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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장 빛나는 자리를 비워두고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Last Updated: 2026-03-05 20:40:34

오후의 햇살이 유리창을 비스듬히 스치며 카페 안쪽으로 들어왔다. 

빛은 테이블 위에 길게 눌린 물결처럼 번졌고, 

그 위에서 잔에 담긴 얼음은 서서히 녹아내리며 

부드럽게 울음을 흘렸다. 나는 가장 빛이 고운 자리를 비워두었다. 

사람이 앉지 않은 빈 의자가 오히려 준비된 무대처럼 보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익숙한 발걸음이 들어섰다. 

도윤이었다. 평범한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 매무새가 단정했다. 

어제와 달리 이번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초코 음료를 주문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몸짓이 어색하지 않게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은 늘 짧고 미묘하다. 그는 곧장 창가에 앉았다. 

마치 자신이 그곳에 앉을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준비된 자리에 제자리를 찾아온 배우처럼.

문이 다시 열리고, 다른 기척이 들어왔다. 

오늘은 메이크업도 헤어도 힘을 빼고 나온 민하였다. 

단정한 셔츠 대신 후드티 차림, 손가락에 걸린 

작은 액세서리조차 없는 모습. 어쩌면 본래의 민하일지도 모른다. 

꾸밈을 벗어낸 얼굴은 방어막이 아닌 솔직함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 일 없는 듯 카운터에서 

물 한 잔을 주문하고 근처 자리에 앉았다.

나는 흘끗 도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무심한 척했지만, 시선이 순간 흔들렸다. 

말없이 누군가의 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흔적이 남는다. 

민하는 휴대폰 화면을 켜고, 몇 차례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입술이 떨리는 순간마다 긴 문장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그것을 우연히 지나치는 풍경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오래 바라본 사람에게는 잊히지 않는 장면이 된다.

나는 카운터에서 컵을 정리하다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봤다.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어른에게 묻듯 불안했다.

“헤어짐을 준비하는 사람은… 뭐부터 해야 하나요?”

그 순간, 주변의 소음이 파도처럼 멀어졌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자기 목소리를 확인하는 게 먼저예요. 남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게… 들릴까요?”

“조용해지면 들려요. 불을 끄고, 휴대폰을 멀리 두고, 호흡을 다섯 번만 세세요. 

그리고 ‘내가 진짜 원하는 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종이에 적어보세요.

말하지 말고, 그냥 적으세요.”

나는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짧게 적어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네모진 종이는 작아졌지만, 손안에 쥔 무게는 더 커진 듯 보였다. 

“고마워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도윤이 컵을 내려놓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카운터로 다가왔다.

“방금… 그분, 괜찮으신 거죠?”

나는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말이에요. 특별한 건 아니에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더 머물다 카페를 나갔다.

문이 닫히자 주방 쪽에서 제하가 나왔다. 

낮은 휘파람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렀다.

“완벽했어. 일부러 만든 연출 같지 않은 연출. 가장 비싼 기술이지.”

나는 컵받침을 정리하며 웃음을 흘렸다. 

“말은 잊히지만 장면은 오래 남아. 

오늘 본 장면이 그의 마음에서 천천히 일을 시작할 거야.”

그날 저녁, 하늘은 서서히 보랏빛으로 기울었고, 

건물 사이사이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민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적어봤어요.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미안하지 않은 미래.’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내일은 마지막 리허설이에요. 

그가 먼저 말하게 만들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또 다른 알림이 화면을 흔들었다. 

미확인 번호. 보고 싶다.

단 두 단어. 그러나 지난 시간의 무게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힘이 있었다. 

심장이 움켜쥐어진 듯 잠시 멈췄다. 

나는 휴대폰을 엎어두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의뢰인의 이별을 지켜냈지만, 

내 안의 이별은 여전히 끝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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