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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락희
성씨 본가를 나설 때 온채아는 다리를 더욱 심하게 절뚝거렸다.

지난 3년간 주율천이 함께 오지 않을 때면 늘 이런 식으로 벌을 내렸기에 온채아는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주율천은 알지 못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증명할 때마다 그녀를 절망의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성씨 가문은 남편의 마음조차 붙잡지 못하는 무능한 아가씨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집사 성탁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어요? 좀 심각한 이유라도 둘러대서 어르신을 속였다면 이렇게까지 다치진 않았을 텐데요.”

“집사님.”

온채아의 맑은 얼굴에 원망의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할머니는 저를 키워주신 은인이세요. 다른 사람은 속여도 할머니는 절대 속일 수 없어요.”

“어휴.”

성탁수의 두 눈에 진심 어린 따뜻함이 더해졌다. 맞아서 새빨갛게 부은 그녀의 손바닥을 보며 말했다.

“지체하지 말고 어서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요.”

“네.”

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운전기사 진명환을 진작 돌려보낸 터라 온채아는 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어릴 때부터 온채아는 소원희가 신데렐라 속 악독한 계모의 환생은 아닌지 의심했었다.

주씨 가문의 어르신 최해경은 기껏해야 심서정에게 정원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했지만 성씨 가문의 어르신 소원희는 가정부들에게 그녀를 자갈이 깔린 길로 끌고 가 무릎을 꿇게 했다.

겨울이라 무릎을 금방 꿇었을 땐 오히려 시원했다. 눈이 쌓여 있었으니까. 춥긴 해도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한참을 꿇다 보면 눈이 녹아내려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자갈만 남게 된다.

온몸이 얼어붙었을 무렵 가정부가 회초리를 들고 와 손바닥을 때렸다. 그때의 고통이 가장 심했는데 살이 다 터지고 피도 흘렀다.

성씨 본가가 둘레 산길 쪽에 있었고 산과 강에 인접해 있어 경치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온채아가 추가 요금까지 내고 겨우 콜택시를 불렀지만 밤이 깊은 데다가 눈까지 내리고 있어 기사는 산 아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산을 내려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녀에겐 고통이었다. 한겨울임에도 통증으로 등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눈길이 미끄러운 도로 위, 멀리서 검은색 벤틀리 리무진이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눈이 예리한 기사가 무의식적으로 속도를 내며 따라갔다.

“도련님, 앞에 저분 아가씨 같은데요?”

뒷좌석에 앉은 남자는 의자에 기댄 채 긴 다리를 느슨하게 꼬고 있었다. 어둠에 가려진 얼굴이 더욱 날카롭고 엄숙해 보였다. 누가 봐도 높은 자리에 있는 권력자였다.

“그래.”

기사의 말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조수석에 앉은 비서가 더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도련님, 아가씨를 그냥 이대로 두실 건가요?”

“신경 쓰고 싶어?”

남자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비서는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한참 뒤 남자는 앞 유리를 통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온채아의 가냘픈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주율천이 오늘 밤 뭐 하러 갔는지 알아봐.”

“이미 알아봤는데 아마 지금 심서정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비서가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도련님, 아가씨가 눈밭에서 몇 시간은 무릎 꿇었을 텐데 더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틀거리며 걷던 그녀가 힘없이 쓰러졌다.

“도련님, 제가...”

쾅.

차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내려 눈밭에 쓰러진 온채아를 캐시미어 코트 속으로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비서가 황급히 내려 뒷문을 열었다.

“어디로 갈까요? 병원으로 가실 건가요?”

“일단 집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의사 불러.”

“이미 연락했어요.”

기사가 눈치 있게 히터 온도를 높였다.

차 안 조명이 켜져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무릎에 닿은 순간 새까만 눈동자에 냉혹한 빛이 스쳤지만 말투는 여전히 무심했다.

“참 세게도 때렸다.”

비서가 중얼거렸다.

“어르신이 언제 가볍게 때린 적이 있었나요?”

“윤혁이 요 며칠에 귀국한다고 했지?”

“네.”

“준비해.”

“어느 정도까지 준비할까요?”

비서를 힐끗거리던 남자의 두 눈에 사나운 기운이 담겼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

온채아가 깨어났을 때 몸이 힘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나른했다. 하지만 그리 힘들진 않았다.

원래 부어오르고 아파야 할 손바닥과 무릎도 보기엔 끔찍했지만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틀간 욱신거리던 꼬리뼈도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 있어선 안 되었다.

온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호텔 프런트에 전화해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인 순간 몸에서 옅은 침향목 냄새가 났다.

잠깐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린 뒤 씩 웃고는 침대 옆 서랍 위에 놓인 익숙한 특제 연고를 집어 들고 체크아웃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유난히 화목했다. 지난 이틀간 분위기가 불편했던 게 그녀라는 불청객 때문이었던 것처럼.

“채아 씨 왔어요?”

심서정이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어젯밤에 주율천이 그녀를 잘 달랜 모양이었다.

온채아는 심서정과 말을 섞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심서정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핑크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자랑했다.

수집 가치가 있는 희귀한 핑크 다이아몬드였는데 온채아가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보석 세트였다.

주율천은 나중에 경매장에 다시 나오면 사서 온채아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런 연한 핑크가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면서 하고 다니면 분명 예쁠 거라고 했었다.

‘심서정한테 선물할 때도 같은 말을 했겠지.’

심서정은 온채아의 얼굴에 스친 실망감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할머니가 그러는데 채아 씨도 보석에 대해 좀 안다면서요? 이 귀걸이 어때요? 율천이가 20억 넘게 주고 낙찰받은 거예요. 그만한 값어치가 있나요?”

“그럭저럭요.”

온채아는 속으로 자신을 비웃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아 참, 저랑 율천 오빠 아직 법적 부부예요. 이십몇억이 부부의 공동재산인 건 알고 있죠? 제 기억이 맞다면 정확히 24억 원이었어요.”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두드리며 말했다.

“형님, 오늘 밤 자정까지 이 계좌로 12억 원을 입금하세요. 안 그러면 할머니한테 이 돈을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서정의 핸드폰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확인해보니 은행 계좌번호였다.

심서정은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나쁜 년, 맨날 그 할망구로 날 위협해? 12억 원을 어디 가서 구해? 주석현이 죽고 내가 받을 유산이 기껏해야 10억인데. 게다가 아직 받지도 못했다고.’

그녀에게 돈이 있든 없는 온채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뒤 딱히 할 일이 없어 방 정리를 시작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미리 정리해둬야 떠날 때 훨씬 수월할 테니까.

온채아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닌지라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가차 없이 버렸다.

결혼할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마저 오경애에게 아래층으로 옮겨 버려달라고 했다.

그때 마침 집으로 돌아온 주율천이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웨딩드레스에 향한 순간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

“웨딩드레스는 왜 꺼냈어?”

온채아는 눈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버리려고요.”

쓸모없는 건 다 버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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