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련아?”“미혜야, 미안해서 어떡하지? 나 내일 급하게 지방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같이 외할머니 선물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못 갈 것 같아.”“괜찮아. 벌써 골랐어.”연미혜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사실 이쪽 골동품 거리는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그저 운이 좋으면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쯤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기대만으로 들른 곳이었고,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 다음 날 차예련과 다른 곳을 둘러볼 생각이었다.그런데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원하는 물건을 딱 찾아낸 것이었다.차예련도 놀란 듯,
“박 대표님이셨군요. 오랜만입니다.”박우빈이 다가오자, 임해철과 임지유가 반갑게 악수하며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은 김 대표님이랑 사업 얘기 나누시던 중인가요?”“네. 요즘 김 대표님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몇 개가 꽤 흥미롭더라고요. 그래서 시간 내서 좀 만나 뵀죠.”김태훈과 연미혜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걸 본 임해철은 잠시 의아한 듯 시선을 던졌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박우빈은 그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김태훈이 인사를 건네지 않는 걸 약간 의아해했다. 사업가라면,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날의 기억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지만, 연미혜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그날, 마음이 복잡했던 그녀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돌아왔을 때, 이금자의 손에는 두 개의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연미혜를 위한 아이스크림이었고, 또 하나는 임지유를 위한 것이었다.가게 직원이 더러운 쟁반을 들고 지나가던 중 실수로 아이스크림을 건드려 한쪽이 긁혀나가고 기름까지 살짝 묻었다.임지유는 주저하지 않고 멀쩡한 쪽을 먼저 집어 들었다.그러자 이금자는 그저 임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고 아무 말 없이 그 더러워진 아이스
조금 떨어진 뒤에야, 박우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분, 임씨 가문하고 뭔가 오해라도 있으신 건가요?”김태훈과 연미혜는 짧게 눈을 마주쳤다.연미혜는 특별한 감정 없이 대답했다.“오해는 없어요.”사실이었다. 그건 오해가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한 원한 관계에 가까웠다.하지만 박우빈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경민준 씨가 임지유 씨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업계에선 다 알잖아요. 그러니 임씨 가문은 이제 날개를 달았다고 봐야겠죠. 경씨 가문
그 선물을 대신 전해달라는 것은 직접 참석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기에 연미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녀는 다른 용건이 없었기에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경민준은 연미혜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매년 이맘때면 연미혜는 그가 함께 연씨 가문에 가줄 수 있냐고 꼭 물어왔었지만, 올해는 그 흔한 질문 하나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연미혜가 전화를 끊자, 경민준은 휴대전화를 경다솜에게 건네며 말했다.“내일 밤에 엄마가 데리러 올 거야. 토요일엔 외증조할머니 댁에 가서, 하루 종일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
경다솜은 연미혜 얼굴에 드리운 냉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연미혜의 말을 듣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연창훈이 허미숙에게 선물을 건넨 뒤, 연미혜도 준비한 선물을 차례로 내밀었다.가장 먼저 건넨 건, 한 폭의 자수 그림이었다.“이 자수는 할머님께서 민준 씨에게 부탁해서 준비하신 거예요.”허미숙은 그림을 받아 펼쳐 보더니, 잠시 들여다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마음에 쏙 든 눈치였다.“정성이 느껴지네.”이번엔 조심스럽게 조각 하나를 열어, 장신구 세트를 내놓았다.“이건 민준 씨가 드리는 선물이래요.”비취의 색감은
경민준을 무서워해서 괜히 엮이기 싫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예 나서서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에 줄 서려는 사람들도 있었다.연씨 가문은 수년째 내리막이었고, 반면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은 지금 경민준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고 있었다. 누구 편을 드는 게 유리한지는 뻔했다.남정우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처음엔 허미숙과 연미혜의 외숙모 하여진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들락날락하는 손님 수가 늘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할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자리는 텅텅 비어 있고, 게다가 몇몇 테이블에만
손님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자, 박영순과 손종철은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연미혜가 짐작했던 대로, 그들 역시 허미숙의 생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오히려 수십 년간 생일을 챙겨온 날이라 일부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오늘 손씨 가문이 이사 잔치를 허미숙 생일에 맞춘 건, 의도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과거 손씨 가문이 연씨 가문 맞은편으로 이사 오려다, 연미혜가 경민준에게 부탁해 그 계획이 틀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그들이 이날을 택한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그 일로 마음이 상했던 손씨 가문은 경민준의 보상 덕에 결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