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벌가 며느리 3년 차, 한서린의 정체는 얼굴 없는 천재 조향사 'N'. 결혼 3주년 밤, 남편의 코트에서 자신의 향을 맡은 그녀는 미련 없이 이혼 서류를 내밀고 떠난다. 뒤늦게 아내의 빈자리를 실감하기 시작한 남편과, 비로소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서린의 이야기.
View More스테이크는 여덟 시에 구웠다.
미디엄 레어. 차도혁이 좋아하는 굽기였다. 3년 동안 그가 한 번도 말해 준 적은 없었지만 한서린은 알았다. 접시에 남기는 고기의 가장자리를 보고, 소스를 찍는 횟수를 세어 가며 알아냈다.
아홉 시가 되자 고기가 식었다.
열 시에는 초가 절반으로 줄었다.
서린은 식탁 위 작은 상자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은색 리본을 두른 30밀리리터짜리 유리병이었다. 이름은 「첫눈」.
석 달이 걸린 향이었다. 3년 전 도혁이 처음 이 집 현관에 들어서던 날, 그의 코트 자락에 묻어 있던 겨울 공기를 기억해 두었다가 만들었다. 베르가모트로 차갑게 시작해 젖은 삼나무를 지나고, 마지막에는 아주 옅은 살냄새 같은 머스크가 남는다.
조향사 N.
업계에서는 얼굴 없는 천재라고 불렀다. 파리의 향수 회사들이 10년째 정체를 찾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 N이 재벌가 며느리가 되어 3년째 부엌에서 스테이크를 굽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남편조차.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단독] 태강그룹 차도혁 전무, 인천공항서 포착… 동행 여성은 첼리스트 유세아」
사진 속 도혁은 웃고 있었다. 서린이 3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의 팔에 하얀 코트를 입은 여자가 가볍게 손을 얹고 있었다.
유세아. 도혁의 첫사랑. 5년 전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던 여자.
서린은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신 일어나 부엌 서랍을 열었다. 수저통 아래 한 달 전에 넣어 둔 서류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이혼 합의서.
그녀의 도장은 이미 찍혀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네."
소리 내어 말해 보니 정말 괜찮았다. 가슴이 아플 줄 알았다. 적어도 조금은 무너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웠다. 오래 신은 구두를 벗은 발처럼, 욱신거리면서도 시원했다.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화면에 「어머님」이 떠 있었다.
"네, 어머님."
"기사 봤니?"
인사도 없었다. 시어머니 윤정숙은 늘 그랬다.
"네, 봤습니다."
"그럼 알아서 처신해. 세아가 돌아왔으니 이제 너도 네 자리가 어딘지 알 거 아니니. 괜히 도혁이한테 전화해서 캐묻고 그러지 말고."
"오늘이 결혼 3주년인데요."
말하고 나서야 서린은 자기가 그 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3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종류의 말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념일? 얘, 빚 대신 들어온 결혼에 무슨 기념일이야. 네 아버지가 우리 회장님한테 무릎 꿇던 날 기념하게?"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식은 스테이크 위로 촛농이 한 방울 떨어졌다.
"네, 어머님.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네 장점이지. 눈치 빠른 거."
전화가 끊겼다.
서린은 촛불을 불어 껐다. 가느다란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갔다. 탄 심지 냄새, 식은 버터 냄새, 로즈마리 냄새. 코는 언제나 마음보다 정확했다. 이 집에서 나는 냄새는 3년 내내 똑같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 같은 냄새.
그녀는 접시를 치우지 않았다. 그냥 두기로 했다. 오늘만큼은 이 식탁을 그가 봐야 했다.
* * *
도어락이 열린 것은 새벽 1시 17분이었다.
거실 불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던 서린은 고개를 들었다. 복도 불빛 속에 도혁이 서 있었다.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코트는 팔에 걸려 있었다.
서린은 그 모습을 잠깐 보았다. 3년 동안 새벽마다 본 모습이었다. 넥타이가 풀린 정도로 그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알았고, 코트를 든 팔의 높이로 기분을 알았다. 오늘은 둘 다 읽히지 않았다.
"안 자고 뭐 해."
"기다렸어요."
도혁의 시선이 식탁으로 향했다. 꺼진 초, 식은 스테이크, 두 개의 와인잔. 그리고 은색 리본 상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오늘이었나."
"3주년이요."
"바빴어."
그게 전부였다. 미안하다는 말도, 변명도 없었다. 서린은 놀라지 않았다. 3년 동안 차도혁이라는 남자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바빴어'였으니까.
결혼하고 첫 겨울, 서린은 감기로 사흘을 앓았다. 그는 그 사흘 동안 한 번 들어왔다. 방 앞을 지나가며 약은 먹었냐고 물었다. 서린은 먹었다고 대답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서린은 그 한마디를 오래 기억했다. 그가 먼저 물어본 말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습관처럼 코트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멈췄다.
냄새였다.
코트에서 향이 났다. 흰 목련. 비에 젖은 돌. 그리고 끝에 아주 희미하게 남는 무화과 잎.
서린의 손끝이 굳었다.
이 향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 향을 아는 사람은 한 명뿐이어야 했다. 작업실 금고 안 노트, 일곱 번째 장에만 적혀 있는 배합. 아직 이름도 붙이지 못한, 한 번도 병에 담아 밖으로 내보낸 적 없는 향.
그 향이 남편의 코트에서, 다른 여자의 체온과 함께 나고 있었다.
서린은 숨을 한 번 더 들이쉬었다. 틀리기를 바랐다. 코는 틀린 적이 없었다. 목련 아래로 낯선 파우더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한 번 스친 정도가 아니었다. 오래, 가까이 있어야 옷감에 이만큼 남았다.
"왜."
도혁이 낮게 물었다. 서린이 코트를 쥔 채 움직이지 않자 미간을 좁혔다.
"……아니에요."
서린은 코트를 옷걸이에 걸었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천천히. 그리고 식탁으로 돌아가 서랍에서 꺼내 둔 봉투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사인해 주세요."
도혁은 봉투를 열었다. 첫 장의 제목을 보고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뭐지."
"보시는 대로요."
그가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비틀어 올리는 웃음이었다.
"기사 때문에? 한서린,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위자료? 얼마면 돼."
"3조 보세요."
도혁의 시선이 서류로 내려갔다.
「제3조. 한서린은 차도혁에 대한 재산분할 및 위자료 청구권 일체를 포기한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주 짧게, 계산이 어긋난 사람의 얼굴이 스쳤다.
"한 푼도 안 받아요. 제가 가져온 건 옷 가방 두 개였으니까, 나갈 때도 그거면 돼요."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 없어요. 유세아 씨 돌아왔잖아요. 전무님 옆자리, 비워 드리려고요."
"그 사람 얘기 꺼내지 마."
"그럼 제 얘기 할게요."
서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3년 만이었다. 이 남자의 눈을 피하지 않고 본 것이.
"저, 이제 그만할래요."
거실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낮게 울렸다.
3년 동안 서린이 가장 많이 들은 소리였다. 그가 들어오지 않는 밤마다 이 넓은 거실을 채운 건 그 소리뿐이었다. 오늘은 그 소리가 조금 멀게 들렸다.
"할아버지가 허락 안 하셔."
"회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렸어요. 한 달 전에."
도혁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가 모르는 일이었다. 이 집에서 그가 모르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것도 한서린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뒤 그는 서류를 봉투째 식탁 위로 던졌다. 종이가 식은 스테이크 접시에 부딪혀 미끄러졌다.
봉투 모서리에 굳은 소스가 묻었다. 서린은 그 얼룩을 보았다. 여덟 시에 구운 고기였다. 그는 끝내 그 고기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너, 나가 봐야 갈 데도 없잖아."
그는 서재로 걸어갔다. 문이 닫혔다. 닫히는 소리조차 크지 않았다. 차도혁은 화가 나도 문을 세게 닫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닫았다. 3년 동안 서린에게 늘 그랬던 것처럼.
* * *
서린은 한참을 식탁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은색 리본을 풀었다. 「첫눈」의 뚜껑을 열고, 식은 스테이크 위 허공에 한 번 뿌렸다.
차가운 베르가모트가 먼저 퍼졌다. 이어서 젖은 삼나무. 3년 전 그날 현관의 공기였다. 그녀가 처음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된 순간의 냄새였다.
서린은 그 냄새 속에 잠깐 서 있었다. 3년 전 겨울, 옷 가방 두 개를 들고 이 거실에 먼저 들어와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처음 한 말은 "그게 다야?"였다. 그녀는 그 말보다 그의 코트 자락에서 들어오던 차가운 공기를 더 오래 기억했다.
"잘 가요, 첫눈."
그녀는 병을 닫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 저장해 둔 번호를 눌렀다. 3년 동안 한 번도 걸지 않은 번호였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 씨?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실장님, 작업실 금고 비밀번호 바꾼 적 있어요?"
"네? 아뇨, 없는데요. 왜요?"
서린은 옷걸이에 걸린 남편의 코트를 바라보았다. 흰 목련과 젖은 돌의 향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누가 제 7번을 훔쳐 갔어요."
* * *
다음 날 아침, 차도혁은 늦게 일어났다.
집은 조용했다. 늘 조용한 집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부엌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커피 내리는 소리도, 도마 위 칼 소리도.
식탁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스테이크도, 초도, 와인잔도 없었다.
서재 책상 위에만 세 가지가 놓여 있었다.
사인란이 비어 있는 이혼 합의서. 결혼반지 하나. 그리고 은색 리본이 풀린 작은 유리병.
그 옆에 메모가 한 장 있었다.
「사인해서 변호사 사무실로 보내 주세요. 3년 동안 고마웠어요.」
도혁은 반지를 보지 않았다. 대신 병을 집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손이 먼저 갔다.
뚜껑을 열고 손목에 한 번 뿌렸다.
차가운 공기가 올라왔다. 겨울 현관. 코트 자락. 3년 전 어느 날, 문을 열었을 때 거실 한가운데 서 있던 스물여섯 살의 여자.
그의 손이 멈췄다.
그날 차도혁은 처음으로 아내의 향을 맡았다.
그리고 아내는 없었다.
눈은 오후 두 시에 왔다.아침부터 하늘이 낮았다. 서린은 옥탑방 창가에 앉아 오전 내내 하늘을 보았다. 작업실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지현이 문자로 한 줄만 보냈다. 「오늘 휴무예요. 대표 둘이 정했어요.」 하람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원료장 앞에 우산 두 개를 세워 둔 사진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쓰지 않았다.열두 시가 넘자 공기가 바뀌었다.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골목의 소리가 한 겹 낮아졌다. 인쇄소 기계 소리도, 빵집 문 종소리도 솜에 싸인 것처럼 멀어졌다. 그리고 코 안쪽이 서늘해졌다. 쇠붙이를 혀끝에 댄 것 같은.서린은 창문을 열었다.첫 송이는 창틀에 앉자마자 녹았다. 두 번째도 그랬다. 세 번째부터는 녹지 않았다. 골목 지붕들이 천천히 하얘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문자는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사람도 창밖을 보고 있을 테니까.대신 그녀는 난로에 불을 붙였다. 주전자에 물을 채워 올렸다. 책상 위를 한 번 닦고, 수첩을 가운데 놓았다가 옆으로 비켜 두었다. 비커는 그대로 두었다. 수첩을 다시 펼쳐 다섯 줄을 소리 없이 한 번 읽었다. 입술만 움직였다. 둘째 줄에서 한 번 멈췄다. 연습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그녀는 수첩을 덮었다.창밖을 내려다보니 골목 입구에 검은 차가 섰다. 남자 하나가 내렸다. 우산을 받지 않고, 눈 속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린은 창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숨지도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 *도혁은 골목 입구에서 차를 보냈다.강민재가 운전석에서 돌아보았다.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우산을 내밀었다. 도혁은 받지 않았다."눈 맞고 갈게.""감기 드십니다.""한 번은 괜찮아."그는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빵집 사장이 가게 앞 눈을 쓸다가 그를 보고 빗자루를 멈췄다. 1년 넘게 이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던 남자였다. 사장은 아무 말 없이 턱으로 빨간 벽돌 건물을 가리켰다. 가 보라는 뜻이었다.계단 아래에서 그는 멈췄다. 가을에 그녀의 캐리
서린은 새벽 네 시에 비커를 꺼냈다.옥탑방 책상 위에 원료병이 스무 개쯤 늘어서 있었다. 작업실에서 하나씩 들고 올라온 것들이었다. 베르가모트, 삼나무, 향나무, 리넨 계열의 알데하이드, 재스민 앱솔루트 한 방울 분량, 제라늄, 그리고 머스크 두 종류.12월의 첫 주였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아직 눈 냄새는 아니었다. 눈이 오기 전의 공기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소리가 낮아지고, 쇠붙이 같은 서늘함이 코 안쪽을 건드리는. 오늘 새벽 공기에는 그게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그녀는 수첩을 펼쳤다. 「청혼받는 조건」 다섯 줄 다음 장에 배합이 적혀 있었다.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있었다.「새 향 — 이름 없음. 둘이 쓰는 것.」처음에는 도혁을 위한 두 번째 향을 만들려고 했다. 첫눈이 곧 떨어질 테니까. 그 병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녀는 알았다. 파리에서, 구청 앞에서, 그의 손목에서 올라오는 향이 날마다 얇아지고 있었다. 머스크만 남고 베르가모트가 먼저 사라지는 건 병 바닥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그런데 첫눈 같은 걸 하나 더 만드는 건 이상했다. 첫눈은 3년 전 그녀가 혼자 기억한 냄새였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위해.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다른 걸 적었다. 그의 냄새와 그녀의 냄새가 한 병 안에서 싸우지 않는 향.첫눈에서 베르가모트와 삼나무를 가져왔다. 옥탑에서 나무 계단과 리넨을 가져왔다. 그리고 1년 동안 두 사람이 같이 맡은 냄새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구청 앞 군고구마. 파리의 크레페 버터. 센강의 물비린내. 그라스의 재스민이 배었다가 그의 첫눈으로 바뀐 손수건.전부 넣을 수는 없었다. 필요 없는 걸 빼고, 마지막에 한 가지만 남기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비커에 베르가모트를 떨어뜨렸다. 다섯 방울. 삼나무 세 방울. 향나무 두 방울. 그리고 한참 멈춰 있다가, 재스민을 이쑤시개 끝으로 아주 조금. 그라스의 밭이 아니라 손수건에 남아 있던 만큼만.시향
문자는 아침 여덟 시에 왔다.「하루 하나는 내일로 미룰게. 오늘은 부탁 하나.오후 두 시 사십 분, 성동구청 앞에서 기다릴게.안 와도 돼. 그냥 거기 있을게.」서린은 옥탑방 창가에서 그 문자를 읽었다. 달력을 볼 필요는 없었다. 11월 5일. 1년 전 오늘 그녀는 법원에서 나와 구청에 갔다. 번호표 118번. 2분이 걸렸다.두 시 사십 분. 그녀가 이혼 신고서를 낸 시각이었다. 그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서린은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알았다. 그날 오후 세 시 정각에 N의 메일이 태강에 도착했다. 확인서 등본을 받고 나서 구청에 들렀다면, 신고는 그 전이었을 것이다. 1년 동안 그 시간을 거꾸로 세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숫자였다.답장은 하지 않았다.그녀는 작업실에 내려가 하루를 보냈다. 무화과 여름 2차 물량의 향 농도를 확인했다. 하람이 만든 다음 시제품을 맡았다. 지현과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두 시가 되었을 때 서린은 앞치마를 벗었다.지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오늘 일찍 가요?""잠깐 나갔다 올게요.""네. 천천히 와요."지현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꼬리만 조금 올라가 있었다.계단을 내려가는데 하람이 원료장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서린 씨, 립밤 발랐어요? 밖에 바람 차요.""……하람 씨.""네?""아무것도 아니에요."하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린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다가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발랐다. 향을 넣지 않은 립밤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오늘은 제 냄새가 아니라 거리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구청까지는 걸었다. 성수의 공장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갔다. 금속을 깎는 기름 냄새, 가죽 공방의 무두질 냄새, 새로 생긴 카페의 원두 볶는 냄새. 1년 전 그날은 택시를 탔다. 법원에서 구청까지, 창밖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오늘은 신호등마다 멈춰 서서 냄새를 하나씩 맡았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 *구청 앞 계단은 1년 전과 같았
라벨은 하람이 직접 붙였다.작업실 작업대 위에 30밀리리터 병 스무 개가 두 줄로 서 있었다. 투명한 유리 안에 연한 초록빛이 도는 향. 하람은 핀셋으로 라벨을 집어 병 목 아래에 한 장씩 붙였다. 숨을 참고 있었다. 한 장 붙일 때마다 숨을 내쉬었다.「무향 — 무화과 여름」그 아래 작은 글씨로 한 줄.「조향 구하람」서린은 창가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았다. N이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무향 병에 붙는 건 처음이었다. 라벨티 표상진은 처음에 반대했다. 두 번째 라인을 신인 이름으로 내는 건 모험이라고. 서린은 숫자를 보여 주었다. 파리 전시 기간 동안 무화과 시제품을 맡아 본 사람들의 반응지, 성수 팝업 재방문율, 그리고 하람이 석 달 동안 고친 버전 스물세 개의 기록. 표상진은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숫자가 좋네요, 그럼 된 거죠."손 떨려요."하람이 말했다. 핀셋 끝이 정말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떨어도 돼요. 삐뚤어지면 다시 붙이면 돼요.""이건 다시 붙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첫 병인데."지현이 커피를 들고 다가와 하람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하람 씨, 서린 씨 첫 병 라벨 얼마나 삐뚤었는지 알아요? 10년 전에. 제가 봤거든요. 이만큼."지현이 손가락으로 기울기를 그려 보였다. 과장이었다. 서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람이 웃었다. 핀셋 끝의 떨림이 멎었다.마지막 병에 라벨이 붙었다. 하람은 핀셋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붙였어요.""네. 붙였어요."서린은 병 하나를 집어 뚜껑을 열었다. 손목에 한 번 뿌렸다.초록 잎이 먼저 왔다. 한여름 오후,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서 있을 때의 풋내. 이어서 덜 익은 열매를 쪼갰을 때의 하얀 즙 냄새. 그리고 끝에 우유처럼 부드럽게 남는 따뜻함. 파리에서 돌아온 날 옥탑방 책상에서 처음 맡았을 때보다 끝이 길어져 있었다. 서린이 쪽지에 적어 둔 대로."끝을 늘렸네요.""네. 샌달우드 조금이랑, 쌀 증류 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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