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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조은서는 예쁘게 생겼고 바이올린 연주도 아주 잘했다.

담당자는 그녀에게 한 행사에 6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행사가 많으면 하루에 3, 4번은 연주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하루에 최소 6시간 바이올린을 켰다. 가녀린 손가락에 물집이 다 잡혔다.

하루하루 힘들게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조은서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선우에게 전화하지 않았고 유선우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그녀는 뉴스로 그가 파티에 참석하고 회사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든 장소에서 유선우는 우아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 장소들은 예전에 조은서가 그와 함께 갔던 곳이고 그의 위풍당당한 자태에 마음이 흔들렸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모습을 보니 조은서는 멀고 낯설게만 느껴졌다.

저녁쯤 병원 옥상.

조은서는 매점에서 사 온 차가운 콜라 한 병을 옆에 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음료수가 몸에 좋지 않아 마시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끔 조금씩 마셨다.

이때 허민우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큰 키에 흰 외과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조은서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와 함께 조용히 일몰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황금빛 석양이 점차 사라졌다.

조은서가 고개를 들었을 때 옆에 있는 허민우를 발견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다급하게 일어나서 인사했다.

“허 선생님.”

허민우는 오랜 추억이 담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은서는 조금 불안했다.

이때 허민우는 먼 곳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은서야, 너 어렸을 땐 날 민우 오빠라고 부르더니... 여름밤에 넌 작은 텐트에서 자는 걸 좋아했잖아. 우리 어머니는 늘 너에게 팥빙수 만들어 주셨고.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어머니는 널 많이 그리워하셨어.”

조은서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마침내 기억해 냈다.

그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우 오빠.”

이 네 글자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민우 오빠’가 옆에 있던 그때는 어렸고 조은서는 아무런 걱정 없이 부잣집의 작은 공주로 귀염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현재 다시 만난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허민우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호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 4억쯤 들어있어.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 아저씨 병원비로는 충분할 거야.”

조은서는 받지 않았다.

“나 돈 있어요. 정말이에요.”

허민우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밴드가 여러 개 붙여져 있는 손이 예전처럼 여리고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그는 목에 메어왔다.

“은서야, 이런 고생 할 필요 없어.”

그는 연고를 꺼내 그녀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약을 다 바르자 조은서는 희고 가는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자아도 없이 살았어요. 맞아요. 나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난 아직 24살밖에 안 됐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허민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그렇듯 부드러운 그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조은서는 병원에 2시간 정도 있다가 저녁 7시쯤 서둘러 개업식을 하는 바로 향했다.

일이 끝났을 때 거의 이른 아침이었다.

조은서는 바이올린을 멘 채 인적 없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는 떨려오는 몸을 꼭 끌어안았다.

늦은 밤, 네온사인이 어두워졌을 때.

초고층 빌딩의 대형 스크린에 스캔들 기사가 나와 늦은 밤의 번화함을 알렸다.

「B시의 재벌 유선우, 여사친과 낭만의 추석을 보내기 위해 H시로 날아왔다.」

화면 속 진 비서는 백아현의 휠체어를 밀고 있었고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유선우의 표정은 짜증으로 가득했다.

조은서는 그가 사진이 찍혀 많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뒤이어 백아현의 인터뷰가 나왔다. 그녀는 카메라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추석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는 다리가 나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음악 천재 김 선생님께 바이올린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유 대표님이요? 유 대표님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입니다.”

말을 마친 백아현의 눈빛에 죄책감이 어렸다.

4년 전, 백아현은 자기가 조은서인 척 유선우를 속여 그의 옆에서 매일 바이올린을 연주해 준 사람이 자기라고 믿게 했다.

백아현은 유선우가 알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곧 그녀는 유선우는 절대 모를 것이라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유선우가 깨어났을 때 백아현은 바이올린을 안은 채 병실에 앉아 있었고 유선우는 그 모습을 보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늦은 밤, B시 거리.

조은서는 묵묵히 서서 고개를 들고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유선우가 다른 사람을 챙기는 모습을 몸이 차가워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추석이었구나.”

그녀는 등에 바이올린을 짊어지고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길 양쪽의 가로등이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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