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준이 물은 건 이건의 상황이었지만,이람은 이미 이건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린 상태였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하준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낮고, 차분하고, 묘하게 귀에 남는 목소리.그 탓에 이람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서하준이 나를 좋아해.’그 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마치 숨이 막히는 것처럼, 가슴이 조여 왔다.이람은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어릴 때부터 예술을 접하며 자라서 이람은 자기 외모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성에게 호감도 적지 않았고, 관심을 표현하는 사람도 꾸준히 있었다.하지만 이람은 늘 다른 관심사가 많았다.일, 예술, 삶, 미래.그래서 누군가에게 마음이 크게 흔들린 적은 없었고, 연애 자체에도 큰 흥미가 없었다.고백받으면 정중하게 거절했고, 대부분은 그걸로 끝이었다.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그러다 제헌이 바다에서 자신을 구해 올렸고,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그 얼굴을 본 순간...이람은 처음으로 ‘심장이 뛴다’라는 감정을 알게 됐다.그때의 감정은 아주 강렬했다.하지만 그 뒤의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그렇게 강한 심장 박동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설렘은 식었고, 잔열은 서서히 사라졌으며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게 이람이 제헌에게 가졌던 감정의 흐름이었다.마음이 식고 난 뒤, 이람은 놀랄 만큼 평온해졌다.강씨 집안 본가에 가서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쳐도, 마음은 큰 물결이 일지 않고 잔잔했다.그러다 어젯밤에 이람은 일부러 잠든 척을 했다고 말하기엔 조금 곤란했다.정말로 피곤했고 눈을 감고 잠에 들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완전히 잠들지는 않은 상태였다.그때 하준의 뜨거운 손바닥이 이람의 뺨에 닿았다.그리고 이람은 그대로 안겨 침대에 눕혀졌고, 이마 위로 아주 조심스러운 키스가 느껴졌다.지금 떠올리기만 해도, 이람의 심장은 다시 한번 제멋대로 뛰었다.그 갑작스러운 키스 앞에서 이람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그 미묘한
이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 말은 네가 맞아. 그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무슨 큰일 있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말할게. 괜히 걱정 안 하게.”이건은 그 말을 듣자 꽤 만족한 듯했다.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찜찜함도, 일단은 많이 가라앉았다.물론, 일단이었다.이건은 살짝 웃었다. 웃지 않을 때는 제법 성숙한 남자의 냉기가 있는데, 웃으면 단번에 젊은 사람 특유의 오만함이 튀어나왔다.의외로 잘 어울렸다.“이제 안 놔줄 거야?”이건은 손을 놓지 않았다.눈에 잠깐 득의양양한 기색이 스쳤고,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말투는 오히려 진지했다.“난 누나만큼 인생을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키는 이만큼 컸어.”이건은 직접 손으로 높이를 재는 시늉까지 했다.“봐, 거의 누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잖아. 누나 힘으로는 여기서 못 빠져나와. 그러니까 힘으로는 내가 이긴다는 거, 이건 인정해야 해.”이건은 이람을 똑바로 바라봤다.“나도 누나보다 잘하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지. 안 그러면 내가 너무 쓸모없어 보이잖아.”그리고 한 박자 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누나, 지난 3년 동안 나 진짜 삐딱하게 살았어. 세상 다 싫어하고, 한쪽으로만 파고들어서 막다른 길로 갔고... 누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신경도 안 썼어.”이건은 이를 꽉 물었다가 풀며 말했다.“근데 나도 배운 건 있어. 이제 안 그럴 거야. 난 그냥 누나를 지키고 싶어.”“내 머리는 별로야. 인정해.”이건은 솔직했다.“대신 몸은 써 줄 수 있어. 누나 지키는 데는. 난 진짜 누나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이건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누나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웃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그게 뭐든, 난 항상 누나 편이야.”말이 절반쯤 왔을 때, 이람의 눈에서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다.이람은 이건을 보며 말했다.“조이건, 이게 네가 할 말은 아닌데.”‘내 동생, 진짜 많이 컸네.’이건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지금 이 상황이 영 불편한 듯했다. 그래도 말은
이 말들은, ‘조이람과 서하준이 이미 사귄다’라는 전제를 두고 이람이 설명한 것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이람과 하준의 관계에 꽤 잘 들어맞는 말처럼 느껴졌다.왜냐하면 하준이 이람을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람이 말한 ‘같은 길을 걷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다만 이람이 고민해야 할 건, 하준을 받아들일지 말지였다.이번 대화에서 이람은 정말로 속마음을 꺼내 놓았다.이건 역시 많은 말을 했다.물론 이건이 이렇게까지 말하게 된 건, 이람이 계속 질문을 던지며 이건의 속마음을 끌어냈기 때문이다.이건의 성격상 그냥 두었다면 절대 이렇게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이람은 설명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건 앞에 섰다.이건은 누나의 긴말을 듣고 멍해져 있었다.‘나 좀 병신 같았네.’방금 이람의 말 속에서 이건은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인생의 관점 같은 걸 배웠다.문득 수범에게 너무 함부로 대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늘 수범의 감정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해 왔으니까.게다가 이건은 지난 3년 동안 이람과 거의 연락을 끊고 살았다.이람이 이혼한 뒤에야 관계가 조금씩 회복됐지만, 이렇게 깊이 이야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이람이 이렇게 속을 꺼내 보이자 이건은 누나를 조금 더 알게 된 느낌이 들었다.이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고, 그 생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오해도 풀렸고, 마음의 거리도 확실히 가까워졌다.이건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그리고 이런 결과가 나오기까지 이람이 끝까지 화내지 않고 참으며 대화한 덕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이건은 내내 성질 더러운 말만 쏟아냈는데 말이다.‘아, 씨... 나는 진짜 병신이네.’‘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이건은 이람이 자기 앞에 서는 걸 올려다봤다.누나의 눈빛이 부드러웠다.‘설마 또 내 속마음 다 꿰뚫고 한마디 하려는 거 아니지?’이건은 이런 분위기를 정말 싫어했다.너무 감정적이고, 너무 민망했다.그래도 이람이 뭔가 말하려 한다면...
이건이 바로 받아쳤다.“일단 우리 집은 서하준네처럼 그렇게 대단한 집안 아니고, 그리고 누나가 서하준 비서로 있을 때 나는 누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서하준 비위 맞추는 것만 봤어.”이건은 원래부터 반골 기질이 있었다.누구에게도 아부하지 않았고, 설령 심혜영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았다.잡힐 생각도, 잡힐 이유도 없었다.그래서 이건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바로 그거였다.자기 누나 이람은 혈연도 아닌 남자를 상대로 자신을 낮추고 맞춘다는 사실.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건의 혈압은 그대로 치솟았다.이건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왜 그래야 하는데? 누나는 세상 누구한테도 잘 보일 필요 없어. 근데 왜 서하준한테는 그래야 해? 서하준은 그냥 남자잖아. 세상에 널린 게 남자야.”이건은 분노에 찬 채 말을 쏟아냈다.“남자들 다 똑같아. 하나같이 더럽고 역겨워.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아쉽게 굴어? 누나는 그냥 자기 인생 잘 살면 돼. 남들이 누나 눈치 보게 만들면 되지, 왜 누나가 먼저 고개를 숙이냐고!”이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래서 내가 누나가 손해 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집안도 안 맞고, 관계도 이상해. 서로 대등하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잖아.”그리고 덧붙였다.“차라리 누나가 서하준 멱살 잡고 욕이라도 하면, 난 지금보다 덜 걱정했을 거야.”이람은 여전히 차분했다. 서두르지도, 감정적으로 맞받아치지도 않았다.“서하준이 집안 가지고 나를 무시했으면, 난 절대 그 사람이랑 같이 있지 않아.”이람은 분명하게 말했다.“아무리 능력 있고 대단해 보여도,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면 난 그 자체로 마음이 안 가.”이람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가 서하준을 ‘비위 맞췄다’라고 느낀 건, 그때 내가 그의 비서였기 때문이야. 비서와 상사는 원래 권한부터 다르고, 그건 공적인 사이에서 구조적인 부분이지.”이람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난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어. 아부하거나 비위 맞춘 게 아니라, 서하준을 상사로서
이건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연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이건은 애초에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여자는 이건이 게임이랑 신혼처럼 지내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도 없었다.그런데 이람은 달랐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남자한테 홀랑 넘어갔다. 심지어 유형도 늘 비슷했다.이건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 자기 누나는 강제헌이나 서하준 같은 타입을 좋아한다는 걸...잘생긴 얼굴로 계산하면서 다가오는 타입.‘주진결 같은 애들은 아무리 기를 써도 누나 눈엔 재미도 없겠지.’이건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커피를 집어 들고 한 모금에 들이켰다.여전히 눈빛은 사납게 이람을 노려보고 있었다.이람이 당장이라도 ‘헤어질게’라고 말해 줘야 마음이 놓일 것처럼.이람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더 이상 바른 자세로 앉아 있지 않고,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헤어지는 건 불가능해.”아직 하준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리되지 않았지만,이건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이건은 이람의 대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누나는 연애를 꼭 해야겠다는 거야?”이람은 이미 이건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알았기에, 감정을 누그러뜨릴 방법도 알고 있었다.“연애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야.”이람은 이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서하준이랑 안 만난다고 해도, 나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때마다 너랑 이렇게 싸워야 해? 그러니까 근본적인 문제부터 보자.”이람은 차분히, 분명하게 말했다.“누나가 누구랑 감정적인 관계가 되든, 절대 손해 보게 행동하지 않을게. 이용당하지도 않고, 또다시 이성 잃고 사랑에 올인하는 일도 없을거야.”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확신이 있었다.시선은 흔들리지 않았고, 농담도 아니었다.그 모습이 묘하게 이건의 기억 속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엄하고 단호하지만, 그 안에 책임이 담긴 말투.이람의 말에는 이상하게 사람을 납득시키는 힘이 있었다.이람의 명확한 답변 덕분에
이건의 말이 이람의 생각을 잠시 끊어 놓았다.이건은 아까보다 더 흥분한 상태였다.“안 돼! 너희는 절대 같이 있으면 안 돼!”이람이 거의 반사적으로 물었다.“왜?”이건이 목소리를 높였다.“왜냐고? 누나가 그걸 왜 묻냐고! 서하준은 강제헌 형이잖아! 누나가 얼마나 힘들게 이혼했는데, 이제는 강씨 집안이랑은 완전히 연을 끊고 살아야 정상 아니야? 근데 다음 사람이 강제헌 형이라고?”이건은 말을 쏟아내듯 이어 갔다.“누나, 한 번 크게 데였잖아. 근데 왜 또 같은 데서 상처받으려고 해? 진짜 바보 된 거야?”이람은 차분히 받아쳤다.“말했잖아.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서하준은 성도 ‘서’고, 엄밀히 말하면 강씨 집안 아들이라고 보기도 애매해.”이건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이복형제니까 다르긴 하지. 근데 피는 섞였잖아! 강제헌 그 쓰레기 성격에 뭐가 좋다고. 강제헌 여동생만 봐도 뻔하잖아.”이건의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그리고 서하준은 더 무서워 보여. 강제헌은 대놓고 미쳤지만, 서하준은 음흉하게 판을 짜는 타입이잖아. 처음부터 속셈이 있었던 게 분명해.”이건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진짜 서하준을 만나는 게 순수하게 좋아서라고 생각해? 난 누나가 그냥 서하준한테 말려든 것 같아.”이람은 이건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는 걸 보고, 재빨리 말을 끊었다.“그만. 서하준이냐 강제헌이냐는 잠시 접어 두자.”이람은 시선을 낮추지 않고 이건을 보며 말했다.“너 말이야. 내가 보기엔 서하준 개인이 싫다기보다는 내가 다시 연애하는 게 싫은 것 같아. 상대가 누가 됐든, 똑같이 반응할 거잖아. 맞지?”이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이람의 차분한 말투에 폭발하던 감정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그럼 뭐겠어?”이건이 낮게 말했다.“누나가 강제헌이랑 결혼해서 어떻게 됐는지 봤잖아. 내가 괜한 걱정하는 게 아니야.”이건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누나는 사람 좋아하면, 자기 인생까지 다 내주는 스타일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