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서해인의 시점.“해인 씨,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시우 씨…… 돌아오셨군요. 오늘은 다도 연맹 강연회가 있었죠? 수고 많으셨어요. 어땠나요?” 마지막 제자까지 배웅하고 아무도 남지 않은 조용한 연습실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정장 차림의 성시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태도로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한 곳에 모아 둔 무거운 다기를 익숙한 손길로 들어 올려 세척대로 옮겨 주려 했다. “덕분에 무사히 끝났어요. 회장님께서도 극찬하시면서 다음에도 꼭 부탁한다고 하시더군요.” “어머, 대단해요.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존경스러워요.” “아니에요. 그보다 해인 씨, 설거지를 하면 손이 거칠어지니까요. 나머지는 제가 해 둘 테니 오늘은 먼저 들어가세요.” “네? 하지만…… 그러면 미안하잖아요. 연습이 끝난 뒤 정리하는 건 제 일이고, 성시우 씨도 일을 마치고 오셔서 피곤하실 테니 쉬세요.” 내가 황급히 다기를 되찾으려고 손을 뻗자, 성시우는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현관 앞에 데리러 온 차가 기다리고 있던데요. 전민수 씨가 무척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오늘 이따가 무슨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으신 것 아닙니까?” “아……” 심장이 따끔하게 아팠다. 성시우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오늘 이따가 최준혁을 만나기로 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는데, 전민수의 차가 평소보다 아주 조금 일찍 도착했다는 것만으로 알아차린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말문이 막혀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성시우는 당황하는 나를 나무라지도 않고 그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세척대에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약속이 있든 없든 늘 해인 씨에게 준비와 정리를 전부 맡기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제게 기대세요. 가끔은 일찍 돌아가서 집에서 편히 쉬시는 것도
서해인의 시점.‘해인아, 잠깐만……! 다시 연락해도 될까? 다시…… 아이들과 너를 만나러 가도 될까…….’ 최준혁의 앞을 지나가려던 내 손목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모습이 그날 이후 몇 번이고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용히 손목을 쓰다듬었다. 그때 최준혁이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라고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을 때, 가슴 깊은 곳이 꽉 조여 왔다. 기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신우석과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고 거리를 두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보호 방법’이라는 사실은 머리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씩씩한 척해도, 문득 찾아오는 밤이나 아이들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리워할 때면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진다. 이대로 영원히 마주치지 못한 채 마음의 거리마저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 견딜 수 없이 막막해진다. 최준혁이 했던 말은 그런 내 마음속 작은 틈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얼어붙어 있던 불안을 서서히 녹여 주었다. 떨어져 있어도 최준혁은 줄곧 우리만을 생각하며 싸워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애틋할 정도로 간질였다. “준혁 씨……” 오후 세 시. 제자들을 무사히 배웅하고 마침내 혼자가 된 나는 호텔 로비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바라봤다. 최준혁에게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어디까지나 날짜를 정하는 것뿐이다. 신우석의 정보를 공유받기 위해서일 뿐…….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이르듯 문자 입력창을 열었지만, 이상하게 손끝이 조금 떨려 문장이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오늘은 놀랐어요. 아까 말했던 일인데, 언제 시간 돼요?’ 이건 조금 너무 차가운 것 같았다. ‘고생했어요. 신우석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어쩐지 너무 사무적인 것 같았다.몇 번이나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최준혁에게 보낼 메시지 내용으
최준혁의 시점.“……알겠어. 전부 이야기할게.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서해인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은 과거 내가 지키려 했던, 그저 연약하고 사랑스럽기만 했던 서해인의 것이 아니었다. 한비와 한결이라는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를 품은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그 안에는 어떤 진실이든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강한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감정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은 신념이 담긴 서해인의 옆모습을 보며, 이제 더 이상 진실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계속 숨기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지성과 어머니로서의 강인함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래, 다시 연락할게.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가볼게.”그 말을 남기고 꼿꼿한 모습으로 내 곁을 떠나는 서해인을 배웅한 뒤, 나는 신칸센 좌석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신우석의 행방이 끊긴 이후에 얻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서아영의 전 비서인 차이령은 현재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처음에 차이령은 모든 혐의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최 씨 그룹의 거액 자금 횡령, 박 씨 그룹을 향한 협박, 그리고 비열한 내부자 거래. 어느 하나만으로도 실형을 피할 수 없는 중범죄였다.하지만 체포된 지 며칠 뒤, 차이령의 진술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모든 일은 서아영의 지시였으며, 자신은 거역할 수 없었다고 했다.‘차이령이 스스로 서아영의 이름을 입에 올린 건, 한철이나 다른 협력자들처럼 소위 말하는 ‘꼬리 자르기’로 버리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서아영은 절대로 붙잡히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라도 있는 건가?’서아영을 목격했던 날, 공항에서 그녀와 합류한 남자가 정말 신우석이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되었다.신우석이 미국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으로 돌아와 법인을 설립했던 시기와 서아영이 해외 유학을 했던 시기를 역산해 보면
최준혁의 시점.“준혁 씨……?”놀라 눈을 크게 뜬 서해인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붙잡은 손목을 통해 서해인의 작은 맥박이 내 손바닥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던 진심을 한꺼번에 쏟아냈다.“지금까지 너와 아이들에게 괜한 피해나 위험이 가지 않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만나는 걸 참아 왔어. 하지만……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고,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아직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야. 그래도 너와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킬게.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당황한 것인지 서해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 표정을 바라보며 몰아붙이듯 뜨거운 마음을 계속 쏟아냈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런 장소에서 갑자기 재결합을 요구하는 행동은 악수일 뿐이라는 것을.그런데도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 말로 붙잡아 두지 않으면 그녀가 정말로 아주 먼 세상으로 떠나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위기감이 나를 떠밀었다.한동안 역의 소란 속에서 우리 둘의 시간만 멈춘 듯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서해인은 곤란한 듯 눈썹을 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준혁 씨 정말 많이 변했네요. 예전에는…… 이렇게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서해인을 보자 가슴이 조여 왔다. 서해인은 내가 변했다고 했지만, 정말로 달라진 사람은 서해인이었다.예전의 서해인이라면 내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감정을 드러냈을 때 곧바로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거나, 아니면 크게 동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서해인은 달랐다. 내 말 하나하나에 감정이 휘둘리지 않았고, 이렇게 열정을 쏟아내도 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어른스러운 여유로 화제를 조금 비켜 갔다.오직 나만을 똑바로 바라보던 서해인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그녀가 우선하는 사람이 나에서 다른 누군가로,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남자로
최준혁의 시점.오늘은 오후부터 지방 본사에서 중요한 미팅이 잡혀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사무실 업무를 마무리한 나는 운전기사가 공항까지 태워준 차에서 내린 뒤, 빠른 걸음으로 탑승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오가는 관광객들 사이를 헤치며 걷던 중, 문득 비스듬한 앞쪽에서 몇 명의 정장 차림 여성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올려 묶은 머리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아름다운 자세. 북적이는 공항 로비에서도 마치 그 공간만 따로 떼어낸 듯 우아했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아니, 단순히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해인이 다도 교실 강사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길거리에서 정장 차림의 여성을 볼 때마다 혹시 서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먼저 뛰었고,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하곤 했다. 이혼한 지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내 머릿속은 여전히 서해인으로 가득했다. '해인도... 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건 아닐까......' 매일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희미한 기대를 품고 곁눈질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눈을 한 번 깜빡인 뒤 다시 바라봤다. ……착각이 아니었다. 연한 연둣빛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서해인이 몇몇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해인은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 푹 빠져 있었는지 내가 보내는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이따금 손을 입가에 살짝 가져다 대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부드럽게 피어나는 미소는 우리가 행복했던 결혼 생활을 하던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내 곁에 없다는 외로움이 함께 밀려왔다. 주변 여성들의 분위기를 보니 아마 다도 교실
최준혁의 시점.“그 사람을 원망하느냐…… 인가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원하정은 힘없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먼 곳을 바라보듯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응시했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묘한 놀라움을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탁하게 가라앉은 원망도, 새까맣게 응어리진 집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미 그녀에게 '아주 먼 과거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팽팽한 삶 속에서 그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둔 듯했다. “최 회장님과는 서로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요. 당시에는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당함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분의 뜻이 아니라 가문의 결정이었어요. 저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최 회장님 개인을 원망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다르네요. 굳이 말하자면…… 나는 '운명' 그 자체를 몹시 원망하고 미워했죠.” “운명…… 말입니까?” “그래요.” “특정한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해 봤자 결국 닳아 없어지는 건 자기 자신 뿐이에요. 설령 복수에 성공해서 그분이 새로운 사람과 행복해지지 못했다고 해도, 그분이 제게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또 다른 최 씨 가문이 원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뿐이겠죠. 그런 허망한 증오에 제 자신을 태우는 건…… 비참하고, 허무할 뿐이에요.” 마치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는 거짓도 꾸밈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오늘 이곳에 오기 전까지 원하정이 신우석과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최 씨 가문을 향한 집요한 공격도 그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속마음을 직접 듣고 보니,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이 이제 와서 신우석까지 이용하며 최 씨 가문을 상대로 복수를 꾸밀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신우석은 사모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알고 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