 스쳤다. 그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서경연이 호통을 쳤다. “뒤돌아서거라! 근처에 불 두 군데 피우고 물부터 끓여. 그리고 당분간 바깥 상황 경계하거라.” “예!” 서경연의 날카로운 말투에 명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움직였다. 그들은 우성에서부터 경성까지 쉬지 않고 말을 타고 왔기에 웬만한 건 다 가지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피워지고 물이 끓여지기 시작하니 사당 안에도 온기가 스며들어 심안영의 안색도 한결 좋아졌다. 이때 서경연이 작은 도자기 병 하나를 심안영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이걸 먹거라. 난 손수건 좀 씻고 올 테다.” 병뚜껑을 열어보니 약 냄새가 확 풍겨 왔다.회춘단...심안영은 원래 의술에 능했기에 의선곡에서 나온 회춘단이 얼마나 귀한 약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다는 그 귀한 약을 서경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주었다. “이거...” “잔말 말고 먹거라.” 심안영이 입을 열려는데 서경연이 먼저 말을 이었다. “이름이 회춘단이라 귀하긴 해도 결국엔 산 사람을 살리는 약이지, 죽은 이에겐 무용지물이야. 그러니 아까워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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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낡은 사당 밖.서경율이 말에서 내리자 미리 도착했던 부하가 급히 달려왔다. “전하, 사당 안에 불빛이 있습니다. 심안영 아씨는 다친 몸으로 안에 숨어든 후 한 번도 나오지 않으셨고 저희 사람들은 이미 준비되었으니 언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만...” 부하가 머뭇거리자 서경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다만?” “전하, 방금 전 이곳을 지나치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저희가 숨어서 지켜보는 위치가 너무 멀다 보니 미처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들이 심안영 아씨를 돕기라도 하면...” “쓸모없는 것!” 서경율이 욕설을 내뱉었다. 기분 좋게 여기까지 달려왔거늘 부하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기분이 반쯤 가라앉았다. 그는 짙은 살기를 내뿜으며 낡은 사당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명령을 내렸다. “산적으로 분장한 자들에게 당장 사당에 들이닥쳐 험악하게 굴라고 하라. 네가 말한 두 놈은 즉시 죽이고 심안영은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롭히다 끌고 나와. 그때 내가 달려들어 심안영을 구할 것이다.” 이미 누군가 사당에 들어갔으니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나 어떻게 보면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그 둘은 기껏해야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줬겠지만 그는 그녀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주기 때문에 앞으로 그는 그녀의 빛이 될 것이다. 누가 진짜 영웅인지, 누가 진심인지, 누가 더 강한지 그녀는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부하가 즉시 움직였다. 낡은 사당 안. 무거운 발소리가 들릴 때쯤, 서경연은 막 심안영의 상처를 다 치료하고 붕대까지 감아주었다. 그는 두루마기로 심안영을 단단히 감싸고 그녀를 부축해 몸을 일으킨 후, 재빨리 명진까지 불러들여 사당 문 뒤에 몸을 숨겼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산적 행세를 한 자들이 열 명 남짓 들어왔는데 그들은 산적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들어가서 뒤져라!” “그 계집년은 다쳤으니 조심히 다뤄라. 죽이면 안 된다.” “압니다요. 부두목이 여인을 가장 아끼시는데 저희가 어찌 감히 다치게 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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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땅 위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 있어 서경율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이 상황은 그의 예상 밖이었다. 그의 사람들은 다 죽었고 심지어 심안영은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는데 이건 그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다. “너... 윽...” 서경율이 입을 열려는데 심안영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녀는 이 기세를 타고 서경율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몸을 낮추어 그의 금비녀를 뽑아 손목을 살짝 틀어 그의 몸에 꽂아 넣었다. 순식간에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서경율은 고통에 찬 얼굴로 심안영을 붙잡으라고 외치려 했지만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서경율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바라보며 심안영의 창백한 얼굴엔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전생에 그녀는 이 남자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적대했다. 그녀는 손에 수없이 피를 묻혔지만 이렇게 통쾌했던 적은 처음이었다.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이리도 즐겁다니. 분노와 충격, 억울함과 무기력함으로 뒤섞인 서경율의 표정을 보자 그녀는 속이 다 시원했다. 그녀가 겪었던 전생의 고통을, 그도 똑같이 겪어야 한다.이 비녀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서경율에게 심안영만의 영웅이 될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던 부하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히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를 본 심안영은 비녀를 뽑아 더 많은 피를 터뜨린 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대로 비녀를 서경율의 어깨뼈 아래로 연속 두 번을 깊이 찔렀다. 이것은 모두 전생에 서경율이 그녀에게 진 빚이다. 심안영의 손은 냉혹했고 서경율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경율의 부하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경율을 바로 죽여버린다면 서경율의 부하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반드시 죽여 황제에게 명분을 주려고 할 것이다. 얻을 것이 없는데 굳이 나서지 말라고 했던 서경연의 말이 옳았다. 이번 싸움에서 그녀는 반드시 얻는 것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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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리될 줄 알고 있었기에 심안영은 더는 몸부림치지 않고 그저 금군이 자신을 어서재로 데려가게 두었다.길은 멀지 않았지만 몸에 상처가 있는 탓에 몇 걸음 걷는 것만으로도 심안영의 기력을 적지 않게 소모했다. 그녀는 어젯밤처럼 기절할 만큼 허약하진 않았지만 편전에 있을 때보다 얼굴색이 훨씬 나빠져 있었다.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덕분에 그녀의 몸에는 더욱 연약한 느낌이 더해졌다.어서방 안.황제는 용상에 앉아 심안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심안영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리고 문안을 드렸다. "소녀 진국장군부 심안영, 폐하를 뵙습니다."서경연의 말을 떠올리며 심안영의 목소리에는 더욱더 억울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황제는 눈썹을 치켜떴고 분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느껴졌다. "너의 죄를 알겠느냐?""소녀는 모르옵니다.""모른다고?" 황제의 안색이 살짝 굳어지더니 목소리 톤이 몇 단 높아졌다. "너는 사황자를 중상에 입혀 하마터면 목숨을 잃게 할 뻔했다. 황자를 해하려 한 것은 사죄인데, 이를 모른단 말이냐?""황자라니요? 소녀가 언제 황자를 중상에 입혔단 말입니까?"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마주한 심안영의 눈빛은 억울함과 함께 망연함으로 가득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소녀는 변방에서 경성으로 돌아오던 중 북요산 근처에서 산적의 습격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해 소녀의 부하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나이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준 덕분에 소녀는 겨우 도망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지요.”“그러다 소녀는 북요산 아래의 낡은 사당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상처를 치료하려 했으나, 또다시 산적들이 침입했고 그들은 소녀를 붙잡아 자신들의 두목을 섬기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소녀는 장군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가르침을 받아 그들과 함께 전쟁터에 나섰습니다. 감히 뼈대 있는 가문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결코 모욕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 소녀는 그들과 맞서 싸웠습니다.”“하지만 사당밖에는 그들을 돕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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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소리가 들려오자 심안영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서경율이 있었는데 그는 아직 의식을 못 찾은 상태로 가마에 실려 있었다. 옷은 이미 갈아입혀져 그녀가 찔렀을 때의 피범벅이었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몸에 감도는 짙은 피 냄새와 창백한 안색은 그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서경율 옆에는 사황자의 어머니인 숙비마마의 심복, 유 상궁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사초령이 있었는데 방금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은 사람이 바로 사초령이었다. 사초령의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이 아마 한바탕 울고 난 후인 듯했다. 심안영이 발걸음을 멈추자 사초령은 미친 듯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 악독한 년! 어찌 오라버니를 해쳐? 죽고 싶어 환장한 게냐?” 사초령은 손을 번쩍 들어 심안영의 뺨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 손은 빠르고도 거칠었다. 전생에 심안영이 냉궁에 갇혀 손발이 묶였을 때, 이 손맛을 그녀는 수없이 느껴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기에 심안영은 더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줄 약자가 아니었다. 사초령의 손이 심안영 얼굴 가까이에 다가온 찰나, 심안영은 손을 들어 사초령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물론 그 충격에 그녀의 상처도 당겨져 고통이 밀려왔지만 전생의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안영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없었고 오히려 손에 힘을 주어 사초령의 손목을 더욱 세게 조이며 말했다.“네 이년, 어느 안전이라고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빌어먹을 년.” 사초령은 노기등등해서 이를 악물고 심안영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율 오라버니를 다치게 했으니 이 정도는 약과야! 너 같은 년은 살가죽을 벗기고 능지처참하여 지옥에 보내도 시원치 않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난 사씨 가문의 적녀다. 난...” “하...”사초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안영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사조를 바라보았다. “사 대장님, 궁에서 누군가 행패를 부리고 궁중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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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서경연이 위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이를 악물고 말하자 명진은 연달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죽기 싫으면 입조심하거라. 또 본왕을 놀린다면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허나 왕야님...” 명진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사람은 워낙 정곡을 찔리면 화를 낸다고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헤헤헤...” 명진은 말을 계속하지 않았지만 그 음흉한 웃음은 그의 속내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서경연은 발을 들어 명진에게 헛발질하며 호통을 쳤다. “저리 꺼져라!” 그러자 명진은 연기처럼 잽싸게 도망쳤다. 서경연은 고개를 돌려 심안영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은 부드럽고도 복잡했다. ...궁문 앞.심안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햇살이 눈 위를 비춰 눈이 부셨다. 붉은 담장과 푸른 기와 너머로 펼쳐진 하얗고 환한 풍경에 심안영은 어둡기만 했던 과거가 한순간에 환히 밝아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냉궁에서의 감금, 겨울날의 눈보라, 피비린내 나는 능지형, 서경율과 사초령, 그리고 태어나지도 못한 그녀의 아이...순간 이 모든 것이 아주 멀리 떠나버린 듯해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하늘도 참 좋구나.”낡은 사당에서 그녀는 의식이 흐릿해질 정도로 생의 희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생각한 건 바로 죽음을 무릅쓴 싸움과 무모한 복수, 서경율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숨이 붙어있다면 현장을 처리해 진국장군부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살고 싶어졌다. 전생의 몫까지 다해 제대로 살고 싶어졌다. 죽음은 서경율의 몫이지 그녀의 몫이 아니다. 심안영이 넋을 잃고 서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안영아, 사랑하는 내 안영아...”늙고 떨리는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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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늦은 밤, 진국장군부의 수강원.태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심안영은 오늘 수강원에서 태부인과 함께 자기로 했다. 태부인은 연세가 많아 몸도 예전 같지 않은데다 이번 심안영의 일로 놀라고 걱정한 탓에 밤잠도 설치고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러다 오늘 심안영이 무사히 돌아오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평온하게 잠이 든 태부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심안영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이 순간의 따뜻함이 자신에게는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느낌이다. 잠시 뒤 심안영은 이불을 걷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살금살금 방을 나섰다.작은 부엌 아궁이 위에는 아직도 약이 데워지고 있었는데 이 약은 심안영이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약을 마신 후 심안영은 수강원을 떠나 곧장 서문으로 향했다.그녀는 사방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가볍게 담을 넘어 밖으로 빠져나갔다.전생에 심안영은 서경율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책략을 꾸몄기에 서경율과 숙비의 비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위 신의라는 인물이 있으니 궁중 태의들이 서경율의 손을 치료하지 못하면 그들은 분명 위 신의를 불러 치료하게 할 것이다. 시간을 대략 계산해 보면 위 신의는 이미 궁에 다녀왔을 것이다.위 신의는 의선곡 출신으로 의술도 아주 뛰어나지만 독과 구술, 생명으로 생명을 치환하는 금술에 능해 파문을 당한 인물이다.그러다 숙씨 가문에 넘어가 숙비의 수하가 되어 그녀의 명령을 따라 움직여왔다. 그의 의술로 서경율의 손을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덜어주는 건 가능했다. 전생에서도 그는 독과 구술로 서경율을 위해 많은 사람을 해쳤다.서경율에게 고통을 주고 훗날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지금 선수를 쳐서 숙비와 서경율의 조력자인 위 신의를 제거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이다. 생각이 정리된 심안영은 목적지를 분명히 하고 곧장 위 신의가 머무는 황성 서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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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 말에 심안영은 입꼬리를 당겼다. 그녀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아까까지만 해도 서경연이 근처에 있다는 걸 심안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남자는 분명 어둠 속 어딘가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숙씨 가문 사람들을 손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서경연은 속을 알 수 없고 생각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자주 모습을 드러낼수록 심안영은 그가 점점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우연?계산된 행동이겠지.심안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발걸음을 옮기자 서경연은 벽에서 몸을 날려 단 몇 걸음 만에 그녀 곁에 다가서더니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이렇게 일을 크게 벌였으니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해도 숙씨 가문 사람들, 숙비, 그리고 서경율까지 누가 봐도 네 짓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저승사자는 상대하기 쉽지만 잡귀가 더 까다롭다는 말도 있지않느냐. 이렇게 대놓고 그 비열한 자들과 맞붙는 거, 그들이 또 무슨 계략을 꾸민다면 너만 손해 볼 것이다.”심안영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방금 말씀하셨다시피 그들은 비열한 무립니다. 제가 반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공격을 멈출 것 같으십니까?”서경연은 잠시 멍해지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그건 그렇지.”서경율이 심안영을 노리고 심씨 가문의 권세를 탐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 악연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심안영이 그들의 뜻을 들어주지 않는 이상, 숙씨 가문과 서경율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결과가 똑같다면, 차라리 통쾌하게 맞서 싸우는 게 낫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며 서경연은 환하게 웃더니 손을 뻗어 심안영의 손목을 잡았다.“뭐 하시는 겁니까?”심안영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고는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며 공격하려 했다.하지만 서경연의 동작이 더 빨랐다.그녀의 다른 손마저 제압한 채 자신의 곁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입꼬리를 올렸다.“가자. 너한테 딱 맞는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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