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서브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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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By:  케사르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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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통제를 추구하는 Dom 최강혁은 최고의 Sub를 찾기 위해 공개 모집을 시작하고, 638명의 지원자 중 서은유를 선택한다. 조건과 계약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욕망과 감정으로 변한다. 최고의 상대가 아니라, 왜 하필 서로여야 하는지를 찾아가는 현대 BDSM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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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짱이
베짱이
은유가 최고의 서브이길!
2026-08-25 17: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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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Chapters
최고의 서브를 구합니다
1화. 최고의 조건, 최고의 서브 "최고의 조건. 최고의 서브." 은유는 그 문장을 세 번 다시 읽었다. 화면 속 공고는 광고라기보다 계약서에 가까웠다. 나이 25~29세. 키 160~168. 체중 45~52kg. 비흡연자. 문신·피어싱 없을 것. 계약 기간 6개월. 전세 보증금 지원(최대 2억). 월 급여 별도 협의. 조건은 상세했다. 사람은 없었다. ⸻ 은유는 그 조건들을 하나씩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조건이 아니라, 조건을 쓴 사람을 읽는 눈으로. 체형까지 세밀하게 적어둔 이유가 뭘까. 보통은 이런 조건일수록 대충 얼버무린다. '예쁘고 어린 사람.' 그런데 이 사람은 숫자로 못박았다. 허용 범위, 제외 항목, 예외 없음. 취향이 확고하다는 뜻이거나, 취향조차 관리 대상으로 다룬다는 뜻이었다. 은유는 뭐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다음으로 넘어갔다. 급여는 협의였다. 그런데 전세 보증금은 최대 2억이라는 숫자가 확정으로 박혀 있었다. '돈에는 별 미련이 없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련이 없는 게 아니라, 협상 자체를 놓치기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채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댓글 창은 이미 수백 개였다. *미친 조건이네ㅋㅋ 전세 2억을 왜 줘* *이거 사기 아니야?* *나 지원함ㅎㅎ 궁금해서* 의심하는 사람들. 장난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지원서만 넣고 사라진 사람들. 은유는 세 번째 부류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침묵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의심하지도, 장난치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사라진 사람들. 그들도 자신처럼 어딘가 걸린 게 있었던 걸까. 은유는 그 생각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대신 스크롤을 내리다 멈췄다. 댓글 정렬을 최신순에서 인기순으로 바꿨다. 가장 많이 눌린 댓글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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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첫날은 아무렇지 않았다.어차피 수백 명 중 하나다.답이 안 와도 이상할 게 없다고, 은유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둘째 날은 조금 달랐다.일부러 확인하지 않으려고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뒀다.세 시간도 못 버티고 다시 꺼냈다.셋째 날 밤, 은유는 공고를 다시 검색했다.혹시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공고가 내려간 건 아닐까.혹은 자신이 이미 걸러져서 알림조차 안 오는 건 아닐까.공고는 그대로 있었다.지원자 수만 계속 늘어 있었다.수백 명 중 하나.이불 속에서 은유는 낮에 읽었던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연기할 수 있는 사람 말고, 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이상하게, 그 말은 잊히지 않았다.나흘째 새벽.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 없음.은유는 잠긴 눈으로 화면을 봤다.[1차 서류 합격을 안내드립니다.][2차는 대면 면접입니다.][일시와 장소는 확정 24시간 전 개별 통보됩니다.]메시지는 짧았다.축하한다는 말도, 인사말도 없었다.그리고 마지막 한 줄.지각자는 그 자리에서 자동 탈락 처리됩니다.예외는 없습니다.은유는 그 문장을 두 번 더 읽었다.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런데 그 한 줄만으로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누군가 이미 정확히, 흔들림 없이 규칙을 정해놓았다는 감각.은유는 그 메시지를 캡처했다.캡처해서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다.사진첩을 열어 방금 찍은 화면을 다시 들여다봤다.지웠다.몇 초 뒤, 휴지통에서 다시 복원했다.'이게 뭐라고.'댓글에도, 의심에도, 흔들리지 않던 사람.그런데 그 완벽한 통제 사이에 딱 한 번, 서두른 흔적이 남은 문장 하나.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그 틈, 나만 본 걸까.''아니면 다들 봤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까.'은유는 몸을 돌려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낮에 떠올랐던 대답을, 이번에는 밀어내지 않았다.이 남자를 만나면, 그 대답이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혹은 자신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도.강혁은 모니터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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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면접 안내 문자는 전날 밤 열한 시를 조금 넘겨 도착했다.발신자 없음.[오후 3시, 강남 OO빌딩 17층.][지각 시 자동 탈락. 예외 없음.]끝이었다.주소도, 시간도.필요한 말만 남아 있었다.은유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혹시 다른 안내가 더 오지 않을까 싶어 새로고침을 몇 번 눌러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다음 날.은유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늦을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나갔다.지하철 연착.길을 헤매는 일.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전부 계산에 넣었다.강남역에 도착했을 때도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은유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지 않았다.옷에 커피 냄새가 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대신 건물 맞은편에서 사람들만 한동안 바라봤다.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회사원들이 종이컵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택배기사가 상자를 들고 나왔다.누군가는 뛰었고,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걸었다.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은유도 그 건물을 올려다봤다.17층.유리창이라 안은 보이지 않았다.⸻오후 2시 52분.은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로비는 생각보다 평범했다.안내데스크.엘리베이터.화분.특별한 것은 없었다.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 번 봤다.셔츠 깃.머리카락.주름.다 괜찮았다.손끝으로 셔츠 소매를 한 번만 정리했다.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17층.문이 열리자 공기가 달라졌다.아래층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복도는 길지 않았다.사무실도 많지 않았다.맨 끝.검은색 문 하나.문패는 없었다.회사 이름도 없었다.초인종도 없었다.문 옆 벽에 작은 숫자만 붙어 있었다.은유는 잠시 멈춰 섰다.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2시 57분.조금 일렀다.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복도 끝 창문으로 오후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엘리베이터가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누군가 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은유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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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사무실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불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책상 하나.의자 두 개.벽면을 채운 책장.그리고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회색 도로.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기보다, 판단을 내리는 공간 같았다.강혁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그는 일어나지 않았다.악수도 청하지 않았다.명함도 없었다.그저 은유를 한 번 바라본 뒤 짧게 말했다.“앉으세요.”은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았다.가방은 의자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강혁은 아무 말 없이 지원서를 펼쳤다.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방 안에 작게 울렸다.십 초.은유는 기다렸다.이십 초.강혁은 여전히 지원서를 보고 있었다.삼십 초.은유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강혁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늦지 않았네요.”“시간을 지켰습니다.”“일찍 오셨더군요.”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강혁은 창밖을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복도에 오래 계셨습니다.”은유는 그제야 깨달았다.복도에도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는 걸.“문을 두드리지 않더군요.”“시간 전이었으니까요.”“들어와도 됐을 수도 있습니다.”“안 된다고도 안 쓰여 있었죠.”짧은 침묵이 흘렀다.“그런데 안 들어왔습니다.”“확신이 없었습니다.”강혁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확신이 없으면 기다리는 편입니까.”은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질문을 한 번 머릿속에서 굴린 뒤 입을 열었다.“상황에 따라 다릅니다.”“이번에는.”“기다리는 편이 손해가 적다고 판단했습니다.”강혁은 지원서에 시선을 내렸다.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손해를 계산하는 사람입니까.”“네.”“이익도.”“그것도요.”강혁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원서를 한 장 넘겼다.실제로는 넘길 내용이 없었다.그는 빈 뒷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덮었다.“자기소개.”지원서를 손끝으로 밀었다.“‘조건에 저를 맞춘 게 아닙니다.’”은유는 자신의 글을 내려다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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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강혁은 모니터 한가운데 떠 있는 메모장을 바라봤다.테스트 필요.네 글자.어제 면접이 끝난 뒤 적어놓은 그대로였다.지우려다 몇 번이나 커서를 올렸다.지우지 못했다.다른 말로 바꿀 수도 없었다.‘확인.’‘관찰.’‘판단.’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그는 결국 메모장을 닫지 않은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발신자 없음.익숙한 화면이었다.문장을 길게 쓰지 않았다.[모레 오후 2시. 같은 장소.][이번에는 신체 접촉이 포함됩니다.][참여 여부를 오늘 자정까지 회신하십시오.]전송.메시지가 사라졌다.강혁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바로 잡았다.소매 끝도 한 번 정리했다.그 버릇이 나온 뒤에도 방 안은 그대로 조용했다.메모장은 여전히 빈칸을 남긴 채 깜빡이고 있었다.⸻은유는 저녁을 막 마치려던 참이었다.컵라면 뚜껑을 덮어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발신자 없음.문자를 읽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하지만 마지막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이번에는 신체 접촉이 포함됩니다.은유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가만히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이번에는.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면접은 끝났다.질문도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번에는 신체 접촉.무엇을 한다는 걸까.어디까지가 테스트일까.겁이 나지 않는건 아니었다.낯선 사람 앞에서 몸을 맡긴다는 건, 아무리 스스로 원했던 일이라도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창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안 가도 된다.’그 생각이 처음으로 스쳤다.아직 계약도 아니었다.거절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누가 비난할 일도 아니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뒤로 가지 않았다.머릿속에는 면접 마지막 장면만 자꾸 떠올랐다.“왜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까.”“손해가 적다고 판단해서요.”“긴장 안 했습니까.”“안 보이려고 했으니까요.”그 질문들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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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이쪽으로 오세요.” 은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강혁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 침묵은 면접의 침묵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시작되기 직전의 침묵이었다. 강혁이 은유 앞에 섰다. 설명은 없었다. “무릎.” 한 단어였다. 은유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 말이 정말 자신에게 내려진 거라는 사실을, 몸이 받아들이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강혁은 바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와 자세를 살폈다. 무릎 사이 거리. 허리가 세워진 각도. 손의 위치. 턱과 시선. “손, 허벅지 위.” 은유의 손이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손바닥을 펴세요.” 펼쳤다. “나를 보세요.” 은유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이 자세로 그를 올려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높이의 차이가 이렇게 크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강혁은 그 시선을 잠시 마주 봤다.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떨어져 서서, 방금 만들어진 그림을 눈에 담듯 오래 바라봤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은유와,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 강혁이 검은 커프를 들고 왔다. “손.” 은유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혁은 채우기 전에 물었다. “계속합니까?” “네.” 커프가 손목을 감쌌다. 완전히 조이지는 않았다. 움직임을 제한하되 통증을 주는 정도는 아니었다. 강혁이 손가락을 커프 안쪽으로 넣어 조임을 확인했다. 손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살갗과 가죽 사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여유를 재는 손길이었다. 은유는 그 순간 자신이 정말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는 걸 실감했다. 지금까지의 자세 교정은 스스로 풀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강혁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세요.” 손을 쓰지 못하는 상태로 일어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강혁의 손이 팔을 붙잡아 바로 세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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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계약서는 열두 장이었다.강혁은 그중 아홉 장을 파일에 넣었다.책상 위에는 세 장만 남겼다.잠시 뒤.문이 두 번 울렸다.똑.똑.강혁은 시계를 봤다.오후 두 시.“들어와요.”문이 열렸다.은유가 안으로 들어왔다.어제와 같은 옷차림은 아니었다.하지만 걸음은 비슷했다.빠르지도,느리지도 않았다.강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은유도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책상 앞에 멈춰 섰다.“앉아요.”은유가 의자에 앉았다.허리를 곧게 세웠다.등받이에는 기대지 않았다.강혁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책상 위 서류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계약서에요.“은유가 첫 장을 넘겼다.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강혁은 말을 보태지 않았다.은유도 서둘러 읽지 않았다.한 줄.또 한 줄.끝까지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읽었다.강혁은 그녀를 보지 않는 척했다.하지만 시선은 종종 손끝으로 향했다.어느 문장에서 멈추는지.어디를 다시 읽는지.그것만 조용히 확인했다.몇 분 뒤.은유가 마지막 장을 덮었다.강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질문 있어요?”은유는 잠시 생각했다.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종이를 한 번 더 내려다봤다.“있습니다.”강혁은 말없이 기다렸다.“전세 보증금.”은유가 조항을 손끝으로 짚었다.“계약이 끝나면요.”“협의합니다.”짧은 대답이었다.“협의가 안 되면.”강혁은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은유를 한 번 바라봤다.“그때 다시 얘기하죠.“은유는 더 묻지 않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강혁은 그 반응을 오래 바라봤다.보통은 여기서 더 물었다.언제까지인지.얼마를 돌려받는지.확실한 보장이 있는지.이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납득해서가 아니었다.더 물어도 지금은 답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 사람처럼,거기서 질문을 멈췄다.강혁은 시선을 거뒀다.다음 장을 펼쳤다.“집은 따로 마련해놨어요.”은유가 고개를 들었다.“오늘 안으로 주소 보낼 겁니다.“잠깐의 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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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은유는 의자를 밀고 천천히 일어섰다.강혁은 계약서를 정리하고 있었다.종이를 가지런히 맞추던 손이 잠깐 멈췄다.은유가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천천히 허리를 숙였다.“잘 부탁드립니다.”짧은 인사였다.그리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주인님.”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강혁은 고개를 들었다.호칭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그를 멈춰 세운 건 다른 것이었다.시키기 전에.지금까지는 늘 그랬다.계약을 맺고,호칭을 정하고,상대가 그다음에 불렀다.순서는 항상 자신이 만들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은유는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다.허락도 구하지 않았다.계약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그 호칭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꺼냈다.강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빠르네.”은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계약은 이미 시작됐으니까요.”짧은 대답이었다.설명도,의도도,덧붙이지 않았다.강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은유는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앞으로도 그렇게 부르겠습니다.”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이미 한 번 불린 호칭을,이제 와서 막는 것도 이상했다.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이번 침묵은 어색해서가 아니었다.둘 다,방금 관계 하나가 바뀌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강혁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책상 서랍을 열었다.안에서 작은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가져.”은유는 봉투를 집었다.생각보다 묵직했다.강혁이 말했다.“열어.”은유는 봉투를 열었다.안에는 열쇠 하나와 접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종이를 펼쳤다.주소.간단한 비밀번호.그 아래에는 입주 날짜만 적혀 있었다.은유는 끝까지 읽고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강혁이 담담하게 말했다.“오늘부터 거기서 지내.”설명은 없었다.왜 그 집인지.왜 따로 마련했는지.말하지 않았다.계약을 이행하는 사람처럼,필요한 사실만 전달했다.은유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강혁은 이어 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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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입주 첫날현관 앞에서 은유는 잠깐 멈췄다.도어락 화면에 손끝을 올렸다.비밀번호는 이미 외웠다.며칠 새 종이에 적어두고 몇 번이나 들여다본 숫자였다.삐빅.문이 열렸다.새 신발장 냄새, 새 페인트 냄새가 먼저 훅 끼쳤다.거실은 넓었다.소파, 러그, TV.주방엔 아일랜드 식탁까지 있었다.침실 두 개, 드레스룸, 욕실도 두 개.전부 갖춰져 있었다.그런데 사람 냄새는 없었다.새로 지은 모델하우스 같았다.걸어 다니면서도, 자기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은유는 캐리어를 세워두고 짐을 하나씩 풀었다.옷을 옷걸이에 걸었다.칫솔을 컵에 꽂았다.텅 빈 싱크대에 머그컵 하나를 올려놓았다.작은 흔적들이었다.그런데도 이 공간이 자기 것 같지 않았다.거실 창밖을 봤다.낯선 동네의 낯선 골목이 내려다보였다.휴대폰이 울렸다.[10분 뒤.]그게 다였다.은유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잠깐 서 있었다.그리고 다시 캐리어 쪽으로 갔다.이미 정리한 옷걸이 간격을 다시 맞췄다.칫솔 위치를 컵 정중앙으로 고쳐놓았다.머그컵 손잡이 방향도 한 번 더 돌려놨다.전부 이미 끝난 정리였다.삐빅.도어락이 열렸다.강혁이 들어왔다.축하한다는 말은 없었다.집이 마음에 드냐는 질문도 없었다.그는 은유부터 봤다.얼굴, 자세, 표정.짐을 얼마나 풀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시선이었다."지낼 만해?""네."강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강혁은 인테리어를 보는 사람처럼 걷지 않았다.옷장 문을 열었다.앞쪽에는 자주 입을 옷들이 걸려 있었다.뒤쪽엔 계절이 지난 옷과 두꺼운 코트가 밀려나 있었다.이미 정리된 순서였다.강혁은 그 순서를 잠깐 눈으로 훑고 문을 닫았다.주방으로 갔다.냉장고 문을 열었다.안은 텅 비어 있었다.생수 몇 병이 전부였다."먹은게 없네?“은유가 그 뒤에 서 있다가 대답했다."...네."“먼저 먹어.”“네.”강혁이 냉장고 문을 닫았다."먹었으면 보고."은유가 그를 봤다.계약서 어디에도 없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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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오전 여섯 시.강혁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끝낸 뒤, 서재로 들어갔다.모니터 세 대에 시장이 떠올랐다.뉴욕.나스닥.국내 선물.보유 종목.숫자들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강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차트를 훑었다.매도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가 그대로 창을 닫았다.팔 이유가 없었다.예전 같으면 달랐다.오전 내내 시장에 매달렸고,한 번의 판단으로 몇 달이 바뀌었다.수익이 나도 잠을 못 잤고,손실이 나면 다시 계산했다.지금은 몇 억이 움직여도 하루가 달라지지 않았다.오전 열 시 오십이 분.강혁은 마지막 모니터까지 껐다.서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그는 빈 머그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커피를 다시 내렸다.휴대폰 화면이 켜졌다.새 알림은 없었다.당연했다.보고는 식사 후라고 말했다.아직 점심도 되지 않았다.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맞은편 아파트 창문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잠시 뒤.그는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손끝이 화면을 한 번 쓸었다.곧바로 화면을 껐다.첫날이다.확인할 게 많은 것뿐이다.그렇게 생각했다.그러고도 휴대폰은 식탁 위가 아니라,자신의 손 닿는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정오를 조금 넘겼을 때였다.휴대폰이 짧게 울렸다.강혁은 화면을 확인했다.서은유. 처음 저장된 이름이었다.문자는 한 줄뿐이었다.점심 식사를 마쳤습니다.사진도 없었다.메뉴도 없었다.몇 시에 먹었는지도 없었다.딱 한 줄.강혁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먹었으면 보고.자신이 그렇게 말했다.은유는 정확히 지켰다.틀린 건 없었다.그런데도 이상했다.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답장을 보냈다.뭘 먹었지.이번에는 답이 빨랐다.식빵 두 장과 우유를 먹었습니다.강혁의 시선이 멈췄다.식빵.우유.그게 전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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