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식사는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식사가 끝난 뒤 온채아가 과일과 다과를 챙기려 하자 이미숙이 막아섰다.“됐어. 넌 그냥 앉아 있어. 경애가 알아서 할 거야.”“전 그냥 말만 전하려 했을 뿐이에요.”온채아가 난감하게 웃었다.“말하는 것도 신경 쓰이는 일이야.”이미숙은 타박하듯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하도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도연아, 지훈아, 너희는 좀 더 앉아 있어. 난 뒷마당 화분 좀 보고 오마.”젊은 사람들끼리 편하게 이야기와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배려였다.하지훈과 하도연이 모두 대답했다.이미숙이 멀리 가기도 전에 하지훈이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누나, 구정훈이 그 입장문 내고 나서 끊겼던 협력 관계들 다시 이어지고 있지?”하도연은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응. 몇몇 업체는 일시 중단했었는데, 어제 오후부터 다시 연락해 왔어.”이익을 좇는 건 사업가의 본성이니 굳이 탓할 일은 아니었다.“그럼 지금 꽤 우쭐해 있겠네.”하지훈은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성유준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그래도 며칠 못 가겠지만.”같은 시각, 구씨 집안 본가의 식당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구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할아버지, 그룹 쪽 많은 프로젝트들이 다시 진행되고 있습니다.”상석에 앉은 구진택의 탁한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어렸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일은 잘 처리했어. 무슨 일이든 우리 구씨 집안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라.”구정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네, 알고 있습니다.”맞은편에 앉은 구민호는 아예 젓가락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그저 찻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갑자기 입꼬리를 씩 올렸다.“민호야, 왜 안 먹어?”금재은은 아들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아차리고 농어찜 한 점을 집어 그릇에 올려 주었다.“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니니? 얼굴이 많이 수척해
성유준도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럼 내일 임지연 시켜서 자료 보내게 할게.”“응.”하도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마치 아주 평범한 거래 하나를 성사한 사람처럼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옆에 앉아 있던 하지훈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누나와 유준이가 일 얘기하는 게 내가 메뉴 하나 고르는 것보다 훨씬 빠르네.”“네가 메뉴 하나 고르면서 너무 따지는 거지.”성유준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하지훈은 말문이 막혔다가 바로 반격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문 너머에서 온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얘기 거의 끝났어요? 할머니가 10분만 있으면 밥 먹을 수 있대요.”그 말에 성유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마침 끝났어.”문을 열자 온채아가 예쁘게 잘라 놓은 과일 한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그녀는 서재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다가 하도연과 하지훈도 이미 일어나 있는 걸 보고 환하게 웃었다.“잘됐네요. 내려가서 같이 식사해요.”“뭐 준비했어?”하지훈이 다가가 과일 접시를 들여다봤다.“망고?”“네. 맞아요. 디저트도 마침 망고 크레이프 케이크를 준비했거든요.”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훈이 무심코 말했다.“너 망고 맛 안 좋아하잖아?”온채아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제 취향도 알고 있었어요?”정말 뜻밖이라 조금 얼떨떨할 정도였다.그도 그럴 것이, 하지훈은 예전부터 온채아를 별로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하지훈은 어색하게 코끝을 문지르며 얼버무렸다.“언제 유준한테 들었던 걸까? 잘 모르겠어. 그냥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었어.”자기 막내동생의 취향을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옆에서 지켜보던 하도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들이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마침 이미숙도 거실 쪽에서 걸어왔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자 반갑게 손짓했다.“도연아, 지훈아, 얼른 와서 앉아. 채아가 너희 좋아하는 음식으로 주방에 따
다음 날 오전, 모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하지훈은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그린 빌라에 나타났다. 그는 원래 강미진의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는데, 하도연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누나, 가자. 유준한테는 미리 얘기해 뒀어.”“그래.”하도연은 머리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뒤로 올려 묶어, 차갑고 침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잘 다녀오렴.”강미진도 두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걸 알고 있었다.“우리 막둥이한테 몸 잘 챙기라고 꼭 말해 줘. 진통 시작하면 반드시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고.”“걱정하지 마세요. 엄마가 말씀 안 하셔도 누나랑 제가 채아한테 꼭 얘기할게요.”하지훈은 웃으며 하도연과 앞뒤로 집을 나섰다.차 옆까지 걸어간 후 하도연이 하지훈을 힐끗 보았다.“유준이한테 뭐라고 했어?”“누나가 볼일이 있어서 찾는다고만 했지.”하지훈은 차 앞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걱정하지 마. 무슨 일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어. 그래도 그 녀석 워낙 눈치가 빨라서 대충은 다 짐작했을걸.”하도연은 더 묻지 않고 허리를 숙여 차에 올라탔다.차는 곧장 월강 레지던스를 향해 달렸다.도착했을 때 온채아는 앞마당에서 코코의 털을 빗겨 주고 있었다. 익숙한 SUV가 들어오는 걸 보자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러더니 금세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도연 언니, 지훈 오빠. 두 분이 어떻게 같이 오셨어요?”곧이어 온채아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덧붙였다.“유준 오빠 찾으러 오신 거죠?”하도연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어떻게 알았어?”“오늘 집에 별일도 없는데 오전 내내 회사에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누구 기다리고 있겠다고 짐작했죠.”온채아는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주었다.“올라가세요. 오빠는 서재에 있어요. 얘기 끝나면 내려와서 점심 드시고요. 제가 주방에 말해서 좋아하실 만한 거로 몇 가지 더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말투는 자연스럽고 세심했다. 일부러 거리를
하도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기 너머, 하용건은 그녀가 대답이 없자 목소리를 한층 더 낮췄다.“도연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느냐?”“네, 알아들었어요.”하도연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께서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조금 더 기다릴게요.”하용건은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할 줄 몰랐는지 오히려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듯했다.잠시 후 하용건이 느릿하게 말했다.“네가 이해했다니 다행이구나. 내가 네 이혼을 막겠다는 게 아니다. 지금 이혼하면 너한테도, 하씨 가문에도 좋을 게 없다는 거지. 여론이 완전히 잠잠해지고 나면 네가 뭘 하든 할아버지가 막지 않으마.”“네.”하도연은 더 말하지 않고 깔끔하게 통화를 끝냈다.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려던 순간, 통화 기록에 부재중 전화 한 통이 더 찍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하지훈에게서 온 전화였다.미처 다시 전화를 걸기도 전에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누나, 나 방금 비행기에서 내렸어. 지금 북영시야.”수화기 너머로 공항 안내 방송이 섞인 하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걱정하지 마. 늦어도 내일까지는 구정훈이 이번 일에 연관됐다는 증거, 반드시 찾아낼게.”하도연은 다급하게 몰아붙이는 그의 말투를 들으며 무심코 미간을 문질렀다.“이제 조사 안 해도 돼. 돌아와.”“뭐?”하지훈이 확연히 당황했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가겠다고?”“이미 증거를 손에 넣었어.”“벌써?”하지훈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무슨 증거?”“민호가 방금 구정훈이랑 허예리가 통화한 녹음 파일을 보내줬어.”하도연은 그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전화기 너머로 2, 3초쯤 조용해졌다.“그 녀석, 움직임 하나는 빠르네.”하지훈의 목소리에는 의외라는 기색이 묻어났다.잠시 망설이던 그가 물었다.“그럼 누나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증거까지 생겼으니 할아버지도 더는 이혼을 막을 수 없잖아.”“방금 할아버지한테도 보냈어
구정훈은 허예리가 대꾸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허예리는 충동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타입이다.몇 마디 겁만 주면 알아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전화가 끊기자 허예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구민호에게 배운 대로 말을 유도해 봤는데 이 수법이 제법 잘 먹혔다.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통화 녹음 파일을 전송했다.그러고 나자 조금 내려놓았던 마음이 다시금 불안해졌다.이 녹음이 구민호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구정훈은 끝내 이번 일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직접 인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동안 구정훈을 상대하며 허예리는 이 남자가 지나치게 영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이 허예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다행히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휴대폰 화면에 곧 새 문자가 떠올랐다.발신자는 민호 오빠였다.[잘했어.]짧은 세 글자에 허예리는 휴대폰을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풀 수 있었다.구민호가 더는 문자를 보내지 않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를 내 문자를 보냈다.[그럼 앞으로 두 집안 협력은...]자기 때문에 금씨 가문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집안에서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구민호의 답장은 금세 도착했다.[약속한 건 어기지 않아.]허예리는 그 글자를 보며 그제야 오전 내내 잔뜩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안심할 틈도 없이 휴대폰이 다시 한번 밝아졌다.이번에도 구민호가 보낸 문자였다.그 문자를 본 순간 조금 전까지 겨우 돌아왔던 허예리의 혈색이 다시 굳어졌다.[하지만 또 누나를 건드리면, 다음은 없어.]협박조의 말투도 아니었고 감정적인 표현도 없었다. 그저 사실 하나를 담담하게 통보했을 뿐이었다.그 누나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허예리는 그 문자를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
같은 시각, 구정훈 역시 입장문 발표 이후의 여론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니까. 하씨 가문 큰아가씨랑 구 대표님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데 진짜 이혼할 리가 있나.][구 대표님이 직접 나서서 설명까지 하네. 하도연 씨한테 정말 한결같은가 봐.][그러게. 하씨 가문 큰아가씨도 잘해야지. 높은 자리에 있다고 너무...]구정훈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댓글을 훑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똑똑.강준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 입장문 반응이 좋습니다. 온라인 여론도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고요. 당분간 사모님 쪽에서도 이혼 얘기를 다시 꺼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조금 전, 그저께 협력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했던 회사에서 다시 계약서를 보내왔습니다.”구정훈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하씨 가문 쪽은 움직임 없어?”“아직 공식 대응은 없습니다. 다만 하용건 회장님께서 이미 이 일을 눌러두셨습니다.”강준태는 잠시 말을 멈췄다. 표현을 고르는 듯했다.“그리고 북영시 쪽에서 소식이 하나 들어왔는데 구민호 도련님이 오늘 아침 허씨 가문에 다녀갔다고 합니다.”구정훈의 움직임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허씨 가문이라고?”“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허예리 씨 안색이 꽤 안 좋았다고 합니다.”구정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이내 평소처럼 돌아왔다.“알았어. 허예리 쪽은 당분간 안 붙어 있어도 돼. 걔가 무슨 큰일을 벌이진 못해.”강준태는 대답만 하고 더 묻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진 순간 구정훈의 휴대폰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 발신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하지만 구정훈은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봤다.그는 휴대폰을 들고 창가까지 걸어간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네가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왜? 받기 곤란한 거야?”허예리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회의 중이야.”구정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