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강변을 따라 노을빛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모두 흘러가 버린 듯,
둔치는 차분하게 고요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며 길게 늘어선 그림자를 드리우자,
바람은 더 차갑게 불어왔다. 이곳이 바로 내일의 무대였다.
오늘은 연습이었고, 내일은 결말을 찍는 촬영이 될 터였다.
나는 오래된 벤치에 앉아 노트를 펼쳐 들었다.
파란 펜으로 적힌 글씨들은 모두 계획표였다.
시간, 동선, 대사처럼 남아서는 안 되지만
결국 머릿속에 꼭 남아야 하는 것들.
펜 끝을 따라가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오늘의 연습이 흔들림 없을 때, 내일의 장면이 완벽해진다.
민하는 내 옆에서 손을 모으고 있었다.
가만히 보면 그녀의 손가락 끝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동자는 여전히 불안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표정에는 결심이 묻어 있었다. 말없이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스스로의 결정을 품고 있을 때,
그 기운이 표정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오늘은 리허설이에요.”
나는 노트를 덮으며 조용히 말했다.
“내일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면, 그땐 실제로 부딪혀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당신이 먼저 말하는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그 말을 꺼내게 만드는 거예요.”
민하는 고개를 들었다.
“만약 그가 끝내 말하지 않으면요? 만약 버텨낸다면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상대의 무게가 달라지는 순간을 느껴요.
당신이 오늘과 다르게 보여주기만 해도, 그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거예요.
사랑이 의무로 변해 있다는 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섰다.
“자, 제가 도윤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해볼까요?”
민하는 입술을 물고 잠시 망설였다가, 낮게 속삭였다.
“우리… 여기까진가 봐.”
그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분명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일은 그 말이 당신 입에서 나오면 안 돼요. 당신은 그저 준비된 표정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가 먼저 내뱉게 만들고, 당신은 받아들이면 돼요.”
바람이 불어와 강물 위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나는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꼭 웃어주세요. 웃음은 잔인할 만큼 오래 남아요.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 되게 하세요.”
민하는 눈을 감았다.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휘날렸고,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깊은 호흡과 함께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연습이었지만,
그 미소 하나로 나는 내일이 성공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민하에게서였다. 연습은 어렵지만, 내일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답장을 쓰지 않고 한참을 화면만 바라봤다.
그 문장은 나에게도 질문처럼 다가왔다.
너도 네 이별을 해낼 수 있겠니?
잠시 후, 다시 울린 알림. 이름 없는 번호에서였다. 나리야, 미안하다.
숨이 목구멍에서 걸려 나오지 않았다.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다 손끝이 떨려 전원을 꺼버렸다.
혹시라도 진짜 온유라면, 왜 지금일까. 혹시 장난이라면,
왜 하필 지금일까.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한 채 나는 불을 끄고 방 안에 앉았다.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호흡을 세었다.
다섯 번의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민하에게 건넸던 문장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미안하지 않은 내일.
그 문장은 어쩌면 민하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기도 했다.
다음 날, 하늘은 맑았지만 바람 끝이 날카롭게 차가웠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는 활기로 가득했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정적에 묶여 있었다.
오늘은 마지막 리허설. 내일이면 실제 장면이 펼쳐질 것이다.
나는 카페 안에서 음료를 정리하며 창가를 살폈다.
문이 열리고 도윤이 들어왔다. 그는 어제와 다름없는
단정한 차림이었지만, 걸음걸이는 약간 무거웠다.
작은 변화를 읽어내는 건 내 일이었다.
그는 어김없이 초코 음료를 주문했고, 조금은 망설이듯 창가에 앉았다.
잠시 후, 민하가 들어왔다. 평범한 옷차림, 힘을 뺀 얼굴.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달랐다. 어제보다 눈빛이 깊고 단단했다.
마음을 다잡은 사람의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곧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오늘은 제가 말하지 않고, 그가 먼저 말하게 하는 거죠?”
나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보여주는 태도, 그 작은 변화가 결국 그를 이끌 겁니다.”
그녀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을 때, 도윤이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입술을 열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예전과 달라 보여서.”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상대가 변화를 감지했다는 건,
이미 마음의 준비가 시작됐다는 뜻이었다.
내일이면 그 말은 더 명확해질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민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말이 없다는 건 때로 가장 큰 대답이 된다.
도윤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녁이 되어, 우리는 다시 강변을 걸었다.
하늘은 붉은 빛으로 물들고, 물 위로 길게 반사된 빛이 금빛처럼 번졌다.
민하는 석양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이 일을 의뢰하는 게 비겁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알겠어요. 이건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였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제 선택이 필요한 거였다는 걸요.”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붉은 빛에 비친 얼굴은 담담했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슬픔이 있었다.
“이별은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일이에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와 나누면 그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죠.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민하는 미소를 지었다. 짧고도 단단한 미소였다.
바람이 머리칼을 스쳐 지나가며 강 위로 물결을 만들었다.
내일, 이 자리에서 한 장면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두 사람 모두의 미래를 지켜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일은 타인의 이별을 돕는 것이 아니라,
끝내지 못한 내 이별을 조금씩 이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만큼은 민하의 장면이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아침시간. 센터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그런데 바닥 위엔 낡은 열쇠 하나와 짧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잠시, 숨 좀 고를게.' - 나리그 두 줄이 전부였다.수경은 한참 동안 그 글을 읽었다.글씨는 익숙했지만, 그 문장이 낯설게 느껴졌다.‘숨 좀 고른다는 게… 얼마나 긴 건데요, 선배.’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선배가 떠난 게 아니라… 잠시인 거죠.”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점점 그 확신이 희미해졌다.그날 오후, 수경은 평소처럼 상담 일정을 진행했다.하지만 대화의 흐름이 자꾸 어긋났다.“그 사람과의 관계가 이제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의뢰인의 말에, 수경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그 마음, 잘 알아요.”“정말요?”“네. 누군가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이 더 이상 내게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더 괴로우니까요.”의뢰인은 잠시 멈췄다.“그 말… 선생님 이야기 같아요.”그녀는 미소 지었다.“그럴 수도 있죠.”상담이 끝나자, 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수경 선배… 오늘, 말투가 조금 다르셨어요.”“다르게 들렸어?”“네. 예전엔 ‘정리’하던 말투였는데, 오늘은… ‘기억’하는 말투였어요.”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기억하는 말투… 그건 나리 선배가 늘 하던 방식이었는데.’저녁, 센터 불이 꺼지고, 수경은 나리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손끝이 책상 표면을 천천히 더듬었다.서류의 각, 컵 자국의 흔적, 메모지 위의 희미한 글씨 자국.“이게 다 선배가 있었던 증거네요.”그녀는 낮게 말했다.책상 위에 놓인 작은 수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수첩 표지엔 볼펜으로 꾹 눌러 쓴 글자가 있었다.“이별은 늘 사람의 목소리로 남는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수경의 눈이 흔들렸다.‘이건… 나한테 남긴 말 같아요.’그녀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그리고 손끝으로 그 문장을 쓰다듬듯 쥐었다.그 순간, 문이 열렸다. 제하였다.“아직 있었네.”“그
센터의 오후는 유난히 조용했다.비도, 바람도, 소음도 없었다.그런데 그 정적이 오히려 불안했다.나리는 창문 쪽 책상에 앉아 손에 든 펜을 돌리고 있었다.펜촉이 종이 위를 긁을 때마다 짧고 건조한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책상 위에는 그녀가 직접 쓴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운영 위임서]서류 상단에는 수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녀는 그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됐다.”그 목소리는 무언가를 끝내려는 사람의 어조였다.문이 열렸다. 수경이 들어왔다.손에는 의뢰인 리스트가 들려 있었다.“선배, 이번 주 일정 정리했어요.다음 주부터는 심리치료 협력팀도 같이 붙을 예정이에요.”“그래? 잘 됐다.”“네. 이제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 같아요.”그녀는 종이를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하지만 나리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수경아.”“네?”“잠깐 앉을래?”“왜요?”“할 얘기가 있어.”수경은 잠시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나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이건… 내가 써둔 서류야.”“무슨 서류요?”“센터 운영 위임서. 앞으로 네가 이 팀을 맡는 게 맞을 것 같아서.”순간, 공기가 멎었다.수경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난 잠시 내려놓으려 해.”“왜요?”“이젠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잖아.”“그게 이유예요?”“그래.”수경은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이걸로 끝이에요?”“끝이라기보단… 잠시 멈춤.”“선배는 늘 그 말을 하죠. 잠시 멈춘다, 쉬겠다 근데 선배한테 잠시는 결국 끝이잖아요.”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경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선배, 이 팀… 선배가 만든 거잖아요. 근데 왜 아무 말도 없이 내려놔요?”“내려놓는 게 아니라, 넘기는 거야.”“같은 말이에요.”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왜 항상 혼자 결정해요? 우린 팀인데, 늘 마지막 순간엔 선배 혼자였어요.”“누군가는 책임져야 하잖아.
월요일 아침, 센터의 유리문이 열렸다.그 문을 밀고 들어온 나리는 잠시 멈춰 섰다.익숙한 공간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책상 배치가 바뀌었고, 하연의 자리 옆엔 새 화분이 있었다.벽에는 새 문구가 붙어 있었다.“이별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나의 회복의 시작이다.”그 문장은 나리의 말이었다.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그 말이 인용되어, 이제는 팀의 좌우명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그녀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내 말인데, 이젠 내 말 같지가 않네.’“선배!”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수경이었다.활기찬 얼굴, 단정히 묶은 머리, 단정한 셔츠. 그녀의 손에는 스케줄표가 들려 있었다.“돌아왔어요?”“응.”“정말요?”“그렇게 놀랄 일이야?”“아니요. 그냥… 조금 더 쉬실 줄 알았어요.”“쉬는 게 체질에 안 맞더라.”둘은 짧게 웃었다.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묘하게 낯설었다.오전 회의가 열렸다.회의 테이블엔 수경, 하연, 그리고 제하가 앉아 있었다.나리가 오랜만에 그 자리에 앉자, 공기 속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동안 내가 없을 때 많이 바빴지?”나리가 조용히 물었다.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방송 나가고 나서 문의가 폭주했어요. 상담은 예약제로 돌렸고, 의뢰인 선정 기준도 새로 세웠어요.”“어떤 기준?”“긴급성, 지속 기간, 감정 회복 가능성 세 가지를요.”“그건 나한테도 말해줬어야지.”“보고는 드리려 했는데, 선배가 휴식 중이었으니까요.”나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보다 묘한 정적이 먼저 흘렀다.그 정적 속에서, 제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좋은 시스템이네. 효율도 생겼고, 팀의 밸런스도 맞아가고.”“고마워요.”수경이 미소 지었다.그 미소가 나리의 눈에 스쳤다.낯설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나리는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효율이 나쁜 건 아니지만, 우린 효율을 위해 일하는 팀은 아니야.”“알아요. 그래서 상담 시간을 줄이지 않았어요. 대
하루 종일 흐린 날이었다.햇빛 대신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잔잔한 먼지가 공기 중을 떠다녔다.나리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커피를 식혀가며 앉아 있었다.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며칠째 휴식 중이었다.일정표엔 아무 일정도 없었다.대신 마음속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데.”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익숙한 발소리, 하지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혹시… 신나리 씨 맞으시죠?”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마주 선 얼굴은 너무 익숙했다.“저… 기억하시겠어요?”“혹시…”“3년 전, 남편과의 이별을 의뢰했던… 정윤서예요.”시간이 멈춘 듯했다.그 이름은 오래된 상자 안에 묻어둔 기억 같았다.“윤서 씨…”“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밝고, 또 어딘가 슬퍼 보였다.둘은 카페 구석자리에 앉았다.창밖엔 흐린 빛이 퍼져 있었다.“그날 이후, 저 많이 달라졌어요.”“그래요?”“처음엔… 아무것도 못 했어요. 숨 쉬는 것도 버거웠고,당신이 해준 말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어요.”“제가 무슨 말을 했죠?”“사랑은 끝나도, 사람은 남아요. 그 말이요.”나리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움찔했다.그 말은, 그녀가 너무도 자주 꺼내던 문장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었다.“그 말 덕분에… 제가 살아 있었던 것 같아요.”“그건 제 말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생이에요.”“아니에요. 그 말이 없었으면 저는… 그때 진짜로 끝났을지도 몰라요.”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서… 감사했어요. 근데 요즘엔 또 무서워요.”“무서워요?”“그 말이 저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요.이제는 그때의 이별조차 제 삶의 일부가 돼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시작이 안
늦은 새벽,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잦아들 무렵이었다.나리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모니터엔 수십 통의 메일이 켜져 있었고,각기 다른 이름의 사연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남편이 떠난 지 6개월이 지났어요.”“이별을 예쁘게 마무리하고 싶어요.”“다시는 사랑하지 않게 도와주세요.”문장마다, 낯선 얼굴들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마치 그 모든 문장들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이젠… 이걸 다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커피잔을 손에 쥐었지만, 잔 안의 액체는 이미 식어 있었다.그녀의 손끝도 마찬가지였다.아침이 되자, 센터는 평소보다 일찍 소란스러워졌다.전화벨 소리,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그리고 하연의 빠른 발걸음이 얽혀 있었다.“수경 선배! 오늘 오전에 새 의뢰 두 건 더 들어왔어요.”“두 건?”“하나는 3년 연애 후 결혼 직전 파혼, 하나는 불륜 관계 정리 요청이래요.”“둘 다 오늘 안에 미팅 잡히겠네.”수경은 서류를 들고 정신없이 움직였다.“하연, 일정 다시 재조정해. 기존 예약자 중 긴급 아닌 사람은 내일로 미뤄.”“네!”그녀는 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어딘가에서 ‘불안한 정적’을 느꼈다.나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 의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선배는 오늘도 안 오시는 거죠?”“응. 이틀째.”그녀는 대답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이럴 때일수록 내가 중심 잡아야 해.”그녀는 그렇게 되뇌었다.그 시각, 나리는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무 약속도 없었고, 오랜만에 일정표가 비어 있었다.하지만 그 ‘비어 있음’이 낯설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다, 이내 화면을 껐다.“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햇빛이 가볍게 떨어지고, 나무 사이로 새들이 오갔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이런 평범함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줄은 몰랐네.”머릿속엔 수경과 제하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둘 다 잘하고 있겠지.’그 생각에 미소가
방송이 나간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센터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메일함은 ‘상담 요청’ 제목으로 가득 찼고,SNS에는 ‘이별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해시태그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선배, 오늘만 스무 통이에요.”수경이 노트북을 열어보이며 말했다.“다 신규 문의예요. 근데 진짜로 다 받아도 될까요?”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창가 쪽에 머물러 있었다.“선배?”“응.”“괜찮아요?”“괜찮다는 말, 요즘은 쉽게 못 하겠네.”그녀는 커피잔을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잔 위로 미세한 김이 맴돌았다.그 김조차 무겁게 느껴졌다.“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야.”“그럼 어떻게 해요?”“줄여야지. 선택을 해야 해.”“누굴요?”“우릴 믿고 연락한 사람들 중, 지금 당장 가장 절실한 사람만.”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 대신, 나머지 사람들에겐 답장을 꼭 보내줘. 당신의 마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문장으로.”그 말이 끝나자 수경은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답장 하나에도 온도를 담을 줄 아는 사람, 그게 나리다.’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점심 무렵, 제하가 센터에 들어왔다.카메라 가방을 내려놓고, 손에 들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방송사 쪽에서 후속편 제안이 왔어.”나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거절해.”“이유는?”“지금은, 보여줄 게 아니라 버텨야 할 때야.”“그래도 이 반응이면”“제하.”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으로 대화를 끊었다.그건 말보다 더 명확한 거절이었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 대신 카메라를 꺼내 창가 쪽으로 렌즈를 돌렸다.나리의 옆모습이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조용한 피로, 그리고 그 속에 묘하게 살아 있는 단단함. 그는 셔터를 누르려다가, 결국 멈췄다.“오늘은 찍지 않을래.”“왜?”“지금의 넌, 기록이 아니라… 사람이야.”“그게 무슨 뜻이야.”“렌즈가 닿으면 깨질 것 같아서.”그 말에 그녀는 짧게 웃었다
균열이 사라진 지 오래지 않았는데도 방 안은 여전히 얼어붙은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가슴은 거센 파도에 휩쓸린 듯 불규칙하게 요동쳤고, 목울대는 갈증에 메말라 몇 번을 삼켜도 건조했다. 창문으로 스며든 새벽빛이 천천히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 밝음마저 차갑게만 느껴졌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그 안에 남은 열쇠는 고요했지만, 여전히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제하는 내 옆에 앉아 있었고, 그의 어깨에 기대자 심장의 박동이 조금은 가라
방 안의 공기는 이미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듯 낯설게 떨리고 있었다. 벽은 더 이상 벽이 아니었고, 균열은 문이라는 형체를 갖추며 검고 은빛의 섞인 빛을 쏟아냈다. 그 빛 속에서 나는 여전히 한 손에 열쇠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부러질 듯 경직되어 있었고, 심장은 단순한 박동이 아니라 내 몸을 찢어버릴 듯한 굉음을 만들어냈다.나는 속으로 수십 번 외쳤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이 빛이, 이 틈이 나를 집어삼켜버릴 거야.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게 너무 두려웠다.
저녁 무렵, 거실의 불빛이 흔들리듯 깜박였다. 마치 방 전체가 얇은 막으로 덮여 있고, 그 막을 누군가 바깥에서 계속 두드리는 것 같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발밑 바닥이 언제든 갈라질 것 같은 불안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균열은 벽을 넘어 천장과 바닥까지 번져 있었고, 그 틈새 사이로 낮게 울리는 진동음이 흘러나왔다.손바닥 위 열쇠는 이제 빛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손을 오므리면 더 뜨거워졌고, 펴면 내 눈앞까지 기운이 번져왔다. 그것은 이미 내 손의 일부가 아니라, 내 운
새벽의 빛이 방 안에 스며들 때까지 나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균열은 지금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잠시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라는 걸 직감했다. 틈새 속에서 뻗어 나왔던 그림자의 손은 내 안에 깊은 공포를 심어 두었고, 동시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압박을 안겨주었다.열쇠는 여전히 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아닌, 심장의 일부처럼 뛰고 있었다. 마치 내 숨결에 맞춰 고동치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았다. 손을 펴고 싶어도 열쇠는 손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주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