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서인은 커피 향에 잠에서 깨어났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침대 끝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무심코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재하는 이미 일어난 뒤였다. 어젯밤에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재하가 이불을 끌어 올려주던 것까지는 기억났지만, 그 뒤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깊이 잠든 밤이었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재하는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갓 내린 커피 향에 버터가 녹는 고소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일어났어요?” 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앉았다. 재하는 그녀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병원 안 들를 거예요?” “저녁에 가려고요. 오전에 회의가 있어서.” “그래요. 나도 저녁에 같이 갈게요.” 서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제 진짜 한 번도 안 깨고 잔 것 같아요.” “나도요.” “우리 둘 다 엄청 피곤했나 봐요.” 재하가 웃으며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다. 서인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표면이 부서지면서 버터 향이 입안에 퍼졌다. 며칠 동안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맛이었다. 식탁 맞은편에서 재하는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며 휴대전화로 아침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서인은 빵을 먹다 말고 그를 잠시 바라봤다. 늘 곁에 있어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쓰러진 뒤로는 이런 평범한 아침조차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재하의 얼굴이며 식탁 위로 내려앉은 햇살까지, 서인은 한동안 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재하가 시선을 들었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인은 웃으며 다시 빵을 집어 들었다. *** 오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뒤로 서인이 확인해야 할 보고서와 결재 서류가 부쩍 늘었다. 평소 한정호에게 직접 올라가던 안건 중 일부도 검토해야 했다.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다음날 아침. 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재하는 보호자 대기 공간에 앉아 있었다. 서인을 발견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왔어요?” “네. 밤새 여기 있었던 거예요?” “중간에 차에서 조금 쉬었어요.” 서인은 재하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 반듯하던 셔츠에는 구김이 져 있었고, 눈가에는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고생했어요. 별일은 없었죠?” “네. 밤새 상태는 그대로세요. 조금 전에 담당 선생님도 다녀가셨고.” 재하는 서인을 바라봤다. “몸은 좀 어때요? 잠은 좀 잤어요?” “네. 재하 씨 덕분에요.” 서인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그런데 옆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조금 허전하더라고요.” 재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서인도 옅게 웃었다. “많이요.” 재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인은 그 손을 마주 잡고 잠시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의료진이 나와 한정호의 상태를 설명했다. 밤사이 추가 출혈이나 급격한 악화는 확인되지 않았고, 혈압과 호흡을 비롯한 주요 수치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오늘부터 진정제를 조금씩 조절하면서 반응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다만 아직은 의식 회복 여부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언제 다시 눈을 뜰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때 한성 비서실장이 병원에 도착했다. 서인은 실장에게 다가가 밤사이 아버지의 상태와 의료진의 설명을 전했다. “오늘은 실장님이 병원에 좀 계셔 주세요.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상무님.” 서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재하에게 돌아왔다. “재하 씨도 집에 가서 조금 쉬어요.” “바로 출근해요?” “네.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네요.” 서인은 재하의 구겨진 셔츠 깃을 바로잡았다. “집에 가서 씻고 좀 자요. 오후에 출근해도 되잖아요.” “
서인이 겨우 울음을 그쳤을 때, 재하는 그녀의 얼굴부터 살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붉게 부은 눈가를 바라보던 재하가 서인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뭐라도 좀 먹어요.” 서인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 없어요.” “조금만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서인은 닫힌 중환자실 문을 돌아봤다. 조금 전 면회를 마치고 나왔지만, 그 안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멀리 안 가요. 병원 안에서 먹으면 되니까.” 재하의 말에 서인은 잠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 식당에서 재하는 죽을 주문했다. 서인은 몇 숟가락 먹지 못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사이 죽은 금세 식어갔다. 그때 한성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상무님, 회장님 소식이 일부 임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오늘 예정된 회의와 결재 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문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서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회의는 예정대로 진행하세요. 아버지 결재가 필요한 안건은 따로 정리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자료는 보내주세요. 제가 확인할게요.” 통화를 마친 서인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내일은 회사에 가봐야 해요.”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서인은 식은 죽을 한 숟가락 더 떠먹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중환자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오전 내내 한정호의 상태에는 변화가 없었다. 서인은 보호자 대기 공간에 앉아 있다가도 중환자실 문이 열리면 고개를 들었다. 의료진이 다른 보호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자꾸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재하는 그 옆에서 그저 말없이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인의 얼굴에는 피로가 짙어졌다. 의자에 기대 잠깐 눈을 감았다가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차에서라도 좀 자는 게 어때요.” “괜찮아요.” “서인 씨.”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서인은 말을 끝맺
재하는 잠든 서인을 돌아봤다. “의식은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답니다. 발견하자마자 119에 신고했고, 지금 병원으로 이송 중이십니다.” “어느 병원입니까?” 비서실장이 병원 이름을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재하는 서인을 바라봤다. 조금 전 천둥소리에 놀라 깼다가 다시 잠든 서인은 그의 팔이 빠져나간 자리로 몸을 조금 웅크리고 있었다. 재하는 서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서인 씨.” “……네.” “일어나 봐요.” 서인이 눈을 떴다. “왜요……?” 재하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장인어른이 쓰러지셨대요.” 잠에 취해 있던 서인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네?” “조금 전에 집에서 쓰러지셨나 봐요. 아직 의식이 없으시대요. 지금 병원으로 가고 계시고요.” 서인은 몇 초 동안 재하를 바라봤다. 그러다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 병원이래요?” 재하가 병원 이름을 알려주자 서인은 베개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한성 비서실에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남아 있었다. “제가 비서실장하고 통화했어요.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요.” 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도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재하는 미리 챙겨 내려온 서인의 외투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밖에 비 많이 와요.” 서인은 외투를 여미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차 키를 챙겼다. 차고를 빠져나오자 빗줄기가 앞유리를 세차게 두드렸다. 재하는 와이퍼 속도를 높였다. 서인은 안전벨트를 매며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아버지는요?” “지금 응급실에 도착하셨습니다. 의료진이 확인 중입니다.” “의식은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서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쓰러지신 거래요?” “화장실에서 나오시다가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 상주 가사도우미분이 소리를 듣고 바로 신고하셨다고 합니다.” “……알겠어요. 결과 나오면 연락
침실에 올라왔을 때는 열한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서인은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세면대 한쪽에는 전날 가져다 놓은 화장품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아직 대부분의 물건은 자신의 방에 있었지만, 잠들기 전에 필요한 것들은 이제 이곳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서인은 잠옷 소매를 끌어당기다가 손목에서 익숙한 향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재하가 쓰는 바디워시의 향이었다. 조금 전 샤워를 하면서 무심코 그의 것을 집어 들었다. 자신의 것과는 꽤 다른 향이었지만, 재하에게서 늘 맡던 냄새라 그런지 낯설지 않았다. 서인은 괜히 손목을 코끝에 가져가 한 번 더 향을 맡았다. “뭐 해요?”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재하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인은 웃으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눌러 닦고 있는데 재하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 말려줄까요?” 서인이 거울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그럴래요?” 재하가 드라이어를 꺼내 들었다. 잠시 후 따뜻한 바람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재하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 드라이어를 움직였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날 때마다 따뜻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서인은 거울 속 재하를 바라보다 수건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직접 말렸을 텐데, 이제는 그에게 맡긴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드라이어 소리가 멎자 재하가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만져봤다. “이 정도면 됐나?”서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충분해요.”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이불을 들추고 들어가자 재하도 뒤따라 누웠다. 협탁의 조명만 켜둔 침실에는 빗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비가 더 오네요.” “그러게.” 그때 휴대전화에서 짧은 알림음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재하가 피식 웃었다. “뭐가 웃겨요?” “도현이가 사진 보냈어요.” “나도 보여줘요.” 서인은 그의 옆으로 다가가 화면을 들여다봤다. 낮에 레스토랑에서 찍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창에 드문드문 물방울이 맺히는 정도였다. 가로등 불빛이 번진 유리 위로 빗방울이 느리게 흘러내리더니, 어느새 앞유리를 가득 적셨다. 차가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서인은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했다. 짧은 거리였지만 어깨와 머리카락 끝에 빗방울이 내려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재하가 문을 닫자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만 낮게 남았다. 쇼핑몰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데다 돌아오는 길에 디저트까지 사 먹어서인지 두 사람 모두 저녁 생각은 없었다. 서인은 새로 산 구두를 드레스룸의 신발 수납장에 넣어두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재하는 보이지 않았다. 서재에 있는 모양이었다. 서인은 노트북을 가지고 식탁에 앉았다. 월요일 오전 임원회의에 올라갈 보고서가 도착해 있었다. 서인은 내용을 차례로 확인하고 몇 가지 의견을 덧붙여 회신했다. 한성의 상황은 이전보다 다소 진정됐지만, 아직 손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다. 당분간은 직접 챙겨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마지막 메일까지 보내고 노트북을 덮었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곧이어 재하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일 끝났어요?” 재하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네. 내일 회의 자료만 좀 봤어요.” 서인은 그의 옆에 앉았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고, 정원 쪽 조명 아래로 굵은 빗줄기가 비스듬히 지나갔다. “벌써 내일이 월요일이네요.” “그러게요.” “주말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아쉬워요?” “네. 주말이 가는 건 항상 아쉽죠.” 재하가 웃었다. 이대로 올라가 잠들기에는 어쩐지 아쉬웠다. 낮에 다녀온 카페며 구두 매장, 우연히 만난 도현 가족까지. 별다른 계획 없이 나선 외출이었는데 생각보다 즐거운 하루였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한 차례 커졌다. 서인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런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