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직접 와서 말하라고?"
승아가 화면을 노려보며 되물었다. 서린은 메일을 한 번 더 읽었다. 두 줄. 차도혁다운 문장이었다. 필요한 말만 하고, 상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정해 준다.
"안 가."
"당연히 안 가지. 가면 뭐, 그 사람이 '돌아와' 한마디 하고 끝낼 텐데. 그 사람 속셈은 뻔해. 네가 직접 오면 이기는 거고, 안 오면 이혼 안 해 주는 거고."
"그럼 협의 말고 다른 길로 가."
승아가 서린을 보았다.
"소송?"
"응."
"서린아, 재판이혼은 사유가 있어야 돼. 바람, 폭력, 유기, 그런 거. 차도혁이 너 때렸어?"
"아니."
"바람은? 유세아랑 뭐 증거 있어?"
"없어. 공항 기사 하나. 그걸로는 안 되겠지."
"안 되지. 첫사랑이랑 공항에서 웃었다는 걸로 외도 인정해 주는 판사는 없어."
서린은 가방에서 수첩 한 권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검정 수첩이었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이건 돼?"
승아가 수첩을 받아 펼쳤다. 첫 장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3년 전 9월. 그 아래로 날짜와 시각이 한 줄씩 빼곡하게 이어졌다.
「9. 24. 01:40」
「9. 25. 귀가 안 함」
「9. 26. 02:15」
「9. 27. 23:50」
한 장, 두 장, 열 장. 승아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수첩은 거의 끝까지 차 있었다. 마지막 줄은 사흘 전이었다. 3주년 다음 날 새벽.
「9. 24. 01:17」
"……이게 뭐야."
"그 사람 귀가 시각."
서린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처음엔 그냥 기다리느라 적었어. 몇 시에 오는지 알면 덜 기다려도 될까 싶어서. 근데 알아도 덜 기다려지진 않더라. 그래도 계속 적었어. 습관이 돼서."
승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어락 앱 기록도 있어. 내 명의로 등록된 거라 내가 뽑을 수 있어. 3년치. 수첩이랑 맞춰 보면 하루도 안 틀릴 거야."
승아가 수첩 뒷장을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에 서린이 따로 정리해 둔 숫자가 있었다.
「3년. 1,095일.
자정 전 귀가 41일.
귀가 안 함 212일.
같이 저녁 먹은 날 9일.
그중 둘만 먹은 날 0일.」
승아는 한참 그 숫자를 보다가 수첩을 덮었다. 목이 잠겨 있었다.
"……너 이거 3년 내내 혼자 세고 있었어?"
"응."
"미친놈."
"나?"
"아니, 그 남자."
승아는 노트북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법 840조 6호.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 3년간 부부 공동생활의 실질이 없었다는 건 충분히 된다. 이거 붙여서 답장 보낼게. 협의 거부하시면 재판으로 가겠다, 증거 목록 첨부."
"응."
"진짜 보낸다?"
"보내."
승아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 * *
그 메일이 차도혁의 책상에 올라온 것은 오후 네 시였다.
변호사가 직접 들고 올라왔다. 도혁은 회의 자료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사모님 쪽 답입니다. 첨부 자료가 좀 있어서 출력해 왔습니다."
도혁은 서류를 받았다. 첫 장은 짧은 답장이었다. 협의에 응하지 않으면 재판상 이혼을 청구하겠다는 내용. 그는 코웃음을 쳤다. 두 번째 장을 넘겼다.
「증거 1. 피고 귀가 시각 기록 (혼인 다음 날부터 현재까지)」
표였다. 날짜와 시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는 첫 줄부터 읽었다. 3년 전 9월 24일, 새벽 1시 40분. 그날이 기억났다. 결혼식 다음 날이었다. 그는 신혼여행을 미루고 회사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날도 깨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날 새벽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던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그 뒤로 3년 동안 매일 그렇게 했다.
그는 다음 장을 넘겼다. 또 넘겼다. 넘길 때마다 날짜가 쌓였다. 새벽 한 시. 새벽 두 시. 귀가 안 함. 귀가 안 함. 새벽 한 시 반.
어떤 줄 옆에는 괄호로 한 글자가 붙어 있었다. (생). 두 번째 해에도, 세 번째 해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둘 다 「귀가 안 함」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아내의 생일이었다. 그는 그 날짜를 지금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맨 마지막 장에 요약이 있었다.
「자정 전 귀가 41일. 귀가 안 함 212일. 같이 저녁 먹은 날 9일. 그중 둘만 먹은 날 0일.」
"0일."
도혁이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변호사가 헛기침을 했다.
"전무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정도 기록이면 재판으로 가도 저쪽이 불리하지 않습니다. 외도나 폭력은 없지만 법원은 이런 걸 파탄의 근거로 봅니다. 게다가 저쪽은 재산분할도 위자료도 안 받겠다고 하니 재판부 입장에서는 더더욱—"
"알았습니다."
"그럼 협의로 방향을 바꾸시는 게—"
"알았다고 했습니다. 나가 보세요."
변호사가 나갔다. 도혁은 혼자 남아 표를 내려다보았다.
사무실 안에는 공기청정기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그는 목에 걸린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오늘 아침에도 매듭은 세 번 만에 겨우 맞았다.
둘만 먹은 날 0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결혼기념일이라든가, 생일이라든가.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 그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두 번째. 할아버지 생신과 겹쳐 본가에서 가족이 다 모였다. 세 번째.
식은 스테이크. 꺼진 초. 두 개의 와인잔.
그리고 은색 리본 상자. 그 안에 있던 병은 지금도 서재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아직 그 병을 치우지 못했다.
그는 서류를 덮었다.
* * *
도혁은 일찍 퇴근했다. 여섯 시였다.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펜트하우스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는 거실을 지나 복도 끝의 방 앞에서 멈췄다. 아내의 방이었다. 결혼 첫날부터 두 사람은 방을 따로 썼다. 그가 그렇게 정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따랐다.
3년 동안 그는 이 문을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 있지 않았다.
방은 거의 비어 있었다. 침대는 시트까지 걷혀 매트리스만 남아 있었다. 옷장 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안에는 빈 옷걸이만 나란히 걸려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립스틱 하나, 머리끈 하나 없었다.
책상 서랍 하나가 덜 닫혀 있었다. 열어 보니 비어 있었다. 바닥 판에 연필 자국 몇 줄만 가늘게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적다가 종이 밖으로 삐져나간 선이었다. 수첩만 한 크기였다.
그리고 냄새가 없었다.
도혁은 방 한가운데 서서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사람이 3년을 산 방인데. 여자가 3년을 잔 방인데. 향수도, 화장품도, 샴푸 냄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둔 채 떠났는지 가을 저녁 공기만 차갑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 방에는 아무 냄새도 없었던 걸까.
결혼 첫 주였던가. 어머니가 식탁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향수 뿌리지 마라. 도혁이가 냄새에 예민하다.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예민한 건 냄새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그 뒤로 3년. 아내에게서 향이 난 적이 있었던가.
결혼하고 첫 설이 떠올랐다. 본가 부엌에서 전을 부치던 아내 뒤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기름 냄새만 났다. 그는 그게 아내의 냄새인 줄 알았다. 그 뒤로 더 가까이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는 기억해 내지 못했다. 기억할 만큼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
그는 빈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잠깐 앉았다. 스프링이 낮게 삐걱였다. 이 방에서 아내는 새벽마다 도어락 소리를 기다리며 수첩을 폈을 것이다. 그 소리가 나면 한 줄을 적고 불을 껐을 것이다. 그는 이 방의 불이 꺼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도혁은 창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으려다 손을 멈췄다. 그리고 문을 조금 열어 둔 채로 두었다.
* * *
일곱 시 반, 세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 먹자는 말에 그는 처음으로 망설이지 않고 차 열쇠를 집었다. 텅 빈 집에 더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한남동의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5년 전 두 사람이 자주 가던 곳이었다. 세아는 창가 자리에 먼저 앉아 있었다. 하얀 니트에 긴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모습이 5년 전과 거의 같았다.
"오빠,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거짓말. 오빠 거짓말할 때 턱에 힘 들어가는 거 여전하다."
세아가 웃으며 와인을 따랐다. 손목이 움직일 때마다 향이 번졌다. 흰 목련. 비에 젖은 돌.
도혁은 잔을 받다가 멈췄다.
"그 향수."
"아, 이거?"
세아가 손목을 들어 보였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좋지? 빈에 있을 때 산 거야. 구시가지 골목에 아주 작은 조향 공방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혼자 하시는 데였거든. 세상에 딱 한 병뿐이래. 이름도 없어서 내가 지어 주려고."
"한 병뿐이라고."
"응. 왜, 오빠도 마음에 들어?"
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향이 그를 이상하게 불편하게 만들었다. 좋은 향이었다. 분명히 좋은 향이었는데, 이 향을 맡으면 자꾸 사흘 전 밤이 떠올랐다. 코트를 받으려다 굳어 버린 아내의 손끝. 그리고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
"오빠?"
"……아니야. 먹자."
세아는 잠시 도혁을 보다가 웃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 와인잔과 자기 손목을 함께 찍었다. 화면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가볍고 빨랐다.
그날 밤 열한 시, 첼리스트 유세아의 SNS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와인잔 옆으로 내민 하얀 손목. 그리고 짧은 글.
「5년 만의 서울.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향과 함께. #귀국 #나만의향 #이름을지어주세요」
눈은 오후 두 시에 왔다.아침부터 하늘이 낮았다. 서린은 옥탑방 창가에 앉아 오전 내내 하늘을 보았다. 작업실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지현이 문자로 한 줄만 보냈다. 「오늘 휴무예요. 대표 둘이 정했어요.」 하람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원료장 앞에 우산 두 개를 세워 둔 사진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쓰지 않았다.열두 시가 넘자 공기가 바뀌었다.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골목의 소리가 한 겹 낮아졌다. 인쇄소 기계 소리도, 빵집 문 종소리도 솜에 싸인 것처럼 멀어졌다. 그리고 코 안쪽이 서늘해졌다. 쇠붙이를 혀끝에 댄 것 같은.서린은 창문을 열었다.첫 송이는 창틀에 앉자마자 녹았다. 두 번째도 그랬다. 세 번째부터는 녹지 않았다. 골목 지붕들이 천천히 하얘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문자는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사람도 창밖을 보고 있을 테니까.대신 그녀는 난로에 불을 붙였다. 주전자에 물을 채워 올렸다. 책상 위를 한 번 닦고, 수첩을 가운데 놓았다가 옆으로 비켜 두었다. 비커는 그대로 두었다. 수첩을 다시 펼쳐 다섯 줄을 소리 없이 한 번 읽었다. 입술만 움직였다. 둘째 줄에서 한 번 멈췄다. 연습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그녀는 수첩을 덮었다.창밖을 내려다보니 골목 입구에 검은 차가 섰다. 남자 하나가 내렸다. 우산을 받지 않고, 눈 속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린은 창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숨지도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 *도혁은 골목 입구에서 차를 보냈다.강민재가 운전석에서 돌아보았다.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우산을 내밀었다. 도혁은 받지 않았다."눈 맞고 갈게.""감기 드십니다.""한 번은 괜찮아."그는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빵집 사장이 가게 앞 눈을 쓸다가 그를 보고 빗자루를 멈췄다. 1년 넘게 이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던 남자였다. 사장은 아무 말 없이 턱으로 빨간 벽돌 건물을 가리켰다. 가 보라는 뜻이었다.계단 아래에서 그는 멈췄다. 가을에 그녀의 캐리
서린은 새벽 네 시에 비커를 꺼냈다.옥탑방 책상 위에 원료병이 스무 개쯤 늘어서 있었다. 작업실에서 하나씩 들고 올라온 것들이었다. 베르가모트, 삼나무, 향나무, 리넨 계열의 알데하이드, 재스민 앱솔루트 한 방울 분량, 제라늄, 그리고 머스크 두 종류.12월의 첫 주였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아직 눈 냄새는 아니었다. 눈이 오기 전의 공기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소리가 낮아지고, 쇠붙이 같은 서늘함이 코 안쪽을 건드리는. 오늘 새벽 공기에는 그게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그녀는 수첩을 펼쳤다. 「청혼받는 조건」 다섯 줄 다음 장에 배합이 적혀 있었다.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있었다.「새 향 — 이름 없음. 둘이 쓰는 것.」처음에는 도혁을 위한 두 번째 향을 만들려고 했다. 첫눈이 곧 떨어질 테니까. 그 병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녀는 알았다. 파리에서, 구청 앞에서, 그의 손목에서 올라오는 향이 날마다 얇아지고 있었다. 머스크만 남고 베르가모트가 먼저 사라지는 건 병 바닥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그런데 첫눈 같은 걸 하나 더 만드는 건 이상했다. 첫눈은 3년 전 그녀가 혼자 기억한 냄새였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위해.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다른 걸 적었다. 그의 냄새와 그녀의 냄새가 한 병 안에서 싸우지 않는 향.첫눈에서 베르가모트와 삼나무를 가져왔다. 옥탑에서 나무 계단과 리넨을 가져왔다. 그리고 1년 동안 두 사람이 같이 맡은 냄새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구청 앞 군고구마. 파리의 크레페 버터. 센강의 물비린내. 그라스의 재스민이 배었다가 그의 첫눈으로 바뀐 손수건.전부 넣을 수는 없었다. 필요 없는 걸 빼고, 마지막에 한 가지만 남기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비커에 베르가모트를 떨어뜨렸다. 다섯 방울. 삼나무 세 방울. 향나무 두 방울. 그리고 한참 멈춰 있다가, 재스민을 이쑤시개 끝으로 아주 조금. 그라스의 밭이 아니라 손수건에 남아 있던 만큼만.시향
문자는 아침 여덟 시에 왔다.「하루 하나는 내일로 미룰게. 오늘은 부탁 하나.오후 두 시 사십 분, 성동구청 앞에서 기다릴게.안 와도 돼. 그냥 거기 있을게.」서린은 옥탑방 창가에서 그 문자를 읽었다. 달력을 볼 필요는 없었다. 11월 5일. 1년 전 오늘 그녀는 법원에서 나와 구청에 갔다. 번호표 118번. 2분이 걸렸다.두 시 사십 분. 그녀가 이혼 신고서를 낸 시각이었다. 그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서린은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알았다. 그날 오후 세 시 정각에 N의 메일이 태강에 도착했다. 확인서 등본을 받고 나서 구청에 들렀다면, 신고는 그 전이었을 것이다. 1년 동안 그 시간을 거꾸로 세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숫자였다.답장은 하지 않았다.그녀는 작업실에 내려가 하루를 보냈다. 무화과 여름 2차 물량의 향 농도를 확인했다. 하람이 만든 다음 시제품을 맡았다. 지현과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두 시가 되었을 때 서린은 앞치마를 벗었다.지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오늘 일찍 가요?""잠깐 나갔다 올게요.""네. 천천히 와요."지현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꼬리만 조금 올라가 있었다.계단을 내려가는데 하람이 원료장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서린 씨, 립밤 발랐어요? 밖에 바람 차요.""……하람 씨.""네?""아무것도 아니에요."하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린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다가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발랐다. 향을 넣지 않은 립밤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오늘은 제 냄새가 아니라 거리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구청까지는 걸었다. 성수의 공장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갔다. 금속을 깎는 기름 냄새, 가죽 공방의 무두질 냄새, 새로 생긴 카페의 원두 볶는 냄새. 1년 전 그날은 택시를 탔다. 법원에서 구청까지, 창밖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오늘은 신호등마다 멈춰 서서 냄새를 하나씩 맡았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 *구청 앞 계단은 1년 전과 같았
라벨은 하람이 직접 붙였다.작업실 작업대 위에 30밀리리터 병 스무 개가 두 줄로 서 있었다. 투명한 유리 안에 연한 초록빛이 도는 향. 하람은 핀셋으로 라벨을 집어 병 목 아래에 한 장씩 붙였다. 숨을 참고 있었다. 한 장 붙일 때마다 숨을 내쉬었다.「무향 — 무화과 여름」그 아래 작은 글씨로 한 줄.「조향 구하람」서린은 창가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았다. N이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무향 병에 붙는 건 처음이었다. 라벨티 표상진은 처음에 반대했다. 두 번째 라인을 신인 이름으로 내는 건 모험이라고. 서린은 숫자를 보여 주었다. 파리 전시 기간 동안 무화과 시제품을 맡아 본 사람들의 반응지, 성수 팝업 재방문율, 그리고 하람이 석 달 동안 고친 버전 스물세 개의 기록. 표상진은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숫자가 좋네요, 그럼 된 거죠."손 떨려요."하람이 말했다. 핀셋 끝이 정말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떨어도 돼요. 삐뚤어지면 다시 붙이면 돼요.""이건 다시 붙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첫 병인데."지현이 커피를 들고 다가와 하람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하람 씨, 서린 씨 첫 병 라벨 얼마나 삐뚤었는지 알아요? 10년 전에. 제가 봤거든요. 이만큼."지현이 손가락으로 기울기를 그려 보였다. 과장이었다. 서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람이 웃었다. 핀셋 끝의 떨림이 멎었다.마지막 병에 라벨이 붙었다. 하람은 핀셋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붙였어요.""네. 붙였어요."서린은 병 하나를 집어 뚜껑을 열었다. 손목에 한 번 뿌렸다.초록 잎이 먼저 왔다. 한여름 오후,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서 있을 때의 풋내. 이어서 덜 익은 열매를 쪼갰을 때의 하얀 즙 냄새. 그리고 끝에 우유처럼 부드럽게 남는 따뜻함. 파리에서 돌아온 날 옥탑방 책상에서 처음 맡았을 때보다 끝이 길어져 있었다. 서린이 쪽지에 적어 둔 대로."끝을 늘렸네요.""네. 샌달우드 조금이랑, 쌀 증류 원료
전화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왔다."한서린 씨죠?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향기 봉사 오셨을 때 수간호사였던…….""기억해요. 배 선생님."서린은 작업대에서 손을 떼고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스물다섯 살 때, 병동 복도 끝 작은 방에서 환자들에게 냄새를 물어 가며 병을 채우던 때였다. 그때 그녀에게 방을 내준 사람이었다. 올해 초 도혁이 찾아갔을 때, 그녀가 두고 간 샘플 상자를 아직 버리지 못했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했다."다름이 아니라요. 요즘 봉사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요. 차성준 님 사모님이세요."서린의 손가락이 작업대 모서리를 짚었다."두 달째 매주 오세요. 환자분들 손 닦아 드리고, 말벗 해 드리고. 그런데 그분이 자꾸 비누를 만드세요. 장미 비누요. 환자분들한테 옛날 냄새를 맡게 해 드리고 싶다고. 근데 그게 잘 안 되시나 봐요. 매번 냄새가 이상하다고 속상해하세요.""…….""그분이 서린 씨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해요. 모른 척하고 한 번만 와 주시면 안 될까요."서린은 창밖을 보았다. 10월 끝자락의 햇빛이 인쇄소 지붕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목요일에 갈게요."* * *병동은 스물다섯 살 때와 거의 같은 냄새가 났다.소독약, 삶은 수건, 오래된 리놀륨 바닥. 그 아래에 사람의 냄새가 있었다. 오래 누워 있는 몸의 냄새, 약 냄새, 그리고 누군가 가져온 귤 껍질. 서린은 복도 입구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들어갔다.간호사실 앞에서 배 선생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새 머리가 하얗게 센 얼굴이었다. 배 선생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서 낡은 종이 상자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뚜껑에 서린의 글씨로 「향기 봉사 — 샘플」이라고 적혀 있었다."아직 있어요. 가끔 열어 봐요. 냄새 다 날아갔는데도요."서린은 상자 모서리를 한 번 쓸어 보았다. 스물다섯 살의 글씨가 거기 있었다. 지금보다 동글동글했다.휴게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창가 테이블에 윤정숙이 앉아
서울은 은행잎 냄새로 서린을 맞았다.인천에서 성수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창문을 조금 내렸다. 한 달 사이에 가을이 깊어져 있었다.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었고, 길가에 떨어진 열매가 밟혀 쿰쿰한 냄새를 올렸다. 파리에서 한 달 동안 맡지 못한 냄새였다. 좋은 냄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반가웠다.골목 입구에서 택시를 내리자 빵집 사장이 가게 앞을 쓸다가 빗자루를 멈췄다."어머, 왔네! 파리 갔다며. 빵은 거기가 낫지?""여기가 나아요.""거짓말도 잘해."사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금빵 두 개를 봉지에 담아 주었다. 돈은 받지 않았다. 봉지에서 버터와 굵은소금 냄새가 올라왔다. 파리의 버터보다 짰다. 서린은 그게 좋았다.캐리어를 끌고 계단 앞에 섰다. 한 달 전 도혁이 캐리어를 내려놓고 바퀴를 돌려놓았던 자리였다. 이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린은 손잡이를 접고 캐리어를 들었다. 가벼웠다. 병 열한 개는 파리에 두고 왔다. 전시가 끝나면 이안이 하나씩 싸서 보내 주기로 했다.올라가는 길에 2층 작업실 문을 잠깐 열어 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다. 원료장 유리문 너머로 갈색 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서린은 문틈에서 숨을 들이쉬었다. 알코올, 나무 선반, 누군가 새로 들여놓은 오렌지꽃 원료. 그리고 하람 책상 모니터 옆의 로즈마리 화분.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틀어지지 않은 냄새였다. 그녀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옥탑방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함께 낯선 냄새가 났다. 무화과였다. 누군가 책상 위에 시향지를 한 장 꽂아 두고 갔다. 그 옆에 쪽지.「두 번 고쳤어요. 이제 진짜 무화과예요. — 하람」서린은 시향지를 코에 댔다. 초록 잎, 덜 익은 열매의 풋내, 그리고 끝에 우유 같은 부드러움. 한 달 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그녀는 쪽지 아래에 연필로 한 줄을 적었다.「좋아요. 끝을 조금만 더 길게.」* * *그날 밤 옥탑방은 시끄러웠다.지현이 족발을 사 왔고, 하람이 떡볶이를 사 왔고, 승아가 소주 세 병을 들고 왔다. 파리 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