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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탄산요정
은희는 차갑게 말했다.

“앞으로도 넌 못 봐. 네 물건 챙겨서 당장 나가.”

남우는 잠시 굳었다가, 차가운 입술 끝을 비틀어 웃었다.

“빈손으로 나가겠다면서 보미는 데려갔다? 아이 핑계로 돈 뜯어낼 생각이야? 아이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

딸의 유골함은 위층에 있었다.

은희는 보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빠가 이토록 잔인한 말을 하는 걸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 선물 상자를 집어 들어 밖으로 던졌다.

“나가라고 했어. 못 알아들어?”

남우의 얼굴이 굳었다.

가벼운 튤 드레스는 비가 갠 마당에 떨어져 흙탕물이 묻었다.

그가 직접 맞췄다는 왕관도 깨져, 큐빅 조각이 낡은 바닥 틈으로 흩어졌다.

그가 눌러 두었던 감정이 터질 듯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통화를 연결했다. 일부러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하 대표님, 주문하신 피아노가 도착했습니다. 기존 주소로 바로 배송 진행하면 될까요?]

남우는 은희를 차갑게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청월힐스 108동으로 변경하세요. 받는 사람은 소맑음으로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남우는 은희에게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이 세워줄 수 있는 체면도, 거둬들이는 것도 모두 그의 마음이라는 걸.

그리고 보미의 존재를 인정해 줄지 말지, 보미가 자신에게 어떤 위치인지 결정하는 사람도 결국 자신이라는 걸.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해 봐.’

빈손으로 나가겠다며 아이까지 들먹이는 은희가, 그 끝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보자는 마음이었다.

은희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창백한 얼굴은 귀신 같았고, 이마에 말라붙은 핏자국은 더 처참해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어 문밖을 가리켰다.

“이제 나가 줄래?”

남우의 가슴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했다.

여러 감정이 뒤엉켰지만, 그는 굳이 이유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턱선이 팽팽하게 굳었다. 억눌린 분노가 목소리에 얼음처럼 배어 있었다.

“고은희, 앞으로 네 딸한테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해. 난 다시는 그 애 보고 싶지 않아.”

그 말은 은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보미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런데 그 영혼마저... 가장 사랑했던 아빠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은희는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놓인 먼지 쌓인 빗자루를 집어 남우에게 휘둘렀다.

“꺼져! 이 개자식아! 한 번만 더 우리 집에 발 들이면 내가 널 죽여 버릴 거야!”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버티기 힘들 때마다 꿀물만 조금씩 마셨다.

몸에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한 채,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남우는 자기 할머니가 은희를 집으로 데려오던 날을 떠올렸다.

그가 은희를 처음 본 것은 그날이 아니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재계 모임에 갔을 때, 그는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귀한 공주 같은 어린 은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은희는 맑은 빛처럼 환했다.

그런데 다시 만났을 때의 은희도 오늘과 같았다.

빗자루를 들고 털을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었다. 가엾고도 고집스러웠다.

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밝은 태양 같은 그 모습은... 쉽게 남우의 죄책감과 보호 본능을 건드렸다.

하지만 남우가 가엾다고 여겼던 어린 여자애가, 결국 그에게 약을 먹였다.

남우는 영은을 집으로 데려와 약혼을 발표하려던 밤, 은희가 자신의 침대에 올라왔고 그 현장을 가족들에게 들켰다.

남우가 보기엔, 그 일이 없었다면 맑음이 조산으로 태어나 병을 얻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영은과 맑음이 그렇게 오랜 고통을 겪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우는 제 발목을 자꾸 때리는 빗자루를 발로 차냈다.

“고은희, 같은 수법은 나한테 안 통해. 넌 보미를 낳고도 자기 딸 앞에서 그런 추한 꼴을 계속 보였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

말을 끝낸 그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차에 시동을 걸고도 한동안 액셀을 밟지 못했다.

차창 너머로 거실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여자가 보였다.

그는 화가 난 듯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

얼마 뒤, 남우는 차에서 내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은희, 우리 할머니가 너한테 어떤 분인데. 해외 요양 끝나고 곧 돌아오시는데, 꼭 이때 이렇게 일을 벌여야겠어?”

바닥에 쓰러진 은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은희!”

남우가 구두 끝으로 은희의 허리를 툭 건드렸다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은희를 안아 들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

사생활 보호가 철저한 사립병원 VIP 병실.

검사를 마친 뒤, 친구이자 병원장인 진효찬이 어이없다는 듯 남우를 바라보았다.

“너... 설마 집에서 아내한테 손찌검하냐?”

굳이 이 병원까지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우가 날카롭게 눈길을 던졌다.

“상태나 말해.”

효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병이라고 할 것도 없어. 영양실조야.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데다가 감정적으로도 계속 무너졌으니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게다가 가벼운 뇌진탕도 있어. 그동안 안 쓰러지고 버틴 게 신기한 상태야.”

남우의 미간이 깊게 접혔다.

‘영은이 맑음이 데리고 돌아온 뒤부터...’

‘이 여자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네.’

‘보미를 이용하는 게 안 통하니, 이제는 단식과 자해?’

“영양 수액 놔.”

효찬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말린다고 들을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소년 시절의 남우는 거침없고 자유로웠다.

그러다 한 번, 야외 답사에서 갑자기 실종된 적이 있었다.

함께 갔던 하씨 집안의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남우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반년 뒤, 사람들은 지방의 한 병원에서 남우를 찾았다.

한쪽 다리는 망가져 있었고, 시력과 청력도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그가 겪은 일에 대해 남우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남우를 구해 준 할머니와 아이도 끝내 찾지 못했다.

그 후로 남우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도 믿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은희가 남우의 집에 들어왔다.

그는 그 어린 여동생을 아꼈고, 가능한 모든 것을 챙겨 주었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잘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닫힌 마음을 다시 열게 한 사람이 남우에게 칼을 꽂았다.

효찬은 은희에게 영양 수액 처방을 넣은 뒤 물었다.

“간병인 불러 줄까?”

남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서 있었다. 넓은 등은 무겁고 고독해 보였다.

효찬은 어깨를 으쓱하고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

은희는 길고 긴 꿈을 꾸었다.

꿈속의 자신은 14살 이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시절 용한그룹은 아직 빛나고 있었다.

은희도 예쁜 드레스를 입고 부모님을 따라 파티에 갔다.

몰래 작은 케이크를 집어 먹다가, 잘생긴 오빠에게 들키고 말았다.

은희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허리에 손을 얹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그러다 장난처럼 크림을 그의 입가에 묻히며 말했다.

들키면 같이 죽는 거라고.

따뜻했던 장면은 곧 날카로운 피 냄새 속으로 찢겨 나갔다.

은희는 아름답던 엄마의 머리가 형체를 잃은 모습을 보았다.

늘 든든했던 아버지의 다리가 이상하게 꺾인 모습도 보았다.

수많은 손이 은희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때, 그 잘생긴 오빠가 손을 내밀어 은희를 끌어냈다.

오빠는 은희가 가장 좋아하던 케이크를 들고 그녀를 달랬다.

“앞으로는 내가 널 지켜 줄게.”

장면이 다시 뒤바뀌었다.

뜨거운 체온이 은희를 짓눌렀고, 낯설고 거친 숨결이 그녀를 삼킬 듯 덮쳐 왔다.

은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몸이 찢어질 듯 아프다는 것만 알았다.

그녀는 무너진 집을 진흙으로라도 메워 보려 애썼다.

두렵고 고통스러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남우!”

막 잠에서 깬 남자의 목소리는 거칠고 잠겨 있었다.

“여기 있잖아. 또 왜 그래.”

남우는 짜증스럽게 은희를 품에 가뒀다가, 손끝에 차갑고 축축한 뺨이 닿자 몸이 굳어졌다.

손바닥에 은희의 눈물이 묻었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은희를 조금 떼어 놓은 채 내려다보았다.

은희는 여전히 악몽에 갇혀 있었다.

서럽게 울고 있었다.

여자의 은 손은 남우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보미한테 그러면 안 돼... 안 돼...”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흐느낌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은 또렷하지 않아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은희는 누군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남우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은희를 달래는 일은 오래전부터 익숙했다.

“안 가. 그러니까 울지 마.”

그는 힘을 풀고 큰 손으로 은희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목 아래 깔린 팔을 조금 굽혀, 손바닥으로 은희의 머리를 감싸듯 덮고 가만히 쓰다듬었다.

은희는 꿈속에서라도 의지할 곳을 찾듯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몸이 스치며 두 사람 사이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갔다.

영은이 맑음을 데리고 돌아온 뒤, 남우는 모든 사실을 확인한 이후 단 한 번도 은희를 안은 적이 없었다.

오래 눌러 둔 욕망이 위험하게 흔들렸다.

그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낮게 경고했다.

“고은희, 더 움직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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