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강성이 어디까지 알고 움직였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다음 날 오전, 도원에너지테크 본사.대회의실에는 구매본부장과 법무팀장, 사업본부장, 해외 사업총괄이 모두 모여 있었다.권도준이 들어서자 참석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상석에 앉아 전날 확보한 자료를 펼쳤다.“세명정밀이 강성과 접촉한 경위부터 보고하세요.”법무팀장이 화면에 이메일 한 통을 띄웠다.강성 측 구매담당자가 세명정밀에 보낸 사업 제안서였다. 문제는 첨부자료에 있었다.도원의 시험장비 도입 일정과 내부 검토 중이던 예상 비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었다.사업본부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이 자료는 외부에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도준은 화면을 한동안 바라봤다. 회의실에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우리 내부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은?”“확인 중입니다. 다만 강성 측 자료에 기재된 숫자가 지난주 내부 검토안과 거의 일치합니다.”도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그렇다면 오늘부터 대응 방식을 바꾸겠습니다.”그는 법무팀장을 바라봤다.“자료 접근 기록부터 보존하고 유출 경위를 조사하세요. 강성에 대한 공식 문제 제기는 증거가 확보된 뒤에 진행합니다.”“알겠습니다.”“구매본부는 대체 공급망 계약을 마무리하세요. 세명에는 추가 접촉하지 마십시오.”도준은 사업본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한 박사님 연구 일정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우리 내부 문제 때문에 연구센터에 부담이 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참석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도준은 잠시 화면에 떠 있는 강성그룹의 제안서를 바라봤다.“강재헌 대표가 원하는 게 경쟁이라면 받아주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준비한 사업계획까지 상대 손에 들어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가 우리 정보를 넘겼는지 반드시 밝혀내세요. 다만 확인되기 전까지 누구도 범인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회의를 마친 도준이 복도로 나오자 비서가 다가왔다.“대표님
“긴장하십니까?”“아니요. 그런데 도준 씨는 정말 하나도 안 떨리는 것 같아요.”“저도 긴장됩니다. 좋아하는 여자와 첫 데이트인데 안 떨리면 이상하죠.”도준은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손 가까이 자신의 손을 내려놓았다. 닿지는 않았지만 서윤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좁아진 것처럼 느껴졌다.“어제 손잡았던 거, 후회하지 않으시죠?”서윤은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손끝이 도준의 손등에 닿자 그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후회 안 해요.”서윤의 대답에 도준이 웃었다.“다행입니다. 저는 어제부터 다시 잡고 싶었거든요.”서윤이 그의 손을 마주 잡자 도준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입술이 가까워지자 서윤은 놀라 눈을 크게 떴고, 도준은 움직임을 멈췄다.“괜찮습니까?”서윤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도준은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서윤은 숨을 멈췄다.도준은 손을 내려놓으며 낮게 웃었다.“한 시간만 주신다고 했죠.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군요.”서윤은 아직도 손등에 남은 감촉 때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왔을 때는 밤공기가 제법 선선해져 있었다.도준은 서윤과 나란히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자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맞물렸다.“오늘은 제가 더 욕심내도 되겠습니까?”서윤이 그를 올려다봤다.“어떤 욕심이요?”“다음에는 한 시간보다 오래 함께 있고 싶습니다.”그녀가 웃자 도준도 따라 웃었다. 그는 서윤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걸었고, 두 사람은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량 앞에서 도준이 문을 열어주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사업본부장이었다.도준은 화면을 확인하고 서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말씀하세요.”—대표님, 강성에서 세명정밀에 추가 조건
“현재 제안된 규모만으로도 상당합니다. 다만 권 대표는 검증 단계에 따라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재헌은 책상 위에 놓인 펜을 집어 들었다.“권도준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오세진은 잠시 망설였다.“사업성도 충분하지만, 대표님께서 생각하시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재헌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무슨 뜻이야?”오세진은 입을 다물었다.재헌은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권도준은 한서윤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숨길 생각 없이.재헌은 연구센터에서 도준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되고 싶습니다.*한서윤의 남자가 되고 싶다는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재헌은 오세진에게 지시했다.“강성에서 제출한 제안서 다시 가져와.”“대표님, 이미 최종안을 제출했습니다.”“더 좋은 조건으로 바꿔.”“어느 부분을 말씀하십니까?”“투자금이든 생산시설이든, 도원이 제시한 조건보다 확실히 앞서게 만들어.”오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 정도 투자가 사업적으로 타당한지는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재헌은 그를 차갑게 바라봤다.“내가 타당성 검토를 하지 말랬어?”그는 서류를 앞으로 밀었다.“강성이 할 수 있는 최대 조건을 가져오라고.”오세진이 나간 뒤 재헌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서윤에게 보낸 메시지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그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다시 문자를 입력했다.*내일 저녁 시간 비워. 할 이야기가 있어.*잠시 뒤 읽음 표시가 나타났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재헌은 턱을 굳힌 채 화면을 내려다봤다.예전 같았으면 자신이 바쁘다고 해도 서윤이 시간을 맞췄다. 그런데 이제는 만날 시간을 정하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재헌은 다시 문자를 보냈다.*강성의 협력 제안과 관련된 이야기야. 직접 만나서 설명하겠어.*이번에는 답장이 왔다.*제안서 관련 내용은 담당자를 통해 전달해 주세요.*재헌은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도준은 준비해 온 자료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세명정밀이 납품을 보류했습니다. 그래서 대체 업체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먼저 확인할 게 생겼습니다.”서윤은 그에게 방금 얻은 시험 결과를 보여주었다.도준은 설명을 듣는 동안 말을 끊지 않았다. 그래프와 수치를 차례로 확인하던 그는 서윤이 새로 작성한 보정식에서 시선을 멈췄다.“그러니까 기존 장비로도 초기 검증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네. 다만 다음 단계에서는 측정 범위가 더 넓은 장비가 필요해요.”도준은 사업본부장을 돌아봤다.“들었습니까? 장비 사양을 다시 정리하세요. 기존 계획대로 발주하면 필요 없는 기능까지 돈을 주고 사는 셈이니까요.”본부장이 급히 메모했다.도준은 서윤을 바라봤다.“한 박사님 덕분에 투자 계획을 다시 세워야겠군요.”서윤이 웃었다.“좋은 쪽으로요?”“아주 좋은 쪽으로요.”그는 그녀가 적어놓은 수치를 다시 확인했다.“강성이 협력업체를 선점하려고 돈을 쓰는 동안, 한 박사님은 그 업체가 가진 장비의 필요성부터 줄여버리셨네요.”현석이 웃음을 터뜨렸다.서윤은 도준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필요 없는 장비를 억지로 구할 이유는 없으니까요.”도준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역시 제가 사람을 제대로 봤습니다.”그 말에는 가벼운 칭찬 이상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뒤 도준은 새로운 공급 계획을 펼쳤다.도원 해외 법인에서 보유한 장비와 국내 대체 업체의 납품 조건이 정리되어 있었다. 서윤이 필요한 규격을 표시하자 도준은 곧바로 사업본부장에게 발주 준비를 지시했다.“국내 두 번째 업체로 진행하세요. 대신 납품 지연에 대한 책임 조항은 명확하게 넣고요.”“대표님, 가격 협상이 남았습니다.”도준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적정 가격이면 오늘 계약하세요. 시간을 끌어서 얻는 이익보다 연구 일정이 늦어지는 손실이 더 큽니다.”그는 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검증 일정은 지킬 수 있겠습니까?”“네.
그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익숙한 이름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췄다.한서윤.한때는 전화를 걸면 당연히 받던 여자였다. 자신이 늦게 들어간다고 하면 언제까지고 기다렸고, 식사를 거르면 직접 챙기려 들었다.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업무 담당자를 통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재헌은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권도준이 오늘 연구센터에 간다고 했지?”“네. 오후에 장비 검증 회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강성에서도 사람 보내.”“기술담당 임원으로 준비하겠습니다.”재헌은 서류를 다시 펼쳤다.도원이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구하지 못한다면 서윤은 결국 다른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때 강성이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된다.재헌은 그렇게 생각했다.자신이 원하는 것이 사업인지, 서윤을 다시 곁에 두는 일인지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오후 두 시, 연구센터 실험실에서는 새로운 센서 모듈의 성능 시험이 진행되고 있었다.한서윤은 흰 가운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제어대 앞에 서 있었다. 이현석이 전원장치를 연결하자 장비 내부에서 낮은 진동음이 울렸고, 모니터에는 불규칙한 파형이 나타났다.“박사님, 출력값이 또 흔들립니다. 냉각 온도는 일정한데 센서 반응이 계속 튑니다.”서윤은 그래프를 확대해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을 확인했다.“온도 문제가 아니에요. 센서끼리 간섭하고 있어요.”그녀는 현석에게 출력값을 유지하라고 지시한 뒤 장비 아래쪽으로 몸을 숙였다. 케이블을 하나씩 확인하던 서윤은 두 번째 모듈의 연결부에서 손을 멈췄다.“현석 씨, 세 번째 채널만 끊어보세요.”현석이 설정을 변경하자 모니터의 파형이 순간적으로 안정됐다.“어? 잡혔습니다.”“다시 연결해 봐요.”세 번째 채널이 연결되자 출력값이 다시 흔들렸다.서윤은 한동안 그래프를 바라보다가 작업대 위에 놓인 노트를 펼쳤다. 몇 줄의 수식을 적은 뒤 기존 설계와 비교하던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원인을 찾았어요.”현석이 다가왔다.“뭡니
세명정밀에서 납품 보류를 통보한 것은 월요일 오전 여덟 시 십 분이었다.도원에너지테크 사업본부장은 밤새 수정한 공급 일정표를 들고 대표이사실로 들어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데도 권도준은 이미 출근해 있었고, 창가에 선 채 해외 법인과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다.“대표님, 세명정밀이 시험장비 공급을 보류하겠답니다. 강성그룹에서 기존 견적보다 높은 금액을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도준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정밀 부품 세 종류에 붉은 표시가 되어 있었고, 그중 하나는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지 못하면 검증 일정이 한 달 이상 밀릴 수 있는 장비였다.“세명과 계약은 체결했습니까?”“최종 서명 전입니다. 일정과 가격은 협의됐지만 아직 발주하지 않았습니다.”“그렇다면 세명이 강성을 선택해도 계약 위반은 아니겠군요.”도준은 보고서를 덮고 사업본부장을 바라봤다.“대체 공급처는 어디까지 확인했습니까?”“국내 업체 두 곳과 접촉 중입니다. 다만 세명만큼 빠르게 납품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도준은 내선전화로 비서실을 연결했다.“해외 사업총괄과 구매본부장, 기술담당 임원 전부 열 시까지 들어오라고 하세요. 유럽 법인이 보유한 시험장비도 확인하고요.”그가 지시를 내리는 동안 본부장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대표님, 강성에서 계속 협력업체를 선점하면 우리도 조건을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도준은 그를 바라봤다.“강재헌이 돈을 더 쓰겠다면 쓰라고 하세요. 우리가 상대 회사의 입찰가를 쫓아다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강성이 정한 판에서 싸우는 겁니다.”그는 태블릿을 켜고 도원의 해외 생산시설 현황을 불러왔다.“한 박사님 기술은 국내에서만 검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설비와 인력을 활용하면 선택지는 훨씬 많아지죠.”본부장은 화면에 표시된 해외 법인 목록을 살폈다.“그럼 해외 시설까지 활용하시겠다는 겁니까?”“필요하다면요. 다만 그 전에 한 박사님에게 확인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검토한 장비가 실제로 필요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