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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락희
선물 상자를 받아든 주율천은 뭔가가 심장 한구석을 빠르게 스치는 것 같았다. 아프다기보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상자 위에 리본이 정성스럽게 묶여 있었다.

온채아가 이 선물을 위해 얼마나 마음을 썼고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반면 주율천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했다.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더러운 속내를 품고 있었으니까.

주율천이 입을 열기 전에 온채아는 이미 현관 쪽으로 걸어가 베이지색 모직 코트를 걸치고 목도리를 둘렀다. 손바닥만 한 얼굴에 맑고 반짝이는 두 눈만 보였다.

그대로 문을 나섰는데 온채아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어색했다.

주율천이 물으려던 찰나 옆에 있던 심서정이 갑자기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소리를 질렀다.

“으악, 너무 아파.”

그는 다시 생각을 거두고 심서정을 자리에 앉혔다.

“무릎 많이 아파? 병원에 데려다줄게.”

“가기 싫어.”

심서정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주율천이 손에 든 상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긴. 채아 씨가 준 선물을 이렇게 소중하게 다루면서.”

“...”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정아, 난 이미 채아한테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했어.”

심서정이 눈을 크게 뜨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럼 나는? 율천이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채아 씨가 나랑 시윤이를 괴롭혀도 그냥 내버려 두겠단 말이야?”

“말했잖아. 채아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만해! 아직도 눈치 못 챘어? 너 지금 하는 말마다 채아 씨를 두둔하고 있어.”

말을 마친 심서정은 눈물범벅인 채로 일어나 주시윤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주율천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그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다른 사람이 온채아의 험담을 하는 걸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

눈이 끊겼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이틀 동안 내렸다.

온채아는 오전에 한의원에서 진료를 봤고 오후에 외국의 같은 업계 종사자가 선배에게 침술을 배우러 왔는데 선배가 급한 일이 생긴 바람에 그 일을 온채아에게 맡겼다.

오후 5시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옅은 화장을 했다.

온채아는 본래 미모가 뛰어나 살짝만 꾸며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오늘따라 집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걸 발견했다. 그 모자가 오늘 유난히 얌전했다.

“온채아 씨.”

온채아가 롱부츠를 신고 있는데 뒤에서 심서정이 웃으며 말했다.

“율천이 채아 씨를 선택할까요? 날 선택할까요?”

온채아는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웃었다.

“형님,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주씨 가문의 과부가 시동생한테 꼬리 치는 연극이라도 하고 싶다는 말씀인가요?”

“온채아!”

너무 노골적인 말에 심서정이 이를 악물고 화를 냈다.

온채아는 태연하게 캐시미어 망토 코트를 걸치며 피식 웃었다.

“율천 오빠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

심서정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통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주율천의 차가 이미 마당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심서정은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 주율천과 온채아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 온채아가 다루기 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든지 상대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차에 오른 온채아가 주율천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린 거 아니죠?”

“아니. 나도 금방 도착했어.”

주율천이 그녀의 손을 잡고 치마를 내려다보았다. 치마 밑으로 드러난 곧고 하얀 다리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온채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 안에는 히터가 있고 본가에는 난방이 되잖아요.”

한의원에서 진료할 땐 환자들에게 절대 몸을 차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무심했다.

주율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감기 걸려서 열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럼 약 먹으면 되죠.”

감기 치료가 가장 쉬웠다. 약 한 첩만 먹어도 절반 가까이 나았다. 지난 3년간 매번 그랬기에 경험이 많았다.

주율천이 그녀를 돌봐주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고 기댈 만한 사람도 없었다.

자기 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온채아의 모습에 주율천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내가 남편으로서 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잖아.”

그 말에 온채아는 흠칫 놀랐다.

“어제 준 선물 안 뜯어봤어요?”

“아직 안 뜯어봤어.”

주율천이 덤덤하게 말했다.

“생일 선물이라며? 생일에 뜯어보려고.”

“...”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충분해지니까.

공통 주제가 별로 없었던 두 사람은 그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율천이 고개를 돌려보니 온채아가 창밖의 차량 행렬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참으로 순하고 얌전한 모습이었다.

‘누구한테도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사람인데 서정이는 왜 이렇게 채아를 못마땅해하는지 모르겠네.’

주율천이 입술을 적시고 화제를 찾으려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대표님, 심서정 씨가 맞선 보러 가셨습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나 온채아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온채아는 주율천이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절제를 잘하는 사람이라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위치 보내.”

주율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전화를 끊고 시선이 온채아에게 향했을 땐 표정이 차분했지만 말투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채아야, 급한 일이 생겨서 가족 모임에 같이 못 갈 것 같아.”

그 급한 일이 무엇인지 온채아는 까발리지 않았다. 까발려봤자 본인만 더 초라해지니까.

“알았어요.”

온채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진 기사님, 앞에서 세워주세요.”

차가 천천히 멈췄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율천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채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안 내리고 뭐 해요? 차 길가에 오래 세워선 안 돼요.”

“알았어...”

주율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지만 그녀의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성씨 가문의 매달 한 번 있는 가족 모임은 다른 명문가처럼 그렇게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주율천까지 포함해서 총 다섯 명뿐이라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제사를 지낼 때처럼 조용한 분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채아가 본가에 들어서자 집사가 그녀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온채아 씨, 어르신께서 채아 씨가 오시길 손꼽아 기다리셨어요.”

온채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으로 늘어뜨린 주먹을 꽉 쥐었다.

주방 안.

소원희가 가운데 자리에, 왼쪽에 그녀의 큰딸과 둘째 딸이 차례로 앉아 있었다.

온채아는 들어가자마자 차례대로 인사했다.

“할머니, 큰 고모, 둘째 고모.”

성씨 가문의 그녀 또래의 항렬에 맞춘 호칭이었다.

두 고모가 심드렁하게 대답했고 소원희는 뒤에 주율천이 없는 걸 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율천이는?”

온채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갔어요.”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호통과 함께 찻잔이 날아왔다.

“나가서 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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