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920톤 아래에 줄을 긋고 물었다.
“짐은 모여 있습니까?”
“아직입니다. 품목별 정리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크기도 부탁드립니다. 묶을 수 있는지 봐야 합니다.”
배석훈은 내 노트를 내려다봤다.
“무게보다 그게 먼저군요.”
“오늘도 묶는 데 제일 오래 걸렸습니다.”
나는 노트를 덮고 작업용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육만길은 길드 신입에게서 돌려받은 끈을 자루에 담고 있었다. 남은 끈까지 챙긴 뒤에도 손이 자루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르신, 빠진 것 있습니까?”
“아니오. 돈 받은 날에도 빈손으로 돌아가니 좀 이상해서.”
“끈 있으십니다.”
노인이 자루를 한 번 들었다 놨다.
“이제 이걸로 벌어야겠구먼.”
나는 반출 확인을 마친 운송장을 챙겼다. 다음 짐을 받기 전에는 끈과 자루부터 봐야 했다.
그날은 유리병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
4월 6일(월), 서울-5호 입구에서 의뢰인을 만났다.
관리청 등록증을 확인하니 B급이었다. 팀장은 내 명함을 꺼내 번호를 맞춰 봤다. 뒤에는 동료들이 작은 나무 상자와 빈 자루를 나눠 들고 있었다.
“연화에서 일하셨다면서요.”
“지난주에 반출했습니다.”
“저희는 그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병 6개입니다.”
팀장이 휴대전화에 찍어 둔 사진을 보여 줬다. 입이 넓은 유리병 안에 누런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병마다 신문지가 둘려 있었다.
“긴팔원숭 알입니다. 채취한 자리에 모아 뒀습니다.”
나는 사진을 조금 키웠다.
“살아 있는 것은 못 받습니다.”
“이름만 알입니다. 둥지에서 걷어 내는 굳은 돌이고요. 부산물 목록에도 그렇게 올라가 있습니다.”
팀장이 반출 품목표를 펼쳤다. 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사진으로 돌아갔다.
“병은 따로 포장하셨습니까?”
“신문지로 감았습니다. 자루에 넣으면 됩니다.”
“병끼리 닿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들고 나왔습니다.”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동료 한 사람이 사진을 들여다봤다.
“오늘은 자루에 같이 넣을 거면 밑에라도 더 깔죠.”
“안에서 보겠습니다.”
나는 빈 운송장을 꺼냈다. 병을 포함한 총무게는 6킬로그램, 채취 지점은 입구에서 2킬로미터였다.
“최소 운임 60만 원입니다.”
팀장은 동료들과 눈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병을 깨뜨리면 안 됩니다. 돌보다 병째 넘기는 값이 높습니다.”
나는 품목 옆에 유리병 6개라고 적었다.
◉
안에 들어가자 팀장이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는 표석을 따라 걸었다. 바위 위에 놓인 자루가 보이자 동료 한 사람이 먼저 가서 입구를 벌렸다.
병 6개는 각자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종이를 두른 부분은 두꺼웠지만 바닥과 어깨는 얇았다. 자루 아래에는 접은 빈 자루가 깔려 있었다.
나는 병 하나를 들어 봤다. 안의 누런 돌이 유리벽에 부딪혀 작게 소리를 냈다.
“병 안에서도 움직입니다.”
“꽉 채울 수는 없어요. 돌을 빼서 옮기면 다시 담아야 하니까.”
팀장은 병뚜껑을 눌러 봤다.
“뚜껑은 전부 잠갔습니다. 내용물만 안 쏟아지면 됩니다.”
나는 자루 밑에 깔린 천을 한 번 더 접었다. 병은 세워 놓고, 남은 신문지를 말아 사이에 끼웠다. 바깥에서 눌렀을 때 바로 유리가 잡히는 곳은 없었다.
자루 입구를 모아 묶자 병들이 안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나는 매듭을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이번에는 입구에 여유를 남겼다.
“꺼낼 때까지 이대로 있어야 합니다.”
“안에서 시간도 멈춘다면서요.”
“네.”
“그럼 들고 오는 것보다는 안전하겠네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넣고 나면 흔들리지 않았다. 받기 전과 내려놓은 뒤는 달랐다.
나는 자루 바닥을 한 번 들어 봤다. 병 사이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정도면 됐다고 보고 운송장을 채웠다.
『품목: 긴팔원숭 알 유리병 6개, 총 6킬로그램 / 출발: 서울-5호 게이트 안 2킬로미터 지점 / 도착: 게이트 앞 관리청 반출 창구 / 운임: 60만 원 / 파손 시 전액 배상』
팀장은 마지막 줄을 읽고 서명했다.
“이런 건 확실하셔서 좋네요.”
나는 한 장을 건넸다. 자루에 손을 얹자 묶음이 들어갔다.
바위에는 접었던 신문지 조각만 남았다.
◉
반출 창구 앞에는 먼저 나온 팀의 갑각이 쌓여 있었다.
직원이 옆으로 자리를 내 줬다.
“작은 짐이면 이쪽에 놓으세요.”
나는 지정한 자리 앞에 앉았다. 받았을 때와 같은 방향으로 자루 바닥을 바닥에 붙였다.
손을 떼기 직전, 자루 안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딱.
곧바로 한 번 더 났다.
나는 손을 멈췄다. 자루 윗부분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팀장도 들었다.
“지금 뭐죠?”
나는 매듭을 풀었다. 입구를 벌리자 신문지 사이로 유리 조각이 보였다. 병 2개의 바닥과 옆면이 깨져 있었다.
서 있던 병들이 자루가 놓이면서 조금 벌어졌다. 바닥을 받친 천은 있었지만, 병이 넘어가지 않게 잡는 칸은 없었다.
팀장이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들어갈 때는 멀쩡했잖아요.”
“네.”
“안에서 부딪힌 겁니까?”
“안에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려놓을 때 병이 기울었습니다.”
나는 남은 병부터 하나씩 꺼냈다. 깨지지 않은 병 4개는 빈 상자에 옮겼다. 직원에게 종이와 집게를 빌려 자루 안에 남은 유리도 걷었다.
누런 돌 2개는 깨진 병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하나에는 모서리가 떨어진 자국이 있었다.
팀장은 운송장과 돌을 번갈아 봤다.
“채취할 때부터 손상된 건 아닙니다.”
“확인하고 받았습니다.”
동료 한 사람이 자루 안의 신문지를 집었다.
“우리가 너무 대충 싼 것도 있죠. 병마다 칸이 있어야 했는데.”
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운송장의 마지막 줄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나는 펜을 꺼냈다.
“구입처에서 병과 내용물 손해를 확인받아 주십시오. 금액 근거도 같이 부탁드립니다.”
“배상하신다는 겁니까?”
“제가 적었습니다.”
반출 창구 직원이 우리 앞에 확인서를 놓았다. 나는 파손 수량을 적고 서명했다.
병 6개 인수. 병 4개 정상 반출. 병 2개 파손.
그 숫자는 바꿀 수 없었다.
◉
확인 자료는 그날 저녁에 왔다.
품목별 거래표와 파손 사진, 수리할 수 없다는 매입처의 답변이 붙어 있었다. 병 안에 그대로 보관된 상품으로 받는 곳이라 돌만 새 병에 옮겨도 원래 값으로는 넘길 수 없었다.
나는 의뢰인에게 전화해 남은 물건의 처리까지 확인했다.
배상액은 350만 원이었다.
운임 60만 원짜리 일이었다. 두 금액을 노트의 같은 줄에 적었다. 오른쪽 칸에 들어갈 숫자가 왼쪽보다 길었다.
예진이 식탁에 앉다가 내 노트를 봤다.
“350만 원이 왜 나갔어?”
“병이 깨졌어.”
“어떤 병?”
“내가 나른 병. 6개 중에 2개.”
예진은 의자를 당겼다. 내가 내민 운송장 사본을 읽고 사진까지 넘겨 봤다.
“유리병을 이렇게 자루에 넣었어?”
“응.”
“이건 포장한 사람도 잘못한 거 아니야?”
“병이 움직이지 않게 했어야지.”
“그럼 왜 오빠가 다 물어?”
나는 운송장 맨 아래를 짚었다.
예진은 그 줄을 읽고 나를 봤다.
“오빠 바보야?”
“약속이잖아.”
예진은 바로 말을 받지 않았다. 사진을 다시 키워서 깨진 병을 봤다.
“그 약속을 하기 전에 포장을 보든가.”
“봤어.”
“그런데?”
나는 자루 바닥에 받쳤던 천을 손으로 접어 보였다.
“밑만 봤어. 옆으로 넘어지는 건 못 잡았고.”
예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나는 송금 화면에 350만 원을 입력했다. 계좌 이름과 자료에 적힌 이름을 맞춰 본 뒤 돈을 보냈다.
곧 답장이 왔다.
『350만 원 확인했습니다. 파손 건 정산 완료했습니다.』
운송장 사본 뒤에 송금 내역을 붙였다.
예진이 물었다.
“다음에도 이렇게 해?”
“같은 포장은 안 받을 거야.”
“그걸 종이에 써. 전화할 때 말하는 건 또 빠뜨리니까.”
나는 새 종이를 꺼냈다.
◉
처음 쓴 공지문은 길었다.
유리병, 깨지는 돌, 뚜껑, 자루, 신문지에 관한 문장을 차례로 적었다. 읽다가 겹친 줄을 지웠다. 그래도 종이 아래까지 내려갔다.
예진이 옆에서 종이를 돌려 봤다.
“이거 읽고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유리병을 잘 싸라는 건데.”
“그럼 잘 싼 게 뭔지 적어.”
나는 깨진 병 사진을 옆에 놓았다.
병 사이를 벌릴 것. 바닥만 아니라 옆도 받칠 것. 상자를 기울여도 병이 움직이지 않을 것.
내가 알아서 한다는 말은 뺐다. 손이 닿으면 넣을 수 있었다. 깨지지 않는 포장까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예진은 연필로 긴 문장을 나눴다.
“이건 앞에 써. 접수할 때 확인한다는 거.”
“응.”
“운송장에 유리병이라고 적은 건 잘했는데, 포장 상태는 없어.”
나는 인수란 옆에 빈칸을 만들었다. 자루인지 상자인지, 안에 칸막이가 있는지 적기로 했다.
받지 못하는 짐도 따로 적었다. 병끼리 바로 닿는 것, 뚜껑이 풀리는 것, 꺼낸 뒤 스스로 서 있지 못하는 것.
예진이 내 글씨를 읽다가 눈썹을 모았다.
“이건 배상한다고 쓴 거야, 배송한다고 쓴 거야?”
“배상.”
“오빠, 배상합니다 앞에 띄어쓰기.”
나는 펜 끝을 종이에 댔다가 들었다.
저쪽에서는 수량에 줄을 긋고 무게를 적었다. 이름은 저쪽 글자로 썼다. 한글로 문장을 쓸 일은 없었다.
“20년 동안 한글을 안 썼네.”
예진이 연필을 멈췄다.
식탁 위에는 병 사진과 운송장, 틀린 글자가 섞인 종이가 놓여 있었다. 예진은 내 종이를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
“그럼 초안은 오빠가 써.”
“다시 쓸게.”
“아니. 내가 옮길게. 내용만 봐 줘.”
예진은 노트북을 가져왔다. 글자 크기를 키우고, 제목 아래에 선을 넣었다. 나는 옆에 앉아 포장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
키보드 소리가 나는 동안 빈 자루를 펼쳤다. 병 대신 물통을 넣고 매듭을 묶어 봤다. 자루를 바닥에 놓자 안의 물통이 옆으로 누웠다.
내가 병을 넣기 전에 했어야 할 일이었다.
◉
4월 7일(화) 아침, 인쇄한 공지문을 반출 창구에 가져갔다.
직원은 내가 내민 종이를 읽고 깨진 병이 놓였던 자리를 봤다.
“어제 그 일 때문에요?”
“네. 붙여도 됩니까?”
“업체 안내는 저 게시판에 붙이세요. 반출 규정하고 섞이지 않게.”
나는 구석에 회사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붙였다.
『유리병은 칸막이와 완충재가 있는 상자에 담아 주십시오. 병끼리 닿거나 상자 안에서 움직이는 짐은 받지 않습니다. 포장 상태를 확인한 뒤 인수합니다. 인수한 짐의 파손 시 전액 배상합니다.』
직원이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배상 문구는 그대로네요.”
“제가 받는 짐은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그럼 받기 전에 오래 보셔야겠어요.”
“꺼낸 뒤에 오래 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직원은 종이 아래쪽에 테이프를 한 번 더 붙였다.
나는 가방에서 새 운송장 양식을 꺼냈다. 포장 상태 칸이 들어가서 인수 서명란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직원은 양식도 받아 봤다.
“복사한 것도 이걸로 바꿀까요?”
“네. 이전 것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게시판 아래 서류함에 남아 있던 빈 양식을 모았다. 배상 문구만 있고 확인할 칸은 없던 종이였다.
버리기 전에 한 장은 접어서 노트 뒤에 끼웠다.
◉
오후에 병 4개가 든 상자를 가져온 헌터가 게시판 앞에서 멈췄다.
“이게 그 업체입니까?”
내가 고개를 들자 헌터는 공지문 아래 전화번호를 가리켰다.
“깨진 거 다 물어줬다는 곳요.”
“네.”
“350만 원을 바로 줬다던데.”
“정산했습니다.”
헌터는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연락했습니다. 저는 깨지면 안 되는 짐이 많아서요.”
나는 상자를 열어 보게 했다.
병마다 나무 칸이 있었고 사이에는 접은 천이 끼워져 있었다. 다만 뚜껑 쪽 공간이 넓었다. 상자를 조금 기울이자 병 하나가 들렸다.
“위쪽도 받쳐 주십시오.”
헌터는 상자를 다시 당겼다.
“여기까지 막아야 합니까?”
“뒤집어 옮기지는 않습니다. 내려놓을 때 기울 수는 있습니다.”
헌터는 짐을 맡기지 않고 포장부터 고치러 갔다.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 나는 전화번호만 노트에 적어 뒀다.
늦은 오후에 돌아온 상자에는 위쪽 받침이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는 기울여도 병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포장 상태 칸에 상자와 칸막이, 위쪽 받침을 적었다. 헌터가 그 옆에 서명했다.
“이렇게 적어 두면 저도 다음에 똑같이 싸면 되겠네요.”
“네. 똑같이 오면 확인도 빨라집니다.”
그날 전화는 짐을 맡기는 것보다 포장을 묻는 쪽이 더 많았다.
어떤 자루를 쓰는지, 병을 따로 가져가야 하는지, 광석 모서리는 뭘 대야 하는지.
나는 답한 내용을 노트에 적었다. 공지문 한 장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
4월 8일(수), 예진은 아침에 내가 고친 양식을 확인했다.
“포장 상태 칸은 좀 더 넓혀. 오빠 글씨로 쓰면 넘치겠어.”
“이만하면 되지 않아?”
“어제 쓴 거 봐.”
나는 어제 운송장을 펼쳤다. 위쪽 받침이라는 글자가 서명란 가까이 붙어 있었다.
칸을 넓혔다.
전화가 울려 펜을 내려놓았다. 의뢰인은 먼저 다음 주에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어서 유리병은 아니지만 깨지는 갑각이라 포장을 봐 달라고 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부재중 전화가 2개 남아 있었다.
예진이 가방을 메며 내 노트를 봤다.
“손해 본 걸로 소문났는데 일이 늘었네.”
“배상한다는 걸로 났나 봐.”
“다음에는 안 깨뜨리고 소문내.”
나는 깨진 병 사진을 노트 안쪽에 넣었다. 새 양식의 포장 상태 칸이 사진 위에 겹쳤다.
오전에 받은 의뢰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유소정이었다.
“신우재 씨, 통화 괜찮으세요?”
“네. 짐 내려놓았습니다.”
“관리청에서 귀환자 S급 실태 조사를 합니다. 아공간 안 물건 목록을 제출하셔야 합니다.”
나는 식탁 위 빈 종이를 당겼다.
“운반 중인 짐도 적습니까?”
“본인 소유 물품과 보관 중인 물품을 나눠 적어 주세요. 다른 분이 맡긴 것도 포함입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맨 안쪽에는 아직 남이 맡긴 보따리가 있었다.
“미개봉인 물건은 어떻게 적습니까?”
(13화 끝)
“독점이면 다른 업체 견적은 못 받습니까?”나는 게시판 앞에서 조금 더 물러섰다. 폐쇄 공고를 읽으러 온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갔다.전화 너머에서 배석훈이 종이를 내려놓았다.“아직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만금 쪽에서는 운반 인력을 미리 잡으려면 계약부터 해야 한다고 합니다.”“물량표는 나왔습니까?”“나왔습니다. 내일 회의실로 오실 수 있습니까?”“비교할 견적이면 같은 자리에서 받으십시오.”배석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오늘 날짜 옆에 연화라고 적었다.“제가 얼마를 부르는지 만금도 들어야 합니다. 만금 조건도 제가 듣고요. 나중에 다르게 전달되면 다시 계산해야 합니다.”“공개 견적으로 하자는 말씀이군요.”“네.”“4월 20일(월), 오전에 뵙겠습니다. 물량표는 먼저 보내 드리겠습니다.”통화가 끝나자 휴대전화에 문서가 도착했다.마력석 620톤. 갑각과 사체 300톤.합계부터 노트에 적었다. 920톤이었다.그 아래에 거리 4.5킬로미터를 적었다. 큰 짐이었다. 숫자를 작게 쓴다고 줄어들지는 않았다.◉연화 길드 회의실 문 앞에서 가방 지퍼를 열었다.운임표와 서울-8호 반출 기록을 따로 끼워 왔다. 종이 모서리가 구겨지지 않게 낡은 판을 밑에 댔다.문을 열어 준 길드원이 명함을 받았다. 다른 손에는 물병이 여러 개 들려 있었다.“등심 운송…….”길드원이 명함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
유소정은 내 가방을 보다가 확인서를 다시 내려다봤다.“안에 있는 물자를 말씀드린 겁니다.”“그건 묶여 있으면 됩니다.”“그 조건도 등록 자료에 적어 둘게요.”나는 노트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이미 적힌 조건이었다. 물건이 크면 나누고, 흩어져 있으면 묶어야 했다. 용량이 커도 그 일은 없어지지 않았다.울리던 전화가 끊겼다. 화면에 남은 번호는 의뢰인이었다.“그럼 가 보겠습니다.”“확인서 잃어버리지 마세요.”나는 가방 안쪽 지퍼를 한 번 더 닫고 계단으로 내려갔다.◉4월 15일(수), 서울-8호 입구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뒤에 선 사람들은 앞사람 어깨 너머로 종이를 읽었다. 관리청 직원이 게시판 옆에서 한 가지 말을 되풀이했다.“우두머리 처치가 확인돼 폐쇄 예측이 나왔습니다. 안에 보관 중인 물자는 반출 일정을 잡아 주세요.”공고 가운데 날짜가 적혀 있었다.『서울-8호 게이트 폐쇄 예상: 4월 21일(화) / 예측 오차: 앞뒤 2일 / 잔류 인원 및 물자 반출 요망』6일 뒤였다. 오차를 빼면 4일이었다.옆에 선 헌터가 수첩을 펼쳤다.“일요일부터는 닫힐 수 있다는 거죠?”“예. 예상일에 맞춰 작업을 끝내지 마시고 여유를 두십시오.”“반출 창구도 늘립니까?”“인력을 추가 요청했습니다. 먼저 운반할 물량과 예상 도착 시간을 알려 주세요.”헌터는 팀원에게 남은 자루 수를 물었다. 다른 팀은 휴대전화로 운반 업체에 연락하고 있었다.나
“봉투나 보따리처럼 겉으로 확인되는 상태를 적어 주세요.”유소정이 말했다.“내용물을 모르시면 미확인이라고 쓰시면 됩니다. 열어 보고 쓴 듯이 적지는 마시고요.”“맡긴 사람 이름도 필요합니까?”“아시면 적어 주세요. 연락할 수 있는지도요.”나는 종이 맨 아래에 보따리라고 썼다. 이름은 적을 수 있었다. 연락처는 없었다.“연락은 안 됩니다.”“저쪽에서 한국 분을 만나신 적은요?”“떨어진 사람은 몇 봤습니다. 한국말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유소정은 그 답을 미귀환자 칸에 옮겨 적는다고 했다.“그 부분은 조사 때 말씀해 주세요. 4월 10일(금) 오전에 측정실로 오시면 됩니다.”“물건은 전부 꺼냅니까?”“목록을 먼저 확인하고 필요한 것만 꺼내겠습니다. 운반 중인 고객 물품은 그 전에 인계를 끝내 주세요.”나는 일정표에 선을 그었다. 그날 오전에는 짐을 받지 않기로 했다.전화를 끊고 목록을 다시 썼다. 마른 빵, 끈, 천막, 물통. 평소 꺼내던 것부터 적고 나니 종이 아래에 빈칸이 조금 남았다.보따리는 그 빈칸에 들어갔다.◉4월 10일(금), 관리청 측정실 문 앞에서 작업용 점퍼의 지퍼를 내렸다.주머니에는 노트와 목록만 넣었다. 맡은 짐은 전날 모두 인계했다. 빈 운송장도 챙겼다가 가방에 도로 넣었다.측정실 문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이계 물품 반출 금지, 보관만 허용』나는 문을 두드리기 전에 문구를 한 번 더 읽었다.안에서 유소정이 문을
나는 920톤 아래에 줄을 긋고 물었다.“짐은 모여 있습니까?”“아직입니다. 품목별 정리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크기도 부탁드립니다. 묶을 수 있는지 봐야 합니다.”배석훈은 내 노트를 내려다봤다.“무게보다 그게 먼저군요.”“오늘도 묶는 데 제일 오래 걸렸습니다.”나는 노트를 덮고 작업용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육만길은 길드 신입에게서 돌려받은 끈을 자루에 담고 있었다. 남은 끈까지 챙긴 뒤에도 손이 자루 안에 들어가 있었다.“어르신, 빠진 것 있습니까?”“아니오. 돈 받은 날에도 빈손으로 돌아가니 좀 이상해서.”“끈 있으십니다.”노인이 자루를 한 번 들었다 놨다.“이제 이걸로 벌어야겠구먼.”나는 반출 확인을 마친 운송장을 챙겼다. 다음 짐을 받기 전에는 끈과 자루부터 봐야 했다.그날은 유리병까지 생각하지 못했다.◉4월 6일(월), 서울-5호 입구에서 의뢰인을 만났다.관리청 등록증을 확인하니 B급이었다. 팀장은 내 명함을 꺼내 번호를 맞춰 봤다. 뒤에는 동료들이 작은 나무 상자와 빈 자루를 나눠 들고 있었다.“연화에서 일하셨다면서요.”“지난주에 반출했습니다.”“저희는 그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병 6개입니다.”팀장이 휴대전화에 찍어 둔 사진을 보여 줬다. 입이 넓은 유리병 안에 누런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병마다 신문지가 둘려 있었다.“긴팔원숭 알입니다. 채취한 자리에 모아 뒀습
“단가를 바꾸시겠다는 겁니까?”배석훈이 물었다. 나는 계산기 옆에 놓인 빈 운송장을 당겼다.“네. 무게만으로 계산하니 맞지 않습니다.”“싸진다는 뜻인지 비싸진다는 뜻인지부터 알려 주십시오.”“이번 짐은 싸집니다. 다만 묶는 작업비를 따로 받겠습니다.”전화기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총액으로 주세요. 현장에서 추가되는 돈 없이.”“포장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사진 보내겠습니다. 덩어리 크기도 적어 드리고요.”“길안내도 필요합니다. 저는 서울-8호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그건 견적에 넣으십시오.”나는 필요한 항목을 적었다. 무게, 거리, 묶음 작업, 길안내.배석훈은 전화를 끊기 전에 한 번 더 물었다.“반출은 얼마나 걸립니까?”“묶는 사람을 붙여 주시면 하루 안에 끝내겠습니다.”“작업할 신입 여덟은 있습니다.”“그럼 묶음을 확인할 사람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전화를 끊고 육만길의 번호를 찾았다. 늦은 시간이었다. 노트에 먼저 연락드릴 일이라고 적었다.◉사진에는 자루보다 덩어리가 많았다.광석은 바위 옆에 품목별로 모여 있었고, 갑각은 서로 포개져 있었다. 마력석 자루는 입구를 접어 놓기만 한 것도 있었다.나는 사진을 크게 벌려 봤다. 겉보기에는 정리된 짐이었다. 손을 대서 넣을 수 있는 묶음은 아니었다.식탁 반대편에 앉은 예진이 계산기 화면을 봤다.
“조건을 먼저 보겠습니다.”공대환은 명함을 건넨 손으로 안주머니를 짚었다. 접힌 종이를 꺼내려다 대문 안쪽을 봤다.계단 위에서 예진이 내려오고 있었다.“여기서 말씀하시게요?”공대환이 종이를 다시 넣었다.“내일 가져오죠. 계약서는 앉아서 봐야 하니까.”“4월 1일 오전이면 됩니다.”“신 대표도 생각해 보세요. 혼자 전화 받고 짐 나르고 돈 받는 게 쉬운 일 아닙니다. 우리는 일감을 붙여 드리는 거예요.”나는 명함을 뒤집어 봤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운송장도 같이 가져오십시오.”“그건 걱정 마세요. 우리 양식 쓰면 됩니다.”공대환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예진이 마지막 계단에 서서 명함을 봤다.“계약하는 거야?”“조건을 봐야지.”“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대?”명함 아래에 내 명함을 겹쳤다. 등짐 운송의 사업장 주소는 집이었다.예진은 두 명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엄마 없을 때 와?”“오전.”“컵은 싱크대 왼쪽에 있어.”예진은 그 말만 하고 올라갔다. 나는 공대환 명함을 노트에 끼웠다.◉4월 1일(수), 공대환은 오전에 왔다.어머니가 출근한 뒤였다. 나는 식탁 위의 운송장을 치우고 빈 종이와 계산기를 놓았다. 공대환은 의자에 앉자마자 서류 봉투를 열었다.계약서와 운송장 양식이 나왔다.운송장 맨 위에는 만금 물류 이름이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