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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꼬마 구름
땅 위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 있어 서경율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이 상황은 그의 예상 밖이었다.

그의 사람들은 다 죽었고 심지어 심안영은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는데 이건 그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다.

“너... 윽...”

서경율이 입을 열려는데 심안영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녀는 이 기세를 타고 서경율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몸을 낮추어 그의 금비녀를 뽑아 손목을 살짝 틀어 그의 몸에 꽂아 넣었다.

순식간에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서경율은 고통에 찬 얼굴로 심안영을 붙잡으라고 외치려 했지만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서경율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바라보며 심안영의 창백한 얼굴엔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전생에 그녀는 이 남자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적대했다.

그녀는 손에 수없이 피를 묻혔지만 이렇게 통쾌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이리도 즐겁다니.

분노와 충격, 억울함과 무기력함으로 뒤섞인 서경율의 표정을 보자 그녀는 속이 다 시원했다.

그녀가 겪었던 전생의 고통을, 그도 똑같이 겪어야 한다.

이 비녀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서경율에게 심안영만의 영웅이 될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던 부하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히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를 본 심안영은 비녀를 뽑아 더 많은 피를 터뜨린 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대로 비녀를 서경율의 어깨뼈 아래로 연속 두 번을 깊이 찔렀다.

이것은 모두 전생에 서경율이 그녀에게 진 빚이다.

심안영의 손은 냉혹했고 서경율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경율의 부하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경율을 바로 죽여버린다면 서경율의 부하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반드시 죽여 황제에게 명분을 주려고 할 것이다.

얻을 것이 없는데 굳이 나서지 말라고 했던 서경연의 말이 옳았다.

이번 싸움에서 그녀는 반드시 얻는 것이 있어야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녀의 목숨으로 서경율의 목숨을 바꾸는 건 가치가 없는 노릇이다.

심안영의 계산은 완벽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더니 서경율의 오른손을 노려보다가 그의 사람들이 도착해 그의 신분을 밝히기 전에 서둘러 비녀로 그의 손바닥을 관통한 후 그의 손목 힘줄을 끊어버렸다.

모르는 자에겐 죄가 없기에 서경율의 신분을 몰랐다고 주장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워낙 의술을 익혔기에 힘 조절이 아주 정확해 힘줄을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지만 천하의 명의가 와도 이 손은 다시 쓸 수 없을 정도라고 확신했다.

천하를 얻고 싶어?

왕위에 오르고 싶어?

하지만 이 세상에 손이 망가진 황제는 필요 없다.

지금은 그를 죽일 수 없으니 대신 그의 육체와 정신 모두 지옥에 빠뜨려줄 것이다.

회망과 절망을 오가게 하여 끝끝내 무너뜨릴 것이다.

모든 동작이 끝난 후에야 서경율의 부하들이 도착했다.

이때 조용히 있던 서경연이 입을 열었다.

“놈들이 도착했으니 어서 가자.”

“예.”

심안영은 가볍게 대답한 후 몸을 일으켰다.

서경율의 부하 중에서 몇몇은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서경율을 대신해 전장에 나갔을 때 그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 그녀와 함께 적을 무찔렀다.

하지만 이번 생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만난 그들은 적이고 심안영은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

심안영은 그들을 힐끔 보더니 서경연과 함께 가장 선두에 있는 서경율의 부하를 향해 돌격했다.

심안영은 비녀로 상대의 목을 찔러 죽였고 서경연은 그녀를 도와 말을 빼앗은 뒤 그녀를 말 위로 당겨 올리더니 서둘러 채찍을 휘둘러 떠나갔다. 심안영의 손에 잡힌 채찍 끝엔, 거의 죽어가는 서경율이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서경율을 끌고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질렀다.

곧 피의 흔적이 뱀처럼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 장면은...

전생에 그녀가 죽던 날, 금군이 그녀를 성루 위로 끌어올리며 남긴 핏자국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상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천벌이다.

심안영이 생각에 잠겨있는 그때, 귓가에 서경연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너무 강하게 나가면 부러지기 쉬우니 모든 일을 강경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약한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넌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산적의 습격에 자신을 지켜야 했던 연약한 여인이었을 뿐이야. 그러니 지금 네게 있어야 할 건 살기가 아니라 억울함이다.”

심안영은 고개를 돌려 서경연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서경연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척 고삐를 더 꽉 조여 잡고 자연스럽게 심안영을 더욱 강하게 감싼 후 나지막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잠시 쉬거라. 아직 한 판 더 버거운 싸움이 남았다.”

“저기...”

“넌 지금 내 품 안에 있다. 날 믿는 것 외에는 더욱 좋은 선택은 없다는 말이다. 너에게 못된 마음을 품었더라면 사당에서 네가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있을 때 벌써 뭐라도 했겠지 지금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심안영은 어리둥절했다.

‘그거랑 이거랑 뭐가 같다는 거지? 지금 그 얘기를 꺼낼 상황이 아닌데?’

그래도 그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심안영은 확실히 전보다 긴장이 많이 풀려 있었다.

게다가 중상까지 입은 상태라 금세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서경연은 품에 안긴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뒤쫓는 자들이 없었다면 그는 이 길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간은 너무 짧고 이건 마치 꿈만 같았다.

제발 꿈이 아니길, 깨어나면 사라지는 꿈이 아니길...

...

황궁.

심안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고꾸라지려는 그때, 그녀의 눈에 대전 중앙에 놓인 구룡천희정이 들어왔다.

이곳이 어디인지 그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여기는 건원전의 편전이다.

전생에 서경율이 즉위한 초기에는 조정이 불안정했다.

그가 억누르고 쫓아낸 여러 황자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 당시 그녀는 이곳에서 자주 서경율을 도와 정무를 처리하곤 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황후의 신분으로 냉궁으로 끌려갔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서경연이 데려온 것일까?

이게 그가 말한 ‘버거운 싸움’일까?

그녀가 서경율에게 중상을 입힌 일은 곧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니 서경연은 그녀에게 정면으로 돌파하라고 조언한 걸까?

‘너무 강하게 나가면 부러지기 쉬우니 때로는 약한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이 말은 그녀에게 주는 계시일까?

비록 심안영이 생각해 둔 뒷길도 그와 크게 다르진 않지만 이 모든 걸 서경연이 직접 준비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무엇보다 그녀는 서경연에게 이렇게 착하고 다정한 면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경연이 그녀를 돕는 이유는 뭘까?

그는 대체 뭘 원하는 것일까?

심안영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별전의 문이 열리더니 열 명 남짓한 금군이 큰 칼을 들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둘러쌌다.

선두에 선 사람은 바로 금군대장 사조로 황제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사조는 심안영을 힐끗 바라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끌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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