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스물여덟 민방실이 박승철의 민원실에 들어온 첫날, 그는 확신했다. 이 여자, 좀 이상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눈이 가고, 신경 쓰이고, 결국 좋아하게 됐다. 문제는 연애를 시작한 뒤였다. “너는 내가 다른 여자랑 있어도 질투 안 나?” “오빠가 그 여자 좋아해?” “아니.” “그럼 됐잖아.” 남의 사랑은 누구보다 잘 알아보면서 정작 제 마음에는 서툰 남자와, 사랑을 확신하는 순간 질투할 이유조차 없어지는 여자. 도무지 이름 붙일 수 없던 마음이 사랑이 되기까지.
view more“민방실 주무관.”
“네.” 방실이 고개를 들었다. 과장이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인사이동 났어요.” “어디로요?” 방실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제법 멀었다. 출퇴근은커녕 이사를 해야 할 거리였다. “언제부터요?” “다음 주 월요일.” “알겠습니다.” “……끝이에요?” “네.” “멀리 가는데?” “그러니까 이사해야죠.” 과장이 할 말을 잃었다. 방실은 다시 모니터를 봤다. “집부터 알아봐야겠네.” 그날 저녁. 방실이 된장찌개를 떠먹으며 말했다. “나 인사이동 났어.” 오미자가 고등어 살을 발라내다 고개를 들었다. “어디?” 방실이 지역을 말했다. “거길? 멀잖아.” “그래서 이사하려고.” 민상호가 물었다. “언제 가는데.” “이번 주말.” “집은?” “구했어.” “언제?” “점심시간에.” 오미자의 눈이 커졌다. “오늘 인사이동 났다며.” “응.” “근데 벌써 집을 구했어?” “가야 되는데 집이 있어야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민방훈이 물었다. “무슨 부서?” “민원실.” “또 민원?” “응.” “팔자가 세다.” 방실이 고등어를 집었다. “월급은 똑같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팔자가 세도 월급 나오면 됐지.” 민상호가 물었다. “혼자 이사할 수 있겠어?” “짐 별로 없어.” “침대는.” “기사님이 들어주시겠지.” “냉장고는.” “기사님이.” “세탁기는.” “아빠.” “왜.” “이삿짐센터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민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오미자가 가족들을 둘러봤다. “딸이 타지로 간다는데 다들 왜 이렇게 태평해?” “엄마도 같이 갈래?” “내가 왜 가.” “그러니까.” 이번에는 오미자가 할 말을 잃었다. 월요일 오전. 박승철은 인사기록카드를 내려다봤다. 민방실. 스물여덟. 지방 근무 경력이 있었고 근무평정에도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빠진 인원을 채우기 위한 전입이었다.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짧은 커트 머리. 무쌍의 고양이상 눈매. 담담한 표정까지 첫인상은 제법 차가웠다. “민방실 주무관?” “네.” “박승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깔끔했다. 승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같이 근무할 민방실 주무관입니다.” “안녕하세요.” 방실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경력도 있었고 차분했다. 적응 문제로 신경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정확히 삼십 분 동안. “아니! 시청에서 일을 이따위로 해도 되는 거야!” 민원실에 고성이 울렸다. “공원에 풀 있잖아! 꽃가루 때문에 내가 비염이 생겼다고!” 하필 방실의 자리였다. 승철이 일어나려던 순간. “어머. 코 막히세요?” “그렇다니까!” “밤에는요?” “밤에도 막혀!” “저도 비염 진짜 심했거든요. 근데 병원 바꾸고 많이 좋아졌어요.” 남자의 기세가 순간 꺾였다. “……뭐?” 방실이 메모지에 병원 이름을 적었다. “여기요. 공원 관리는 담당 부서 연결해드릴게요.” “……그래.” “병원도 꼭 가보세요. 밤에 코 막히면 진짜 힘들잖아요.” “맞아. 잠을 못 자.” “그러니까요.” 조금 전까지 소리치던 남자가 얌전히 메모지를 접었다. “한번 가볼게.” 민원인이 돌아갔다. 승철은 닫힌 문을 바라봤다. 해결된 건가. 저게? “엣취!” 방실이 코를 훌쩍였다. “아, 이놈의 지긋지긋한 비염.” 승철의 눈썹이 꿈틀했다. “고쳤다면서요.” “많이 좋아졌다고 했지 고쳤다고는 안 했는데요?” “아까—” “다음 민원인 오십니다.” 방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승철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인사기록카드를 다시 봤다. 근무평정 양호. 민원 업무 경험 있음. 특이사항 없음. “그러니까 쓰레기를 버린 사람은 모르시고요?” “모른다니까!” “그럼 제가 찾아낼 수는 없어요.” “CCTV 있잖아!” “제가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어떡해!” “일단 치워드릴게요.” “범인은?” “쓰레기부터 치우고 찾죠. 냄새나잖아요.” “……그건 그렇지.” “담당 부서에 접수하고 CCTV 확인 절차도 안내해드릴게요.” 일은 잘했다. 민원인의 말을 대충 듣지도, 규정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해야 할 절차는 정확히 밟았다. 그런데 중간중간 뭔가 이상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방실이 승철에게 다가왔다. “팀장님.” “네.” “옥상 가도 돼요?” “……옥상이요?” “밥 먹었으니까 자려고요.” “휴게실 있습니다.” “사람 많던데요.” “옥상에서 자려고요?” “네.” “첫날부터?” 방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첫날에는 자면 안 돼요?” “그런 규정은 없습니다.” “그럼 가도 되죠?” “……네.” “감사합니다.” 방실은 만족스럽게 돌아섰다. 승철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인사기록카드로 시선을 내렸다. 특이사항 없음. 누가 작성했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과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확실했다. 이 여자. 좀 이상했다.점심시간. 민원실 네 사람은 근처 백반집에 앉아 있었다. “방실 씨.” 정소라가 국을 한 숟갈 뜨다 말고 방실을 봤다. “네.” “아까 할머니 커피요.” 방실이 제육볶음을 집었다. “네.” “엄청 짰잖아요.” “짰죠.” “괜찮았어요?” “뭐가요?” 소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걸 다 마셨잖아요.” “네.” “나는 한 모금 먹고 혀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옆에서 김태호가 바로 끼어들었다. “저도요. 아직도 입이 짜요.” “김 주무관님은 한 모금도 제대로 안 마셨잖아요.” “입에 넣었으면 마신 거죠.” “다시 뱉었잖아요.” “삼킬 수 있는 맛이 아니었습니다.” 방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짜긴 했어요.” 소라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됐다. “근데 왜 할머니한테 갈색설탕이 맛있다고 했어요?” 방실이 밥을 먹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갈색설탕이 맛있다고 한 겁니다.” 소라가 숟가락을 든 채 멈췄다. “네?” “갈색설탕이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방실이 소라를 봤다. “그냥 그 말인데요.” 소라는 갸웃했다. 태호도 옆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이해 못 했습니다.” “뭘 이해해요?” “왜 소금커피 마시면서 갈색설탕 얘기를 했냐고요.” 방실이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육볶음 한 점을 상추에 올렸다. 그 모습을 보던 승철의 손이 멈췄다. 갈색설탕. 소금. 잠시 생각하던 승철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 세 사람의 시선이 승철에게 향했다. 소라가 물었다. “팀장님은 알아들었어요?” 승철은 방실을 봤다. 방실은 여전히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민 주무관.” “네?” “할머니가 설탕이랑 소금을 헷갈렸다고 생각한 겁니까?” 방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라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승철이 물었다. “그래서 갈색설탕이라고 한 거고?” “네.” “다음부터 헷갈리지 말라고?” “갈색이면 소금이랑 색이 다르잖아요.” 그제야
그날 이후였다. 오전 열 시만 되면 민원실 문이 열렸다. “왔어.” 처음에는 직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두 번째 날에도 봤다. 사흘째부터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방실 앞으로 갔다. 민원도 없었다. 그냥 앉았다. “오늘은 왜 오셨어요?” “내가 오면 안 돼?” “안 된다고 안 했는데요.” “그럼 됐지.” “네.” 방실은 일을 했다. 할머니는 이야기했다. 윗집 남자가 새벽에 또 화장실을 갔다. 옆집 며느리가 이번 주에도 안 왔다. 복지관 국에 감자가 너무 컸다. 버스 기사가 정류장에서 너무 멀리 세웠다. 방실은 서류를 보면서도 중간중간 대답했다. “네.” “그래요?” “감자가 크면 잘라 드세요.” “그걸 내가 몰라?” “아시는구나.” 승철은 이제 웬만해서는 끼어들지 않았다. 오전 열 시부터 십오 분쯤.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방실 앞에서 실컷 말하고 나면 얌전히 돌아갔다. 대신 방실에게는 할 일이 하나 생겼다. “할머니.” “왜.” “저기 잠깐 앉아 계시다가 혈압 재고 종이 가져오세요.” “내 혈압을 네가 왜 봐.” “지난번에 높았잖아요.” “오늘은 안 높아.” “재보셨어요?” “안 재봤지.” “그럼 어떻게 알아요?” “느낌이 그래.” 방실이 할머니를 빤히 봤다. 할머니도 방실을 봤다. 잠시 뒤. “아휴, 지겨워.” 할머니는 투덜거리며 혈압계 쪽으로 갔다. 그리고 꼬박 종이를 뽑아왔다. “자.” 방실이 수치를 확인했다. “오늘은 괜찮네요.” “내가 괜찮다 그랬잖아.” “느낌으로 맞히셨네.” “내 몸인데 내가 알지!” “내일도 재세요.” “싫어.” 다음 날에도 쟀다. 그다음 날에도. 계피사탕을 두고 싸우는 것도 매일 똑같았다. “갈색 하나 줘.” “안 됩니다.” “그거 하나가 뭐라고!” “제가 좋아하니까요.” “박하는 맵다고.” “계피도 매워요.” “그 매운 거랑 이 매운 거랑 같아?” “다르긴 하죠.” “그럼 줘.” “싫어요.”
오전부터 민원실 분위기가 묘했다. 직원 하나가 출입문 쪽을 보더니 작게 말했다. “팀장님.” “왜요.” “저분 또 오셨는데요.” 승철이 고개를 들었다. 허리가 조금 굽은 할머니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혼자 사는 노인이었다. 노인복지 관련 담당 부서에서도 이미 여러 번 상담했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상담할 일이 없어도 온다는 거였다. 외롭거나 심심한 날이면 시청에 와서 괜한 시비를 걸곤 했다. 직원이 한숨처럼 말했다. “민 주무관님이 걸리셨어요.” 승철의 시선이 돌아갔다. 할머니가 정확히 방실 앞에 앉았다. “뭘 도와드릴까요?” “도와주긴 뭘 도와줘!” 시작부터 목소리가 높았다. “나라에서 늙은 사람은 죽으라고 하는 거지!” 방실이 눈을 깜빡였다. “왜요?” “전기세도 나오지! 수도세도 나오지! 약값도 들지!” “네.” “내가 평생 세금을 얼마나 냈는데!” “많이 내셨어요?” “많이 냈지!” “얼마나요?” 승철이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도 멈칫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저도 몰라서 물어봤어요.” “지금 나 놀려?” “아니요.” 방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뒤로도 한참을 쏟아냈다. 버스가 늦게 왔다. 동네 마트 콩나물이 비싸졌다. 윗집에서 밤마다 의자를 끈다. 복지관 반찬은 지난주보다 싱거웠다. 시청에서 대체 하는 일이 뭐냐. 민원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방실은 끊지 않았다. “네.” “그래요?” “그건 불편하셨겠네요.” 딱 그 정도만 대답했다. 승철은 어느 순간 서류보다 방실 쪽을 더 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중간에 이상한 해결책 하나쯤 나올 때였다. 그런데 오늘은 없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그리고 말이야. 요즘 공무원들은 사람이 말을 하는데 물 한 잔 주는 놈도 없어.” 방실이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가 움찔했다. 방실은 정수기로 가더니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왔다. “물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민원실 자동문이 열렸다.서류를 확인하던 승철이 고개를 들었다가 잠깐 멈췄다.낯이 익었다.며칠 전 가로등을 뽑아달라던 남자였다.그때 방실은 가로등을 없애는 대신 암막커튼을 달라고 했다.이미 세금으로 설치한 거니까 잘 이용하시라는 말까지 덧붙였다.그리고 민원인은 납득하고 돌아갔다.적어도 승철은 그렇게 생각했다.“안녕하세요.”방실도 남자를 알아봤다.“커튼 사셨어요?”승철이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보통은 민원 내용부터 물어본다.방실은 커튼부터 물었다.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샀어요.”“어때요?”“좋아요.”“다행이네요.”끝난 줄 알았다.남자가 의자에 앉았다.“근데요.”승철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역시 안 끝났다.방실이 물었다.“또 밝아요?”“아뇨. 이제 깜깜해요.”“잘됐네요.”“너무 깜깜해요.”방실이 눈을 깜빡였다.승철도 남자를 봤다.남자가 진지하게 말했다.“커튼을 치니까 밖이 하나도 안 보여요.”방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승철은 괜히 궁금해졌다.이번에는 뭐라고 할까.“그게 커튼인데요.”역시나였다.남자가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아니, 그러니까 밤에 밖을 보고 싶은데 가로등은 눈부시고 커튼을 치면 밖이 안 보인다고요.”“아.”방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밖은 보고 싶으시고.”“네.”“가로등은 싫고.”“그렇죠.”“커튼도 열고 싶고.”“맞아요.”방실이 잠시 생각했다.승철이 먼저 끼어들었다.“민 주무관.”“네?”“잠깐만요.”방실이 입을 다물었다.승철은 남자에게 차분히 설명했다.“지난번 말씀드린 것처럼 가로등은 보행 안전 때문에 설치된 시설이라 개인 주거의 빛 불편만으로 바로 철거하거나 소등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빛이 주택 내부로 과도하게 들어오는 정도라면 담당 부서에 차광판이나 조명 각도 조정이 가능한지는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남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그런 게 돼요?”“가능 여부를 확인해봐야 합니다.”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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