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최고의 조건, 최고의 서브
"최고의 조건. 최고의 서브."
은유는 그 문장을 세 번 다시 읽었다.
화면 속 공고는 광고라기보다 계약서에 가까웠다.
나이 25~29세. 키 160~168. 체중 45~52kg.
비흡연자. 문신·피어싱 없을 것.
계약 기간 6개월. 전세 보증금 지원(최대 2억). 월 급여 별도 협의.
조건은 상세했다.
사람은 없었다.
⸻
은유는 그 조건들을 하나씩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조건이 아니라, 조건을 쓴 사람을 읽는 눈으로.
체형까지 세밀하게 적어둔 이유가 뭘까.
보통은 이런 조건일수록 대충 얼버무린다.
'예쁘고 어린 사람.'
그런데 이 사람은 숫자로 못박았다.
허용 범위, 제외 항목, 예외 없음.
취향이 확고하다는 뜻이거나, 취향조차 관리 대상으로 다룬다는 뜻이었다.
은유는 뭐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다음으로 넘어갔다.
급여는 협의였다.
그런데 전세 보증금은 최대 2억이라는 숫자가 확정으로 박혀 있었다.
'돈에는 별 미련이 없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련이 없는 게 아니라, 협상 자체를 놓치기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채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댓글 창은 이미 수백 개였다.
*미친 조건이네ㅋㅋ 전세 2억을 왜 줘*
*이거 사기 아니야?*
*나 지원함ㅎㅎ 궁금해서*
의심하는 사람들.
장난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지원서만 넣고 사라진 사람들.
은유는 세 번째 부류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침묵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의심하지도, 장난치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사라진 사람들.
그들도 자신처럼 어딘가 걸린 게 있었던 걸까.
은유는 그 생각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대신 스크롤을 내리다 멈췄다.
댓글 정렬을 최신순에서 인기순으로 바꿨다.
가장 많이 눌린 댓글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이 남자가 어떤 댓글에 답을 달았는지 보고 싶었다.
답은 하나도 없었다.
의심에도.
장난에도.
수백 개의 댓글 중 단 하나도 반응하지 않았다.
'말이 아니라 서류로만 판단하는 사람이구나.'
은유는 그 사실을 조용히 접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이 계약은 역할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연기할 수 있는 사람 말고, 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이 문장만 다른 결이었다.
앞의 모든 조건은 차갑고 사무적이었는데, 이 한 줄만 어딘가 서두른 흔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이 문장만은, 앞의 조건들과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느껴졌다.
은유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췄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책상 위에는 어제 뜬 메일이 아직 열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귀하의 역량은 충분하나, 이번 채용에는…
계좌 잔고는 어제와 같은 숫자였다.
토익 학원비 고지서가 알림함에 쌓여 있었다.
은유는 다시 공고로 돌아갔다.
전세 보증금 지원.
숫자가 그녀의 숨통을 조금 트이게 했다.
그 사실이 스스로도 조금 불쾌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이 움직이다니.
⸻
하지만 진짜로 마음을 붙잡은 건 돈이 아니었다.
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지난 1년, 어떤 자기소개서에도, 어떤 면접관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말이었다.
역량. 스펙. 적합도.
전부 그녀가 무엇을 갖췄는지 묻는 말들이었다.
이건 달랐다.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은유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뭘 원하지?'
대답이 너무 빨리,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유는 휴대폰을 뒤집어 침대 위에 엎어놓았다.
그리고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방금 떠오른 대답을 다시 들여다볼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
지원 칸은 많지 않았다.
이름, 나이, 사진 세 장, 짧은 자기소개.
은유는 자기소개 칸에 커서를 두고 첫 문장을 썼다.
저는 성실하고 책임감이…
지웠다.
이건 이력서다.
이 사람은 이력서를 원하지 않는다.
다시 썼다.
저는 이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입니다.
지웠다.
이것도 아니었다.
'완벽히 부합한다'는 말은, 결국 자신을 조건 안에 욱여넣는 말이었다.
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
이 남자는 이미 조건을 정해뒀다.
숫자로, 항목으로, 예외 없이.
그런데도 저 한 줄, 연기 말고 원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문장을 굳이 덧붙였다.
조건은 걸러내기 위한 것이고, 그 한 줄은 남기기 위한 것이다.
'그럼 나는 뭘 남겨야 할까.'
증명이 아니라 확인.
애원이 아니라 진술.
은유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수백 명이 지금쯤 저마다 자신을 증명하는 문장을 쓰고 있을 것이다.
저는 성실합니다.
저는 진지합니다.
저를 뽑아주세요, 라는 말을 다르게 포장한 문장들.
은유는 그 줄에 서고 싶지 않았다.
세 번째로 쓴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절반을 지웠다.
남은 건 이거였다.
조건에 저를 맞춘 게 아닙니다.
제가 이 조건에 맞았을 뿐입니다.
무엇을 증명하는 문장이 아니었다.
읽는 사람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이게 맞는 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수백 개의 문장 중 하나로 묻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전송.
지원이 접수되었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
첫날은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수백 명 중 하나다.
답이 안 와도 이상할 게 없다고, 은유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둘째 날은 조금 달랐다.
일부러 확인하지 않으려고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뒀다.
세 시간도 못 버티고 다시 꺼냈다.
셋째 날 밤, 은유는 공고를 다시 검색했다.
혹시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공고가 내려간 건 아닐까.
혹은 자신이 이미 걸러져서 알림조차 안 오는 건 아닐까.
공고는 그대로 있었다.
지원자 수만 계속 늘어 있었다.
수백 명 중 하나.
이불 속에서 은유는 낮에 읽었던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연기할 수 있는 사람 말고, 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이상하게, 그 말은 잊히지 않았다.
⸻
나흘째 새벽.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없음.
은유는 잠긴 눈으로 화면을 봤다.
[1차 서류 합격을 안내드립니다.]
[2차는 대면 면접입니다.]
[일시와 장소는 확정 24시간 전 개별 통보됩니다.]
메시지는 짧았다.
축하한다는 말도, 인사말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지각자는 그 자리에서 자동 탈락 처리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은유는 그 문장을 두 번 더 읽었다.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한 줄만으로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누군가 이미 정확히, 흔들림 없이 규칙을 정해놓았다는 감각.
은유는 그 메시지를 캡처했다.
캡처해서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다.
사진첩을 열어 방금 찍은 화면을 다시 들여다봤다.
지웠다.
몇 초 뒤, 휴지통에서 다시 복원했다.
'이게 뭐라고.'
댓글에도, 의심에도, 흔들리지 않던 사람.
그런데 그 완벽한 통제 사이에 딱 한 번, 서두른 흔적이 남은 문장 하나.
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 틈, 나만 본 걸까.'
'아니면 다들 봤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까.'
은유는 몸을 돌려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낮에 떠올랐던 대답을, 이번에는 밀어내지 않았다.
이 남자를 만나면, 그 대답이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자신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도.
2화: 오류
강혁은 모니터를 켰다.
지원자 수.
638명.
예상보다 많았다.
놀랍지는 않았다.
조건이 사람을 걸러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조건이 많을수록 사람은 자신을 맞춰 넣으려 했다.
강혁은 첫 번째 지원서를 열었다.
사진.
나이.
키.
체중.
조건 밖.
닫았다.
다음.
사진.
조건 충족.
자기소개.
저는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닫았다.
다음.
뽑아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닫았다.
다음.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닫았다.
손가락이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였다.
사진.
조건.
자기소개.
닫기.
사진.
조건.
자기소개.
닫기.
몇 분 지나지 않아 화면 오른쪽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강혁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지원서를 읽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고르는 것도 아니었다.
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남는 사람은 소수였다.
대부분은 스스로 탈락했다.
조건을 읽지 않았거나.
조건을 읽고도 자기소개에서 다른 사람이 되려고 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
저는 귀하의 조건에 맞추기 위해 꾸준히 운동했습니다.
닫았다.
원하시는 스타일에 맞게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닫았다.
무엇이든 배우겠습니다.
닫았다.
강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
‘무엇이든.’
그 말이 가장 믿기 어려웠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람은 대개 아무것도 오래 하지 못했다.
화면을 넘겼다.
⸻
시간이 한 시간쯤 흘렀을 때였다.
지원서는 어느새 백여 장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강혁은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다음 파일을 열었다.
사진.
조건 충족.
나이.
스물일곱.
이름.
서은유.
시선이 마지막 칸으로 내려갔다.
조건에 저를 맞춘 게 아닙니다.
그는 다음 줄까지 읽었다.
제가 이 조건에 맞았을 뿐입니다.
손가락이 멈췄다.
다시 읽었다.
짧았다.
설명도 없었다.
보충도 없었다.
읽는 사람에게 판단을 맡기는 문장이었다.
강혁은 지원서를 처음으로 맨 위까지 다시 올렸다.
사진을 다시 봤다.
자기소개를 다시 봤다.
사진이 문장을 증명하지도 않았고,
문장이 사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 어긋남이 눈에 걸렸다.
강혁은 다음 지원서를 열려다 멈췄다.
다시 서은유의 지원서로 돌아왔다.
커서를 자기소개 위에 올려놓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새 메모를 열었다.
보통은 이름만 적었다.
면접.
보류.
탈락.
세 단어면 충분했다.
커서가 깜빡였다.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았다.
메모 창을 닫았다.
지원서도 닫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열었다.
이번에는 자기소개보다 사진을 먼저 봤다.
사진 속 표정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래서 더 거슬렸다.
강혁은 지원서를 면접 대상 폴더로 옮겼다.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다음 지원서를 열었다.
손가락은 다시 원래의 속도를 찾았다.
하지만 화면 오른쪽의 숫자가 하나 줄어드는 동안에도,
방금 읽은 한 문장은 머릿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면접 안내 문자는 전날 밤 열한 시를 조금 넘겨 도착했다.
발신자 없음.
[오후 3시, 강남 OO빌딩 17층.]
[지각 시 자동 탈락. 예외 없음.]
끝이었다.
주소도, 시간도.
필요한 말만 남아 있었다.
은유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혹시 다른 안내가 더 오지 않을까 싶어 새로고침을 몇 번 눌러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
다음 날.
은유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늦을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지하철 연착.
길을 헤매는 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
전부 계산에 넣었다.
강남역에 도착했을 때도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은유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지 않았다.
옷에 커피 냄새가 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신 건물 맞은편에서 사람들만 한동안 바라봤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회사원들이 종이컵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택배기사가 상자를 들고 나왔다.
누군가는 뛰었고,
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걸었다.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은유도 그 건물을 올려다봤다.
17층.
유리창이라 안은 보이지 않았다.
⸻
오후 2시 52분.
은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안내데스크.
엘리베이터.
화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 번 봤다.
셔츠 깃.
머리카락.
주름.
다 괜찮았다.
손끝으로 셔츠 소매를 한 번만 정리했다.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
17층.
문이 열리자 공기가 달라졌다.
아래층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복도는 길지 않았다.
사무실도 많지 않았다.
맨 끝.
검은색 문 하나.
문패는 없었다.
회사 이름도 없었다.
초인종도 없었다.
문 옆 벽에 작은 숫자만 붙어 있었다.
은유는 잠시 멈춰 섰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2시 57분.
조금 일렀다.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복도 끝 창문으로 오후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누군가 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은유는 괜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2시 58분.
아직도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도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 한 줄이 다시 떠올랐다.
시간을 지키라는 말이지,
일찍 오라는 말은 아니었다.
은유는 그대로 기다렸다.
⸻
2시 59분.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문 안에서도 아무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은유는 문손잡이를 한 번 바라봤다.
잠겨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스쳤다.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괜한 행동 하나가 평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손을 뻗지는 않았다.
⸻
휴대폰 액정이 다시 켜졌다.
2시 59분 50초.
은유는 화면을 끄고 가방 안에 넣었다.
십 초.
아홉.
여덟.
숫자를 세지는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정각.
철컥.
안에서 문이 먼저 열렸다.
낮고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은유는 처음으로 그 남자를 보았다.
사무실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불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벽면을 채운 책장.
그리고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회색 도로.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기보다, 판단을 내리는 공간 같았다.
강혁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악수도 청하지 않았다.
명함도 없었다.
그저 은유를 한 번 바라본 뒤 짧게 말했다.
“앉으세요.”
은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았다.
가방은 의자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강혁은 아무 말 없이 지원서를 펼쳤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방 안에 작게 울렸다.
십 초.
은유는 기다렸다.
이십 초.
강혁은 여전히 지원서를 보고 있었다.
삼십 초.
은유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강혁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늦지 않았네요.”
“시간을 지켰습니다.”
“일찍 오셨더군요.”
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혁은 창밖을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
“복도에 오래 계셨습니다.”
은유는 그제야 깨달았다.
복도에도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는 걸.
“문을 두드리지 않더군요.”
“시간 전이었으니까요.”
“들어와도 됐을 수도 있습니다.”
“안 된다고도 안 쓰여 있었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안 들어왔습니다.”
“확신이 없었습니다.”
강혁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확신이 없으면 기다리는 편입니까.”
은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한 번 머릿속에서 굴린 뒤 입을 열었다.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번에는.”
“기다리는 편이 손해가 적다고 판단했습니다.”
강혁은 지원서에 시선을 내렸다.
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손해를 계산하는 사람입니까.”
“네.”
“이익도.”
“그것도요.”
강혁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원서를 한 장 넘겼다.
실제로는 넘길 내용이 없었다.
그는 빈 뒷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덮었다.
“자기소개.”
지원서를 손끝으로 밀었다.
“‘조건에 저를 맞춘 게 아닙니다.’”
은유는 자신의 글을 내려다봤다.
“‘제가 이 조건에 맞았을 뿐입니다.’”
강혁이 이어 읽었다.
“이 문장을 쓴 이유가 뭡니까.”
“그게 사실이니까요.”
“사실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까?”
“필요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아직 모르겠습니다.”
강혁의 시선이 처음으로 조금 길어졌다.
“모르는데도 그렇게 썼군요.”
“그래서 짧게 썼습니다.”
은유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길게 쓰면 변명처럼 보일 것 같아서.”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강혁은 그녀를 바라봤다.
은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 다 먼저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후 강혁이 지원서를 덮었다.
“오늘은 질문보다 관찰을 많이 하게 되네요.”
그 말이 은유를 향한 것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었다.
강혁은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예정했던 순서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강혁은 시계를 한 번 본 뒤 지원서를 덮었다.
원래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경험.
계약 조건.
생활 패턴.
준비해 둔 항목은 많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유 역시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정적이 길어졌다.
창밖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희미하게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강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앞으로 나오더니 창가까지 걸어갔다.
등을 돌린 채 한동안 밖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은유는 그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지금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기다려야 할까.
잠깐의 망설임이 스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혁이 다시 돌아섰다.
“지원자가 많았습니다.”
첫 질문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이었다.
“그렇겠죠.”
“대부분은 비슷했습니다.”
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혁이 말을 이었다.
“자기소개를 읽으면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그런 글 많이 써봤어요.”
강혁의 시선이 은유에게 멈췄다.
“써봤다고요.”
“취업 준비하면서요.”
은유는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요.”
잠시 침묵.
“효과는 없었습니다.”
강혁은 의자 등받이에 손끝을 올렸다.
“이번에는 안 그랬군요.”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왜.”
“그렇게 쓰면 저도 수백 명 중 하나가 될 것 같아서요.”
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유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강혁은 천천히 책상으로 돌아왔다.
지원서를 다시 펼쳤다.
사진.
이름.
자기소개.
같은 문장을 다시 훑었다.
처음 읽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문장보다 사람 쪽으로 시선이 더 오래 머물렀다.
은유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안한 얼굴도 아니었다.
손가락 끝이 무릎 위에서 한 번 포개졌다가 다시 풀렸다.
강혁은 그 작은 움직임을 봤다.
“긴장하십니까.”
은유는 잠깐 웃었다.
“당연하죠.”
“안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안 보이려고 했으니까요.”
그 대답에 강혁은 짧게 시선을 내렸다.
지원서 위에 놓인 펜을 손끝으로 한 번 굴렸다.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예정보다 일찍 끝난 면접이었다.
은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멈췄다.
뒤돌아본 것은 아니었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강혁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서류를 다시 읽으신 건… 원래도 그러세요?”
짧은 정적.
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유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사무실 안에는 다시 적막만 남았다.
문이 닫혔다.
사무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강혁은 그대로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은유가 앉아 있던 의자를 한 번 바라본 뒤, 천천히 책상으로 돌아왔다.
지원서를 다시 펼쳤다.
사진.
이름.
나이.
체중.
조건.
전부 처음 봤을 때와 같았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같은 지원서가 조금 전과 다르게 읽혔다.
강혁은 펜을 들었다.
면접이 끝나면 항상 같은 순서였다.
짧은 메모.
평가.
다음 지원자.
오늘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펜 끝이 종이 위에 닿았다.
잠시 뒤 한 줄이 적혔다.
테스트 필요.
강혁은 다음 줄로 내려갔다.
평소라면 여기부터 빨랐다.
반응.
판단.
위험 요소.
확인 항목.
몇 단어면 충분했다.
커서가 멈추듯 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방금 면접을 머릿속으로 다시 훑었다.
복도에서 기다렸다.
시간 전에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침묵을 견뎠다.
필요 없는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질문을 돌려보냈다.
긴장은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전부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느 하나도 평가 항목 안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강혁은 펜을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종이를 꺼냈다.
새 면접 평가표였다.
첫 번째 항목.
순응성.
잠시 바라보다 줄을 그어 지웠다.
두 번째.
판단력.
쓰려다 멈췄다.
세 번째.
계산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단어도 끝내 적지 않았다.
종이를 구겨 휴지통에 던졌다.
툭.
작은 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렸다.
강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상한 지원자는 있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꾸며내는 사람도 수도 없이 봤다.
하지만 오늘처럼,
어느 쪽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책상 위 휴대폰 화면이 잠깐 켜졌다.
다음 면접 예정 알림.
오후 4시.
강혁은 화면을 한 번 본 뒤 알림을 지웠다.
다음 지원서를 열지 않았다.
다시 서은유의 지원서를 열었다.
자기소개 한 줄이 화면에 떠올랐다.
조건에 저를 맞춘 게 아닙니다.
제가 이 조건에 맞았을 뿐입니다.
강혁은 그 문장을 끝까지 읽고도 화면을 넘기지 않았다.
손끝이 마우스 위에서 멈춰 있었다.
몇 초가 흘렀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는 천천히 메모 창을 다시 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창을 닫지도 못했다.
그저 커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처음 생긴 문제는,
저 지원자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아니었다.
무슨 기준으로 확인해야 하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그건 처음 겪는 종류의 오류였다.
3화 ― 검증
강혁은 모니터 한가운데 떠 있는 메모장을 바라봤다.
테스트 필요.
네 글자.
어제 면접이 끝난 뒤 적어놓은 그대로였다.
지우려다 몇 번이나 커서를 올렸다.
지우지 못했다.
다른 말로 바꿀 수도 없었다.
‘확인.’
‘관찰.’
‘판단.’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메모장을 닫지 않은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 없음.
익숙한 화면이었다.
문장을 길게 쓰지 않았다.
[모레 오후 2시. 같은 장소.]
[이번에는 신체 접촉이 포함됩니다.]
[참여 여부를 오늘 자정까지 회신하십시오.]
전송.
메시지가 사라졌다.
강혁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바로 잡았다.
소매 끝도 한 번 정리했다.
그 버릇이 나온 뒤에도 방 안은 그대로 조용했다.
메모장은 여전히 빈칸을 남긴 채 깜빡이고 있었다.
⸻
은유는 저녁을 막 마치려던 참이었다.
컵라면 뚜껑을 덮어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발신자 없음.
문자를 읽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번에는 신체 접촉이 포함됩니다.
은유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가만히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면접은 끝났다.
질문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체 접촉.
무엇을 한다는 걸까.
어디까지가 테스트일까.
겁이 나지 않는건 아니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몸을 맡긴다는 건, 아무리 스스로 원했던 일이라도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안 가도 된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스쳤다.
아직 계약도 아니었다.
거절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누가 비난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뒤로 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면접 마지막 장면만 자꾸 떠올랐다.
“왜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까.”
“손해가 적다고 판단해서요.”
“긴장 안 했습니까.”
“안 보이려고 했으니까요.”
그 질문들보다 더 선명한 건,
질문 사이사이 길게 이어지던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
사람을 읽으려는 눈.
아니.
읽어내지 못해서 더 오래 바라보던 눈.
은유는 천천히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답장은 짧았다.
[참여하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에도 화면을 바로 끄지 못했다.
이번에는 캡처하지도 않았다.
지우지도 않았다.
복원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뒤에는, 더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대폰 화면이 천천히 꺼졌다.
은유는 식어버린 컵라면을 내려다봤다.
젓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대신 가슴 한가운데가 아주 조금 뜨거워져 있었다.
다음 날.
은유는 오후 한 시 오십 분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끝만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다.
17층.
복도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회색 벽.
검은 문.
문패도, 초인종도 없었다.
은유는 문 앞에서 멈췄다.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이번에도 두드리지 않았다.
잠시 뒤.
철컥.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강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책상 뒤가 아니었다.
문을 연 채 은유를 잠깐 바라본 뒤 짧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은유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사무실 안은 달라져 있었다.
책상은 벽 쪽으로 밀려 있었고, 가운데 공간이 비어 있었다.
회의실처럼 꾸며진 것도, 상담실처럼 편안한 것도 아니었다.
불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공간 전체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강혁은 은유가 방 안을 훑어보는 시간을 막지 않았다.
대신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은 면접이 아닙니다.”
은유가 그를 바라봤다.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알겠습니다.”
강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탁자 위에서 서류 한 장을 집어 은유 앞으로 내밀었다.
“읽어보세요.”
은유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길지 않았다.
오늘 진행되는 절차에 대한 안내와 중단 의사 표현, 종료 기준 같은 기본적인 내용만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은유는 끝까지 읽은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읽었다.
강혁은 재촉하지 않았다.
“질문 있습니까.”
은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확인하지 않고 서명하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은유는 다시 종이를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었다.
강혁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몇 분 뒤.
은유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괜찮습니까?”
강혁이 물었다.
“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읽고 이해한 뒤에 결정했으니까요.”
강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은유는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종이를 건네자 강혁은 바로 치우지 않았다.
서명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파일에 넣었다.
“오늘 제가 보는 건 잘하는지를 보는게 아닙니다.”
은유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지시를 들었을 때 어떻게 판단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은유는 짧게 대답했다.
“네.”
“억지로 버틸 필요도 없습니다.”
강혁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높이를 유지했다.
“불편하면 말하세요.”
“말하면.”
은유가 처음으로 질문했다.
“끝입니까?”
강혁은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그 시점부터 다시 판단합니다.”
은유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녀가 기대했던 답도, 예상했던 답도 아니었다.
강혁은 시계를 한 번 바로잡았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비어 있는 공간을 가볍게 가리켰다.
“이쪽으로 오세요.”
은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강혁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 침묵은 면접의 침묵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시작되기 직전의 침묵이었다.
강혁이 은유 앞에 섰다.
설명은 없었다.
“무릎.”
한 단어였다.
은유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 말이 정말 자신에게 내려진 거라는 사실을, 몸이 받아들이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강혁은 바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와 자세를 살폈다.
무릎 사이 거리.
허리가 세워진 각도.
손의 위치.
턱과 시선.
“손, 허벅지 위.”
은유의 손이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손바닥을 펴세요.”
펼쳤다.
“나를 보세요.”
은유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이 자세로 그를 올려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높이의 차이가 이렇게 크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강혁은 그 시선을 잠시 마주 봤다.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떨어져 서서, 방금 만들어진 그림을 눈에 담듯 오래 바라봤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은유와,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
강혁이 검은 커프를 들고 왔다.
“손.”
은유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혁은 채우기 전에 물었다.
“계속합니까?”
“네.”
커프가 손목을 감쌌다. 완전히 조이지는 않았다.
움직임을 제한하되 통증을 주는 정도는 아니었다.
강혁이 손가락을 커프 안쪽으로 넣어 조임을 확인했다.
손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살갗과 가죽 사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여유를 재는 손길이었다.
은유는 그 순간 자신이 정말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는 걸 실감했다.
지금까지의 자세 교정은 스스로 풀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강혁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세요.”
손을 쓰지 못하는 상태로 일어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강혁의 손이 팔을 붙잡아 바로 세웠다.
은유는 그 손에 기대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오히려 한 번 더 휘청였다.
“도움까지 거부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습니다.”
은유는 짧게 숨을 삼켰다.
“네.”
이번엔 그 손에 무게를 조금 실었다.
강혁이 얇은 검은 천을 꺼냈다.
“시야를 가립니다.”
바로 씌우지 않았다.
“허용합니까?”
은유는 천을 봤다. 그리고 그를 봤다.
“허용합니다.”
시야가 사라졌다.
세상이 갑자기 좁아졌다. 남은 건 손목에 닿은 가죽의 감촉, 발밑의 바닥, 그리고 그의 발소리뿐이었다.
강혁이 그녀를 낮은 의자 앞으로 이끌었다.
손으로 몸의 방향을 잡아 세웠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가까이 있다는 것만, 발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로 짐작했다.
뭔가가 손등에 닿았다.
납작하고, 서늘하고, 조금 단단한 것.
“패들입니다.”
강혁이 말했다.
“다섯 번입니다. 매번 숫자를 말하세요. 강도를 낮추고 싶으면 숫자 대신 노랑.”
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으로.”
“네.”
“엎드려.”
첫 번째가 왔다.
예상보다 컸다. 소리보다 감각이 먼저 왔고, 은유는 순간 숨을 참았다.
숫자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강혁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숫자.”
“…하나.”
두 번째.
이번엔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준비한 만큼 오히려 더 긴장했다.
순간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이 더 힘들었다.
“둘.”
세 번째에서 목소리가 흔들렸다.
아프지 않은 척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랑을 말하지도 않았다.
강혁이 물었다.
“계속할 수 있습니까?”
은유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자기 몸의 반응을 먼저 확인했다.
떨림, 열기, 숨의 속도.
“할 수는 있습니다.”
“하고 싶습니까?”
질문이 바뀌었다.
시야가 가려진 채라, 은유는 오히려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네.”
네 번째.
이전보다 강도가 조금 높았다.
숫자를 말하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넷.“
강혁은 다섯 번째를 남긴 채 멈췄다.
은유는 기다렸다.
시간이 길어졌다.
패들이 다시 오지 않았다.
결국 은유가 먼저 물었다.
“마지막은요?”
그의 계획에 없던 질문이었다.
강혁은 그녀가 참았다는 사실보다, 끝나지 않은 걸 스스로 요구했다는 사실에 더 오래 걸렸다.
“왜 원합니까?”
“다섯 번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건 이유가 아닙니다.”
침묵이 흘렀다.
은유는 그 침묵 안에서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이유를 찾으려 했다.
“끝까지 받고 싶습니다.”
강혁이 다섯 번째를 집행했다.
가장 센 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녀가 스스로 원한다고 인정한 뒤에 받는 첫 타격이었다.
숨이 짧게 끊겼다.
엉덩이에 뜨거운 열감이 올라왔다.
강혁은 곧바로 천을 풀지 않았다.
“상태.”
은유는 숨을 골랐다.
“아픕니다.”
잠깐의 틈.
“그런데 괜찮습니다.”
“후회합니까?”
“아니요.”
강혁이 시야를 가린 천을 풀었다.
빛이 다시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는 손목의 커프를 풀며 붉게 남은 압박 자국을 확인했다.
엄지로 피부를 짧게 눌러봤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일어나세요.”
은유가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엔 그가 팔을 붙잡았을 때 버티지 않았다.
그 힘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강혁은 평가를 설명하지 않았다.
물 한 잔을 건넸다.
은유가 그것을 마시고, 숨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테스트는 끝났습니다.”
“결과는 언제 알려주시나요?”
강혁은 이미 정한 상태였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오십시오. 계약서를 준비해두겠습니다.”
은유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안도와 기대가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강혁은 메모장을 열었다.
테스트 필요.
그 네 글자를 지웠다.
새로 적은 말은 짧았다.
계약 진행.
그 아래 칸이 남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테스트 결과를 적는 칸이었다.
강혁은 그 칸을 채우지 못했다.
통증을 잘 견뎌서도 아니었다.
명령을 잘 따라서도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다른 문장이었다.
끝까지 받고 싶습니다.
강혁은 그 말을 몇 번 다시 떠올렸다.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는 이유를 대지 않았다.
그저 원한다고만 했다.
그는 그 대답을 평가 항목 어디에도 넣을 수 없었다.
펜을 내려놓았다.
메모장을 닫지 않은 채, 그는 오래 화면을 바라봤다.
revi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