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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eur: 민민루
깊은 밤.

하윤지는 서재현과의 이혼협의서를 서재현의 서재를 빌려 다 써두고, 다음 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로펌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차를 세우자마자, 머리를 풀어 헤친 여자가 갑자기 달려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하윤지는 거의 반사적으로 차 문을 잠갔다.

“이년아! 양심도 없는 변호사야! 내 아들 결백 돌려내!”

여자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더니 손에 든 벽돌로 차창을 그대로 내리쳤다. 유리가 와르르 깨지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파편 몇 개가 하윤지의 팔에 튀어 팔뚝에 얕은 상처가 여러 줄 생겼다.

소리가 워낙 커서 주차장 경비들이 달려왔다. 두세 명이 중년 여자를 붙잡아 제압했다.

그중 한 명이 하윤지를 보며 물었다.

“하 변호사님, 괜찮으세요?”

하윤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여자는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그제야 하윤지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봤다.

3년 전, 하윤지는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을 맡았었다. 피해자 부모가 찾아왔을 때는 눈이 부을 만큼 울고 있었지만, 증거가 부족해 많은 로펌이 꺼렸다.

하윤지는 그 사건을 받아들였고, 증거를 잡으려고 일 년 반을 뛰었다. 결국 재판을 이겼고, 가해 청소년들도 전부 처벌을 받았다.

그중 한 명이 지금 이 여자의 아들이었다. 듣기로는 그때 막 유명 학교에 붙은 상태였다고 했다.

여자는 돈으로 하윤지의 입을 막아 피해자 변호를 포기하게 만들려 했지만 하윤지는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하 변호사님?”

경비가 몇 번 더 불러서야, 하윤지는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신고해요.”

하윤지는 엉망이 된 차를 한번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배상할 건 배상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요.”

그 밖의 일은...

하윤지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사건은 끝난 지 이미 일 년이 넘었다. 보복하려면 진작 했어야 하는데, 이제 와서 나타난다? 이상했다.

경비가 지시에 따라 여자를 끌고 가려 하자, 여자는 더 미친 듯 몸부림치며 악다구니를 썼다. 주차장 전체가 욕설로 울렸다.

하윤지는 그 소리를 아예 들리지 않는 것처럼 지나쳐 밖으로 향했다.

당시 일은 하윤지가 조금도 잘못한 게 없었다. 그러니 그런 말 몇 마디가 마음에 박힐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연지아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특히 하윤지의 팔에 난 상처를 보더니, 무슨 일이 있어도 병원에 가야 한다며 끌고 갔다.

하윤지는 끝내 못 이겨 응급실로 갔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그중 한 곳은 꿰매야 한다고 했다.

처치받는 동안 연지아는 밖으로 나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연지아가 돌아왔을 때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하윤지가 걱정되어 물었다.

“언니, 왜 그래?”

“아니야. 의뢰인 전화였어.”

연지아가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너랑 서재현은 어떻게 됐어? 진짜 법정에 갈 거야?”

하윤지는 그녀가 화제를 돌린다는 걸 알아챘지만 굳이 들춰내지는 않았다. 입꼬리만 얕게 올렸다.

“정말 마지막까지 몰리기 전에는, 법정까지는 안 갈 거야.”

서재현의 장애가 거짓이었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가 목숨 걸고 하윤지를 살렸던 일도 사실이었다. 지금의 서재현이 어떤 인간이 되었든, 하윤지는 그 순간만큼은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장애를 가장한 일을 이혼 조건으로 들먹이지 않는 건, 서씨 가문과 서재현에게 최소한의 체면을 남겨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냥... 그때 생명을 구해준 은혜를 갚는 셈으로.

연지아는 하윤지가 무슨 생각인지 다 알지는 못했지만, 하윤지가 허투루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도 서로를 이해한 채 로펌으로 돌아왔다.

하윤지 차는 견인되어 버려 퇴근길에는 택시를 타야 했다.

그런데 로펌을 나오자마자 익숙한 스파이커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창문이 내려갔고 서재현의 단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윤지야.”

서재현이 웃으며 손짓했다.

하윤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다가갔다.

“너 왜 왔어?”

“퇴근 픽업.”

몸이 불편하다면서도 먼 길을 와서 아내를 데리러 온다니, 겉으로는 여전히 ‘애처가’ 같았다.

예전의 하윤지라면 분명 감동했을 것이다. 그 미친 여자가 차를 부쉈던 이야기부터, 팔 상처까지 하루를 통째로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윤지는 차에 올라탄 뒤에도 일부러 그와 최대한 멀리 앉았다. 서재현이 그 변화를 느끼고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다른 소리가 끼어들었다.

“멍!”

가늘고 약한 강아지 울음이었다.

하윤지의 시선이 창밖에서 안쪽으로 옮겨오는 데는 한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찰나에 눈가가 붉어졌다.

“좋아?”

서재현은 어디서 꺼냈는지 투명한 이동장을 내밀었다. 안에는 손바닥만 한 아기 비숑이 들어 있었다.

하윤지의 눈이 붉어진 걸 보고, 서재현은 감동해서 그런 줄 알았다. 서재현의 눈에는 하윤지가 원래 달래기 쉬운 사람이었다.

서재현이 하윤지 손을 잡았다. 목소리는 더 다정해졌다.

“어제는 내가 잘못했어. 딸기 보내고 네가 얼마나 힘든지도 알아. 그런데 윤지야, 생로병사는 원래 그런 거잖아. 이제부터는 얘가 딸기 대신 너랑 있어 줄 거야. 예전이랑 똑같아.”

새끼 강아지는 딸기와 거의 똑같이 생겼다. 서재현이 신경 써서 찾아온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없어진 건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닮아도 하윤지와 함께 자라던 그 딸기가 아니었다.

하윤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밀어 넣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너 어제 나한테 한 말. 아직도 유효해?”

서재현 눈에 잠깐 당황이 스쳤다가 곧 떠올랐는지 웃었다.

“당연하지. 윤지는 뭐가 갖고 싶은데?”

“얼마 전 그룹에서 인천에 새로 자회사 세웠잖아. 그 회사 법무팀, 우리 로펌에 맡기면 어때?”

서재현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갑자기 왜 그걸 원해?”

예전 같았으면 하윤지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을 것이다.

서재현도 하윤지가 무언가를 요구한다 해봐야 차나 집, 귀금속, 가방 같은 걸 떠올렸지, 이런 방향은 전혀 예상 못 했던 모양이었다.

하윤지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들고 있던 이동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왜, 나를 못 믿어?”

연지아가 숨기려 했어도 하윤지는 바보가 아니었다.

요즘 로펌 사정이 좋지 않았고, 하윤지는 강시원 사건을 공짜로 붙잡느라 찾아온 일들을 꽤 많이 흘려보냈다.

연지아는 하윤지가 가장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일자리를 준 사람이었다. 하윤지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하윤지에게도 속내는 있었다.

하윤지는 눈에 스치는 빛을 감춰버린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끼 강아지를 살살 건드렸다.

“무슨 소리야.”

하윤지가 웃는 걸 보자, 서재현도 자기가 안도한 걸 깨닫지 못한 채 숨을 놓았다.

“남 좋은 일 시킬 바에야, 자기 집 아내한테 맡기는 게 맞지. 내가 너를 왜 못 믿어.”

서재현이 하윤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러면 네가 계약서를 써서 가져와. 내가 볼게.”

“이미 써뒀어.”

하윤지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집에 가면 바로 보여줄게.”

서재현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 하윤지가 이렇게까지 준비해 둘 줄은 몰랐던 듯했다.

서재현이 한동안 말이 없자 하윤지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서재현이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예상 못 해서.”

그는 끝내 묻지 않았다. 대신 하윤지와 함께 새끼 강아지를 몇 번 더 만지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갔다.

“아, 그리고 윤지야. 할머니가 이번 주말에 집에서 가족 모임 하자고 했어. 할아버지 일 도와준 친척들이랑 지인들한테 인사도 하고. 너도 같이 와.”

“가족 모임?”

하윤지가 무심코 올려다봤다.

서씨 가문 사람들의 비웃음과 쏘아붙임이 떠오르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올라왔다.

“아니, 나는 안 갈래. 나도 바쁠 수도 있고.”

“그만.”

서재현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달래는 듯하면서도 밀어붙이는 결이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밖에서라도 가족처럼 보이길 바라는 거야. 체면도 있고. 그리고 그날, 부산 송끼 가문에서도 사람이 온대.”

그 말과 동시에, 하윤지의 얼굴에서 피가 싹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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