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단 세 사람만 아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황제와 유모, 그리고 나. 나는 황가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황실에 몰래 들여온 뻐꾸기 황녀였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난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운명. 그래서 누구보다 조용히 살아남으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황제는 날 밀어내기는커녕 점점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내가 숨기려는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보다 더 끔찍한 진실이 남아 있는 걸까?
View More한밤중, 8살 황녀의 침실.
“로웰~!” 잠이 오지 않던 엘로라가 이불을 뒤척다가 유모를 불렀다. “네, 아가씨.” “졸려, 근데 아직 자기는 싫어.” 엘로라가 이불 밖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만 해줘.” “어제도 그러시더니.” “에이, 그건 벌써 다 까먹었어.” 그 말에 로웰은 픽 웃으며 침대맡에 앉았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뻐꾸기 얘기 들어보셨어요?” “뻐꾸기? 그, 뻐꾹뻐꾹 우는 새?” “맞아요. 근데 그 새, 좀 이상한 구석이 있거든요. 자기 둥지를 안 만들어요.” “으응? 그럼 둥지가 없으면 어디서 살아?” 엘로라의 질문에 로웰이 입을 열었다. “그냥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남의 둥지에 몰래 알만 낳고 가버려요.” “그럼 그 알은? 버리고 가는 거야?” 엘로라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버리는 건 아니고… 다른 새한테 떠맡기는 거죠.” “누구한테?” “뱁새라고 조그만 새가 있는데, 그 둥지 주인이 자기 알인 줄 알고 열심히 품어요.” “으음, 모르고 그러는 거야?” 로웰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네, 근데 더 웃긴 게 있어요….” “그게 뭔데?” 로웰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뻐꾸기 새끼가 먼저 태어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빨리 말해줘, 뭔데.” 로웰이 뜸을 들이자, 엘로라가 재촉했다. 귀여운 모습에 그녀가 싱긋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럼 그 조그만 몸으로 등을 밀어서, 원래 있던 알들을 밖으로 밀어서 떨어뜨려요.” “…뭐야, 그게.” 엘로라가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럼 딴 새끼들은 다 죽는 거야?” “그렇죠, 대부분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먹이를 나눠줄 형제가 없어야, 자기가 다 먹을 수 있으니까요.” “…치, 나빴다.” “꼭 그렇게만 볼 건 아니에요. 안 그러면 자기가 굶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엘로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방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근데 뱁새 엄마는? 자기 새끼가 없어진 것도 몰라?” “몰라요. 그냥 큰 새끼가 배고파하니까, 하루 종일 먹이만 물어다 주거든요.” “허얼~ 뭐 그런 게 다 있어!” “그러게요, 이미 자기보다 몇 배는 큰데도….” “…불쌍해.” 엘로라가 넌지시 입을 떼더니 중얼거렸다. “누가요, 뱁새 엄마가요?” “으응, 근데….” 엘로라는 뭔가 더 말하려다 멈췄다. “근데요?” “…그 뻐꾸기 새끼도 좀 불쌍한 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로웰이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걔는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원래 자기 자리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그냥 어쩌다가 남의 둥지에서 눈뜬 거고.” “아가씨, 오늘따라 생각이 깊으시네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래, 로웰은 아냐?” “맞아요. 그 새는 태어난 순간부터 낯선 곳에 있었던 거죠.” 엘로라가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걔도 언젠가 알겠지? 자기가 진짜 뱁새가 아니란 거.” “당연히요. 크면서 몸집도 다르고 소리도 다르니까, 모를 수가 없죠.” “그럼 그때부터는 어떻게 살아?” “글쎄요? 그건 저도 아직 잘 몰라요.” 엘로라는 이불깃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유모, 혹시 나도 그런 걸까…?” 그 물음에 로웰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몰라서 물어? 다들 뒤에서 그러잖아. 나더러 반푼이래, 완전한 황가의 핏줄이 아니라고.” “…아가씨.” “그러니까 나도 어디 남의 둥지에 잘못 떨어진 알 같은 거 아닐까 해서.” “…….” 로웰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겼다. “그런 소리 마세요.” “근데 사실이잖아.”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게 아가씨 잘못은 아니에요.” “그래도 언젠가 밀려나는 거 아니야? 진짜 알들처럼.” “그런 일 없게 제가 옆에서 꼬옥~ 지켜드릴게요.” 엘로라는 그 말에 픽 웃고 말았다. “흥, 유모가 무슨 힘이 있다고.” “없어도 그렇게 할 거예요.”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허나 이상하게 그 순간엔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게 들렸다. 뭐 하나 빠짐없이 화려한 새장 같은 황궁. 어린 엘로라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로부터 12년 후, 황태자의 즉위식. 이곳에서 폭군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엘로라 역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벼랑 끝에 몰린 짐승처럼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그 눈동자 속에는 결코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심지가 깃들어 있었다.“이 사람은 협박당한 피해자예요. 죄인이 아니라.”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만큼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엘로라. 뒤로 물러나 있어, 위험하니까.”칼리안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낮게 경고했다.그의 손에 쥔 검신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싫어요. 로이 님을 이렇게 두고 갈 순 없어요. 저 때문에 시작된 일이에요.”로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말렸다.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황녀님, 저 때문에 다치시면 안 됩니다. 부디… 제발 저를 두고 피하세요.”“조용히 하세요. 지금은 제가 정할 일이에요.”엘로라의 단호하고도 단단한 태도에, 로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의 눈빛에는 황녀를 향한 깊은 죄책감과 고마움이 뒤섞여 복잡하게 요동쳤다.“하, 하지만 저희는 후작님의 명을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사병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리며 주춤거렸다.그러나 칼리안은 그들의 변명을 단칼에 잘라내었다.“그 명령이 잘못됐다는 걸, 지금 이 순간 깨달아야 할 거야. 네들이 눈이 멀지 않았다면 말이다.”칼리안이 서슬 퍼런 검을 겨눈 채 한 걸음 다가섰다.발걸음 소리마다 묵직한 압박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다시 한번 묻지. 물러날 건가, 아니면 여기서 반역죄를 하나 더 추가할 건가.”사병들은 서로의 눈치를 팽팽하게 살피며 극심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황제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명백한 반역이자 죽음으로 가는 길
서기관실 앞.그곳에는 이미 기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소문은 빠르게 번졌다.지나가던 시녀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웅성거리고 있었다.“무슨 일이지.”칼리안이 그리 물으면서 다가섰다.그러자 기사 하나가 낮게 보고했다.“서기관이 후작가와 내통한 정황이 발견됐습니다.”엘로라의 눈이 커졌다.“로이 님이요?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니에요?”“증거가 명확합니다, 전하. 서기관실 문서에서 유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기사의 말에 칼리안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내가 직접 만나보지.”*서기관실 문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의 로이가 끌려 나왔다.“폐하, 저는…”“일단 안으로.”칼리안의 명령에, 사람들이 물러났다. 좁은 방 안엔 칼리안과 엘로라, 그리고 로이까지 딱 세 사람만 남았다.“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로이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죄송합니다, 폐하.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엘로라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차근차근 말해라.”“후작이… 제 어머니를 빌미로 협박했습니다. 그레이스가 관련 기록을 넘기지 않으면, 어머니를 해치겠다고요.”엘로라의 표정이 흔들렸다.“그래서 정보를 넘긴 거예요?”“…네. 조사대의 출발 경로도, 제가 넘겼습니다.”칼리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럼 습격도 네가.”“저는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줄은…”로이의 목소리가 떨리며 갈라졌다.“믿어주십시오, 폐하. 사람이 다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엘로라가 그의 앞에 무릎을 낮춰 눈을 맞췄다.“로이 님, 왜 진작 저희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무서웠습니다. 후작이 어머니를 진짜로 해
집무실,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부상당한 부대장을 돌보는 의원들의 발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이 증언서, 진짜라고 믿어?”칼리안이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믿고 싶지 않지만… 앞뒤가 너무 맞아떨어져요.”엘로라의 목소리가 떨렸다.“레이너드 후작이 그동안 왜 그렇게 제 신분에 집착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증거를 없애려고?”“아니면, 제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위협이었겠죠.”“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화가 나네요. 제 존재 하나가 누군가한텐 위협이라니.”칼리안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위협이 아니야. 그자들이 두려워하는 거지.”단테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폐하, 하지만 이 증언 하나만으로 후작을 몰아세우기엔 부족합니다.”“무슨 뜻이지.”“노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자의 증언은, 법정에서 힘을 갖기 어렵습니다.”칼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럼 이 인장 반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그것도 정황 증거일 뿐입니다. 후작이 발뺌하면 그만입니다.”엘로라가 물었다.“그럼 대체 뭐가 있어야 확실한 증거가 되는 건데요.”“살아 있는 증인, 혹은 후작이 직접 쓴 문서 같은 것이겠지요.”단테가 답하자 엘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하아… 그런 게 남아 있을까요.”“없으면 만들어야죠. 아니, 찾아내야 합니다.”단테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뗐다.“로웰도 그날 봉인고 정리에 참여했었지.”“그렇습니다. 유모님이라면 뭔가 더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엘로라의 얼굴이 굳었다.“유모를 또 몰아붙여야 한다는 거예요?”“몰아붙이는 게 아니야. 이제는 유모도, 숨길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엘로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그럼 이 상황을 이대로
새벽부터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엘로라는 창밖을 내다보다 숨을 멈췄다.며칠째 소식이 없어 애가 타던 참이었다. 그레이스령까지는 말을 달려도 왕복 엿새가 걸리는 거리였다.“조사대예요.”로웰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로라는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뛰쳐나갔다.“폐하!”칼리안도 이미 정문에 나와 있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말에서 내리는 기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갑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대열 끝에는 들것에 실린 사람이 있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칼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기사대장이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폐하, 그레이스령 폐허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습니다.”“뭐라고, 매복이라니?”“누군가 저희가 갈 걸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출발 날짜와 경로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지.”칼리안의 물음에 기사대장이 잠시 머뭇거렸다.“…폐하와 단테 경, 그리고 서기관실을 거쳐야 했으니 서기관 몇 명 정도입니다.”“서기관실이라.”칼리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엘로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럼… 다친 분은요?”“부대장이 크게 다쳤습니다. 목숨은 붙어 있지만, 아직 의식이 없습니다.”로웰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세상에.”“당장 치료실로 옮겨. 최고의 의원을 불러.”칼리안의 명령에 기사들이 서둘러 부대장을 들것째 옮겼다. 로웰이 그 뒤를 따르며 낮게 기도를 읊조렸다.“증거는요? 가져오셨어요?”엘로라가 다급히 물었다. 기사대장이 품속에서 낡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냈습니다.”기사대장의 손이 상처투성이였다. 목숨을 걸고 지켜낸 흔적이 역력했다.“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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