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주승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승희 씨, 당신이 정말 현민이의 생모인가요?”
주승희는 심지우의 시선을 마주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5년 전 제 커리어와 회사와의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민이와의 모자 관계를 숨겨야 했어요.”
심지우의 숨이 잠시 멎었다.
“그럼 현민이의 아빠는...”
“현민이는 저와 승현 씨 아이예요.”
주승희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칼날이 되어 심지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숨이 막힌 심지우는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지난 5년 동안 정성을 다해 키운 아이가 변승현과 주승희의 아이였다니... 변승현은 처음부터 나를 속인 거였어. 결혼 후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를 농락하고 이용한 거야!’
“지우 씨, 오랫동안 숨겨서 죄송해요. 사실 저도 처음엔 승현 씨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권했지만 승현 씨가 이 일은 외부에 알려지면 안 좋다고 생각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주승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법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울려댔다.
심지우는 그제야 변승현에게 있어 그녀는 항상 외부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5년을 살며 한 아이를 함께 돌봤으니 감정은 없어도 가족이라 믿었지만 그는 끝까지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는 변승현이 왜 자신을 속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진실을 말했다면 내가 이렇게 빠져들지도 않았을 텐데...’
“지우 씨, 지난 5년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저와 승현 씨도 지우 씨가 현민이에게 베푼 정성과 노력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주승희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우 씨는 현민이를 정말 잘 키워주셨어요. 현민이의 생모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심지우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창백한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변현민을 안고 있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우리 엄마는 하나뿐이란 말이야! 난 엄마만 있으면 돼!”
변현민이 주승희를 향해 외쳤다.
“나쁜 여자! 왜 네가 내 엄마야? 난 너 같은 엄마는 필요 없어!”
주승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이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함을 자아냈다.
곧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진숙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심지우를 꾸짖었다.
“넌 아이를 이렇게밖에 못 가르쳤어? 어른에게 위아래가 없잖아!”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심지우는 진숙희와 논쟁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의 마음을 고려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민이는 아직 아이예요. 현민이에게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합니다.”
“흥! 네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진숙희는 비웃으며 말했다.
“심지우, 같은 여자끼리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여.”
“집사!”
진숙희가 외치자 집사가 급히 달려왔다.
“사모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이를 데리고 와. 우리 변씨 가문의 핏줄이 저런 여자의 손에 이용당하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지.”
집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현민이를 심지우의 품에서 떼어냈다.
“싫어! 놔줘요! 엄마, 나 엄마랑 집에 갈래요.”
심지우는 변현민이 격하게 우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현민이는 천식이 있어요. 제발 이렇게 강제로 아이를 몰아붙이지 말아 주세요.”
그 말에 진숙희도 잠시 멈칫했다.
주승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숙희의 팔을 붙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니, 집사님한테 현민이 놔주라고 해주세요. 전 괜찮아요. 제가 엄마로서 책임을 제대로 못 졌으니 아이가 저를 인정하지 않는 건 당연해요.”
진숙희는 한숨을 내쉬며 집사에게 손짓해 현민이를 풀어주었다.
“엄마!”
변현민은 울며 곧장 심지우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심지우는 한발 물러서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배가 부딪친 탓에 통증이 심해지면서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엄마, 할머니는 거짓말쟁이죠? 제 엄마는 하나뿐이잖아요! 다른 엄마는 싫어요! 저는 엄마만 있으면 돼요!”
변현민은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심지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변현민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선천성 천식도 있어 격한 감정 기복은 특히 위험했다.
그녀가 직접 키운 아이였다 보니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보아도 이 아이를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현민아, 울지 마. 엄마는 너를 버리지 않아. 그러니까 울지 말자. 응?”
심지우는 아이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진숙희는 이를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심지우, 창피한 줄 알아! 현민이는 네가 낳은 애도 아니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지?”
그녀는 평소의 품위 있는 태도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독설을 퍼부었다.
“현민이가 왜 너만 찾고 나한테 정 붙이지 않았는지 이제 알겠다. 평소에 그런 말로 아이를 세뇌하고 있었던 거지?”
그 말에 심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이가 있다는 것도 잠시 있고 얼굴을 굳혔다.
“사모님, 제가 승현 씨와 결혼할 때 승낙을 받지 않아 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다섯 살 아이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어른다운 모습인가요? 제가 무례한 건가요, 아니면 사모님께서 나이 먹고도 어른답지 못한 건가요?”
“너!”
진숙희는 심지우가 반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분노에 차 치를 떨었다.
“지금 날 도발하는 거야?”
“그럴 필요도 없어요.”
심지우는 진숙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혼 여부는 저와 변승현이 결정할 문제예요. 현민이는 이 집에 남기세요. 전 현민이를 빼앗을 생각 없어요.”
“싫어! 난 싫다고!”
변현민은 그 말을 듣자 심지우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저 버리지 마요. 네? 할머니 집 싫어요! 저 나쁜 여자도 싫어요! 전 엄마랑 집에 갈래요. 제발 절 데리고 집에 가줘요!”
울면서 한참을 소리 지른 탓에 변현민의 목소리는 이미 쉰 상태였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변현민을 키우면서 그녀로서도 아이가 이렇게까지 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진숙희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감정이 격해져 있으니 일단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차분해지면 아이에게 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심지우는 변현민의 손을 잡고 뒤돌아 나왔다.
변현민은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지 바쁜 걸음으로 심지우의 뒤를 따랐다.
그는 혹시라도 심지우를 놓칠까 봐 발걸음을 더욱 급하게 움직였다.
“현민아!”
주승희가 다급하게 뒤따라 나왔다.
마당에서 주승희가 변현민의 팔을 붙잡았다.
“현민아, 가지 마. 엄마가 잘못했어. 그땐 어쩔 수 없었지만 엄마는 정말 널 사랑해.”
“나쁜 여자! 놔! 놓아줘요!”
변현민은 주승희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주승희가 꽉 잡은 탓에 그는 통증마저 느꼈다.
“엄마, 도와줘요. 이 나쁜 여자가 절 잡아가려 해요. 얼른 도와주세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심지우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변현민을 만류하지 못한 주승희는 심지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은 마치 동정심을 유발하듯 애처로웠다.
“지우 씨, 제발 부탁이에요. 현민이는 제가 열 달 품고 낳은 아이예요. 당신이 지난 5년 동안 애써주신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아이를 변승현을 붙잡기 위한 도구로 삼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심지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뭘 했다고 모두가 자신을 아이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우가 변현민의 손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본 진숙희는 도우미들에게 심지우를 밀어내라고 명령했다.
심지우는 몇 걸음 뒤로 밀려 휘청거리며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녀는 갈수록 통증이 심해지는 복부를 부여잡고 도우미들의 손에 끌려 주승희와 진숙희의 옆에 선 변현민을 바라보았다.
변현민은 하늘이 무너질 듯 애처롭게 울며 외쳤다.
“놔줘요. 엄마랑 같이 가고 싶어요! 엄마...”
심지우는 그 모습을 보며 무력감을 느꼈다.
한 사람은 아이의 친할머니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이의 생모였다.
그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그저 변승현과 곧 이혼하게 될 철저한 외부인이었다.
그때 검은색 벤틀리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차 소리에 고개를 돌린 심지우는 차에서 내리는 변승현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