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온세아가 걸음을 멈췄다.“대표님, 다른 지시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권태혁이 명령하듯 말했다.“물 한 잔만 가져와.”온세아는 그를 돌아보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넸다.“자, 물 마시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그녀가 어떻게든 가려 하자 권태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비록 세아 씨가 나한테 600억짜리 신세를 지진 않았지만 내가 아직 세아 씨한테 2천만 원을 빚지고 있어.”권태혁이 온세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온세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그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저번에 같이 자기로 약속했었는데 다치는 바람에 당분간은 세아 씨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온세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괜찮아요...”온세아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돈으로 사서 권태혁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보다 2천만 원을 돌려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권태혁이 진지하게 말했다.“난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켜. 게다가 2천만 원을 거저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온세아가 억지 미소를 쥐어짰다.“그렇게 미안하시면 차라리 2천만 원을 저한테...”돌려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권태혁이 갑자기 바짝 다가오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을 훅 불어넣었다.온세아의 온몸에 찌르르한 전율이 일었다.몸에서 참기 힘든 갈증과 열기가 순식간에 사지로 번져 나갔다.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에 온세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젠장. 병이 또 도진 것 같아. 어떻게 된 거지? 제때 약을 챙겨 먹었고 구형민한테 마음이 완전히 식은 뒤로는 한동안 도지지 않았었는데 오늘 밤에 왜 하필 권태혁의 병실에서 도진 거야?’설상가상으로 아까 집에서 정신없이 뛰쳐나오느라 약을 챙기지 못했다.“2천만 원을 어쩌라고?”권태혁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의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얇은 옷자락 위를 가볍게 쓸어내리는 걸
하지만 권태혁의 몸에 칭칭 감겨 있는 하얀 붕대를 보고 나니 온세아는 더는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집에 갔었어요.”권태혁이 넘어졌다는 소식만 듣지 않았어도 이 늦은 시각에 병원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칠흑처럼 어두운 눈으로 온세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울었어?”온세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권태혁의 눈썰미가 이토록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그녀가 울었다는 사실을 단번에 간파할 줄이야. 하지만 구차하게 인정할 수는 없었다.“아니요.”온세아는 어색하게 부인하고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아직 약 안 드셨죠? 얼른 약부터 드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랍 위의 약병을 집어 들고 알약들을 톡톡 털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다음 권태혁에게 건넸다.권태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눈앞의 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는 온세아가 울었다고 확신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이유 모를 안타까움과 분노가 밀려왔다.어떤 놈이 온세아를 속상하게 했는지 알고 싶었으나 지금의 그에게는 캐물을 자격이 없었다.“설마 약 먹는 게 무서워서 피하시는 건 아니죠?”권태혁이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자 은근슬쩍 도발했다. 그가 온세아를 노려봤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어색한 목소리로 인정했다.“쓴 건 딱 질색이라서.”온세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쓴 걸 못 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천하의 대표님이 쓴 걸 못 드세요? 설마 저보고 나가서 막대 사탕이라도 사 오라는 건 아니시죠?”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장난스럽게 놀려대자 권태혁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적당히 까불어.”온세아가 손바닥을 그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자, 얼른 드세요. 몸에 좋은 약이 입에도 쓰다고 하잖아요.”권태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결국 그녀의 손에서 물컵과 알약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 단숨에 털어 넣었다.쓴맛이 밀려왔는지 잘생긴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천하의 권태혁이 이토록 쩔쩔매는 모습을 처음 본 온세아가 또다시 배를 잡고
더는 구형민과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온세아가 구형민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잊지 말고 합의서에 사인해.”이혼하지 못할 이유 따윈 없었다. 오늘날 온세아를 이 지경으로 내몬 건 그들이었다.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극에 달하면 사람은 앞뒤 재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새로 시작하고 싶어지는 법이다.온세아는 방으로 가지 않고 집을 나갔다. 구형민을 홀로 남겨두고 집을 나간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밤공기가 꽤 차가웠다.온세아가 텅 빈 거리를 홀로 걸었다. 쓸쓸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온몸이 으스스 떨렸지만 가슴속에서 몰아치는 한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단지 그녀가 성해연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온아정에게 짓밟혀 살아야 한단 말인가?인생을 지키기 위해 단 한 번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건만 친어머니도, 남편도 도리어 그녀를 탓했다.도대체 언제부터 모두 온아정의 편만 들어준 걸까? 온세아의 감정과 권리 같은 건 진작 모두의 안중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어쩌면 오래전에 이 모든 굴레를 용기 있게 벗어던지고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늘 온아정의 그림자가 되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게 아니라.그때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확인해 보니 권태혁의 수행 비서 강준우에게서 온 전화였다.“온 비서님, 지금 어디세요?”“집인데요.”강준우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이 온종일 약을 안 드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세요. 비서님이 가신 뒤로 더 까칠해지셔서 아무도 곁에 가지 못하고 있어요. 미안한데 병원에 와서 대표님 좀 설득해주시면 안 될까요?”온세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까 대표님 옆에 다른 여자분이 간호해주고 계시지 않았나요?”강준우가 이미 진작 상황을 파악했다.“권민지 씨 말인가요? 그분은 대표님의 누나세요. 바쁘신 분인데 낮에 잠깐 시간 내서 병원에 오셨다가 수술 일정이 있으셔서 금방 가셨어요.”온세아는 순간 멍해졌다.낮에 병실에서 그녀와 권태혁의 민망한 순간을 목격했던 분
구형민이 온세아에게 이토록 불같이 화를 낸 게 오늘 밤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온세아의 언니 때문이었다.그가 온세아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왜 때렸어? 온세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아정이한테 손을 대?”‘무슨 자격으로?’온세아가 차갑게 웃었다. 구형민의 눈에 비친 온세아는 그럴 자격이 없는 존재였다.온씨 가문에서 온철환과 심미란, 성해연이 온아정의 편을 들고 있었고 심지어 남편 구형민의 마음마저 온아정에게 가 있었다.그런 처지에 무슨 배짱으로 감히 온아정에게 손을 댔냐는 뜻이었다.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온세아가 구형민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온아정이 네 와이프인 나한테 약을 먹였어. 내가 고스란히 당해주지 않아서, 딴 남자랑 뒹굴지 않아서 아쉬운 거야?”온세아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남편이라면 온아정에게 따져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되레 피해자인 온세아에게 따졌다.‘대체 무슨 뜻이지? 온아정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서 아쉬운 거야?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거냐고.’갑작스러운 따귀에 구형민의 잘생긴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구형민이 멈칫했다가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온세아를 쳐다보았다.“무슨 소리야, 그게? 아정이가 너한테 약을 먹였다고? 그 착한 애가 그럴 리가 없잖아.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아니야?”온세아는 역겨움에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어떻게 온아정이 나한테 약을 먹인 것까지 오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내가 온아정의 뺨을 때린 게 그렇게 대역죄야? 내 앞에서 처형 편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들다니. 네가 온아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세상 사람들이 모를까 봐 그래?’온세아가 구형민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오해인지 아닌지는 경찰서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면 알 거 아니야?”그러고는 구형민을 밀쳐내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구형민이 온세아의 팔을 잡고 다시 끌어당겼다.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경악한 얼굴로 온세아에게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너 경찰
온세아가 전화를 끊고 자리를 뜨려던 그때 강준우가 그녀를 보고 다가와 물었다.“온 비서님, 대표님 약 드셨어요?”그녀가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아직요...”강준우가 뭐라 하기 전에 온세아가 먼저 말했다.“지금 간호해주시는 분이 있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방금 병실로 들어간 아름다운 여인이 한눈에 봐도 권태혁과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여 그녀 같은 비서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온 비서님...”강준우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려는데 온세아가 이미 뒤돌아 가버렸다....VIP 병실.권민지가 권태혁의 상처를 다시 붕대로 꼼꼼하게 감아주었다.“조사해 봤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번에 다친 거 진짜 사고 맞아?”권민지는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태혁이가 현장 실사를 나가자마자 낙하물에 다쳤다는 게 말이 돼? 현장 안전점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단 소리야?’“단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계획한 거야.”누나를 쳐다보는 권태혁의 준수한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누구야?”권민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작은아버지.”권태혁은 누나에게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권민지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를 갈며 분노를 터뜨렸다.“작은아버지랑 연관이 있을 줄 알았어. 권씨 가문의 권력을 내려놓기 싫은 거겠지. 앞으로도 계속 권일 그룹을 쥐고 흔들겠다는 심산이야.”과거 그들의 아버지인 권인규가 교통사고로 위독해졌을 때 권태혁이 해외에 머물고 있어 귀국하지 못했다. 하여 이사회에서는 권일 그룹의 경영권을 임시로 작은아버지인 권상진에게 맡겼다.그 후 아버지가 일어나지 못하자 권상진은 기회를 틈타 자기 세력을 포섭하고 권일 그룹을 완전히 장악해버렸다.그런데 권상진이 권태혁의 목숨까지 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아무리 그래도 한 핏줄인데 어떻게 이렇게 독할 수가 있어? 안 되겠어. 이 일을 할머니께 다 말씀드릴 거야.”권민지가 분노를 참지 못했다.“할머니 연세가 많으신 데다 아버지 일로 이미 큰 충격을 받으셨어.
방금 몸을 너무 과격하게 움직인 탓에 권태혁의 팔 상처가 다시 찢어지고 말았다.하지만 권태혁은 온세아를 덮친 상태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온세아가 다급하게 말했다.“이것 좀 놔요. 지혈해야 하니까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하지만 권태혁은 온세아를 풀어주기는커녕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온세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상황에서 권태혁이 입을 맞출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온몸이 그의 뜨거운 숨결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권태혁이 단순히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그녀의 굳게 다문 치열을 가르고 더 깊게 파고들려던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태혁아, 괜찮...”남동생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권민지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병실 문을 열자마자 권태혁이 침대 위에서 웬 여자를 품에 안고 진하게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그대로 굳어버린 권민지는 놀란 나머지 하던 말을 멈췄다. 동시에 온세아도 화들짝 놀랐다.“악!”온세아가 정신을 차리고 권태혁을 밀어낸 뒤 침대에서 내려와 도망치듯 병실을 나갔다.그녀가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권민지가 그녀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이 여자는...’지난번 권태혁이 한밤중에 그녀를 긴급 호출하여 해독제 주사를 놓아주라고 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올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좀 하고 오지.”권태혁이 잔뜩 굳은 얼굴로 투덜거렸다.온세아를 품에 안고 한창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권민지가 들이닥칠 줄은 미처 몰랐다.권민지가 사과를 건넸다.“미안.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그런데 동생을 좀 더 놀리려던 찰나 권태혁의 몸에 시선이 닿았다. 붉은 피로 물든 붕대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상처가 벌어졌어.”권민지가 재빨리 권태혁에게 다가가 다시 상처를 싸매줬다.“권태혁, 너 언제부터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졌어? 여자 하나 때문에 참지 못하고 병원에서 이 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