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지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좋아하는 사람을 3년이나 방치해? 그런 사랑이면 난 사양이야!”진유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건 그러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널 집에 가두려는 의도가 뭘까? 어차피 3개월 지나면 이혼하고 그 집에서 나오게 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신연지도 그 점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그날 저녁 그들은 밖에서 샤부샤부를 먹었다.신연지는 가장 매운 소스를 주문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섭취했다.그날 밤, 남자에게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녀는 캐리어를 들고 어제 계약한 새 집으로 향했다.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그녀는 새로 취직한 곳으로 향했다.경원 작업실.허 원장은 이곳 담당자였다. 60세가 넘은 노인은 신연지를 보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진유라 씨가 얘기하던 복원사 실버가 자네였어?”신연지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최근 몇 년 사이, 신연지가 작업한 작업물은 그리 많지 않지만 매번 극악 난이도의 작업물만 작업했기에 업계에서 꽤 유명해져 있었다.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기에 실버라는 가명을 썼다.허 원장은 직전에 그녀의 작품만 보고 대단한 실력자라고 평가했다. 몇몇 작품은 심지어 업계의 원로들마저 자신 없어 하던 작업이었는데 실버라는 신인 복원사가 해냈다는 소리를 듣고 높은 평가를 주었다.그래서 허 원장은 실버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젊은 처자였을 줄이야!“자네가 복원한 작품을 봤어. 상당한 실력을 가졌더군!”신연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과찬이십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아요.”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허 원장은 그녀를 이끌고 자리로 갔다.“이곳이 자네가 일할 곳이야!”그는 직원 한 명을 자리로 불렀다.“경수 씨! 가서 작업해야 할 골동품들 좀 가져와 봐.”골동품 복원사로서 그 골동품이 존재했던
손님이 꽉 들어찬 고깃집에는 진한 연기가 들어찼다.긴 웨이브 진 머리를 간단히 틀어올리고 하얀 목선을 드러낸 신연지의 모습은 청순하면서도 여성미가 넘쳤다. 그녀는 메뉴판을 보며 옆에 있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직원을 호출했다.고연우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박태준에게 말했다.“네 마누라 너 없어도 잘 지내는 것 같은데?”박태준은 말없이 룸을 나섰다.맥주가 올라오자 이경수는 벌컥벌컥 한캔을 들이켜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연지에게 말했다.“연지 씨가 정말 실버에요? 거의 구데기가 된 고려 청자기를 복원해 낸 그 실버?”신연지는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이 질문은 고깃집에 오기 전부터 열 번은 대답한 질문이었다.허 원장이 이경수의 옆구리를 치며 말했다.“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적당히 마셔. 연지 씨, 이 녀석은 신경 쓸 거 없어. 편하게 먹다 가면 돼.”신연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기 나왔습니다!”직원이 큰 소리로 외치며 불판과 함께 메뉴를 테이블에 올렸다.그때, 신연지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수저를 놓고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움찔하며 잠시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전화는 잠시 울리다가 끊었다.박태준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전화를 늦게 받으면 끊어버리고는 했다.휴대폰 화면에 문자 알림이 떴다.화면을 열어 확인해 보니 박태준에게서 온 문자였다.[나와.]신연지는 인상을 팍 쓰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맞은편 고급 레스토랑 앞에 세워진 검은색 벤틀리를 발견했다.한정판 차량이었기에 한눈에 박태준의 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신연지는 무시하기로 하고 수저를 들었다.이경수는 그녀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있자 분위기가 어색해서 그러는 줄 알고 큰 고기를 한점 집어 그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긴장할 거 없어요. 편하게 생각해요. 우리 직원들 다 성격이 좋은 사람들이에요.
차 안에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박태준이 말했다.“그건 당신이 멍청하고 현실 감각이 없어서 그딴 생각이나 하는 거야.”“정말이지….”신연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인간도 아닌 거랑 무슨 대화를 한다고.”말을 마친 신연지는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박태준이 음침한 표정을 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바깥에서 서성이던 이경수는 안에서 반응이 없자 다급한 목소리로 신연지를 불렀다.“연지 씨, 괜찮아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하, 눈물 나는 관심이군.”남자는 싸늘한 표정으로 신연지를 노려보며 말했다.“아직 이혼도 하기 전에 벌써 바람을 피우는 거야? 그런데 남자 보는 안목은 여전히 형편없군.”신연지는 더 이상 설명도 하기 귀찮아졌다.“그래. 남자 보는 안목이 형편없으니까 당신이랑 결혼했지. 그리고 이경수 씨랑은 그냥… 친구야. 당신이 떳떳하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렇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런 거 아니거든?”그를 약 올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대체 뭐가 남자의 신경을 건드린 건지, 박태준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당신 애인은 당신이 유부녀라는 거 알아? 우리가 차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목격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이 인간은 대체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신연지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누구 한 명 죽일 것 같은 남자의 눈빛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박태준은 행동으로 자신이 한 말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그는 거칠게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입술을 부딪혔다.신연지가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는 버튼을 눌러 의자를 뒤로 젖힌 뒤,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박태준이 이렇듯 통제를 잃은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이거 놔!”그 순간, 그녀의 움직임과 함께 차체가 흔들렸다.창문을 노크하던 소리가 사라졌다. 아마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신연지는 동작을 멈추고 분노한 눈빛으로
신연지는 그의 카톡까지 차단하려다가 연락처 하나는 남겨둬야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그녀는 이혼이 통과되면 당장 이 인간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해 버리고 평생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이때, 동료 직원들이 뒤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아침에 찾아온 남자 정말 근사하지 않았어? 결혼은 했을까? 그런데 갑자기 영숙 누님 직업을 물어봐서 당황했어.”신연지는 아침에 진영웅이 다녀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마침 물컵이 바닥에 떨어져서 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고 있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조영숙도 그녀의 옆에서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던 게 기억났다.직원들의 잡담은 계속되고 있었다.“그런데 영숙 누님 직업은 굳이 왜 물어봤을까? 딱 봐도 청소부 복장을 입고 바닥을 닦고 있었는걸?”신연지는 그제야 진영웅이 뭔가 크게 오해를 하고 잘못된 정보를 박태준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하지만 굳이 전화를 걸어 해명하고 싶지는 않았다.변호사에게서 서류를 받고 이혼에 동의할 줄 알았건만, 일주일이 지나가도록 박태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조바심이 났지만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이날은 진유라와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최근 유명한 맛집에 가보기로 했는데 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신연지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기로 했다.얼마 되지 않아 만석이 되었고 신연지는 밖에서 줄을 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진유라에게 문자를 보내려던 찰나, 거슬리는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연지 씨, 혼자 왔음 혹시 합석하면 안 될까요? 조금 늦게 왔더니 다 만석이라네요. 기다리려면 두 시간 정도 더 걸린대요.”고개를 들자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전예은이 붙임성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모두의 눈길을 끄는 여자였다.신연지는 고민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안 되는데요.”하지만 전예은은 이미 자리에 앉은 뒤였다.신연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신연지가 원하던 대답이었다.그녀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고마워.”말을 마친 그녀는 걸음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집으로 돌아간 신연지는 호적등본과 서류를 미리 챙겨 가방에 넣었다. 휴대폰에 한 장 남은 결혼사진을 봤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결혼한지 3년이나 됐지만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은 결혼식 날 드레스를 입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사진 속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보자 가슴이 아려왔다.그녀는 드디어 이 무의미한 결혼생활이 끝났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하며 자신을 위안했다.더 이상 빈 거실을 지키며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무의미한 스킨십에 가슴이 뛰었다가 뒤늦게 자신이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상처받는 일도 그만하고 싶었다.신연지는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팽개치고 소파에 누웠다.다음 날, 그녀는 생각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거울 앞에 서니 두 눈은 퀭하고 피부가 꺼칠한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초라한 모습을 들키기 싫어 그녀는 정성 들여 화장했다.그리고 길이 막힐까 봐 일부러 30분 일찍 집에서 떠났다.법원 앞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하늘도 그녀의 처지를 안쓰럽게 생각하셨는지 오늘 따라 길이 뻥뻥 뚫린 탓에 예상보다 더 빨리 도착한 것이다.신연지는 한적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그 순간, 진유라에게서 카톡이 왔다.[내가 같이 가줄 걸 그랬나?]카톡을 보자 신연지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괜찮아. 내가 뭐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곧 끝날 거야.]답장을 보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청문동에서 걸려온 전화였다.그녀가 받을지 말지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하지만 곧이어 또 다급한 벨소리가 울렸다.신연지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본가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그녀는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네, 저예요.”“작은 사모님, 접니다. 사모님께서 아침에
신연지는 다급히 병상에 있는 강혜정의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갔다.“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박태준이 씩씩거리며 물었다.“지금 어디야?”“지금 병원….”어머니가 아프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가 포효하듯 비난을 퍼부었다.“신연지, 핑계도 좀 창의적인 거로 대면 안 돼? 그렇게 이혼하자고 난리를 피워대더니 정작 이혼하자고 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 다리가 부러져서 약속 시간에 못 올 정도야? 그냥 솔직하게 이혼하기 싫고 그냥 내 관심 받고 싶어서 일부러 그 난리를 피웠다고 인정이라도 하지 그래?!”신연지는 박태준이 자신을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비겁한 사람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억누르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하.. 내가 아니라 어머님이 아프셔. 40도 고열로 쓰러지셔서 지금 응급실에 실려왔어.”그제야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당신은 몰랐지?”신연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매번 어머니 아프실 때면 아줌마는 가장 먼저 나한테 전화하고 당신에게는 알리지도 않았으니까. 3년 동안 내가 당신 대신 효도한 거 알기나 해?”가장 황당했던 적은 출근 중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인사과에서 일부러 연차를 불허한 적도 있었다. 평소에 박태준이 냉대하는 말단 직원이다 보니 동료로써 받아야 할 존중이나 대우 같은 건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결구 그날 그녀는 무단결근을 했다.나중에 소식을 전해 들은 박태준은 전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비난한 적 있었다.바보 같았던 신연지는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 제대로 된 반박 한번 하지 않았다.그때 직원들의 경멸에 찬 시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시간이 멈춘 것처럼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박태준의 담담한 목소리가 전해졌다.“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신연지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복도에서 한참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야 병실로 돌아갔다.잠시 후, 박태준이 병원에 도착했다. 신연지는 잠든 강혜정의
박태준은 신연지가 어머니한테 고자질한 줄 알고 분노가 치밀었다. 게다가 강혜정이 충격 받으면 쓰러진다는 걸 알고도 그런 짓을 했다니 화가 안 날 수 없었다.그런데 오히려 강혜정이 더 놀라며 되물었다.“어제 둘이 같이 안 있었어? 그럼 목에 그 흔적은 뭐야!”강혜정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노려보았다.“설마 또 전예은 그 계집애 만나니? 그거 그 계집애가 만든 거야? 너.. 정말 엄마 미쳐서 죽는 꼴 보고 싶어?! 예전에도 말했지만 걔는 절대 안 돼!”박태준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목을 쓰다듬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그런 거 아니에요.”말을 마친 그는 곧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한편, 땡볕을 이고 병원을 나온 신연지는 진유라에게 문자를 보내 저녁 약속을 잡았다.아직 이른 시간이고 작업실로 돌아갈 필요도 없었기에 슈퍼로 가서 일용품도 조금 샀다.퇴근한 진유라가 차를 끌고 그녀를 마중 나왔다.“나 오늘 진짜 비싼 거 하나 팔았거든? 가자,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네가 그 인간 쓰레기한테서 벗어난 걸 축하도 할겸!”신연지가 웃으며 말했다.“그 말 너희 아빠가 들었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몰라.”상대는 박태준이었다. 전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 대표를 인간 쓰레기로 정의하다니! 만약 박태준 본인이 들었으면 골동품 가게는 물론이고 진유라 부모님이 운영하는 대진그룹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우리끼리만 있을 때 하는 얘기지 뭐.”약속 장소에 도착한 신연지는 번쩍이는 형광등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기껏 밥 산다더니 여기야?”클럽 엔조이는 고소비층이 모여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유명 업소였다.“적당히 마시다가 가면 되지. 오늘은 제대로 축하 파티를 벌여보자! 네가 꽃꽂이나 하면서 따분한 생활하는 거 이제 못 봐주겠어. 어떻게 3년을 그렇게 버틴 거야? 여긴 박태준이 잘 안 오는 곳이니까 실컷 즐기자고!”신연지는 결혼한 뒤로 클럽이나 파티와 담을 쌓고 살았다. 매일 회사와 집을
진유라는 축 늘어져 있는 친구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멍하니 어딜 보고 있어? 불러도 반응도 없고.”신연지는 약간 어지럼증을 느끼며 힘없이 말했다.“나, 박태준을 본 것 같아.”“뭐라고?”진유라는 눈을 크게 뜨고 바깥을 살폈지만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술을 너무 마셔서 환각이 보이는 거 아니야? 박태준이 엔조이에 왔으면 최상층으로 올라갔겠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진유라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잘나가는 자본가들은 맨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걸 좋아하잖아!”신연지는 그런가 보다 하고는 눈앞에 선 남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네가 불렀어?”“맞아. 술 혼자 부어 마시기 귀찮으니까 부른 거지 뭐.”원래는 신연지의 이혼 축하 파티를 해주려고 일부러 잘나가는 선수들만 선별해서 예약했는데 안타깝게 이혼을 못 했으니 옆에 앉혀 놓고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신연지는 이런 분위기가 불편했지만 물릴 수 없다는 진유라의 단호한 말에 어쩔 수 없이 두 명을 자리에 앉혔다.이날 둘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선수들의 부축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그러는 도중에 신연지가 마주 오는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혔다.상대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는데 음흉한 눈빛으로 신연지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이게 누구야? 신 비서 아니야? 나 WH 마태훈, 기억하지? 지난 번에 재경에 갔을 때 우리 만난 적 있는데!“ 그때 회사 자금줄에 문제가 생겨 살려달라고 박태준에게 찾아간 적 있었다. 그때 신연지를 만났는데 그녀의 미모는 여태 기억에 남았다.신연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마태훈의 손을 뿌리쳤다.“이런 곳에서 뵙네요.”“신 비서도 친구랑 술 마시러 왔나 봐?”마태훈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남자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음흉하게 말했다.“차라리 우리 방으로 와서 합석하는 게 어때? 마침 신 비서랑 이야기할 것도 있고.”하지만 신연지는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만, 회사 일이라면 저는 일개 비서일 뿐이라 도움을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