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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남편의 친절에는 이유가 있다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5 13:49:56

백도겸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했다.

ㅡ “VIP 병동 18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오른쪽 끝에 보안 데스크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제 이름을 대세요. 안쪽 전용 복도로 안내해 줄 겁니다.”

ㅡ “복도 끝에 별도 상담실이 있습니다. 문에 적힌 번호는 1807호. 거기서 뵙죠.”

그때였다.

징징징.

손에 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

깜짝 놀라 화면을 내려다봤다.

부재중 전화 알림과 함께 문자가 연달아 떠 있었다.

[매너콜]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신 동안 강현 씨(010-XXXX-XXXX) 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2건)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지금.

나는 서둘러 통화 기록을 열었다. 화면에는 차강현의 부재중 전화 두 건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나는 곧장 차강현의 이름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엉켜 들었다.

ㅡ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강현 씨. 전화했었어요?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ㅡ “어, 우연아.”

ㅡ “너 좋아하는 멜론 사러 왔는데, 유바리 멜론이 다 팔렸다네.”

너무 예상치 못한 부분이라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아. 그래요? 아쉽네.”

ㅡ “백화점도 다 문을 닫은 시간이라, 다른 멜론이라도 괜찮아?”

나는 최대한 평소처럼 대답했다.

“……응. 다른 것도 괜찮아요.”

ㅡ “그럼 적당한 걸로 사 갈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자마자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바리 멜론이라.”

참 다정하기도 하지.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 하나를 사려고 문 닫을 시간까지 발품을 파는 남편이라니.

누가 봤다면 감동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몇 달 전이었다면 그랬을 테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차강현의 다정함에는 늘 이유가 있었다. 내 기분을 살피는 척하면서 원하는 걸 얻어 내고, 내 마음을 헤아리는 척하면서 제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고 갔다.

그러니 이런 친절이 반가울 리 없었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네가 나에 대한 모든 걸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엇에 기뻐하는지, 어떤 말에 마음이 풀리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전부.

아니, 어쩌면 잊은 게 아니라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고이 접어 두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연아, 자?”

차강현이었다.

나는 얼른 휴대폰 화면을 껐다. 조금 전까지 그를 의심하던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안 자요.”

“잘됐네.”

그리고 나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꽃다발이었다. 풍성하게 겹친 꽃잎 사이로 연한 초록색 잎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뭐야, 그거?”

나는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 뭘 물어.”

차강현이 피식 웃었다. 그는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물건들을 한쪽으로 밀고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병실에 꽃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리시안셔스의 꽃잎이 눈에 들어왔다. 겹겹이 포개진 꽃잎은 끝이 부드럽게 말려 있었다.

“마음에 들어? 너 꽃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이런 걸 언제 샀어요?”

“멜론 사러 갔다가.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기묘하게 저렸다.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날 생각하면서 골랐을 너를 사랑한 거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몇 번이나 크게 싸운 날에도 꽃 한 송이 없었으면서.

그토록 받고 싶었던 꽃다발을 드디어 오늘에서야.

“왜 그래. 표정이?”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놀라서요.”

“멜론 좀 먹어 봐, 제일 좋은 놈으로 달라고 했어.”

그가 꺼낸 건 한입 크기로 정갈하게 잘라 놓은 다이스 멜론이었다. 투명한 용기 안에 과육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얼른 먹어 봐. 입맛 없다고 또 안 먹지 말고.”

포크 끝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는 지금 내가 알고 있던 차강현을 통째로 꺼내 연기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게 무심했던 시간을 모조리 보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구는 꼴이 참으로 노골적이었다.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다시 예전처럼 나를 길들여 놓으려는 걸까.

내가 더는 그의 진심을 믿지 못하게 된 뒤에야 건네는 호의는 의심만 키울 뿐이었다. 참 우습고 지긋지긋한 일이었지만 이게 우리 부부의 현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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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12. 1807호

    그 순간,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찰칵. 문이 안으로 열렸다. “…….” 휠체어에 앉은 내 시선에서는 손등을 가로지르는 굵은 핏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실릴 때마다 손등의 힘줄이 희미하게 도드라졌다. 그 손의 주인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백도겸이 서 있었다. “들어오시죠.” 백도겸은 내 휠체어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몸을 비켜 문을 넓게 열었다. “…….” 나는 그가 비켜 선 틈으로 안쪽을 살폈다. 상담실이라고 들었는데, 일반적인 병원 면담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창가에는 낮은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서류를 펼쳐 놓기에도 넉넉해 보이는 커다란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복도를 지나오는 내내 개미새끼 한마리 구경하지 못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백도겸이 문을 닫았다. 철컥.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문은 왜 잠그시는거죠?” “방해받기 싫어서요.”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고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휠체어에 앉은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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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9. 업보 청산

    “…….” 검색 결과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백도겸 대표, 투자회사 대표, 국내외 부동산 투자, 호텔 및 물류 사업. 기사마다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그가 손을 댄 사업은 규모가 컸고, 그가 투자한 회사는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첫 번째 기사를 눌렀다. 〈Verdant 백도겸 대표, 대규모 투자 유치로 업계 주목〉 두 번째 기사에는 그가 인수한 호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세 번째 기사에는 해외 물류 기업과의 협력 소식이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 나는 사진 속 남자를 확대했다. 병실에서 마주쳤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ㅡ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ㅡ ’당하고만 있을 반푼이로는 안 보이는데.‘ 처음에는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해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꽤 정확하게 짚어 냈다. 남편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 그 사실을 들켰다는 걸 남편은 아직 모른다. “……백도겸.” 소리 내어 이름을 읽어 봤다. 그래서 차강현이 그토록 빌빌 기었구나 싶었다. 나는 다시 검색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단어를 덧붙였다. [흥신소]. 검색 결과가 주르륵 나타났다. 사람 찾기, 외도 증거 수집, 개인 신원 조사, 기업 관련 조사.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확인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차강현의 뒤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하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결혼 전부터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던 것, 투자 유치를 위해 내 이름을 어디까지 들먹였는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인 일들까지 모조리 다 파헤칠 수 있을까. 다만 흥신소를 통해 얻어 낸 증거가 법정에서 어디까지 효력이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나는 검색창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8.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

    “우연아!”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엄마가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뒤따라 들어온 아버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살폈다. “세상에, 우연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였다. “어디 봐. 의식은 제대로 있는 거야?”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엄마는 내 이마와 뺨을 번갈아 어루만지다가,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머리가 왜 이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가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뭘 하고 있었는가.” 낮은 목소리가 불호령처럼 떨어졌다. 우림리테일의 대표이사, 연우림. 창업주인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따 회사명을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우림리테일은 오랜 세월 유통업계에서 입지를 다져 온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운 나를 돌아봤다.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확인하는 순간, 굳게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내 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느냐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제가 더 세심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세심하게?” 아버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 “우연이를 자네랑 결혼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아빠.” 끼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이제 그만 나가줘요.” 아버지는 내가 아프다는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인어른, 제가 잘못했습니다.” 차강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우연이에게 더 잘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해. 헛물 켤 시간에 자네가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란 말이야.” 아버지는 차강현의 사업을 말 그대로 ’헛물‘이라 지칭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투자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7. 불행 끝에 만난 남자

    “보기 좋네요.” 백도겸이었다. “난데없이 도로에 뛰어들길래 반푼이 아닌가 했더니.”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놀란 기색이라도 보이면, 남자가 내 속내를 알아챘다는 사실을 차강현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혼잣말입니다.” 그가 재킷 소매를 매만지며 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 벌써 가시려고요?” 차강현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는데……. 대표님께서 직접 병원까지 동행 해주셨는데 제가 이대로 보내 드릴 수는 없죠. 따로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차강현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 앞에서는 언제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였으니까. “식사라.” “…….” “내 차가 당신의 아내를 친 게 뭐가 그리 감사할 일이라고.” 차강현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멈췄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실언했습니다.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는 잘 익은 벼처럼 연신 고개를 숙여 댔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내가 알던 차강현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대체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사업이 잘 풀린 뒤로 차강현은 늘 자신만만했다. 그 오만함마저 성공을 향한 확신처럼 보여 그를 사랑했었지. 그런 차강현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백도겸은 문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만 느릿하게 돌렸다. “연우연 씨.”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다음엔 신호부터 확인하고 뛰어드세요.” “…….” “달려오는 차도 못 피하면서, 준비는 제대로 해둬야 하지 않겠어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걱정인지 핀잔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준비라니. 나는 그 말에서 다른 의미를 읽었다. 당장 차강현에게 달려가 따져 묻는 대신, 그가 모르는 사이에 증거를 모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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