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윤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재현과 만났다. 그는 젠틀하고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에 하윤지는 평생 함께할 사람을 찾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결국 서재현의 첫사랑을 위해 이혼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5년 간의 사랑도 가짜, 애처가 이미지도 가짜, 심지어 불구인 줄 알았던 다리마저 가짜. 서재현이 거짓말을 한다면 하윤지 역시 할 수 있었다. 이혼 절차를 끝낸 날, 하윤지를 모욕하는 글이 인터넷에 즐비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틈을 타서 판을 뒤집었다. 하윤지를 5년이나 찾아다닌 거물은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는 반지가 들려 있었고, 눈빛에는 애원하는 기색이 있었다. “윤지야, 나의 구원이 되어 놓고서는 어떻게 나더러 포기하라는 말이야.”
View More하윤지는 이미 집을 나간 상태였다. 이 별장에는 이제 여자라고는 강시원 혼자뿐이었다.강시원은 망설임도 없이 그 보석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 착용해 보았다.한껏 들뜬 마음으로 서재현에게 보여 드리려고 거실로 나왔을 때는 이미 그가 발코니에 없었다.잠시 의아해진 강시원은 주방으로 가 물었다.“아줌마, 재현 오빠 어디 갔어요?”“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셨어요. 잠깐 다녀오신대요.”임미진의 말투는 차가웠다.강시원은 기분이 들떠 있던 터라 그 미묘한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거울 앞으로 가 자신을 감상했다.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강시원은 마치 집주인처럼 말했다.“아줌마, 문 좀 열어 주세요.”주방에 있던 임미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마지못해 현관으로 갔다.다음 순간, 거실에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어요!”“네, USB 하나를 두고 간 것 같아서요. 그거 찾으러 왔어요.”하윤지는 임미진이 이렇게 반가워할 줄 몰랐다.아직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임미진은 이미 몸을 숙여 슬리퍼를 꺼내 놓고 있었다.“감사합니다.”하윤지는 현관 수납장에 손을 짚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강시원이 허리를 살짝 흔들며 다가왔다.얼굴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담겨 있었다.“윤지 언니가 다시 오셨네요. 정말 오랜만이라 손님 같아요.”손님?하윤지는 피식 웃었다.“강시원 씨, 여기가 어딘지 잊으신 건 아닌가요. 제 집입니다.”강시원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다시 그 가식적인 미소로 바뀌었다.“아, 그렇죠. 제가 잠깐 착각했네요. 언니가 워낙 오래 안 들어오셔서, 주인이라는 것도 잊을 뻔했어요.”“제 신분을 잊는 건 상관없습니다.”하윤지는 시선을 내리깔며 담담히 말했다.“다만, 본인 신분은 잊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그때, 하윤지의 시야에 강시원의 목에 걸린 보석이 스쳤다.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강시원은 그 반응을 정확히 놓치지 않았다.강시원은 입꼬리를 올렸다. 눈매와 입가에는 노골적인 자만
하윤지는 거의 도망치듯 뛰쳐나갔다.차에 올라타 문을 닫고, 그곳을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났다.조금만 더 머물렀다가는 정말로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윤지는 유우진과 달랐다. 하윤지는 술이 정말 약했다. 신경을 마비시킬 수 있는 건, 사실상 일뿐이었다.그래서 하윤지는 한밤중에 차를 몰아 로펌으로 향했다.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윤지는 막힘없이 달렸고, 신호등 앞에서 창문을 내렸을 때 옆 차 운전자가 왠지 낯익다는 걸 알아챘다.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유우진의 의사 친구처럼 보였다.하지만 하윤지는 그 사람을 단 한 번 본 게 전부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인사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고 상대 차량은 하윤지와 반대 방향인 동쪽 외곽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다음 날.유우진은 머리를 짓누르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며, 우젠 빌리지의 빌라에서 눈을 떴다.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는 순간, 침실 문손잡이가 돌아갔다.“대표님, 일어나셨습니까?”방성훈이 들어왔다. 표정에는 난감함이 묻어 있었다.“꿀물 한 잔 드세요. 이모님이 방금 준비하셨습니다.”“그래요.”유우진은 꿀물을 받아 들었다. 막 깬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일은 다 끝났어요?”방성훈은 더 난감해졌다.“소유권 변경은 절차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렇게 빨리 끝날 수가 없죠...”“강시원 말하는 거예요.”“아... 그건.”방성훈은 말을 고르듯 머뭇거렸다.“일단... 일단은 됐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유우진의 미간이 더 깊게 접혔다.“일단은? 그게 무슨 말이에요.”유우진은 방성훈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허술해 보여도, 일만큼은 대충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더 이상했다.“‘일단’이라는 건, 강시원은 서재현 곁으로 돌아갔는데... 그게 우리 쪽에서 풀어 준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뭐라고요?”유우진은 물을 마시던 동작을 멈췄다.계속하라는 듯 눈으로 재촉했다.“제가 사람 보내서 동쪽 외곽 창고에서 풀어
이건 거의 치명적인 질문이었다.옆에서 지켜보던 방성훈조차 그 안에 깔린 실망을 단번에 알아챘다.하윤지는 한때 눈앞의 남자를 사랑했다. 목숨을 건 인연, 생사를 함께 넘나들던 동행. 정말로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진심이었다.그런데 결과는 뭐였나.하윤지는 버려졌다.영화로운 부와 권세, 대저택, 산해진미, 미인들이 가득한 세계.그 남자에게는 그를 위해 달려들 사람들로 넘쳐났고, 더는 누구와도 생사를 함께할 필요가 없었다.그리고 하윤지가 서재현과 결혼한 건, 다만 ‘안정’ 때문이었다. 죽음 앞에서라도 끝까지 하윤지를 살리려 했던 그 한순간의 안정감.프러포즈할 때 서재현도 하윤지에게는 온갖 맹세를 했다. 하지만 끝은 어땠나. 결국 그것도 속임수였다.10년. 두 남자.과정은 달랐지만 결말은 같았다.차이가 없었다.하윤지는 반걸음 앞으로 나아가, 유우진의 복잡하고 깊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그리고 비웃음이 살짝 스쳤다.“어쨌든 저와 서재현은 법적으로 부부예요. 서재현이 강시원에게 돈을 썼다 한들, 그게 뭐가 중요해요. 적어도 서재현은 저에게 명분과 안정은 줬어요.”하윤지가 애써 버티고 있다는 걸, 일부러 저러는 걸 유우진도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유우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눌러 내지 못했다.“좋아. 좋아.”유우진의 눈에 숨길 수 없는 폭풍이 서서히 맺혔다.유우진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하윤지와 거리를 벌렸다.유우진은 하윤지를 똑바로 노려봤다.“네가 그렇게 끝까지 가고 싶다면, 박애주의자에다가 장애인인 남자 옆을 평생 지키며 살고 싶다면, 내가 미리 축하하지.”유우진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말을 뱉었다.“평생, 원하던 대로.”유우진은 등을 돌렸다.들썩이는 어깨가, 그의 숨이 얼마나 거칠어졌는지 그대로 드러냈다.룸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유우진은 갑자기 몸을 돌려 테이블 위 술병을 집어 들고 입에 들이부었다.방성훈은 그 모습을 보며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 했지만 끼어들 틈이 없었다.결국 방성훈은
“서재현, 진짜 배짱은 있네. 수천억짜리 프로젝트를 말 한마디로 포기해 버리다니.”유우진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근데 그게 더 궁금하다. 너, 네 아내한테도....”유우진은 몸을 살짝 숙이며 일부러 말을 길게 끌었다.“이 정도로 돈 써 본 적은 있어?”서재현은 휠체어를 돌려 나가려던 동작을 그대로 멈췄다.서재현의 머릿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하윤지의 얼굴이 떠올랐다.맑고 단정한 얼굴, 그 안에 꺾이지 않는 단단함이 있었다.사람이 풀이나 나무도 아닌데, 결혼한 5년 동안 서재현이 어떻게 하윤지가 자신에게 진심이었다는 걸 모를 수 있겠는가.그래서 더더욱 서재현은 하윤지의 앞에 설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서재현은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렸다. 억지로 평소의 온화한 표정을 붙들어 매며 되묻듯 말했다.“계약서는 이미 체결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쯤 사람을 풀어 주실 생각이십니까?”유우진은 낮게 웃더니 느긋하게 소파로 가 앉았다.“급할 거 없어. 계약 정리 끝나면 그때 이야기하지.”“그럼 그동안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서재현은 마음이 급했지만, 지금은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 기간 동안 강시원의 신변 안전만은 꼭 보장해 주십시오.”“당연하지.”유우진은 술을 한 잔 따라 천천히 마셨다.주연성이 서재현의 휠체어를 밀고 나가자, 룸 안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화장실에서 하윤지의 곁에 있던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하이힐이 바닥을 두드리는 또각또각한 소리가 울렸다.유우진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다 화장실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잔을 내려놓고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봤지?”유우진의 목소리는 태연했다.“네 남편이 다른 여자 때문에 전부 걸어버리는 거. 어떤 기분이야?”“유 대표님께서는... 제가 어떤 기분이길 바랍니까?”하윤지는 차갑게 웃었다. 말끝은 낮고 조심스러웠다.그제야 하윤지는 유우진이 말한 ‘볼거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한때 자신을 버렸던 남자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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