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아이, 그런 말은 하지 마...” 왕진은 눈물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왕정은 갑자기 기침하더니 입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연은 깜짝 놀라 손으로 피를 받으며 외쳤다. “정아!!”무대 앞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상혁은 바로 일어나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지시했다. “길을 트고, 119를 불러야 해!”한창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휠체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고,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지만 전혀 주저하지 않고 피를 받아내고 있었다. 이 순간, 그도 하연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이걸 쓰세요.” 한창명은 바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하연은 누구의 것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피를 닦으며 지혈을 시도했다.왕정은 곧바로 응급차로 이송되었는데, 응급차에는 가족만 동승할 수 있었다. 하연은 왕진 모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숨을 고르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괜찮을까요?”상혁은 하연의 흔들리는 몸을 붙잡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실은 하연도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괜찮을 거야.”하연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힘이 빠진 듯 상혁의 품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한창명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옆에 있던 방송국의 한 고위층 인사가 웃으며 말했다. “최 사장님도 참... 저렇게 위독한 사람을 이런 자리에 데리고 오다니, 한 검사장님도 놀라셨겠어요.”한창명은 바로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위독한 사람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아, 아닙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한 검사장님...” 한창명은 하연을 한 번 더 흘끗 쳐다본 후, 결국 아무 말 없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걸그룹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뛰어난 춤과 노래 실력으로 수많은 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왕정은 10시간의 긴 수술 끝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깊은 밤, 하
하연과 이현은 조문객들 뒤편에 서 있었고, 주변은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현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듯했다.여러 일을 겪은 하연은 더 이상 이현이 낯선 사람이 아닌,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요. 저와 상혁 오빠는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인연이에요.”이현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선 신중한 편이라 더 이상 묻지 않았다.“축하해요.”“손이현 씨.” 그가 고개를 약간 돌린 순간, 하연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그를 불렀다. 이현은 그녀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그때, 계속 침목하고 있던 왕진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여기 왜 왔어?”그곳에는 한서영이 있었다. 그녀는 온통 검은빛으로 물든 장례식을 향해 새빨간 옷을 입고, 요염한 화장을 한 채 당당하게 다가오고 있었다.“아주머니, 따님이 떠났다고 해서 특별히 향이라도 하나 올리러 왔는데, 그렇게 나오실 거예요?” 왕진은 분노로 몸을 떨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부축했다.“나가! 넌 여기서 환영받지 못해!”하지만 서영은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참 예쁜 얼굴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마비된 걸까? 하긴, 이제라도 떠나서 다행이야. 자신도 괴롭고, 남까지 힘들게 한 삶이었으니까.” 이 말을 들은 하연은 당장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이현이 그녀를 단번에 붙잡았다. “지금 하연 씨가 나서는 건 좋지 않아요.”“근데 한서영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지금 당장 나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경찰을 부를 거야!” 왕진은 분노로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아주머니, 왜 이렇게 손님 대접을 못 하셔? 우리 엄마의 자금 지원이 없었으면, 당신 딸이 목숨 연장할 돈을 구할 수 있었을까? 우린 같은 길을 걸었는데, 이제 와서 나를 미워하는 거야?”서영은 비웃으며 웃음을 터뜨렸고, 숨이 찰 정도로 웃었다. “아주머니가 했던 일들, 사람들 앞에서 다 까
하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한서영이 대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난동을 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한서영의 동작은 너무 빨랐다. 손이현이 즉시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옷자락만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서영은 그대로 하연에게 덮쳐 넘어뜨렸고, 칼을 든 손을 잔혹하게 휘둘렀다. 주위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하연은 즉각 머리를 돌려 가까스로 피했다.“한서영! 너 정말 미쳤구나!”하연은 서영의 손을 필사적으로 제압하려 했지만, 서영의 눈은 이미 피로 물들었고, 끝장을 보기 전까지는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내 인생은 망했어. 너도 나랑 같이 무덤에 들어가. 너희 집안도 우리 집안과 같이 무너져야 해!”서영은 몇 번이나 칼을 휘둘렀지만, 하연은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하연은 무릎을 끌어올려 서영의 하반신을 강타했고, 곧바로 몸을 돌려 서영 위에 올라탔다.“한서영!” 하연은 소리치며 서영의 뺨을 세게 때렸다. “네 오빠는 이미 감옥에 들어갔어. 너도 그렇게 되고 싶어?”“지금 안 들어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서영은 칼을 단단히 쥔 채, 주변 사람들을 경계했다. “이 모든 건 다 너 때문이야!”“왕씨 가문이 사람을 보냈어. 그 사람들은 우리를 망치고 우리 집안을 완전히 접수하려고 하지. 이것도 네가 꾸민 거 아니야?” 서영은 냉소를 지으며 갑자기 몸을 풀었다. “애초에 우리 오빠가 너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 호랑이 새끼를 우리 집에 들인 거야. 내가 널 저주한 게 아니라, 너는 원래부터 재앙이었어!” 서영은 말을 끝내며 하연을 향해 침을 뱉었다.옷이 이미 엉망이 된 것을 본 하연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왕씨 가문의 책임자로부터 답이 오지는 않았지만, 한서영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그 집안의 책임자가 이미 한씨 가문을 처리할 준비를 끝마쳤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절박한 한서영이 이렇게 미쳐가고 있는 거야.’“한씨 가문의 몰락은 최하연 씨 때문이 아니야.”이현은 서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쉽게 그
하연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그런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날 위해서 다른 일을 좀 해줘야겠어.” “무슨 일이죠?”“손이현에 대해 조사해봐. 그 사람의 모든 정보를 다 알아내 줘, 전부 다.”하연은 강조했다. 이에 정태훈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손이현 사장님요? 갑자기 왜 그분을 조사하려고 하시는 거죠?”요즘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손이현과 관련이 있었다. 원래 하연과는 아무 상관도 없던 사람이 이렇게 여러 사건에 관여하고 있었다.“학비도 기부금으로 충당해야 했던 고아가 어떻게 별장을 소유하고,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는지 궁금하네. 나도 좀 배워야 할 것 같아.”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후, 추가 정보를 전했다. “이미 승진하신 전 지방검찰청 검사장, 정태산 검사장님께서 곧 B시에 오실 예정입니다. HD그룹 방문 일정이 잡혀 있고, 송 대표님과의 만남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그 사이에 약 30분 정도 시간이 생길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 최 사장님께서 송 대표님을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정태산 검사장님은 언제 오신대?”“모레입니다.”하연은 일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녀는 목의 상처를 만지며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상혁 오빠에게는 특히.”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걱정하는 걸 원하지 않았고,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황연지가 했던 말이 가슴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사실 하연도 자신이 상혁에게 너무나 큰 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태훈은 약간 민망해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최 사장님의 비서예요, 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잖아요.”하연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 꽤 많은 걸 말했잖아.”묘지를 떠난 후, 이현은 곧바로 가게로 향했다. 거기에는 양한빈이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손 사장님, 도대체 무슨 일인데 전화로 말하지 않고 직접 보자고 한 거예요? 저도 바쁜 몸이라고요.” 양한빈이 농담을 던졌다.“한서영이 악
[창명이는 시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내 학생 중에서도 창명이는 가장 규칙을 잘 지키고, 본분을 넘지 않는 애라고.]전화기 너머로 정태산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저는요?”[너? 너는 말로는 듣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엉뚱하게 행동하지. 거의 내 머리 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나?]만약 조진숙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정태산은 사실 부상혁의 이런 행동을 참지 않았을 것이다. 상업에 종사하는 자가 정치에까지 간섭하며, B시의 두 거물을 몰락시켰다는 건 너무나도 지나친 일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여기까지 해도 충분했다. 더 이상 도울 수 있는 점이 없었다.상혁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정태산이 가장 아끼던 학생은 부상혁도, 한창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은 모습을 감춘 정태산의 자랑스러운 제자였다.전화를 끊자, 황연지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오늘의 업무를 보고한 후,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부 회장님께서 다시 DL그룹을 장악하신 이후, 부남준이 자주 드나들며 사실상 실권을 쥐고 있는 듯합니다. 이사회에서도 부남준에게 극진히 예를 갖추고 있습니다.”“모두...” 연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말해.” 상혁이 다그쳤다.“모두들 대표님이 완전히 총애를 잃고, DL그룹에서의 지위도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원래 대표님을 지지하던 이사들마저도 지금은 흔들리며 저한테 상황을 물어보고 있습니다.”연지는 상혁이 FL그룹 일에 몰두하느라 DL그룹에서의 입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넌 뭐라고 대답했지?”“DL그룹의 구매팀과 재무팀은 여전히 저희 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 대표님께서 DL그룹을 포기하실 생각이 없으니, 조금만 더 버티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부 회장님께서 화가 나 계시지만, 일이 끝나면 곧 돌아가실 거라고 말했습니다.”상혁이 눈을 들었다. 연지는 긴장하며 몸을 떨었다.“그게 내 지시였나?”“아닙니다...” 연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
“제가 할 일이 아니라니요? 겨우 꽃에 물을 줬을 뿐이에요.” 하연은 물 호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분명히 여름날의 시원함을 즐기는 듯, 물을 직접 자기 다리에 뿌렸다.물방울이 하연의 종아리를 따라 흘러내리며 잔디에 떨어졌다.상혁은 그 광경을 보고 목이 잠기는 듯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하연 쪽으로 걸어갔다.“대표님이 돌아오셨네요.” 가정부가 외쳤다.하연은 바로 물을 끄고, 물을 튀긴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 “언제 왔어요?”상혁은 여름 저녁 햇살 속에서 흰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어 더욱 눈에 띄었다. 그의 얼굴은 빛에 반짝이며 한층 더 매력적이었다.그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하연의 손에서 물 호스를 빼앗으며 말했다. “네 이름이 이제 ‘꽃연’이야.”하연은 잠시 멍해졌다. “무슨 소리예요?”“꽃에 물 주는 거 아니었어? 온몸이 다 젖었잖아.” 상혁은 그녀의 흠뻑 젖은 가슴을 흘끗 보며 말했다. 그곳은 이미 희미하게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연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꽃연? 그거 꽤 귀엽네요. 정원이 이렇게 큰데, 우리 배나무 하나 심어요. 내년 봄에는 눈처럼 하얀 꽃을 볼 수 있을 거예요.”상혁은 물 호스를 높은 곳에 걸어 두었다. 하연은 그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게다가 배도 먹을 수 있잖아요.”그녀의 생각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상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농업실습 수업은 들은 적 있나?”하연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때는 수학 성적이 워낙 나빴던 탓에 보충수업에 남아야 했고, 실습수업에는 참석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오빠도 알잖아요. 나는 물리도 항상 꼴찌였어요.”상혁은 그 시절을 기억하며 웃었다. “맞아, 여름에 나무를 심으면 봄에 심은 것보다 안 자라.” “그래도 해봐야죠.” 하연은 질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상혁은 그녀의 목에 붙은 반창고를 보고 얼굴빛이 변했다.“목은 왜 그래?”하연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조진숙은 상혁에게 등을 진 채, 어항 속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미묘한 어조로 말했다. “너, 아주 바쁜 사람이 되었더구나. 나를 만나려고 일정까지 조율해야 하다니.” 상혁은 표정을 거두고, 다른 어항의 먹이를 찾아 조진숙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 바쁘지 않아요.”“정말?” 조진숙은 분명히 화가 나 있었는데, 날카로운 어투로 말하며 상혁을 흘겨보았다. “FL그룹에서 잘나간다고 하던데, 그쪽 일에만 온 마음을 쏟는다고 들었어.”“황 비서가 그러던가요?”“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게 사실이냐는 거지!”상혁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목소리는 차가워졌다.“네, 맞아요.”“맞아?” 조진숙은 화가 치밀어 올라 상혁이 건네준 어항 먹이를 단번에 쳐내며 바닥에 떨어뜨렸다. “너, 얼마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니? DL그룹에서 잠시 물러날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네가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는 안 했잖아.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뭐니?”상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가슴은 들썩였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제가 DL그룹으로 돌아가지 않은 걸 탓하시네요.”“최소한 뭔가 행동은 보여줘야지!”“무슨 행동이요, 아버지에게 가서 사과하란 말씀이신가요?”두 사람은 마주 서서 대치했다. 조진숙은 아들을 한동안 응시한 후 말했다. “그게 잘못됐다는 거니? 나는 B시에 와서 송혜선과 정면으로 맞섰어. 송혜선의 행동은 원래 내가 무시할 만한 거였고, 신경 쓸 가치도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 부남준은 야망이 커. 이렇게 두면 DL그룹은 결국 부남준의 것이 될 거야.”이때, 하연이 계단에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다가 두 사람의 언쟁을 듣고 멈칫했다.“진숙 이모...”조진숙은 하연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여전히 상혁을 향해 경고했다.“이제 너도 꽤 성장했구나. 네 회사를 차려서 잘나간다지만, FL그룹이 아무리 잘돼도 DL그룹의 손가락 하나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 같니? 부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이름, DL그룹의 이사라는
그날 하연은 상혁과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상혁 역시 DL그룹에 대해 언급은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묘한 침묵 속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며칠 후, 정태산이 B시에 도착했고, 공식적인 행사를 마친 뒤 비로소 개인 일정이 시작되었다.상혁은 고요한 정취가 흐르는 수연정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국악 공연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으로, 그의 방문 소식을 들은 주인은 특별히 유명한 명창을 초대해 무대에 올렸다. 지금 상혁은 정자에 서서 푸르른 여름 풍경을 배경으로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고고한 양반가의 우아한 도련님을 떠올리게 했다.황연지는 그곳에 도착해 상혁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가가며 말했다.“부 대표님, 우희서 씨가 도착했습니다.”연지 옆에 서 있는 우희서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도 여전히 단정한 얼굴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얼굴에는 은근한 매력이 감돌고 있었다.“부 대표님.” 희서가 인사했다.상혁은 호수에 핀 한 송이 연꽃을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지난달에‘NIGHT'에서 10억을 벌어들여 1위를 했다고?”희서는 솔직하게 보고했다. “B시에는 재벌 2세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저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부남준이 좋아했어?”“제 지위로는 아직 부남준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 남희가 중간에서 처리했습니다. 남희는 다음 주에 부남준이 돌아오면 저를 부남준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NIGHT’은 단순한 클럽이 아니었다. 클럽이란 돈만 있으면 부유층이나 연예인이 쉽게 열 수 있는 곳이지만, ‘NIGHT’ 같은 최고급 클럽은 엄청난 인맥과 자본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한때 ‘NIGHT’은 단속으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 안에는 유능한 인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모두 남희의 지휘에 따랐다. 그리고 그 남희 위에는 바로 부남준이 있었다.우희서는 저번 단속 이후, 부상혁이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스파이’로서 ‘NIGHT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