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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빚은 아빠 거예요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5 08:19:00

작업실 건물 옥상에는 방이 하나 있었다.

원래는 건물주가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서린이 결혼 전 작업실을 얻으면서 같이 빌려, 밤샘 작업을 하는 날이면 쪽잠을 자던 방이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창문 하나. 3년 동안 비어 있던 방에서는 먼지와 마른 나무 냄새가 났다.

서린은 거기서 사흘을 잤다.

잠은 잘 왔다. 이상할 만큼 잘 왔다. 펜트하우스의 넓은 침대에서는 새벽 한 시, 두 시까지 도어락 소리를 기다리느라 눈을 감지 못했는데, 이 좁은 방에서는 기다릴 사람이 없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밤이 이렇게 가벼운 줄 그녀는 몰랐다.

첫날 아침 열 시 정각, 구하람이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어, 서린 씨? 웬일이세요, 평일 아침에?"

스물넷의 하람은 늘 밝았다. 조향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지현의 추천으로 들어온 아이였다. 동그란 안경에 운동화 끈을 늘 두 번 묶는 아이. 1년 동안 서린은 하람이 지각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잠깐 들렀어요. 원료 좀 볼 게 있어서."

"아, 그럼 커피 타 드릴까요? 실장님은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하람이 제 책상으로 가서 엎어 둔 머그컵을 뒤집었다. 컵 옆의 시향지 몇 장을 아무렇지 않게 쓸어 서랍에 넣었다. 서린은 그 손을 보았다. 서두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 손이었다. 버릇처럼 치우는 손.

지현이 작업대 너머에서 서린을 보았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서린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람 씨."

"네?"

"요즘 개인 작업은 뭐 해요? 실장님이 하람 씨 코가 좋아졌다고 하던데."

하람의 손이 한순간 멈췄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커피 가루를 뜨던 숟가락이 공중에서 반 박자 머물렀다가 다시 움직였다.

"에이, 아니에요. 그냥 서린 씨 예전 향 따라 해 보는 연습이요. 한참 멀었어요."

"어떤 향?"

"음, 3번이요. 무화과 들어간 거."

3번에는 무화과가 들어가지 않았다. 무화과가 들어간 것은 7번뿐이었다.

"그렇구나. 열심히 해요."

서린은 웃으며 원료장으로 돌아섰다. 등 뒤에서 하람이 커피를 젓는 소리가 들렸다. 숟가락이 컵에 부딪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그날부터 서린은 하람이 퇴근한 뒤에만 작업실에 내려왔다.

* * *

나흘째 아침, 서린은 교대역 근처의 작은 법률사무소를 찾았다.

"한서린!"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승아였다. 대학 동기, 같은 과에서 유일하게 향수 이야기를 지루해하지 않던 친구. 지금은 개업 2년 차 변호사였고, 세상에서 N의 이름을 아는 세 번째 사람이었다.

"너 살 빠졌어. 아니, 얼굴은 좋아졌네? 뭐야, 이혼이 체질이야?"

"아직 이혼 안 했어."

"곧 하잖아. 앉아, 앉아."

승아의 사무실은 서류 더미와 식은 커피 냄새로 가득했다. 서린은 창가 소파에 앉았다. 승아가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그 전에 믹스커피부터 두 잔 탔다. 서린은 종이컵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설탕과 분유, 조금 탄 원두. 펜트하우스에서는 3년 동안 한 번도 맡지 못한 냄새였다. 시어머니는 믹스커피를 싫어했다. 그 집 찬장에는 원두만 있었다.

"네가 한 달 전에 준 합의서, 도장 찍힌 원본은 차도혁 쪽에 있고 사본은 여기 있어. 협의이혼이면 두 사람이 같이 가정법원 가서 신청하고, 자녀 없으니까 숙려기간 한 달, 그다음 확인기일에 또 둘이 같이 나가서 판사 앞에서 '네' 하면 끝이야."

"같이 가야 해?"

"같이 가야 해. 대리인도 안 돼. 법이 그래."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일이었다.

그 사람과 나란히 법원 복도에 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3년 동안 둘이 나란히 앉아 본 곳은 명절 본가 식탁뿐이었다. 그때도 그는 서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근데 서린아."

승아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너 진짜 3조 그대로 갈 거야? 재산분할 포기. 태강 차도혁이면 3년 혼인 기간으로 쳐도 받을 게 꽤 돼. 너 그 집에서 가사 노동 한 거, 시댁 행사 챙긴 거, 법원은 그거 다 기여로 인정해 줘."

"안 받아."

"왜."

"받으면 그 사람 말이 맞는 게 되니까."

승아가 입을 다물었다. 서린은 창밖을 보았다. 교대역 사거리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3년 내내 그 사람은 내가 돈 때문에 결혼했다고 믿었어. 한 번도 말로 한 적은 없지만 눈이 늘 그렇게 말했어. 나갈 때 한 푼이라도 받으면 그 사람은 평생 그렇게 믿을 거야. 봐라, 결국 돈이었다고."

"……안 받으면 믿음이 바뀔 것 같아?"

"몰라. 안 바뀌어도 상관없어. 내가 알면 돼."

승아가 볼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대학 때부터 할 말을 참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너 결혼식 날 기억나? 나 하객석에서 너만 봤거든. 너 그날 한 번도 안 웃더라."

"웃었어."

"사진 찍을 때만."

서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날 신랑 대기실 앞을 지나갈 때 들은 말이 있었다. 신부 쪽 하객이 너무 적다고.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지금도 몰랐다.

승아는 한숨을 쉬고 파일을 덮었다.

"그래. 돈은 N이 벌면 되지. 작년 로열티 정산분 들어온 거 알지? 파리 쪽 두 건."

"알아."

"그거면 너 혼자 3년은 놀고먹어도 돼. 참고로."

서린은 작게 웃었다. 사흘 만에 처음 나온 웃음이었다.

* * *

11시에 아버지가 왔다.

한기택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화가 나 있었다. 예순둘, 한때는 경기도에서 알아주던 화학 원료 공장 사장이었다. 지금은 그 공장 이름 앞에 '부도 직전'이라는 말이 3년째 붙어 있었다.

서린이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집으로 오라고 하면 아버지는 술을 먹고 올 것이고, 작업실로 오라고 하면 작업실을 알게 될 것이었다. 변호사 사무실이 가장 안전했다.

아버지에게서 담배 냄새가 났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서린은 그게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넥타이는 3년 전 상견례 때 매고 나왔던 것과 같은 남색이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아버지는 앉지도 않았다. 승아가 자리를 비켜 주려 했지만 서린이 손짓으로 붙잡았다.

"앉으세요, 아빠."

"앉긴 뭘 앉아! 사돈어른한테서 전화 왔다. 네가 집을 나갔다고.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고. 그게 사실이야?"

"사실이에요."

"이게 미쳤나."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린은 그 얼굴을 담담하게 보았다. 어릴 때는 이 얼굴이 무서웠다. 결혼 전까지도 무서웠다. 지금은 그저 피곤해 보였다.

3년 전 그날도 아버지는 이 얼굴이었다. 서린의 원룸 바닥에 앉아 한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식은 보리차를 두 잔째 비우고서야 태강 이야기를 했다. 서린은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숱이 생각보다 많이 빠져 있었다.

"당장 돌아가. 가서 무릎 꿇고 빌어. 네가 나오면 우리 집 어떻게 되는지 몰라? 태강에서 그 빚 다시 문제 삼으면 공장 문 닫아야 돼. 직원이 몇인데. 네 아빠 감옥 가는 꼴 보고 싶어?"

"아빠."

"너 누구 덕에 대학 나왔는데! 누구 덕에 그 비싼 향수 학원 다녔는데! 그렇게 키워 놨더니—"

"아빠."

서린이 조금 더 크게 불렀다. 아버지의 말이 끊겼다.

"그 빚, 아빠 빚이에요."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승아가 볼펜을 쥔 채 숨을 죽였다.

"3년 전에 아빠가 저한테 그랬죠. 태강에서 너를 원한다고. 네가 그 집에 들어가면 빚 얘기는 없던 걸로 해 주겠다고. 그래서 갔어요. 3년 동안 있었어요. 그 집에서 한 번도 싫다는 말 안 했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저는 3년 했어요."

서린은 아버지를 똑바로 보았다.

"더는 안 해요. 이제부터 그 빚은 아빠가 갚으세요. 공장을 팔든, 집을 팔든, 태강에 가서 직접 빌든. 제 인생으로는 더 못 갚아요."

아버지의 입술이 떨렸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삼켰다. 그 표정을 서린은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숨기다 들킬 뻔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너, 너는 모르는 게 있어."

"그럼 말씀해 주세요."

"태강에서 매달—"

아버지가 멈췄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매달, 뭐요?"

"아니다."

아버지는 테이블 위의 물컵을 집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컵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서린은 그 손을 보았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어릴 때 공장 창고의 원료 드럼 사이를 뛰어다니던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던 손이었다. 그때 그 손에서는 늘 기계유와 알코올 냄새가 났다. 지금은 담배 냄새만 났다.

"후회할 거다, 한서린. 그 집 나와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없잖아. 가진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승아가 옆에서 뭔가 말하려는 걸 무릎을 짚어 막았다.

아버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세게 닫혔다. 그 사람은 늘 문을 세게 닫았다. 문을 조용히 닫는 남자와 세게 닫는 남자 사이에서 그녀는 스물아홉 해를 살았다.

* * *

"야."

한참 뒤 승아가 입을 열었다.

"아까 무릎 왜 눌렀어. 할 줄 아는 거 없다고 할 때 내가 딱 한마디만 하려고 했는데. 파리 로열티 명세서 보여 드릴까요, 아버님, 하고."

"그래서 눌렀어."

"……하여튼."

승아가 웃다가 멈췄다. 책상 위 노트북에서 메일 알림이 울렸다. 승아가 화면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굳었다.

"서린아."

"응."

"차도혁 쪽 변호사한테서 답 왔어."

서린은 창밖을 보던 고개를 돌렸다.

"뭐래."

승아가 화면을 돌려 보여 주었다. 짧은 메일이었다. 법무법인 이름이 박힌 서명 위에 문장은 두 줄뿐이었다.

「의뢰인 차도혁은 협의이혼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혼을 원한다면 본인이 직접 와서 말하라는 것이 의뢰인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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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96화. 윤정숙의 봄

    전화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왔다."한서린 씨죠?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향기 봉사 오셨을 때 수간호사였던…….""기억해요. 배 선생님."서린은 작업대에서 손을 떼고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스물다섯 살 때, 병동 복도 끝 작은 방에서 환자들에게 냄새를 물어 가며 병을 채우던 때였다. 그때 그녀에게 방을 내준 사람이었다. 올해 초 도혁이 찾아갔을 때, 그녀가 두고 간 샘플 상자를 아직 버리지 못했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했다."다름이 아니라요. 요즘 봉사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요. 차성준 님 사모님이세요."서린의 손가락이 작업대 모서리를 짚었다."두 달째 매주 오세요. 환자분들 손 닦아 드리고, 말벗 해 드리고. 그런데 그분이 자꾸 비누를 만드세요. 장미 비누요. 환자분들한테 옛날 냄새를 맡게 해 드리고 싶다고. 근데 그게 잘 안 되시나 봐요. 매번 냄새가 이상하다고 속상해하세요.""…….""그분이 서린 씨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해요. 모른 척하고 한 번만 와 주시면 안 될까요."서린은 창밖을 보았다. 10월 끝자락의 햇빛이 인쇄소 지붕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목요일에 갈게요."* * *병동은 스물다섯 살 때와 거의 같은 냄새가 났다.소독약, 삶은 수건, 오래된 리놀륨 바닥. 그 아래에 사람의 냄새가 있었다. 오래 누워 있는 몸의 냄새, 약 냄새, 그리고 누군가 가져온 귤 껍질. 서린은 복도 입구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들어갔다.간호사실 앞에서 배 선생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새 머리가 하얗게 센 얼굴이었다. 배 선생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서 낡은 종이 상자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뚜껑에 서린의 글씨로 「향기 봉사 — 샘플」이라고 적혀 있었다."아직 있어요. 가끔 열어 봐요. 냄새 다 날아갔는데도요."서린은 상자 모서리를 한 번 쓸어 보았다. 스물다섯 살의 글씨가 거기 있었다. 지금보다 동글동글했다.휴게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창가 테이블에 윤정숙이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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