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찾아야지. 나머지 두 개의 갱에도 없으면 군의 도움을 받아야겠어.”하민의 분부에 상혁이 먼저 일어나더니 피곤함도 무릅쓰고 9번째 갱에 내려갔다.그리고 하늘은 노력한 자를 버리지 않는다고, 새벽 3시에 상혁은 끝내 마지막 갱에서 하연을 발견했다. 하지만 열 몇 시간 동안 탈수한 상태로 산소가 부족한 곳에 있어 하연은 이미 의식을 잃었다.상혁이 하연을 업고 갱에서 나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은 곧바로 하연을 병원으로 옮기며 응급처치를 시작했다.시간이 1분 1초 흐를수록,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는 하민과 하성은 이미 초조함에 속이 타들어 갔다.비록 밤새도록 하연을 찾느라 모두 탈진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본인 상태는 뒤로한 채 하연의 상태에만 신경 썼다.“젠장! 누가 하연을 갱안으로 데려간 거야? 잡히기만 해봐, 내가 그놈 껍질을 벗겨낼 거야!”하성이 화를 내며 이를 갈았다.그에 반해 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넋이 나가 있는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제대로 생가해 봐, 아까 혹시 무슨 상황이었어? 혹시 따로 미움을 산 사람이 있는 거야?”그 말에 눈을 든 상혁은 하민과 시선을 마주치며 대답했다.“HY 그룹.”얼마 전에 바로 HY 그룹과의 협력을 취소해 그쪽에서 보복했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생각을 정리한 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래 직원을 시켜 HY 그룹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날이 밝기 전에 HY 그룹 파산시켜.”하지만 하민과 하성은 이 정도 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다.“고작 파산으로 하연이 오늘 겪은 고통과 어떻게 비교해?”“이건 시작에 불과해.”상혁의 말에 하민과 하성은 그제야 개입하지 않고 모든 걸 상혁에게 일임했다. 그도 그럴 게, 상혁은 언제나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기에 믿을 수 있었으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주자철은 사람들에게 잡혀 비틀거리며 달려와 상혁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이 사라진 건 정말 저희랑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제발 HY 그룹을 그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상혁의 부하가 떠나자 주자철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이윽고 상혁이 손을 휘휘 젓자 다른 부하가 다가와 주자철을 끌어갔다.그 뒤로 한참 동안 꺼지지 않은 응급실 불을 보며 상혁, 하민과 하성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그러다 날이 밝자 응급실의 불은 끝내 꺼졌고, 세 사람은 동시에 응급실 문 쪽으로 달려갔다.마스크를 벗으며 나오는 의사를 보자 상혁이 맨 먼저 물었다.“상태가 어떻나요?”의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산소가 부족한 공간에 너무 오래 있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의식을 회복하기가 어려울 겁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상혁의 눈에 절망이 드리웠고, 목소리가 떨렸다.“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분이 식물 인간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그럴 리 없어!”하성이 시뻘게진 눈을 한 채 버럭 소리쳤다.“하연이 식물 인간이 되다니. 절대 그럴 리 없어.”이윽고 마치 이 사실이 믿기 힘든 것처럼 연신 부정했다. 이 순간 하성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세 사람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그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눈을 반짝이며 의사를 붙잡았다.“무슨 방법이죠? 하연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없어요.”“하... 하지만 그분이 나서줄지가 미지수라.”“그게 누구죠? 어디 있어요? 제가 당장 사람을 시켜 찾아올게요.”하민이 다급히 따져 묻자 의사는 입을 꾹 다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분은 의술이 뛰어나지만 신출귀몰하는 분이라 일반인들은 절대 찾을 수 없어요. 그리고 환자분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을 지체하면 아마...”의사는 안타깝다는 듯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하성이 다급히 물었다.“골든 타임이 아직 얼마나 남았죠? 하연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볼게요.”“6시간 남았습니다.”“6시간?”“네. 때문에 정말 어려워
상혁의 심각한 말투에 현승은 장난기 섞인 모습을 거두로 진지하게 물었다.“보스, 무슨 일인데 그래요?”“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간단한 한마디에 현승은 이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그를 보자 덩그러니 남겨진 미녀가 뒤에서 소리쳤다.“도련님, 어디 가는데요?”하지만 현승은 그 여자를 상대할 겨를이 없어 집에 가라는 말을 끝으로 곧장 전용기에 올라탔다.두 시간의 비행 끝에 현승은 겨우 D시 병원에 도착했다.“백... 백 교수님?”“헐,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정말 백 교수님이잖아!”“...”현승은 의료진들의 선망의 눈빛과 흥분 섞인 말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비행 중에 이미 하연의 검사 보고서를 토대로 수술 방안을 구상한 현승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복으로 환복하고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불이 다시 켜지자 하성이 걱정스레 물었다.“저 사람 정말 괜찮은 거 맞아?”“백현승이란 이름 세 글자가 의료계에서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어. 백 교수가 지금껏 실패한 수술이 없거든. 그런데 백 교수마저 실패하면 하연은...”하민은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하연의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하민도 생각지 못했으니까.그때 상혁이 하민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그래. 하연만 무사하면 이 일 제대로 갚아줄 거야. 하연이 다치게 한 사람은 한 놈도 용서할 수 없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뒤에 검은 무리를 달고 안으로 들어왔다.“한 대표님, 가시면 안 됩니다.”“꺼져!”서준은 포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저를 막는 경호원들을 뿌리쳤지만 경호원 역시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한 대표님,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최하연 어디 있어?”서준의 물음에 경호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때 하민이 다가와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한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하민을 마주하자 서준은 성질이
“걱정 마세요. 제 손을 거친 수술이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환자분은 이미 고비를 넘겨 곧 깨어날 겁니다.”그 말을 듣자 모든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상혁이 다가가 현승의 어깨를 두드렸다.“고생했어.”말이 떨어진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승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듯 고개를 상혁의 어깨에 기댔다.“보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제가 얼마나 열심히 수술했는데, 고작 고생했단 한마디가 끝이라고요?”그 말에 상혁은 현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테니까.”“이건 보스가 직접 말했어요? 후회하면 안 돼요.”현승은 헤실 웃으며 말하더니 피곤한지 하품을 했다.“에너지 너무 소모했더니 피곤해 죽겠네. 저 먼저 한숨 자고 와서 상은 이따 받을게요.”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경호원이 현승을 휴게실로 안내했다.한편, 수술실에 있던 의사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흘러나왔다.“와, 이게 가능해? 그렇게 오랫동안 뇌에 산소가 부족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바로 괜찮아졌다고?”“이건 의학계의 기적이야.”“역시 이래서 백 교수님 백 교수님 하는 거였네.”“이번 수술을 다음 논문의 참고 자료로 사용해야겠어. 백 교수님은 내 우상이야.”“...”사람들은 현승의 의술에 혀를 내두르며 열심히 학습했다.고비를 넘긴 하연은 이내 VIP실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 상혁이 계속 곁을 지켰다.한편 병실 입구에서 하민이 하성을 가로막았다.“두 사람한테 시간을 좀 줘.”결국 하성은 마지못 해 입을 삐죽거리며 문 앞에서 중얼거렸다.“저 자식이 앞으로 하연이 배신하면 내가 저 자식 가죽을 벗길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하성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상혁은 믿을 수 있어. 그동안 상혁이 하연한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는 어린애도 다 알 텐데, 우리가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일이잖아.”하성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 하
“제가 여기 남든 말든 최 대표님과 상관없지 않나요?”서준이 제 태도를 표명하자 더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눈치챈 하민은 마지막으로 충고했다.“한 대표님, 버스를 놓쳤으면 다음 걸 기다리세요. 선 자리에서 지나간 버스를 아무리 기다려봤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한 대표님도 잘 아실 텐데.”이윽고 하성을 데리고 병원을 나섰다.“형, 저 자식 저기 있게 그냥 두는 거야?”하성은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간다고 버티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무슨 수로 내쫓아?”“그래도 하연이 저 자식 얼굴 꼴도 보기 싫어할 거 아니야!”“너도나도 하연이 믿어야 돼. 본인이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 하연이도 남은 인생 누구한테 걸어야 할지 알 거야.”그 말에 하성의 마음은 이내 차분해졌다.“그러길 바라야지.”한편, 하연은 아주 긴 꿈을 꿨다.시간은 5년 전 서준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갔는데, 그때 하연은 컬럼비아 대학 디자인 학과를 다니며 대학원생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처음으로 하연을 낯선 도시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최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걱정했다.“하연아, 내가 너희 학교 맞은편에 집 하나 구입하고 경호원과 가정부도 고용했어. 밖에서 지내는 동안 절대 손해 보지 마.”하민이 전화로 신신당부하자 하연은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걱정 붙들어 매요. 그리고 이왕 공부하러 왔으니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 돼요. 저 이미 다 커서 나를 돌볼 능력은 되거든요.”“아무리 그래도, 네가 우리 곁을 떠난 적 한 번도 없어 걱정돼서 그러지.”하연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저 벌써 스무 살이에요. 어린애 아니라고요. 언젠가는 커요...”하연의 끊임없는 설득 끝에 하민은 그제야 받아들였다.전화를 끊은 하연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웬 사람 한 명이 하연에게 달려와 부딪쳤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중심이 무너져 버린 하연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고 곧이어 엉덩이에
그 남자와 다시 만난 건 약 한 달 정도 후였다.하연이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자 한 무리 사람들이 키득키득거리며 다가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아시아인들은 다 너처럼 등신 같고 개 같아?”“예전부터 병을 몰고 다니더니 더러운 종자!”“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시아인은 우리 발밑이야.”“...”사람들의 말에 하연은 속에서 열불이나 눈살을 찌푸렸다.‘이 왹국놈들 대체 뭐야? 이유도 없이 남을 욕하다니.’이윽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앞으로 다가가 반박하려 할 때, 옆에서 남자의 비명과 욕설이 들렸다.“젠장! 감히 나를 때려?”심지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대 더 얻어터졌다.“때렸다, 어쩔래? 감히 우리를 욕해? 오늘 제대로 얻어터져 봐!”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또다시 외국 학생의 얼굴을 후려쳤고 곧이어 꽥꽥거리는 비명이 들렸다.앞으로 다가가 보니 아시아인 남학생이 방금 하연을 비아냥거렸던 외국 학생들을 제대로 혼쭐 내주고 있었다.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몇 대 만에 외국 학생들을 모두 때려눕힌 남자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제 팔을 주물럭댔다.이윽고 눈을 내리깔며 귀찮은 듯 말했다.“같잖은 겉들이 어디서 잘난 척이야? 앞으로 나 만나면 돌아서 다녀. 안 그러면 볼 때마다 때릴 거니까.”말을 마친 남자가 뒤돌아서자 하연은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곧이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가리켰다.“어? 그쪽!”하연을 알아본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하연의 팔을 덥석 잡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아까 너무 멋지던데요? 나쁜 자식들! 감히 우리를 그렇게 욕해? 우리나라 경제가 지금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데 아직도 무시하다니. 아까 그 자식들 쥐어팬 거 너무 속 시원했어요. 저도 당장 가서 때려주고 싶었다니까요.”“...”하연이 끊임없이 쫑알대는 사이, 남자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그러다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그제야 하연을 놓아주었다.“아까 계속 있었어요?”남자의
하연이 웬 남자와 돌아온 걸 본 룸메이트들은 사냥감을 찾은 늑대처럼 득달같이 달려왔다.“방금 그 남자 누구야? 남자 친구? 너무 잘 생겼다!”“그러게. 근육질 몸매인 것 같던데, 너무 남성미 넘치더라.”“남친은 언제 사귀었어? 왜 나는 몰랐지?”“...”룸메이트들이 재잘재잘 질문하자 하연은 다급히 설명했다.“내 남자 친구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뭐?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그럼 이름이 뭔데? 나한테 소개해 줄 수 있어?”끊임없는 질문 세례에 하연은 그제야 상대와 두 번이나 만났는데 아직 이름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그건, 다음에 물어보면 알려줄게.”그 말에 룸메이트들은 너도나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다음에 만나면 이름, 학원 등등 개인 정보를 제대로 물어봐야지.’그리고 하연이 기대했던 만남은 다음날 바로 이뤄졌다.“하연아, 저 사람 어제 너 데려다줬던 그 남학생 아니야? 왜 교무처로 불려 갔지?”룸메이트의 말에 하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뒤따라 교무처로 향했다.이윽고 문에 바싹 기대 안을 확인했더니 안에는 어제 맞은 외국 남학생들이 불쌍한 표정으로 선생님께 일러바치고 있었다.“쌤, 저 아시안 놈이 어제 이유도 없이 우리를 때렸어요.”“학교에서 폭행을 저지르는 건 교칙에 어긋나는 거 아니에요? 저 자식 꼭 벌해주세요.”“아예 퇴학시켜 버리면 더 좋고요.”“...”외국 학생들의 비난에 남자는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유창한 언어로 툭 내뱉었다.“어제 그것도 많이 봐준 거야. 다음번에 또 만나면 그땐 이빨 다 털어줄게.”“그만!”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의 말을 잘랐다.“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학교도 더 이상 너를 받아줄 수 없어. 이렇게 뉘우치지 않으면 당장 교장 선생님께 말해 학교에서 제명하는 수가 있어.”“마음대로 하세요.”개의치 않는 듯한 남자의 태도에 선생님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보다
하연은 싱긋 웃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쪽 정의의 사도잖아요. 어제 그 자식들이 먼저 그렇게 심한 말을 했으니 저였어도 그놈들 곤죽을 만들었을 거예요.”“여자애가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되죠. 이런 일은 남자한테 시켜요.”이윽고 남자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투로 물었다.“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예요?”“최하연. 여름 하 제비 연이에요.”“음, 기억해 둘게요.”“그러는 그쪽은요? 이름이 뭔데요? 계속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남자는 싱긋 웃으며 의아함 가득한 눈으로 하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내 이름 알고 싶으면 모레 오후 세 시 반 서문에서 봐요. 그때 알려줄게요.”“뭐야!”하연은 불만 투로 중얼거렸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손을 흔들었다.“모레 세 시 반, 잊지 마요.”하연은 떨떠름해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날이 자꾸만 기다려졌다.그래서인지 시간은 무척 늦게 흘러갔다. 2년 같은 이틀이 지나 세 번째 날이 되자 하연은 아침 일찍 치장하고 예쁜 옷을 골라 입고는 오후 1시부터 서문에서 남자를 기다렸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남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하루, 이틀, 사흘...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기대가 점점 실망으로 변했고, 또 어느덧 2년간의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지만 기다리는 남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심지어 앞으로 평생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던 2년 뒤, 하연이 졸업하고 F국으로 돌아갈 때 비행기 안에서 또 그 남자를 만났다.양복을 쫙 빼 입고 광택 나는 구두를 신은 남자의 모습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조각 같은 얼굴에는 더 이상 가볍고 장난기 넘치는 분위기가 아닌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라 저도 모르게 잘못을 뉘우칠 뻔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잖아?’“이봐요, 잠깐만요.”하연은 남자에게 다가가 막아서더니 분노와 서러움이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2년 전에 왜 약속 안 지켰어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하연은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