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전 9시 40분.상담실 문 앞에서 한 여자가 서 있었다.흰 코트에 단정한 머리, 그러나 손끝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그녀의 이름은 윤서진이었다.예식장 예약일이 열흘 남았던 여자,사랑을 잃은 것도 실감하지 못한 채,결혼식이 취소된 세상 한가운데 멈춰 있는 여자.“어서 오세요.”문을 열자 라벤더 향이 스며들었다.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썼지만,그 표정은 금세 무너져 내렸다.“제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데 오는 게.”“이별을 도와주는 곳이에요. 잘 찾아오셨어요.”“이별이란 게… 도와준다고 되는 건가요?”“아니요. 다만, 덜 아프게 하는 방법은 있어요.”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자세가 너무 곧았다.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물컵을 건네며 물었다.“서진 씨, 언제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죠?”“다음 주 토요일이요.”“그럼 예식장은 아직 예약 상태일 테고.”“네. 취소도 못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그 남자분은 연락이 없나요?”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일주일 전까진 통화했어요. 근데… 그날 이후로, 메시지도 전화도 다 차단됐어요.”그녀의 눈이 흔들렸다.나는 그녀의 손동작을 유심히 봤다.손끝이 허공을 더듬는 듯 미세하게 움직였다.“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뭐였어요?”“‘미안하다.’ 그게 전부였어요.”“그리고 나서, 이유도 없이 사라졌나요?”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이유는 있었어요. …언니 때문이었죠.”그녀의 입에서 ‘언니’라는 단어가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그녀는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제 언니랑… 그 사람, 몇 년 전에 짧게 만났었어요. 그때는 저도 몰랐어요.근데 결혼을 앞두고, 어떤 사람이 사진을 보내왔어요.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을.”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그 사람은 울면서 사실이라고 했어요.그냥… 오래전의 실수였다고. 근데… 나한테 미안하다고만 하고 떠났어요.”“떠날 이유가 그뿐이었을까요?”그녀는
분식집 문을 밀자마자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튀김 냄새와 데친 어묵의 김이 공기 속에 엉켜 있었다. 그 익숙한 냄새는 사람을 묘하게 안심시킨다.나는 가장 구석 자리로 향했다.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아 창가 근처엔 비어 있는 자리가 여럿이었다.조리대 안쪽에서 수경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나리야!”짧은 웨이브, 그 특유의 밝은 표정.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눈 밑에는 피곤이 엿보였다.“오랜만이네.”내가 말하자 그녀는 내 어깨를 툭 쳤다.“넌 진짜 변함없다. 근데, 오늘은 뭔가 다르다? 얼굴이 좀 편해 보여.”“그런 말, 요즘은 제하가 더 자주 해.”“하긴, 그 애는 네 얼굴을 더 자주 보니까.”우린 동시에 웃었다.제하는 이미 주문을 마치고 있었다. 김치찌개와 떡볶이, 그리고 만두 한 접시. 평소보다 메뉴가 많았다.“너 언제부터 이렇게 잘 챙겼냐?”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오늘 네가 밥 먹을 때까지 말 거의 안 할 것 같아서.”그 말에 수경이 웃음을 터뜨렸다.“여전히 말투는 뻣뻣한데, 사람 마음은 다 읽네. 둘 다 여전하네.”자리엔 묘한 정적이 흘렀다.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물컵을 만지작거리거나, 젓가락을 맞춰놓거나, 테이블 위를 쓸었다.마치 서로의 눈을 마주치면 그동안 덮어뒀던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올까 봐 조심스러웠다.떡볶이 접시가 내려오자, 수경이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 셋이 이렇게 앉은 거.”“그때는 퇴근하고 이 집만 오면 하루가 정리됐었지.”“그래서 내가 그때 자주 놀러왔잖아.”그녀가 말을 던지자 제하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그때는 네가 웃을 수 있었지.”수경의 손이 잠깐 멈췄다.그리고 웃음처럼, 한숨처럼 짧게 내뱉었다.“그러니까,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고 온 거야.”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뭔가 단단히 결심한 기운을 읽었다.“새로운 의뢰인 얘기라더니, 그게 본인 얘기였구나.”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맞아, 절반은 내 얘기야. 근데
나는 상담실 책장 맨 아래 서랍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크림색 종이, 손으로 접은 티가 나는 모서리, 실 한 가닥로 봉합된, 내가 준비해 둔 의례의 도구.“여기에 열쇠를 넣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문장을 한 줄 쓰세요. 상대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고요.”“나한테요?”“네. 열쇠를 반납하는 건 그에게서 당신으로 중심을 되돌리는 절차예요.”그녀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봉투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금속이 종이를 누르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녀의 눈길이 그 작은 물체를 맴돌았다. 세 달 동안 손바닥 안에서 닳아 있던 그 표면, 모서리의 잔 스크래치, 열쇠의 이빨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생활을 증언하는 듯 서늘했다.내가 펜을 건네자 그녀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간단할수록 좋아요. 예를 들면 나는 오늘 나를 돌려받는다.”그녀는 작게 숨을 삼키고, 그 문장 앞에서 펜 끝을 내렸다. 종이가 잉크를 천천히 빨아들이는 흔적이 선명했다.“오늘 당장 전달하나요?”“그가 회사 앞에서 피한다면… 그럴 수 있겠죠.”“당신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상처 받겠죠. 근데, 그걸 피하려고 여기까지 왔겠어요?”나는 그녀의 눈에서 망설임보다 결심이 더 크다는 걸 확인했다. 손가락의 떨림이 줄었고, 어깨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좋아요. 그럼 계획을 세웁시다.”나는 메모지에 간단히 적었다. 시간, 장소, 동선, 퇴로.“두 가지 경로를 가져요. 하나는 직접 전달, 다른 하나는 실패 시 대체 경로. 실패했을 때를 준비하면, 성공했을 때 감정의 진폭이 덜 흔들립니다.”그녀는 내 말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문득, 유리벽 너머 그림자가 스쳤다. 제하였다. 그는 들어오지 않고, 내 쪽을 보았다가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다음 상담에 대한 준비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곧 메시지가 왔다. “점심은 먹고 하자. 네가 빠지면 내가 분리수거까지 도맡게 생겼다.” 짧고 투
저녁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퇴근 시간대의 거리는 늘 보던 풍경인데, 오늘따라 모든 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신호등이 바뀌는 속도마저 사람들의 웃음소리마저.나는 손에 쥔 메모리 카드를 꼭 쥔 채 걸었다.그 안에는 온유의 마지막 말이 있었다.그리고 그 말의 중심엔 언제나 아버지가 있었다.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왔니.”짧고 단호한 인사. 늘 그렇듯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나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곧았다.양복 셔츠의 주름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그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무슨 일이라 했지?”“온유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어요.”“…….”그는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그래서?”숨이 막히는 듯했다.하지만 이제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그 사람이 떠난 이유,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죠. ‘나리 곁에서 떠나라.’고.”그의 손끝이 잠시 떨렸다.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그건… 네가 몰랐으면 했던 일이다.”“왜요?”“너는 아직 어렸어. 그때 네 감정이 얼마나 커질지 몰랐다.”“그건 제 감정이에요. 아버지가 대신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어.”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나는 그 아이의 기록을 봤다.의사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 아이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그런데 너는 그 옆에 남겠다고 했지. 그게 네 인생을 통째로 바치겠다는 말이었어.”“그래서요?”“난 널 지키고 싶었다.”“지키는 게 그런 방식이어야 했어요? 거짓말로, 강요로, 사랑을 찢어놓는 걸로요?”말을 내뱉는 순간, 목이 떨렸다.그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 고요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나리야.”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그 아이가 떠난 뒤, 나도 괴로웠다. 하지만 그게 그 애의 뜻이었어.너를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게
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하늘은 맑았지만, 햇살엔 온기가 없었다.나는 병원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건물 위로 나부끼는 깃발이 미세하게 흔들렸고,그 아래로 스쳐가는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렸다.한 걸음을 내딛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심장이 두근거렸다.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이미 끝났다고 믿었던 과거가 다시 나를 부르는 듯한 두려움이었다.“괜찮아?”제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진지했다.“괜찮을 거야. 그냥… 보고 오기만 하면 돼.”“같이 들어가줄까?”“아니. 이건… 나 혼자 가야 할 일 같아.”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그 말에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은 이미 작은 파도처럼 요동치고 있었다.의사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의 얼굴은 따뜻했지만, 눈빛엔 약간의 망설임이 비쳤다.“오랜만이시죠, 나리 씨.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그 파일이 정말 온유의 건가요?”“네. 얼마 전 병원 시스템 정리 중에 발견됐습니다.그의 이름으로 등록된 비공개 폴더였어요.”그는 컴퓨터를 켜고 몇 번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잠시 후, 화면 속에 오래된 날짜가 뜨며 ‘Patient: Lee Onew’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비켜섰다.모니터 앞에 앉은 나는,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마우스를 움직이는 게 마치 금기를 깨는 행위처럼 느껴졌다.‘Record_0317’그 파일을 클릭하자, 정적 속에서 영상이 재생됐다.화면 속에는 침대에 기대어 앉은 온유가 있었다.살이 많이 빠진 얼굴, 그럼에도 여전히 따뜻한 눈빛.그는 숨을 고르며 카메라를 응시했다.“이걸 볼 때쯤이면,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야.”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했다.눈물이 금세 눈가에 고였다.“나리는 지금쯤 잘 지내고 있을까?그 애는… 늘 남보다 자신을 나중에 두는 사람이
창문을 여니 바람이 달라져 있었다.겨울의 냉기가 완전히 물러간 자리엔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나는 가방에 얇은 스웨터 하나를 챙겨 넣으며 중얼거렸다.“여행이라니, 진짜 오랜만이네.”제하가 내 옆에서 웃었다.“이별 전문가도 가끔은 떠나야지.사람의 마음만 들여다보다가 자기 마음은 잊어버리잖아.”“누가 그래?”“나. 그리고 널 잘 아는 사람들.”그의 말에 나도 피식 웃었다.그의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안엔 언제나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우린 동해로 향했다.차창 너머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위의 풍경이 흐르듯 지나갔다.가로수 가지마다 어린 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그 빛이 차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얼굴에 점처럼 흩어졌다.나는 그 순간, 삶이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나리야.”“응?”“우리 도착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말자.”“왜?”“그냥 바다 보고 싶을 뿐이야. 그동안 말로만 살아왔잖아.이제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보는 시간도 좀 필요하지 않겠어?”그의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말 없는 시간.’그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시간이었다.온유를 잃은 후, 나는 늘 무언가를 말해야만 숨을 쉴 수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바다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짙은 파랑이었다.햇빛이 수면에 부서져 반짝였고, 모래사장은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나는 신발을 벗고 모래 위를 걸었다.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따뜻했다.제하는 그 옆에서 조용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봐봐,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모래야. 우리 둘이 첫 발자국을 남기자.”우리는 나란히 걸었다.두 발자국씩, 일정한 간격으로.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머리카락을 흩었다.바다의 냄새, 파도의 소리, 그 모든 게 나를 덮었다.온유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잠시 스쳤지만, 이상하게 그 기억은 고통이 아니었다.마치 오래된 영화처럼 조용히 흘러가며 배경이 되어주는 듯했다.“여기 앉자.”제하가 커다란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