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By:  비밀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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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세 사람만 아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황제와 유모, 그리고 나. 나는 황가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황실에 몰래 들여온 뻐꾸기 황녀였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난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운명. 그래서 누구보다 조용히 살아남으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황제는 날 밀어내기는커녕 점점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내가 숨기려는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보다 더 끔찍한 진실이 남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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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 마녀가 타던 밤

그해 겨울, 그레이스 제국의 하늘은 유난히 붉었다.

노을 탓이 아니었다.

광장 한복판에 쌓아 올린 장작더미가 사흘 밤낮을 꺼지지 않고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수도의 골목마다 스며들었다.

빵 굽는 화덕 앞에서도, 빨래를 너는 마당에서도 사람들은 같은 냄새를 맡았다.

송진과 기름, 그리고 그 밑에 깔린 들척지근한 냄새.

마녀를 태우는 불이었다.

역병이 돌면 마녀 탓이었고, 흉년이 들어도 마녀 탓이었다.

그 겨울에는 이웃 나라 로이센에서 쫓겨난 은발의 여자가 그 모든 탓을 혼자 뒤집어썼다.

"태워라!"

"은발의 마녀를 태워라!"

함성이 밤하늘을 찢었다.

기둥에 묶인 여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불길이 치맛자락을 핥고 올라와도, 자줏빛 눈동자는 광장 건너편 한 곳에 박혀 있었다.

기사들에게 짓눌려 무릎 꿇은 남자가 거기 있었다.

흑발에 푸른 눈.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 끝에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제국의 대공이었다.

"놔라!"

"전하, 진정하십시오."

"내 아내다. 마녀가 아니라, 내 아내란 말이다!"

쉰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대공의 인장을 돌바닥에 내던지며 처형을 멈추라 명했다.

황제의 이름으로 사면을 외쳤다.

인장은 눈 녹은 진창 위를 굴러가다 어느 귀족의 장화 앞에서 멈췄다.

아무도 그것을 주워 들지 않았다.

대신 등 뒤에서 날아든 검 하나가 그의 몸을 꿰뚫었다.

여자의 입술이 처음으로 떨렸다.

불길 사이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낮은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광장의 횃불이 일제히 꺼졌다.

"저주다!"

"마녀의 저주야, 엎드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진창에 이마를 박았다.

저주가 아니었다.

장작더미의 불길만은 꺼지지 않았으니까.

여자는 다른 모든 불을 끄고, 저를 태우는 불 하나만 남겨두었다.

군중이 엉켜 흩어지는 사이, 광장 뒤편 골목으로 검은 망토 하나가 빠져나갔다.

망토 자락 안에 작은 꾸러미 하나를 품은 채였다.

새벽이 왔을 때 장작더미 위에는 재만 남아 있었다.

대공의 시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이후 제국의 연대기에서, 그 대공가의 이름은 소리 없이 지워졌다.

*

후궁전의 밤은 광장과 달리 고요했다.

두꺼운 휘장이 바깥의 함성을 삼켰고, 화로의 숯은 거의 사그라져 재만 붉었다.

그 고요 속에서 울음소리 하나가 끊겼다.

태어난 지 열흘 된 후궁의 막내딸이었다.

열에 들뜬 작은 몸은 새벽이 오기 전에 식어버렸다.

후궁 에인젤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울지 않았다.

흐트러진 백발이 아이의 이마를 덮었다.

손바닥 아래로 마지막 온기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창밖의 붉은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하늘 아래에서 지금 누가 타고 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찬바람과 함께 그을음 냄새가 들이쳤다.

황제 카시안이었다.

흑발에 붉은 눈,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지친 노인처럼 어깨가 굽은 남자.

망토 자락 안에서 작은 것이 꼼지락거렸다.

갓난아기였다.

연기에 그을린 낡은 담요에 싸여 있었다.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달빛을 녹여 놓은 듯한 은빛이었다.

"……폐하."

"오늘부터 네 딸이다."

에인젤의 자줏빛 눈이 아기에게 내려앉았다.

은발.

잠에서 깨어 그녀를 올려다보는, 맑고 푸른 눈.

'아, 그 여자구나.'

목 안쪽이 타는 듯 따가웠다.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이 궁에 들어온 첫날 밤, 거울 앞에서 뺨이 달아오르던 그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품 안의 아이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에인젤은 식은 몸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싫다면요."

"그럼 너도 오늘 밤 그 애 곁에 묻히면 된다."

황제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화를 내지도, 달래지도 않았다.

그래서 진심이었다.

"죽은 아이는 조용히 묻어라."

"이 일을 아는 자들은요."

"오늘 밤 안에 입을 닫는다. 전부."

황제가 아기를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작은 손이 허공을 더듬다가 에인젤의 백발 한 가닥을 움켜쥐었다.

놀랄 만큼 따뜻한 손이었다.

에인젤은 그 손을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그 여자의 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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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예일
곧 대기업이 낚아채갈 작가
2026-07-17 23:30:24
3
1
204 Chapters
1. 도망치던 밤
이십 년이 흘렀다. 그리고 선황 카시안이 죽었다. 부고가 내려온 날부터 황궁은 소리를 잃었다. 시녀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고, 시종들은 복도 모퉁이마다 멈춰 뒤를 살폈다. 장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황태자 칼리안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단 사흘 만에 정리했다. 황위를 넘보던 숙부 둘이 목을 잃었다. 그들을 따르던 백작가 셋이 문을 닫았다. 즉위식이 끝난 그날 밤, 궁 안의 누구도 감히 새 황제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 대전에는 낮부터 피 냄새가 떠돌았다. 향을 아무리 피워도 덮이지 않는, 녹슨 쇠 같은 냄새였다. 대신들이 줄지어 충성을 맹세하는 동안, 기둥 뒤편에는 덜 닦인 핏자국이 거뭇하게 남아 있었다. 엘로라는 황녀들의 맨 끝자리에 서 있었다. 차례가 오자 대전이 잠깐 조용해졌다. 누군가 부채를 접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엘로라 그레이스. 새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옥좌 위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턱 한 번 까딱하고 넘어가던 붉은 눈이, 그녀 앞에서 멈췄다. 멈춘 채 떠나지 않았다. 엘로라는 조아린 목덜미에 그 시선이 칼등처럼 얹히는 걸 느꼈다. 뒤편 어디선가 킥킥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반푼이가 드디어 목이 날아가겠네." "쉿, 들려요."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날 저녁, 로웰이 처음으로 그 말을 꺼냈다. 오늘 밤, 떠나자고. * 지하 통로 입구는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갈 만큼 낮았다. 곰팡이 냄새와 젖은 흙냄새가 뒤섞여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다. 벽에 꽂힌 횃불 하나가 바람도 없는데 자꾸만 흔들렸다. "아가씨, 이쪽이요. 머리 조심하시고." "유모, 정말 이 끝이 궁 밖이야?" "그럼요." "어떻게 장담해?" "제가 팠으니까요. 몇 년을 두고." "……몇 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거든요. 자, 발밑. 물 고였어요." 로웰은 더 묻기 전에 그녀의 손을 끌었다. 거칠고 따뜻한 손이었다. 이십 년 동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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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에 겨눠진 칼
통로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마저 끊긴 것 같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엘로라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낮에 대전에서 목덜미를 짓누르던 시선이, 지금 등 뒤에서 똑같이 내려앉고 있었으니까. 몸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즉위식 예복도 채 벗지 않은 차림이었다. 가슴께에 수놓인 황금 사자가 횃불을 받아 번쩍였다. 그 위에서,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 같은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황제 칼리안 그레이스. 불과 몇 시간 전, 그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한 남자였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이제 와서." 칼리안이 다가왔다. 큰 키가 좁은 통로를 꽉 채워, 그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어둠이 한 뼘씩 그녀 쪽으로 밀려왔다. 가죽 장화가 젖은 돌을 밟는 소리가 귓속을 긁었다. 엘로라는 로웰의 손을 끌어당겨 유모를 등 뒤로 숨기고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는 죽이셔도 좋습니다." "그래?" "대신 유모는 살려주세요." "내가 왜." "마지막 소원이니까요." "남의 소원 들어주는 취미는 없는데." "그럼 오늘 하나 생기시는 거죠." 칼리안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다음 순간, 칼집에서 검이 뽑혔다. 쇳소리가 통로를 길게 긁고 지나갔다. 로웰이 짧은 비명을 삼켰다. 엘로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이구나. 유모, 미안해.' 삼 년 넘게 흙을 퍼 나른 손이 지금 그녀의 등 뒤에서 떨고 있었다.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혀뿌리가 썼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 것이었던 적 없는 삶이, 끝마저 남의 칼끝에서 정해지고 있었다. 목덜미에 차가운 기운이 닿았다. 아프지 않았다. 눈을 뜨자 검 끝이 목 바로 앞, 한 치 거리에서 멈춰 있었다. 칼리안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정말 죽일 줄 알았나?" "……아니셨어요?" "아직은." "……." "겁은 많으면서 도망은 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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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장 속의 첫날 밤
황제의 침실은 황궁 동쪽 탑의 꼭대기에 있었다. 창이 넓어 밤하늘이 통째로 방 안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그 온기가 엘로라에게는 목을 죄는 털목도리처럼 답답했다. "저는 제 방에서 자겠습니다."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들었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럼 대답도 들었겠군." 칼리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망토를 벗어 의자에 던졌다. 엘로라가 문 쪽으로 반걸음 물러서자, 문밖에서 갑옷이 철컥 부딪쳤다. 기사가 서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그녀의 짐 보따리까지 이미 옮겨져 있었다. "도망친 죗값이다. 하룻밤에 두 번 놓칠 만큼 멍청하진 않아서." "제가 어딜 가요. 유모가 감옥에 있는데." "그러니까 확실히 해두는 거지." 그가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 장화를 벗었다. 가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묵직했다. 엘로라는 침대 반대편 끝에 서서, 그 침대가 끓는 기름 솥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폐하." "아무 짓도 안 해." "……네?" "그 얼굴. 칼 겨눴을 때보다 더 질렸어." "그럼 베개라도 하나 더 주세요." "베개는 왜." "가운데 놓게요." "성벽이라도 쌓겠다?" "네." 칼리안이 말없이 베개 하나를 던졌다. 엘로라는 그것을 침대 한가운데 세로로 길게 눕혔다. 보잘것없는 성벽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침대 위에서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침대가 넓어 둘 사이에 사람 둘은 더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등 뒤의 체온이 이불을 타고 건너오는 것처럼 뜨뜻했다. 홑이불에서 낯선 삼나무 향이 났다. 엘로라는 천장의 그림자를 셌다. 선황은 다정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녀를 무릎에 앉혀준 적도, 이름을 불러준 적도 손에 꼽았다. 그녀를 볼 때면 늘 그녀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보았다. 그녀 뒤에 서 있는 다른 누군가를 보는 것처럼. 그래도 그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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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핏자국
밤새 눈을 붙이지 못했다. 엘로라는 침대 귀퉁이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창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늘이 검푸른빛에서 잿빛으로, 잿빛에서 묽은 분홍으로 바뀌는 동안 카펫 위의 얼룩도 검은색에서 녹슨 갈색으로 말라붙었다. 벽난로는 꺼진 지 오래였고, 방 안에는 식은 재와 쇠 비린내가 뒤섞여 떠돌았다. 시체는 이미 없었다. 칼리안이 문밖에 대고 한마디 던지자 기사 둘이 들어와 그것을 들고 나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곡식 자루 하나 옮기듯 무심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피 묻은 손을 이불 자락에 대충 문지르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까지 들려왔다. 엘로라는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얼룩이 끝난 자리에서 손가락 두 마디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 거리가 자꾸 눈에 밟혔다. 칼을 휘두르기 직전, 그는 그녀의 머리 위로 팔을 뻗었다. 비켜 가는 팔이 아니었다. 그녀를 등 뒤로 감추는 팔이었다. 그 팔이 스쳐 간 정수리가 아직도 서늘했다. 짧은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황녀님." 회색 제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갈색 머리를 빗어 넘긴, 콧대가 곧은 남자였다. 한 손에는 물통을, 다른 손에는 접은 수건 더미를 들고 있었다. "시종장 세드릭 에반디스입니다. 바닥 좀 치우겠습니다." 에반디스. 남부의 후작가였다. 그 집안 서자가 황태자궁 시종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엘로라도 시녀들 수다 끝에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피를 반만 받은 남자. 반푼이 소리를 들으며 자란 게 그녀 혼자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시종장이 직접요?" "아랫사람한테 맡기면 입이 샙니다." 세드릭은 무릎을 꿇더니 젖은 수건으로 얼룩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지르지 않고 두드렸다. 섬유 속으로 피가 더 먹어 들지 않게. 몸에 밴 손놀림이었다. "……매일 이래요?" "매일은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사흘에 한 번쯤입니다." "……." "즉위 전엔 이틀에 한 번이었으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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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릎 위의 정무
황제의 집무실에서는 피 대신 잉크 냄새가 났다. 천장까지 닿은 서가에 장부가 빽빽했고, 책상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허리 높이로 쌓여 있었다. 열린 창 너머로 분수 물소리가 잘게 부서져 들어왔다. 엘로라가 책상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겼다. "거기 말고." 칼리안은 서류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 "그럼 어디요." "여기." 그가 의자를 조금 뒤로 빼더니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엘로라는 의자 등받이를 쥔 채 그대로 굳었다. "……농담이시죠." "내가 농담하는 얼굴이야?" "여긴 집무실이에요." "알아." "신하들이 드나드는 데라고요." "그러니까 여기지." "그게 무슨 논리예요." "침실엔 자객이 들고, 네 방엔 아무나 들어. 남는 데가 어디지." "그렇다고 무릎은 좀……." "싫으면 말고." 칼리안이 펜을 내려놓았다. "유모 저녁을 빼면 되니까." 엘로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노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그 눈빛마저 구경거리라는 듯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쳤다. "하나, 둘." "가요, 간다고요!" 엘로라는 그의 무릎 맨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닿을락 말락 한 자리였다. 허리에 팔이 감겼다. 단번에 끌려가 등이 그의 가슴에 붙었다. "떨어지면 내 탓 할 거잖아." "안 해요." "할 거야." 목덜미로 숨결이 닿았다. 솜털이 한꺼번에 곤두섰다. 그가 서류를 넘길 때마다 소매가 그녀의 팔을 쓸었고, 그때마다 가슴께가 엉뚱한 박자로 뛰었다. 어젯밤 사람을 벤 손이 지금 허리 위에 있었다. 겁이 나서 그런 거라고, 엘로라는 몇 번이고 우겼다. 허리를 받친 손은 움켜쥐지도, 더듬지도 않았다. 떨어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게 더 곤란했다. "폐하, 서기관 이반이 들었습니다." 문가에서 세드릭이 고했다. 갈색 곱슬머리의 젊은 남자가 서류 뭉치를 안고 들어왔다. 팔꿈치가 반들반들하게 닳은 소박한 외투 차림이었다. 고개를 들던 이반의 눈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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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하 감옥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백스물세 칸이었다. 한 칸 내려설 때마다 공기가 한 겹씩 차가워졌고, 벽에 맺힌 물방울이 횃불을 받아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쇠 녹과 썩은 짚, 오래 고인 오물 냄새가 축축하게 목구멍에 들러붙었다. "정말 보내주시는 거예요?" "싫으면 올라가." "아니요! 아닌데요." "오전 내내 내 무릎에서 서류를 열일곱 장 구겼어." "그건 폐하가 자꾸 귀에 대고 말을 하시니까……." "그 값이야." "서류 구긴 값으로 면회를요?" "불만이야?" "……아뇨." 칼리안이 감옥 입구 아치 아래에서 멈췄다. 횃불이 그의 옆얼굴을 반만 비췄다. "백 셀 동안." "백이요? 겨우?" "넘으면 다시는 못 내려와." 엘로라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만큼은 비꼬는 기색 없이, 허리가 꺾이도록. 간수가 철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나."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가장 안쪽 감방이었다. 로웰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발목에 감긴 쇠사슬이 짚 더미 위로 늘어져 있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가 얼굴을 반쯤 덮었다. "유모!" "……아가씨?" 로웰이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가 여길 어떻게…… 아이고, 신발은 또 왜 그 모양이에요. 바닥이 이렇게 질척한데." "지금 신발이 문제야?" 엘로라는 창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로웰이 사슬을 끌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그 손을 잡았다. 거칠고 차가웠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식은 적 없던 손이었다. "다친 데는? 맞았어? 누가 손댔어?" "아무도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폐하께서 이 방엔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하셨대요. 간수들이 수군대더라고요." 엘로라는 말문이 막혔다. 가둔 것도 그였다. 지켜준 것도 그였다. "스물." 먼 데서 숫자가 울렸다. "밥은 왜 안 먹어." "입맛이 없어서요." "유모." "정말이에요." "왼쪽 눈썹." 로웰이 제 이마를 짚었다. "……아가씨는 별걸 다 기억하시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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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폐후궁의 다과
폐후궁전은 황궁 서쪽 끝, 해가 가장 늦게 드는 자리에 있었다. 한때 선황의 총애를 받던 처소답게 정원은 넓었으나 손보는 이가 없어, 장미 덩굴이 담장을 제멋대로 타 넘고 있었다. 돌길 위에 떨어진 꽃잎들이 짓밟힌 채 거뭇하게 말라 갔다. 공기에서 단내와 썩은 내가 함께 났다. 초대장은 감옥에서 돌아온 그날 오후에 왔다. 흰 백합 한 송이가 함께였다. 어머니가 딸을 부르는 다과회. 겉으로는. "오랜만이구나, 엘로라." 폐후궁 에인젤은 창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흔이 된 지금도 머리칼은 눈처럼 희었고, 자줏빛 눈동자는 겨울 호수처럼 맑았다. 선황이 사랑한 누군가를 닮았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엘로라를 보고 웃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엘로라는 무릎을 굽혔다. 어머니, 라는 말이 혀끝에서 까끌하게 걸렸다. 이십 년을 불러도 길들지 않는 말이었다. "폐후궁이 된 어미한테 꼬박꼬박 예를 차리는 건 너 하나구나."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라." 에인젤이 그 말을 혀 위에서 굴렸다. 입가의 주름이 잠깐 움직였다. 웃음이라 부르기엔 너무 짧았다. 선황이 숨을 거둔 날, 새 황제의 첫 칙령이 그녀를 후궁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 뒤로 이 처소의 문을 두드린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앉으렴." 시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김이 오르지 않았다. 잔을 감싼 손바닥에 미지근한 기운조차 닿지 않았다. '또 식은 차.' 목 안쪽이 따끔했다. 일곱 살에도, 열다섯에도, 이 방의 찻잔은 늘 이 온도였다. 엘로라는 잔을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쥐고 있었다. 에인젤은 그녀를 딸로 대한 적이 없었다. 대놓고 미워한 적도 없었다. 식은 차, 닫힌 문, 끝내 마주치지 않는 눈. 그게 전부였다. 어릴 땐 뭘 잘못했는지 몰라 이불 속에서 울었고, 자라서는 알았다. 잘못한 게 아니라, 곁에 있는 것만으로 이 여자를 아프게 한다는 걸. 오늘은 처음으로 그 아픔의 정체가 궁금했다. 로웰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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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회의실의 귓속말
대회의실의 천장은 까마득히 높았다. 원탁 위로 샹들리에 수십 개가 금빛을 쏟아냈지만, 그 아래 둘러앉은 대신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그늘이 져 있었다. 밀랍 녹는 냄새와 묵은 양피지 냄새가 공기 중에 눅진하게 엉겨 있었다. 황제가 들어서자 서른 개의 의자가 한꺼번에 뒤로 밀렸다.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반푼이 황녀가 들어섰다.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일었다. 칼리안이 자리에 앉자 그것도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엘로라의 자리는 황좌 옆에 놓인 작은 의자였다. 등받이에 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급히 창고에서 꺼내 온 의자였다. 대신들의 시선이 정수리 위로 바늘처럼 꽂혔다. 엘로라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여기 앉은 얼굴의 절반은 선황 시절 그녀를 수도원에 보내라고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었다. 그 상소 맨 앞에는 늘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마.'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드레스 자락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의자 다리 하나가 짧은지, 숨을 쉴 때마다 엉덩이 밑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폐하." 원탁 오른편에서 은발의 중년 남자가 일어섰다. 레이너드 후작. 기름을 발라 반질반질하게 넘긴 머리, 셈을 하듯 가늘게 뜬 눈. "신성한 어전 회의에 황녀 전하를 대동하신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안 돼." "……폐하,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나도 전례 없는 황제야." 누군가 헛기침으로 웃음을 덮었다. 레이너드의 귀밑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옷깃을 한 번 쓸어내리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본론을 아뢰지요. 성 루미아 수도원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그래서." "황녀 전하를 받겠다고 합니다. 선황께서 붕어하셨으니, 이제 전하의 거취를 정하실 때지요." 엘로라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성 루미아. 북부 설산 꼭대기, 일 년 중 열 달이 눈에 묻혀 있는 곳. 그곳에 들어간 귀족 영애 중 제 발로 내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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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혈통 검증
성유물 보관실은 황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계단을 세 번 꺾어 내려가는 동안 공기가 점점 차가워졌고, 벽에서 젖은 흙과 녹슨 쇠 냄새가 배어 나왔다. 창 하나 없는 원형의 방, 벽을 따라 늘어선 촛대 수백 개가 일제히 타오르며 돌벽을 금빛으로 핥았다. 방 한가운데, 검은 대리석 받침 위에 주먹만 한 붉은 보석이 놓여 있었다. 그레이스의 심장.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의 피가 깃들었다는 보석이었다. 그레이스의 피가 닿으면 붉게 타오르고, 아니면 길가의 돌멩이처럼 잠잠하다고 했다. 엘로라는 그것을 오늘 처음 보았다. 선황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이 방에 들이지 않았다. 왜였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보관실 안은 사람으로 빽빽했다. 레이너드 후작과 대신 열댓 명. 폐후궁 에인젤, 그리고 그 곁에서 미간을 좁힌 채 엘로라를 보는 에녹. 기둥 그늘에서 서류철을 가슴에 끌어안은 서기관 이반. 보석 바로 옆에는 팔짱을 낀 칼리안이 서 있었다. 이 방에 들어서기 직전, 칼리안은 문 앞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폐하가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러니까 하는 거예요. 근데 왜 잡으세요." "떨려서." "저 안 떨거든요." "너 말고."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손을 놓았다. 뜻을 물을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황녀 전하, 손을 내미시지요." 늙은 대신관의 목소리가 둥근 벽을 한 바퀴 돌아 되돌아왔다. "겁이 나시면 지금이라도 물러나셔도 됩니다, 전하." 레이너드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목소리에 꿀이 발려 있었다. "후작께서 더 떨리시는 것 같은데요." "허." "후작, 숙녀를 그리 노려보시면 보석이 먼저 놀라겠습니다." 에녹이 웃는 낯으로 거들었다. 대신 몇이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췄다. 대신관이 헛기침으로 장내를 눌렀다. 엘로라는 보석 앞으로 걸었다. 열두 걸음. 발밑의 돌바닥이 얼음장 같았는데, 그 냉기조차 남의 일처럼 멀었다. 에인젤의 시선은 차가웠다. 에녹의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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