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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민민루
서재현은 자기 말투가 너무 세졌다는 걸 깨달은 듯 가볍게 한숨을 쉬며 톤을 눌렀다.

“윤지야, 나 그런 뜻 아니야... 할아버지 이제 막 돌아가셨잖아. 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어. 괜히 할머니가 알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결국 너잖아.”

숨이 턱 막혔다.

하윤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봤다.

“너 지금 나를 협박해?”

“윤지야,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서재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부드러운 말투인데도 어딘가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결이 섞여 있었다.

“사과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 오래 걸리지도 않아.”

“내가 안 가면?”

변호사로 일한 세월이 길었다. 하윤지도 협박을 처음 받아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협박하는 사람이 서재현 같은, 침대에서 숨을 나누던 남자일 줄은 몰랐다. 가슴속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촘촘하게 아려왔다.

하윤지가 눈가를 붉힌 채로도 꺾이지 않자, 서재현 마음에도 이유 모를 불편함이 스쳤다. 그가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윤지야, 네가 병원 가서 민우만 한번 달래주면 내가 뭐든 다 들어줄게. 그러면 되잖아.”

그 말에 하윤지가 번뜩 눈을 들었다. 그녀는 잘못 들은 줄 알고 한 번 더 확인했다.

“뭐든 다?”

“응. 뭐든.”

하윤지가 흔들리는 걸 보자, 서재현은 곧장 밀어붙였다.

“윤지야, 딸기 이렇게 돼서 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 그런데 어쨌든 아이가 더 급해. 우리 같은 어른이, 민우가 어릴 때부터 마음에 상처 남게 두면 안 되잖아.”

어른?

부모도 어른이고, 조부모도 어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가 사촌오빠 겸 양육자 같은 위치로 ‘어른’ 소리까지 하게 된 걸까.

하지만 하윤지는 더 말 섞을 힘이 없었다. 그녀가 붙잡고 싶은 건 오직 한 문장뿐이었다.

‘뭐든 다.’

병원에 도착하자 운전기사가 서재현을 밀어 내렸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하윤지가 했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손을 대지 않았다.

서재현은 하윤지가 아직 딸기 때문에 힘든 줄로만 알고 더 묻지 않았다.

병실 안에서는 강시원이 강민우에게 과일을 깎아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강시원이 급히 일어났다. 눈이 빨갛게 부어 있어 막 울고 난 것 같았다.

“윤지 언니, 괜찮으세요?”

강시원은 다정한 척 하윤지의 손을 잡았다.

“민우는 제가 너무 버릇없이 키워서 그래요. 아직 어리니까, 언니가 애랑 똑같이 굴지 않으셨으면 해요. 민우야, 윤지 이모한테 얼른 사과해.”

강민우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손에는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꼭 쥐고 있었다.

“저는 사과 안 해요! 저 여자는 나쁜 여자예요! 딸기가 민우 괴롭히게 한 나쁜 여자예요!”

“민우야!”

강시원이 또 울컥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들 하나 어쩌지 못하는 불쌍한 엄마 같은 얼굴이었다.

“윤지 이모는 우리한테 큰 은인이야. 너는 왜 이렇게 철이 없어?”

“됐어, 울지 마.”

서재현이 티슈를 몇 장 뽑아 강시원에게 건넸다. 눈빛 깊은 곳에서 알아채기 힘든 아픈 기색이 잠깐 스쳤다.

강민우는 든든한 편이 생겼다고 느꼈는지, 짧은 다리로 침대에서 내려와 서재현 무릎 위로 올라탔다.

서재현도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고 달랬다. 그러면서 강시원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윤지는 변호사야. 소송하는 건 원래 윤지 일이잖아. 너무 마음에 담지 마.”

하윤지는 속으로 비웃음이 치밀었다.

법정에 서는 건 변호사의 일이다. 의뢰인을 변호하는 것도 직업의 몫이다.

하지만 그건 돈을 받고, 계약을 하고, 그 책임을 지는 전제에서다.

강시원 사건은 쉬운 소송이 아니었다. 양육권을 원했고, 남편이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둘렀다며 주장했지만, 정작 소송을 들어갈 때는 증거가 허술했다.

하윤지는 ‘서재현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반년 넘게 공짜로 뛰었는데 돌아온 말은 그녀의 일이라는 말이었다.

“아빠...”

강민우가 서재현 목을 껴안고 응석을 부렸다.

“나쁜 여자랑 그 개새끼가 저를 괴롭혔어요. 아빠가 대신 혼내주면 안 돼요? 저 무서워요...”

“민우야, 괜찮아.”

서재현은 입가에 얕은 미소를 걸었다. 강민우가 던진 ‘나쁜 여자’라는 말은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대신 하윤지에게 시선을 한번 던졌다. 사과하라는 뜻이었다.

하윤지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속으로 이게 마지막이라고 되뇌었다.

어차피 목적은 이혼이다. 이혼만 하면 이 더러운 판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버티다가, 하윤지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강시원 씨, 민우가 입원한 건... 제 책임도 있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

강시원 눈빛에 순간적으로 득의가 번쩍 지나갔다. 하지만 얼굴은 넉넉한 척했다.

“윤지 언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제가... 민우가...”

“민우가 어떻든 저랑은 상관없어요.”

하윤지가 차갑게 끊었다.

“이번 일은 제가 딸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에요. 사람처럼 동물도 키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르쳐야 한다는 걸 잊었네요. 안 그러면 언젠가 목숨을 잃고, 그때 가서 바로잡고 싶어도 기회가 없으니까요.”

강시원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녀는 서재현을 슬쩍 바라봤다. 서재현이 별 반응이 없자 그제야 억울한 척 입술을 열었다.

“오빠...”

“딸기는 이미 죽었어요.”

하윤지는 강시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대로 강민우 앞에 쪼그려 앉더니 입꼬리를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올렸다.

“그래서 민우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꿈에서가 아니면 딸기가 다시는 우리 민우를 놀라게 할 일 없거든요. 그렇죠?”

마치 하윤지의 말을 일부러 확인해 주기라도 하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하늘이 우르릉 울렸다.

겨울비가 퍼붓듯 쏟아졌다.

강민우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서재현 목을 꽉 끌어안았다.

“아빠, 무서워요... 오늘 밤 여기 있어 주시면 안 돼요? 아빠가 저랑 엄마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서재현이 몇 마디로 아이를 달래고는 하윤지를 못마땅하게 봤다.

“너 굳이 그런 말로 애를 겁줄 필요가 있었어?”

“내가?”

하윤지가 되물었다.

“네가 애한테 트라우마 남기면 안 된다고 했잖아.”

하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민우가 진실을 알았으면 했어. 그러면 이제 그 강아지를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만해.”

서재현이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다물었다가 결국 얼굴을 굳혔다.

“사과했으니까 이제 돌아가. 나는 오늘 민우 옆에 있을게.”

오히려 좋았다.

그가 남아 있으면, 하윤지는 밤새 협의서 초안을 잡을 시간이 충분했다.

하윤지는 별말 없이 돌아섰다.

엘리베이터까지 거의 다 왔을 때, 뒤에서 강시원이 부르며 따라왔다.

하윤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른 척하려 했지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아 강시원에게 시간을 줘버렸다.

하윤지가 등을 돌린 채 서 있는데도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윤지 언니, 오늘은 정말 죄송해요.”

사과라기에는 눈에 숨기지 않은 독기가 있었다.

“그래도 언니, 너무 마음에 담지 마세요. 오빠도 이제 서른 다 되어가잖아요. 남자면... 아이 갖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가 있나요?”

강시원은 일부러 하윤지의 배를 한번 훑어보았다. 비웃음이 더 짙어졌다.

“윤지 언니, 오빠랑 결혼한 지 5년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네요? 마침 병원이니까, 제가 같이 검사라도 받으러 가드릴까요?”

하윤지가 웃었다.

“애는 누구나 낳을 수 있죠. 그런데 누구나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니고, 누구나 키울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언니...!”

강시원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윤지는 더 말 섞지 않았다.

“천박한 년!”

강시원이 발을 굴렀다. 이를 악문 채 닫혀가는 엘리베이터 문을 노려봤다.

무언가가 떠오른 듯, 강시원의 입꼬리가 비틀리게 올라갔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윤지,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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