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달마다 정해진 날을 나누어 각 공의 처소에 납시어 화친의 의를 몸소 행하시되, 한 이레는 비워 심신을 보하시라 하셨나이다." 예관이 두루마리를 또르륵 말았다. 반 시진짜리 고문 낭독이 드디어 끝났다. 소원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겉으로만. '한 이레를 비운다는 건 한 달에 일주일만 쉰다는 거고…… 그럼 나머지 스무사흘은 매일……? 그 정도면 노동 아닌가? 스테이크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데, 아무리 남신이랑 자는 것도 과유불급이다 정말.' 머릿속으로 출근 일수와 체력 계산기를 두드리던 소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툭 튀어나갔다. "……그러니까,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지?" 순간 대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예관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질 뻔했고, 단 아래 늘어선 네 공의 눈빛이 일제히 굳었다. 대전 뒤편에 늘어선 각 부족 사신들 사이에서는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났다. 소원은 순간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해진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 '아니, 원래 몸 주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모후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셋째 딸이라 하지 않았나? 궁중 대전 한복판에서 던지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이었네.' 순간 당황해서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원은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아니, 근데 내가 틀린 말 했나? 말을 괜히 빙빙 돌려봤자 서로 간만 보고 기싸움만 길어지지. 핵심은 이거잖아.' 소원은 슬그머니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을 뻔뻔하게 바꿨다. "아니…… 제가 표현이 좀 거칠었을진 몰라도, 결론적으로 돌아가면서 뭘 하라는 건 맞잖아요? 돌려 말하면 전달만 안 되니까 요점만 짚자는 겁니다." 뻔뻔하지만 정확한 정곡. 예관은 입만 뻐끔거렸고, 단 위에 앉은 모후는 말없이 소원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아닌—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한 무거운 침묵. 그 침묵이 오히려 소원에게 판을 깔아준 꼴이 되었다. 소원은 십이 년 동안 학원가에서 단련된 '질문 정리' 버릇을 발동했다.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순서는 누가 정합니까?" "……" "제가 정합니까, 저분들이 정합니까?" "늑대 부족이 먼저입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태율이었다. 고고하고 오만한 얼굴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첫 사람이 처음 맺은 것이 저희 부족입니다. 여쭐 것도 없는 일입니다." "여쭐 것도 없다니요." 지환이 능글맞게 웃으며 받았다. "저는 오늘 처음 듣습니다만." "모르셨습니까?" "압니다. 아는 것과 따르는 건 다르지요."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태율의 미간이 좁아졌다. "다른 공이 먼저 드시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습니다." '순리? 방금 그거 법도 얘기 맞아? 본인은 법도라고 믿는 것 같은데, 내 귀엔 체면 챙기는 소리로 들리는데. 첫 번째가 아니면 자기네 신화가 우스워지니까.' "저희 부족은 국경을 혼자 지고 있습니다." 청운이 목소리를 높였다. "작년에만 오랑캐를 세 번 막았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말하다가 소원과 눈이 마주쳤다. "……" 말이 끊겼다. "청운공?" "아, 아닙니다." "하시던 말씀 마저 하세요." "……나중에 하겠습니다." '왜 하다 말아, 답답하게.' "공자님은 왜 그렇게 급하십니까." 지환이 비꼬듯 웃었다. "급한 거 아닙니다." "그럼 왜 아까부터 마마 쪽만 보고 계십니까?" 청운의 귀가 빨개졌다. "……보면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닌데, 티가 나서요." "공자님은 아직 어리셔서 모르시는 겁니다." 사절단의 늙은 사신 하나가 거들었다. "이런 자리는 연륜이 있는 쪽이——" "어리지 않습니다." 청운이 딱 잘라 가로챘다. "저도 마마와 나이가 같습니다." 대전이 조용해졌다. '……나 스물둘인데.' 소원이 눈을 깜빡였다. 지환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운공." "예." "스무 살 아니셨습니까?" "……" "작년에 제가 축하 서신도 보내드렸는데요." "……그건." 청운이 입을 다물었다. 대전 곳곳에서 헛기침이 났다. '아, 이 사람 지금 나이 속인 거구나. 왜?' "저는 순서 따위 관심 없습니다." 묵현이었다. 넷 중 유일하게 목소리에 아무 감정이 없었다. "저희 부족 아이가 제일 먼저 태어나는 게 중요하죠. 수태가 되는 게 중요하지, 순서 따위야." "그 말이 더 무례합니다, 묵현공!" 태율이 강하게 항의하였으나 묵현은 차갑게 반응했다. "무례한 건 신경 안 씁니다." 묵현이 소원 쪽을 무심하게 한 번 봤다. "다만." "……다만?" "이번 달은 제가 먼저였으면 합니다." "방금 순서에 관심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환이 물었다. "순서가 아니라 날짜 얘기입니다." "……무슨 날짜요?" 묵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날짜? 이번 달만 되는 날짜가 따로 있다는 소리 같은데, 그걸 저 사람만 안다는 거고.' "마마." 지환이었다. "예." "마마께서는 어느 쪽이 편하십니까?" 대전의 시선이 소원에게 쏠렸다. "……저한테 물어보시는 겁니다?" "예. 당사자시니까요." 말은 공손했다. 소원은 그 얼굴을 유심히 봤다. 지환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웃음인지 계산인지, 소원은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어, 근데 이 사람 아까부터 나한테만 물어보네. 저 셋은 자기 얘기만 하는데 혼자만 내 의중을 캐.' 각 부족 사신들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씩 보태며 본격적으로 싸워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매번 국경에서 피 터지게 고생하는 건 우리 부족인데 이런 혜택도 없습니까!" 독수리 부족 사신이 고성을 질렀다. "저희 부족은 자신 있습니다! 한 번에 수태시킬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성공합니다!" 뱀 부족 사신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선대에도 저희 부족 공이 먼저인 것이 법도였거늘!" "그럼 뭘로 정합니까, 주먹으로 정합니까?" "그것도 방법이지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목소리가 난잡하게 겹쳤다. 각 부족 사신들과 공들이 뒤엉켜 대전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예관이 "조용, 조용히 하십시오!" 하고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다. 소원은 그 꼴을 기가 차다는 듯 보고 있었다. '와, 이게 궁이야? 시험 기간 고등학생 애들이 더 낫겠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누군가 그 소매를 잡았고, 사신 하나가 다른 사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소원도 일어섰다. "자, 잠깐만요." 안 들렸다. "잠깐만요!" 여전히 안 들렸다. 그래서 소원은 십이 년 동안 하루에 여섯 번씩 하던 걸 했다. 짝. 짝. 짝. 손뼉 세 번. 대전이 뚝 멎었다. '내가 왜 저 소리에 얼떨결에 멈췄지?' 하는 듯, 태율과 지환의 눈빛에 찰나의 자괴감과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되네, 이게.' "앉으세요." 아무도 안 앉았다. "앉으시라고요." 넷이 앉았다. 각 부족 사신들도 주춤주춤 앉았다. "한 분씩 하겠습니다. 손 드시고요." "……손이요?" "네, 손. 안 들고 말씀하시면 안 받습니다." 대전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엔 어이없어서 조용한 쪽이었다. 그때 손이 하나 올곧게 올라왔다. 청운이었다. '……저 사람 진짜 손 들었네.' "네, 말씀하세요." "아까 하다 만 말이 있습니다." "하세요." 청운이 숨을 한 번 쉬었다. 이 궁에 온 뒤로 그는 여러 번 말을 시작했다가 여러 번 잘렸다. 어리다고, 서툴다고, 아직 모른다고. 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저희 부족이 고생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인데요?" "……" 청운이 입을 다물었다. 귀가 다시 빨개졌다. "됐습니다. 다음 분 하십시오." '뭐야 저거. 말을 하다 말아, 자꾸.' 넷이 차례로 말했다. 손을 들고, 한 명씩. 그리고 넷이 다 말하고 나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넷 다 자기가 먼저여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지. 발언 기회를 공평하게 주면 결론이 날 줄 알았지. 안 나지.' "그럼 이거, 서로 얘기해서는 못 정하는 거네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못 정하시는 거 맞죠?" "……" 예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마마. 제비를 뽑으시는 건 어떠하올지." "제비요?" "예. 넷이 한자리에 모여 뽑으시면, 하늘의 뜻으로 돌릴 수 있사옵니다." '하늘의 뜻은 무슨. 아무도 책임 안 지겠다는 소리지.' 소원은 넷을 둘러봤다. 태율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지환은 웃고 있었는데 눈은 안 웃었다. 청운은 또 뭔가 말하려다 말았고, 묵현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습니다." "묵현공은 아까부터 다 좋으시네요." "제가 뽑힐 확률은 넷 중 하나니까요. 저 셋이 다투는 동안에도 넷 중 하나였고, 지금도 넷 중 하나입니다.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럼 제비로 하시지요." 태율이 마지못해 말했다. 나머지 셋도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정리하면. 넷이 한 시진 동안 싸웠고, 결론이 안 나서 제비를 뽑기로 했네. 한 나라의 후계가 달린 일을 제비로.'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리하겠습니다. 태율공은 순리를 말씀하셨고, 지환공은 제 사정을 물으셨고, 청운공은 하다 마셨고, 묵현공은 날짜를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아무도 못 정해서 제비를 뽑기로 했고요." 소원이 잠깐 멈췄다. "근데 여기서 하나가 빠졌는데요. 저한테 하겠냐고 물어보신 분은 아직 한 분도 없습니다." 대전이 완전히 멎었다. 예관이 결국 두루마리를 놓쳤다. 단 위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났다. "소원." 모후였다. '아 맞다. 저 사람 계속 있었지.' "예, 폐하." 모후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난 얼굴도, 웃는 얼굴도 아니었다. 어제 인장을 건네주던 그 깊은 눈이었다. "할 말은 끝났느냐." '……끝내야 하는 분위기네.' "예." "그럼 답하겠다." 모후가 일어섰다. "화친의 의는 오늘부로 발효된다. 순서는 제비로 정하고, 첫 제비는 달이 바뀌는 날 뽑는다." "……그게 답입니까?" "그게 답이다." 모후는 그 말만 하고 대전을 나갔다. 소원은 선 채로 그 뒷모습을 봤다. '……졌네. 결국 서열에 밀렸네. 애들 조용히 시키는 것까진 됐는데, 정작 내 얘기는 아무도 안 들었어.' 대면식이 파했다. 태율이 제일 먼저 나갔다. 나가면서 한 번도 소원 쪽을 보지 않았는데, 문턱에서 딱 한 번 걸음이 느려졌다. 묵현은 일어서다가 소원 쪽을 봤다. 인사도 예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면서 한마디 던졌다. "한 달에 사흘입니다." "……예?" "아까 날짜 말씀드린 것이요.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묵현은 그 말만 하고 나갔다. '아니 사흘이 뭐냐고! 알 수 없게 맥락 없이 던지고 가지 말란 말이야!' 지환은 나가는 길에 청운 옆을 스쳤다. "오늘은 말씀이 많으셨습니다, 청운공." "……예." "나이도 두 살이나 느셨고요." "……" 지환은 그 말만 하고 지나갔다. 청운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알았다. '나 지금 견제당한 건가?' 깨닫고 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견제를 당한다는 건 상대가 자기를 셈에 넣었다는 뜻이니까. 청운은 마지막으로 단 쪽을 한 번 돌아봤다. 거기 선 여자는 아직도 뭔가 못 들은 얼굴로 서 있었다. 청운은 고개를 숙이고 웃다가 밖으로 나갔다. ---------------------------------------------- 그날 밤, 혼자 남은 소원은 침상에 앉아 한참 천장만 봤다. '정리하자. 하나, 나는 한 달에 스무사흘을 남의 처소에서 잔다. 둘, 그 순서는 제비로 정한다. 첫 제비는 달이 바뀔 때. 셋, 사흘이 뭔지는 아직도 모른다. 넷, 저기 청운이라는 연하는 나이를 속였다. 다섯, 내 동의는 아무도 안 물었다.' 정리할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뭐. 어차피 나 돌아갈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편이 편했다. 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든 남의 나라 사정이다. 개입하지 말고, 튀지 말고, 얌전히 있다가 눈 뜨면 학원이겠지. ……그런데 오늘 대전에서 한 시진을 허비한 건 뭔가. '아니, 개입 안 하더라도 파악은 해야지. 넷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한 달을 보내면 그건 시험 범위도 안 보고 시험 치는 거잖아.' 소원은 문 쪽에 대고 불렀다. "서령." "예, 마마." 바로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의 속도였다. "공들을 한 분씩 만나고 싶어요. 따로, 개별로." "……하문하시옵니다. 어느 분부터 청하시겠사옵니다." "부족 큰 순서로요. 첫 번째는……" 소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문턱에서 걸음이 느려지던 큰 등이 떠올랐다. "……늑대요." "태율공이시옵니다. 내일 저녁으로 전하겠사옵니다." 서령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혼자 남은 소원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파악만 하자. 파악만. 어차피 돌아갈 거니까. ……근데 돌아가는 방법은 누가 알려주지?' 그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6화. 시범이라고 해 두지요사흘째 저녁, 태녀궁 접견실.문이 열렸고, 묵현이 들어왔다.인사는 짧았다."뱀 부족 공, 묵현입니다."그리고 소원이 앉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어제 그 늑대는 앉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앉았는데.'검은 옷에 검은 머리. 불빛이 닿는 자리마다 머리카락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다.허리춤에는 작은 약재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은은하게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났다.연한 황록빛 눈동자는 소원을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묘한 각도에 머물러 있었다."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인사 다음이 바로 용건이었다. 날씨 얘기도, 안부도 없었다.묵현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 두루마리도 아니었다. 접힌 종이 한 장.소원은 그것을 펼쳤다.> **약재 전매권**끝이었다. 소원은 종이를 뒤집어 봤다. 뒷면은 백지였다."이게 다예요?""다입니다.""보통 이런 건 이유라든가, 근거라든가, 부족의 공적이라든가 그런 걸 쭉 쓰지 않아요?""필요 없는 걸 쓰면 읽는 쪽이 피곤합니다."소원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근데 좀 당황스럽네요.""무엇이 말씀입니까.""보통 이런 자리엔 내가 뭘 해 드리겠다, 약속을 들고 오지 않나요? 첫 만남부터 요구서를 내미시니까."묵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약속은 지키지 못하면 빚이 됩니다. 요구는 거래고요. 저는 빚은 지지 않습니다.""……그럼 그 거래, 대가는요? 이걸 주면 뱀 부족은 뭘 주는데요?""후계입니다. 확실하게.""확실하게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묵현이 처음으로 소원을 똑바로 보았다."대면식에서 보니 마마께서는 넷을 버거워하시더군요.""……""그럼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직선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계는 어차피 낳으셔야 합니다. 빨리 낳으시면, 그만큼 빨리 놓여나십니다."묵현은 거기서 한 박자 쉬었다."그리고 넷 중 제가 성공률이 가장 높습니다."접
이튿날 저녁, 태녀궁 접견실.소원은 상석에 단정하게 앉아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차 향이 접견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실전 모드로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상담이나 면담은 한이경, 아니 소원의 본업이자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십이 년 동안 학원가를 누비며 학부모 상담만 천 번도 넘게 해온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똑같아. 상대 말을 경청하고, 원하는바를 빠르게 파악하고, 약속은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상대가 학부모가 아니라 거대한 수인족 남편이라는 것만 다르지. ……뭐, 생각해 보니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차이점이긴 하다만.'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접견실 문이 열렸다.태율은 문턱에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궁의 문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닌데도, 그 어깨가 문틀에 걸릴 것만 같은 체구였다. 그가 들어서자 넓던 접견실이 한 칸쯤 줄어든 것 같았다.'못해도 190은 넘겠네, 저거.'"늑대 부족 공, 태율이 마마를 뵙습니다.""어서 오세요. 거기 서 있지 말고 편하게 앉으세요.""서서 고하겠습니다."'아, 완벽하게 외워왔네, 외워왔어.'어깨는 각을 잡아 꼿꼿이 펴고, 시선은 정면 한 점에 고정, 두 손은 옷솔기에 딱 붙이고. 소원의 눈에는 까다로운 입학사정관 앞에서 잔뜩 굳은 고삼 면접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소신 태율은 늑대 부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화친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의무요.""그렇습니다.""의무니까 하겠다는 거예요?""그렇습니다.""그게 뭐예요. 너무 기계적이잖아요. 듣기에 영 별로인데요."태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기계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리 느끼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진지하게 저러니까 더 이상하네. AI한테 너 AI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 꼴이잖아.'소원은 터져 나오려는 입꼬리를 겨우 눌렀다. 어제는 꼬리를 살랑거리던 여우 앞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으니, 오늘은 표정 관리라는 걸 좀 해야
"……달마다 정해진 날을 나누어 각 공의 처소에 납시어 화친의 의를 몸소 행하시되, 한 이레는 비워 심신을 보하시라 하셨나이다."예관이 두루마리를 또르륵 말았다. 반 시진짜리 고문 낭독이 드디어 끝났다. 소원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겉으로만.'한 이레를 비운다는 건 한 달에 일주일만 쉰다는 거고…… 그럼 나머지 스무사흘은 매일……? 그 정도면 노동 아닌가? 스테이크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데, 아무리 남신이랑 자는 것도 과유불급이다 정말.'머릿속으로 출근 일수와 체력 계산기를 두드리던 소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툭 튀어나갔다."……그러니까,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지?"순간 대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예관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질 뻔했고, 단 아래 늘어선 네 공의 눈빛이 일제히 굳었다. 대전 뒤편에 늘어선 각 부족 사신들 사이에서는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났다.소원은 순간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해진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아니, 원래 몸 주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모후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셋째 딸이라 하지 않았나? 궁중 대전 한복판에서 던지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이었네.'순간 당황해서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원은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아니, 근데 내가 틀린 말 했나? 말을 괜히 빙빙 돌려봤자 서로 간만 보고 기싸움만 길어지지. 핵심은 이거잖아.'소원은 슬그머니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을 뻔뻔하게 바꿨다."아니…… 제가 표현이 좀 거칠었을진 몰라도, 결론적으로 돌아가면서 뭘 하라는 건 맞잖아요? 돌려 말하면 전달만 안 되니까 요점만 짚자는 겁니다."뻔뻔하지만 정확한 정곡. 예관은 입만 뻐끔거렸고, 단 위에 앉은 모후는 말없이 소원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아닌—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한 무거운 침묵. 그 침묵이 오히려 소원에게 판을 깔아준 꼴이 되었다.소원은 십이 년 동안 학원가에서 단련된 '질문 정리' 버릇을 발동했다."그럼 다음 질문입
검은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했다.'염색?''아니, 저건 그런 수준이 아닌데.'뿌리에서 번진 은빛이 순식간에 머리 전체를 집어삼켰다.그리고 쿵, 하고 바닥이 울렸다.남자의 뒤편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처음엔 연기인 줄 알았다.아니었다.빛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거대한 늑대였다.늑대는 대전 안에서 다 자라지 못했다. 몸이 커지는 속도가 천장보다 빨라서, 그대로 지붕을 통과해 바깥으로 솟아올랐다.열린 문 너머로 보였다.궁 서쪽 하늘에 늑대가 섰다.그게 신호였던 것처럼, 나머지 셋에게서도 동시에 빛이 터졌다.금발 남자의 손톱이 길게 뻗어 나왔다."어, 어."본인이 제일 놀랐다.그 뒤로 독수리가 솟아 동쪽 하늘에 날개를 폈다. 날갯짓을 하지 않는데 떠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눈동자만 세로로 가늘어졌다.그 뒤에서 뱀이 흘러나와 북쪽 담을 따라 길게 누웠다. 비늘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고, 어디까지가 몸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마지막.적갈색 머리 남자의 옷자락 아래로 꼬리가 빠져나왔다.그 뒤에서 여우가 일어나 남쪽 하늘에 앉았다. 꼬리를 몸에 감고 앉은 자세가 어딘가 한가로웠다.네 마리가 궁의 사방에 섰다.빛으로 되어 있는데 털이 한 올씩 다 보였고, 그 너머로 하늘도 같이 보였다.소리는 나지 않았다.그런데도 거기 있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아까부터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떨림이 저것들의 숨이었다.그리고 그림자가 없었다.하늘을 반이나 가리고 있는데 마당에 그림자가 한 점도 지지 않았다.소원은 입을 반쯤 벌린 채 서 있었다.'……이거 입장료 받아도 되겠는데.'무서운데 아름다웠다.아름다운데 무서웠다.그 와중에도 머리는 딴 데로 굴러갔다.'동서남북에 하나씩. 정확히 넷.''짐승 문양이 넷이었고, 저기 선 남자가 넷이고, 지금 뜬 게 넷. 저걸 뭐라고 하나? 신수? 저 신수가 남자들 거구나.'거기까지 세고 나서야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넷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
"오늘 마마께서 하실 일은 셋뿐이옵니다."회랑을 앞서 걸으며 상궁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폐하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시고, 서약문을 낭독하시고, 책봉을 받으십니다. 그게 답니다."'그게 다라니.''그 셋 다 처음인데.'"절은 어떻게 하는데요.""……예?"상궁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아니,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평소랑 다른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뭐, 각도라든가.""……무릎을 먼저 놓으시고, 손은 이마 높이로 모으신 다음, 상체를 세 번에 나누어 낮추시면 되옵니다. 세 번째에서 잠깐 멈추셔야 하고요."'세 번에 나눠서. 세 번째에 멈춤.''각도는 끝까지 안 알려주네.'소원은 걸으면서 손을 어정쩡하게 이마 근처로 들어 올려봤다."마마. 지금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아, 네."손을 내렸다.상궁이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소원은 그 등을 보며 속으로 셌다.'아니 되옵니다.''오늘 아침부터 벌써 네 번째.'거대한 문 앞에서 상궁이 멈춰 섰다."여기서부터는 혼자 드셔야 합니다.""네?""단까지는 아무도 따라 들지 못하옵니다."소원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대전은 사람으로 가득했다.그리고 정면 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저 사람이구나.'설명은 필요 없었다.대전 전체가 그 한 사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니까.모후였다.아직 물러나지 않은, 지금 이 나라의 황제.'그러니까 나는 오늘 왕이 되는 게 아니구나.''저 사람 밑에서 후계자 자리에 앉는 거구나.'그걸 알아챈 순간 오히려 숨이 트였다.오늘 하루는 뭘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붉은 융단이 단까지 곧게 깔려 있었다.소원은 그 위를 걸었다.단 아래 왼편, 대신들 앞줄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소원과 이목구비가 비슷했다.나이가 조금 더 들었고, 훨씬
책봉식을 하루 앞둔 밤, 태녀궁의 대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태녀의 침소만은 예외였다.침소 밖 회랑에서는 어린 궁녀 둘이 등을 맞대고 서서 소곤거리고 있었다."낮부터 지금까지 한 번을 안 깨셨다며?""의녀님 말로는 맥은 멀쩡하시다는데,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책봉식 전날 그렇게 곯아떨어지시는 게.""난 또 무슨 큰일 난 줄 알고. 하긴 내일부터는 진짜 하루도 못 쉬시겠지. 그 네 분 공들도 정식으로 다 뵈어야 하고.""그러게. 난 그중에 독수리 부족 공이 제일 걱정이더라. 아직 애 티가 안 벗겨지셨던데.""그래도 이번엔 넷이니 낫지. 모후 마마 때는 다섯이었다며. 그중 하나는 본토 큰 부족도 아니고 군소 부족 출신이었다던데.""그러니까 다들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거 아니겠어. 세가 기울면 다음엔 그 자리, 자기네 차례가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까.""쉿, 목소리 낮춰. 의녀님 나오신다."궁녀들이 황급히 흩어졌다.서령이 등롱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마마, 내일이 책봉식이옵니다."궁 의녀 서령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침상에 누운 태녀는 대답이 없었다. 눈은 뜨고 있었는데 초점이 이상했다. 방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서령의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사실 그건 정확한 관찰이었다. 지금 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몇 시간 전, 다른 세계의 서울 어느 학원 건물.자정을 넘긴 강의실에 불빛 하나가 켜져 있었다. 국어 강사 한이경은 다음 날 라이브 특강에 쓸 자료를 다듬느라 아직 퇴근을 못 하고 있었다."자, 여러분. 이번 9월 모평 독서 8번 보면요."한이경은 혼잣말로 강의를 연습했다. 늦게까지 남아 있으면 종종 생기는 버릇이었다. 듣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