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9화 데이트 상대

신연지는 당연히 순순히 박태준이 올 때까지 기다려줄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박태준은 검은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싸늘한 차도남 이미지를 풀풀 풍기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엄청난 재력까지 겸비한 성공한 기업인.

솔직히 저 재수 없는 성격만 제외하면 완벽한 남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의 옆에는 진영웅이 뒤따르고 있었다.

신연지가 멍 때리는 사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박태준이 불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강 기사한테 들었는데 어제 집에 안 들어갔다면서?”

고작 이것 때문에 기다리라고 한 건가?

“기사 아저씨가 내 말은 안 전했나봐? 어제만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그 집에는 갈 일 없어.”

신연지가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는데 진영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 비서, 대표님은 신 비서가 여기 있는 줄 알고 달려온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고?

그 정성에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라는 건가?

진영웅은 박태준 주변 인물 중에 두 사람의 결혼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신연지를 사모님이 아닌 신 비서로 호칭했다.

박태준 옆에서 3년 하녀 생활을 하는 동안 박태준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 인물들마저 그녀를 재경의 안주인이 아닌 하녀 취급하고 있었다.

신연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진영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 비서, 당신 같은 사람을 고대에는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진 태감!

“신연지, 적당히 해.”

박태준이 경고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한 다툼은 부부 생활의 재미라고 넘어가줄 수 있지만 과하면 보기 안 좋아. 집에 옷이랑 신발 모두 그대로 있던데 나한테 삐져서 달래달라고 나간 거잖아? 진 비서,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예약해 줘.”

그는 신연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녁에 같이 외식이나 하자. 며칠 뒤에 보석 전시회가 있는데 그때 가서 당신 갖고 싶은 거 마음대로 골라.”

이게 박태준이 싸운 뒤에 그녀를 달래는 방식이었다. 명품 가방, 명품 옷, 보석, 돈으로 살 수 있는 온갖 것을 선물했다. 예전에는 그냥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라 여자를 다룰 줄 몰라서 그런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지만 그가 전예은을 대하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고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일부러 안 가져간 게 아니라 전예은 씨 위해서 남겨둔 거야. 그 여자 원래 남의 걸 빼앗는 걸 좋아하잖아? 어차피 나한테는 쓰레기니까 마음에 들면 다 가지라고 해!”

옆에 있던 김청하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사모님, 오해에요. 예은이가 대표님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남의 가정을 파탄 낼 생각은 없었을 거에요. 박 대표님께 이 가방을 부탁한 것도 회원제 브랜드라 예은이 혼자 구매할 수 없어서 그런거에요. 이 가방이 그렇게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그냥 드릴테니 사람을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지 마세요!”

만약 여우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면 이 여자는 가히 최상급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단 몇 마디로 신연지를 가방 때문에 남편에게 삐진 속 좁은 여자로 만들어 버리다니!

신연지는 고개를 돌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럼 고맙게 받을게요.”

어차피 이 가방을 사러 왔던 거고 공짜로 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가 없었다.

박태준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가 당당하게 카운터로 걸음을 옮기자 박태준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러지 마. 그 가방 마음에 들면 내가 다시 주문해 줄게. 어차피 오래 걸리지도 않아.”

신연지는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 동안 온갖 무시를 당하며 살아온 3년과 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전예은의 상황이 자꾸만 비교가 되었다.

박태준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했다. 이 가방은 전예은을 위해 준비한 거니 욕심내지 마라.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남성용 가방을 가리키며 점원에게 말했다.

“저거 포장해 주세요.”

박태준은 그녀가 자신을 위한 선물을 사는 줄 알고 불편했던 속이 조금은 내려갔다.

비록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녁에 외식하는 거 잊지 마. 이따가 진유라 씨 집에 가서 짐을 가져오게 할게.”

신연지는 깔끔히 무시하고 점원에게 말했다.

“카드 한 장 대신 써주실 수 있나요?”

점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럼… JOY,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 라고 써주세요.”

박태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신연지의 팔목을 잡으며 따지듯 물었다.

“JOY가 누구야?”

신연지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꾸했다.

“오늘 나랑 데이트할 사람.”

그녀는 박태준의 손길을 뿌리치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태준 씨도 그만해. 이거 마음에 들면 다음에 주문해 줄게. 어차피 오래 걸리지도 않아.”

박태준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점원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신연지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남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연지, 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 수 있는 브랜드가 아닐 텐데?”

전에 신연지에게 줬던 카드는 이미 정지된 상태였다. 사실 지난번 호텔에서 쓴 거액의 지출을 제외하면 그녀는 그 카드를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3년 월급 받은 걸 다 모아도 1억이 될까 말까인데 그는 그녀에게 그 정도 구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명세서가 출력되었다.

신연지는 점원에게서 구매 명세서를 받아 들고 홀연히 자리를 떴다.

박태준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백화점에서 나온 신연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택시를 타고 진유라의 골동품 가게로 향했다.

그녀를 본 진유라가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저녁에 집에서 샤부샤부 만들어 먹기로 했잖아?”

신연지는 선물 박스를 그녀에게 건네며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마. 재수 없어.”

진유라는 선물 박스를 열어보고 표정이 환해졌다.

“이게 뭐야? 나 주는 거야?”

신연지는 눈을 감고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포장지를 열어본 진유라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무리 내가 여성스럽지 않아도 그렇지 남자 가방은 좀 아니지 않아?”

신연지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남자친구한테 선물하면 되잖아.”

진유라는 황당한 표정으로 친구를 노려보았다.

모태 솔로에게 남자친구라니!

신연지에게서 박태준이 별거를 기를 쓰고 반대한다는 얘기를 들은 진유라는 한참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태준 그 녀석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Related chapters

Latest chapter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