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강바람은 아침마다 강 위에 얇은 주름을 새겨놓았다.
햇살은 물결을 따라 반짝이며 달리는 이들의 땀방울과 뒤섞였다.
그 무리 속에서도 한 남자의 모습은 단숨에 눈에 들어왔다.
달리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정갈했고,
마치 누군가의 눈금에 맞추듯 일정한 속도로 호흡을 정리했다.
민하의 예비신랑, 도윤이었다.
제하는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리고, 오래 바라본 뒤 낮게 중얼거렸다.
“예상대로군. 이런 사람은 책임과 죄책감을 구분하지 못해요.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끝까지 매달리거든.”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그의 말에 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웅담을 만들어주면 안 돼.
‘내가 떠나야 저 여자가 산다’라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우리가 멈춰야 둘 다 살아남는다’는 현실을 보여줘야 해.”
한강 위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이 흩날렸다.
도윤은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다시 출근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흐트러짐 없는 뒷모습이 오히려 위태로워 보였다.
누구보다 견고해 보이지만, 그 견고함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 더 크게 부서지는 법이니까.
정오 무렵, 회사 주변의 카페에 들어선 나는 가볍게 앞치마를 걸쳤다.
커피머신이 뿜어내는 김과 원두 향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작은 종소리가 손님들의 리듬을 끊임없이 바꾸어 놓았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도윤이 들어왔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지만,
나는 짧은 숨을 고른 뒤 부드럽게 제안했다.
“오늘은 조금 다른 걸 드셔보시면 어떨까요? 아침에 달리셨잖아요. 몸이 단 걸 찾고 있어요.”
도윤은 순간 놀란 눈빛을 띠었다가 이내 웃음을 지었다.
“정확하시네요. 늘 같은 것만 마시다 보니, 다른 걸 권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따뜻한 초코 음료 위에 시나몬을 별 모양으로 뿌리며 건넸다.
“오늘만 예외예요. 내일부터는 다시 규칙대로 돌아가셔도 되죠.”
그는 잔을 받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
달콤한 맛이 혀끝에 번지는 순간, 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규칙을 무너뜨리는 작은 경험이 주는 해방감을, 그는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짧게 축하를 건넸다.
“곧 결혼하시죠? 미리 축하드려요.”
도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대답은 짧았지만, 말 사이에 불안과 안도가 함께 묻어 있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작은 파동이 이미 충분한 신호였으니까.
저녁 무렵, 민하의 집은 정적이 흘렀다.
서랍 한 칸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카드와 계약서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에 박힌 손톱 자국은
지난 며칠 그녀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결혼식 말고,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인가요?”
민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내리깔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빚이 없는 삶이요. 내일을 생각할 때 미안하지 않은… 그런 삶.”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선 안 돼요.
오늘부터 우리가 만들어야 할 건, 스스로 서는 내일이에요.”
나는 화이트보드를 꺼내 하나씩 적었다.
공동 계좌 정리, 반환해야 할 선물, 양가 대응 매뉴얼,
SNS 정리, 재무 설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왔다.
단순한 이별 문장이 아니라, 살아갈 방법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걸 조금씩 이해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작은 종이에 글씨를 적어 건넸다.
오늘 밤, 방의 불을 끄고 휴대폰은 거실에 두세요.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숨을 다섯 번 세세요.
그리고 ‘내가 진짜 원하는 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적어보세요.
민하는 종이를 반으로 접고 또다시 접었다.
접힌 자국이 마치 다짐의 주름처럼 남았다.
현관 앞에서 제하가 신발끈을 매며 말했다.
“내일은 회사 카페에서 한 번 더 자연스럽게 스치고,
모레는 한강에서 마지막 리허설. 그렇게 가면 충분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말보다 장면을 오래 기억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건 말이 아니라 장면이야.”
제하는 웃었다.
“너, 그 말 이제 트레이드마크 됐어. 그런데 웃기지? 들을 땐 매번 새로워. 네가 말해서 그런가 봐.”
밤이 내려앉은 도시의 창문 사이로 여기저기 다른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화해하고, 또 누군가는 혼자 밥을 차려 먹었을 것이다.
내 방의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아 계획표를 다시 확인했다.
손끝이 식어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때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도 이름 없는 번호였다.
보고 싶다. 단 두 단어. 그러나 방 안의 공기를 움켜쥐기에 충분했다.
너무 늦게, 그러나 잔인하게 가까운 말.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내일은 누군가의 이별을 지켜내야 한다. 내 과거는 내일 모레 다루자.
창문 바깥에서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오래전의 기억이 그림자처럼 스쳐갔다.
결혼식장 리허설의 눈부신 조명,
그리고 그 이틀 뒤 모든 것을 무너뜨린 짧은 한마디.
사라진 사람,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병의 진실.
그의 잔인한 말들이 사실은 방패였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잔해 위에 이 일을 세웠다.
누군가의 마지막 장면을 안전하게, 품위 있게,
새로운 시작으로 데려다주는 일.
매번 다른 의뢰인을 만나면서도,
결국 그 이별 속에는 언제나 나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의 장면을 리허설했다.
창가에 앉을 자리, 음악의 볼륨, 컵에 담길 얼음이 녹는 속도,
빛이 들어오는 각도. 디테일은 기억을 만든다.
그리고 기억은 사람을 움직인다.
눈을 감기 직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얼굴은 온유가 아니었다.
앉아 떨리는 손으로 컵을 감싸 쥐던 민하의 얼굴이었다.
도망치려는 여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하려는 사람의 표정. 그 표정이 오래 남았다.
“신나리.”
나는 내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놓게 만들자. 하지만 누구도 부서지지 않게.”
방 안의 공기가 얇아지며 잠이 내려앉았다.
내일의 장면은 이미 어딘가에서 빛을 머금고 있었을 것이다.
할 일은 그 빛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꼭 필요한 만큼만 비치도록 자리를 정리하는 것.
그렇게 끝을 데려다주면, 또 다른 시작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아침시간. 센터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그런데 바닥 위엔 낡은 열쇠 하나와 짧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잠시, 숨 좀 고를게.' - 나리그 두 줄이 전부였다.수경은 한참 동안 그 글을 읽었다.글씨는 익숙했지만, 그 문장이 낯설게 느껴졌다.‘숨 좀 고른다는 게… 얼마나 긴 건데요, 선배.’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선배가 떠난 게 아니라… 잠시인 거죠.”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점점 그 확신이 희미해졌다.그날 오후, 수경은 평소처럼 상담 일정을 진행했다.하지만 대화의 흐름이 자꾸 어긋났다.“그 사람과의 관계가 이제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의뢰인의 말에, 수경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그 마음, 잘 알아요.”“정말요?”“네. 누군가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이 더 이상 내게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더 괴로우니까요.”의뢰인은 잠시 멈췄다.“그 말… 선생님 이야기 같아요.”그녀는 미소 지었다.“그럴 수도 있죠.”상담이 끝나자, 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수경 선배… 오늘, 말투가 조금 다르셨어요.”“다르게 들렸어?”“네. 예전엔 ‘정리’하던 말투였는데, 오늘은… ‘기억’하는 말투였어요.”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기억하는 말투… 그건 나리 선배가 늘 하던 방식이었는데.’저녁, 센터 불이 꺼지고, 수경은 나리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손끝이 책상 표면을 천천히 더듬었다.서류의 각, 컵 자국의 흔적, 메모지 위의 희미한 글씨 자국.“이게 다 선배가 있었던 증거네요.”그녀는 낮게 말했다.책상 위에 놓인 작은 수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수첩 표지엔 볼펜으로 꾹 눌러 쓴 글자가 있었다.“이별은 늘 사람의 목소리로 남는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수경의 눈이 흔들렸다.‘이건… 나한테 남긴 말 같아요.’그녀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그리고 손끝으로 그 문장을 쓰다듬듯 쥐었다.그 순간, 문이 열렸다. 제하였다.“아직 있었네.”“그
센터의 오후는 유난히 조용했다.비도, 바람도, 소음도 없었다.그런데 그 정적이 오히려 불안했다.나리는 창문 쪽 책상에 앉아 손에 든 펜을 돌리고 있었다.펜촉이 종이 위를 긁을 때마다 짧고 건조한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책상 위에는 그녀가 직접 쓴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운영 위임서]서류 상단에는 수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녀는 그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됐다.”그 목소리는 무언가를 끝내려는 사람의 어조였다.문이 열렸다. 수경이 들어왔다.손에는 의뢰인 리스트가 들려 있었다.“선배, 이번 주 일정 정리했어요.다음 주부터는 심리치료 협력팀도 같이 붙을 예정이에요.”“그래? 잘 됐다.”“네. 이제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 같아요.”그녀는 종이를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하지만 나리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수경아.”“네?”“잠깐 앉을래?”“왜요?”“할 얘기가 있어.”수경은 잠시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나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이건… 내가 써둔 서류야.”“무슨 서류요?”“센터 운영 위임서. 앞으로 네가 이 팀을 맡는 게 맞을 것 같아서.”순간, 공기가 멎었다.수경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난 잠시 내려놓으려 해.”“왜요?”“이젠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잖아.”“그게 이유예요?”“그래.”수경은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이걸로 끝이에요?”“끝이라기보단… 잠시 멈춤.”“선배는 늘 그 말을 하죠. 잠시 멈춘다, 쉬겠다 근데 선배한테 잠시는 결국 끝이잖아요.”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경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선배, 이 팀… 선배가 만든 거잖아요. 근데 왜 아무 말도 없이 내려놔요?”“내려놓는 게 아니라, 넘기는 거야.”“같은 말이에요.”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왜 항상 혼자 결정해요? 우린 팀인데, 늘 마지막 순간엔 선배 혼자였어요.”“누군가는 책임져야 하잖아.
월요일 아침, 센터의 유리문이 열렸다.그 문을 밀고 들어온 나리는 잠시 멈춰 섰다.익숙한 공간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책상 배치가 바뀌었고, 하연의 자리 옆엔 새 화분이 있었다.벽에는 새 문구가 붙어 있었다.“이별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나의 회복의 시작이다.”그 문장은 나리의 말이었다.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그 말이 인용되어, 이제는 팀의 좌우명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그녀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내 말인데, 이젠 내 말 같지가 않네.’“선배!”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수경이었다.활기찬 얼굴, 단정히 묶은 머리, 단정한 셔츠. 그녀의 손에는 스케줄표가 들려 있었다.“돌아왔어요?”“응.”“정말요?”“그렇게 놀랄 일이야?”“아니요. 그냥… 조금 더 쉬실 줄 알았어요.”“쉬는 게 체질에 안 맞더라.”둘은 짧게 웃었다.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묘하게 낯설었다.오전 회의가 열렸다.회의 테이블엔 수경, 하연, 그리고 제하가 앉아 있었다.나리가 오랜만에 그 자리에 앉자, 공기 속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동안 내가 없을 때 많이 바빴지?”나리가 조용히 물었다.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방송 나가고 나서 문의가 폭주했어요. 상담은 예약제로 돌렸고, 의뢰인 선정 기준도 새로 세웠어요.”“어떤 기준?”“긴급성, 지속 기간, 감정 회복 가능성 세 가지를요.”“그건 나한테도 말해줬어야지.”“보고는 드리려 했는데, 선배가 휴식 중이었으니까요.”나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보다 묘한 정적이 먼저 흘렀다.그 정적 속에서, 제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좋은 시스템이네. 효율도 생겼고, 팀의 밸런스도 맞아가고.”“고마워요.”수경이 미소 지었다.그 미소가 나리의 눈에 스쳤다.낯설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나리는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효율이 나쁜 건 아니지만, 우린 효율을 위해 일하는 팀은 아니야.”“알아요. 그래서 상담 시간을 줄이지 않았어요. 대
하루 종일 흐린 날이었다.햇빛 대신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잔잔한 먼지가 공기 중을 떠다녔다.나리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커피를 식혀가며 앉아 있었다.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며칠째 휴식 중이었다.일정표엔 아무 일정도 없었다.대신 마음속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데.”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익숙한 발소리, 하지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혹시… 신나리 씨 맞으시죠?”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마주 선 얼굴은 너무 익숙했다.“저… 기억하시겠어요?”“혹시…”“3년 전, 남편과의 이별을 의뢰했던… 정윤서예요.”시간이 멈춘 듯했다.그 이름은 오래된 상자 안에 묻어둔 기억 같았다.“윤서 씨…”“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밝고, 또 어딘가 슬퍼 보였다.둘은 카페 구석자리에 앉았다.창밖엔 흐린 빛이 퍼져 있었다.“그날 이후, 저 많이 달라졌어요.”“그래요?”“처음엔… 아무것도 못 했어요. 숨 쉬는 것도 버거웠고,당신이 해준 말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어요.”“제가 무슨 말을 했죠?”“사랑은 끝나도, 사람은 남아요. 그 말이요.”나리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움찔했다.그 말은, 그녀가 너무도 자주 꺼내던 문장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었다.“그 말 덕분에… 제가 살아 있었던 것 같아요.”“그건 제 말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생이에요.”“아니에요. 그 말이 없었으면 저는… 그때 진짜로 끝났을지도 몰라요.”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서… 감사했어요. 근데 요즘엔 또 무서워요.”“무서워요?”“그 말이 저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요.이제는 그때의 이별조차 제 삶의 일부가 돼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시작이 안
늦은 새벽,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잦아들 무렵이었다.나리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모니터엔 수십 통의 메일이 켜져 있었고,각기 다른 이름의 사연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남편이 떠난 지 6개월이 지났어요.”“이별을 예쁘게 마무리하고 싶어요.”“다시는 사랑하지 않게 도와주세요.”문장마다, 낯선 얼굴들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마치 그 모든 문장들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이젠… 이걸 다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커피잔을 손에 쥐었지만, 잔 안의 액체는 이미 식어 있었다.그녀의 손끝도 마찬가지였다.아침이 되자, 센터는 평소보다 일찍 소란스러워졌다.전화벨 소리,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그리고 하연의 빠른 발걸음이 얽혀 있었다.“수경 선배! 오늘 오전에 새 의뢰 두 건 더 들어왔어요.”“두 건?”“하나는 3년 연애 후 결혼 직전 파혼, 하나는 불륜 관계 정리 요청이래요.”“둘 다 오늘 안에 미팅 잡히겠네.”수경은 서류를 들고 정신없이 움직였다.“하연, 일정 다시 재조정해. 기존 예약자 중 긴급 아닌 사람은 내일로 미뤄.”“네!”그녀는 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어딘가에서 ‘불안한 정적’을 느꼈다.나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 의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선배는 오늘도 안 오시는 거죠?”“응. 이틀째.”그녀는 대답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이럴 때일수록 내가 중심 잡아야 해.”그녀는 그렇게 되뇌었다.그 시각, 나리는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무 약속도 없었고, 오랜만에 일정표가 비어 있었다.하지만 그 ‘비어 있음’이 낯설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다, 이내 화면을 껐다.“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햇빛이 가볍게 떨어지고, 나무 사이로 새들이 오갔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이런 평범함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줄은 몰랐네.”머릿속엔 수경과 제하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둘 다 잘하고 있겠지.’그 생각에 미소가
방송이 나간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센터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메일함은 ‘상담 요청’ 제목으로 가득 찼고,SNS에는 ‘이별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해시태그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선배, 오늘만 스무 통이에요.”수경이 노트북을 열어보이며 말했다.“다 신규 문의예요. 근데 진짜로 다 받아도 될까요?”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창가 쪽에 머물러 있었다.“선배?”“응.”“괜찮아요?”“괜찮다는 말, 요즘은 쉽게 못 하겠네.”그녀는 커피잔을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잔 위로 미세한 김이 맴돌았다.그 김조차 무겁게 느껴졌다.“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야.”“그럼 어떻게 해요?”“줄여야지. 선택을 해야 해.”“누굴요?”“우릴 믿고 연락한 사람들 중, 지금 당장 가장 절실한 사람만.”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 대신, 나머지 사람들에겐 답장을 꼭 보내줘. 당신의 마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문장으로.”그 말이 끝나자 수경은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답장 하나에도 온도를 담을 줄 아는 사람, 그게 나리다.’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점심 무렵, 제하가 센터에 들어왔다.카메라 가방을 내려놓고, 손에 들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방송사 쪽에서 후속편 제안이 왔어.”나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거절해.”“이유는?”“지금은, 보여줄 게 아니라 버텨야 할 때야.”“그래도 이 반응이면”“제하.”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으로 대화를 끊었다.그건 말보다 더 명확한 거절이었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 대신 카메라를 꺼내 창가 쪽으로 렌즈를 돌렸다.나리의 옆모습이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조용한 피로, 그리고 그 속에 묘하게 살아 있는 단단함. 그는 셔터를 누르려다가, 결국 멈췄다.“오늘은 찍지 않을래.”“왜?”“지금의 넌, 기록이 아니라… 사람이야.”“그게 무슨 뜻이야.”“렌즈가 닿으면 깨질 것 같아서.”그 말에 그녀는 짧게 웃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자마자 현관 앞에 놓인 봉투가 시야를 사로잡았다. 낮에 사무실에서 느낀 팽팽한 긴장감이 아직 식지 않았는데, 마치 그가 내 뒤를 따라와 집 앞까지 스며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봉투를 들어 올리는 순간, 종이 사이로 묘하게 습한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서랍 속에 던져 넣던 이전 쪽지들과 달리 이번엔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더 이상 숨길 필요도, 감출 이유도 없다고 내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전등 불빛 아래 봉투를 찢어 열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마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병실 안은 한층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기계음은 여전히 규칙을 잃은 채 불규칙하게 울려 퍼졌고, 침대 위의 온유는 힘겹게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떨리고 있었고, 손끝은 더 이상 온기를 품지 못한 듯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나는 그의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았다. 떨림이 멎은 손을 붙잡고 있자니, 마치 이미 이별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속삭였다.“온유야, 듣고 있지? 네가 숨 쉬고 있는 한, 난 여기 있어. 눈을 감아도,
낮에는 이별을 돕는 상담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머릿속은 조금도 집중되지 않았다. 병원 침대 위의 온유, 그리고 점점 깊어지는 수경의 시선이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의뢰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남편은 제가 아직도 예쁘다고 말해요. 근데 그 말이 더 아프더라고요. 저는 이미 그 사람 눈빛에서 식어가는 걸 알아요. 그래서… 먼저 끝내고 싶어요.”의뢰인은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가 했던 말들이 겹쳐졌다. 사랑하지 않
늦은 밤, 카페의 불빛이 꺼지자 남겨진 공기가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 하루는 다른 날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온유가 다시 나타났고,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내 지난 시간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문을 닫고 의자에 주저앉자,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컵을 닦던 힘이 풀려 작은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을 때, 제하가 재빨리 잡았다.“이제 그만해.”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오늘은 정리할 힘이 없어 보여. 그냥 앉아 있어.”나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나오려다 멈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