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그럼 오늘은 제가 조금 더 사랑받아도 될까요?”태준이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공원 벤치 아래로 마른 잎 하나가 굴러왔고, 나는 어깨에 남아 있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웃었다. 기운이 없어서 찾아온 사람이 사랑까지 더 달라고 한다니, 이렇게 뻔뻔한 남자친구는 처음이었다.“허락해 줄게요. 오늘은 특별히 이채린 사랑 이용권 무제한.”“정말요?”“대신 본인도 하나 약속해요. 힘든 날에는 괜찮은 척하지 말기.”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양손을 잡아 손바닥 사이에 끼워 넣었다. 추운 밤인데도 손끝이 따뜻했다. 머리칼을 한 번 더 쓰다듬어 주자 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리고 오늘 칭찬도 받아요. 아주 잘했어, 강태준.”“그 말 들으려고 온 것 같네.”“아유, 우리 애기. 칭찬이 그렇게 좋아요?”그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까지 어깨가 들썩였다. 나는 보온병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져야 했다. 내 손을 끝까지 놓기 싫어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면서도 자꾸 웃음이 났다.다음 날,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후속 점검 결과가 공유됐다. 우리가 여러 번 고친 안내 문구가 현장에 적용됐고, 운영팀과 함께 확인한 결과를 정리하는 자리였다. 나는 수아가 정리한 비교 자료를 다시 검토해 빠진 설명을 보탰다. 회의가 끝나자 운영팀 동료가 내게 다가왔다.“이채린 선임님, 이번 수정안 정말 좋았어요. 현장에서 헷갈린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설명 순서 바꾸니까 훨씬 낫더라고요.”“운영팀에서 구체적으로 알려 주셔서 가능했죠. 저희끼리 봤으면 못 찾았을 거예요.”“그래도 선임님이 끝까지 확인하셨잖아요. 다음 검토에도 같이 부탁드려요.”그가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나도 따라 웃고 수아에게 공을 돌렸다. 수아는 옆에서 우리 팀의 야근 시간이 드디어 보상을 받았다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한동안 수정 표시로 가득했던 문서가 떠올랐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함께 고생한 동료에게 결과를 인정받으니 기분
“오늘은 제가 안아줄 차례예요.”내가 두 팔을 벌리자 태준은 앉은 자세로 나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내 어깨에 기대 있던 사람이 이번에는 어디에 손을 둬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세온그룹 대표가 여자친구 품에 안기는 일에는 결재 절차라도 필요한 모양이었다.“왜요? 안아 주는 것도 대표님 승인이 있어야 해요?”“제가 좀 무거울 텐데.”“어머. 지금 저를 약골 취급해요? 이래 봬도 장바구니에 수박 두 통까지 들어 봤거든요.”“수박이랑 제가 같은 급인가요?”“당연히 다르죠. 수박은 사 오면 먹기라도 하지, 태준 씨는 자꾸 보고 싶게 하잖아요.”그제야 그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코트가 손바닥 아래에서 구겨졌고, 밤공기에 식은 어깨가 조금씩 따뜻해졌다. 키가 큰 남자를 품에 넣으려니 모양새는 어설펐다. 그래도 그가 고개를 내 목 가까이 기댔을 때, 이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공원 입구에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우리는 잠깐 떨어져 앉았다가 사람이 멀어진 뒤 다시 손을 잡았다. 태준은 벤치 아래 놓인 보온병 뚜껑을 닫았다. 뚜껑을 세 번이나 돌리는 손끝을 보니 아직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은 일이 있는 듯했다.“내일 아침에도 그 일 생각할 거죠?”“응. 제가 확인해야 할 게 남았어.”“그럼 내일 회사에서는 강태준 대표님이 알아서 해결하세요. 여기 있는 강태준 남자친구는 잠깐 쉬고.”“둘이 따로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다.”“가능해요. 제가 남자친구 쪽 전담이잖아요. 회사 쪽은 사내 규정대로 움직이시면 되고요.”그는 손가락으로 보온병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한동안 말을 고르더니, 오늘 낮에 자꾸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고 했다. 잘못된 판단을 발견하고도 처음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부터 생각했단다. 자기 판단을 믿고 일한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게 두려웠다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도 회의에서 내 자료의 오류를 인정하기까지 여러 번 입술을
“오늘은 채린 씨에게 좀 기대도 될까요?”그 말에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잠깐 떼어 냈다. 화면에는 여전히 강태준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늘 내 기분부터 묻고, 내가 울면 휴지를 챙기던 남자가 오늘은 먼저 기대도 되느냐고 물었다.“어머, 우리 대표님 배터리 방전됐어요?”농담부터 튀어나왔지만 태준은 웃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종이를 접는 소리가 났고, 이어 깊은 숨이 들렸다.“오늘 회사에서 일이 좀 있었습니다.”나는 의자에 걸어 둔 겉옷을 집었다.“그럼 나와요. 우리 집 근처에 벤치 있잖아요. 거기서 잠깐만 만나요. 제가 충전기 해 줄게요.”“늦었는데 괜찮겠어요?”“지금 남자친구 고장 났다는데, 애프터서비스를 거절하면 안 되죠.”그제야 태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시간을 맞춰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나는 운동화를 신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거울을 보며 입술에 바를 것을 찾다가 그만뒀다. 오늘 필요한 건 예쁜 얼굴이 아니라 잘 들어 주는 귀였다.집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공원에는 가로등 두 개가 켜져 있었다. 놀이터의 그네는 비어 있었고, 바람에 마른 잎이 벤치 다리 아래로 굴러왔다. 나는 사람이 잘 지나지 않는 안쪽 벤치에 앉았다. 손에는 따뜻한 보리차를 담은 작은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태준은 약속한 시간에 나타났다. 걸음은 평소와 같았지만 셔츠 목깃이 살짝 구겨져 있었고, 가방을 내려놓는 동작이 느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 준비해 둔 농담을 하나 삼켰다.“일단 앉아요. 오늘 상담사는 출장 서비스 나왔으니까.”“상담료는요?”“보리차 한 잔. 그리고 솔직한 대답 하나.”내가 뚜껑에 차를 따라 건네자 그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하얀 김이 잠시 올라왔다가 밤바람에 흩어졌다. 태준은 한 모금을 마시고 한동안 벤치 앞의 흙길을 바라봤다.“서비스 관련 민원이 있었어요. 처리 과정에서 제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요. 오늘 그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제 전화엔 첫마디가 정해져 있어요.”수화기 너머에서 태준이 종이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소파에 앉아 발끝으로 슬리퍼 한 짝을 밀었다 당겼다. 회사에서는 온종일 ‘강태준 대표님’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이런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중 얼마나 될까. 오늘은 그 특권을 조금 더 누리고 싶었다.“여보세요 금지예요. 제 전화 받으면 무조건 ‘보고 싶어요’부터 말하기.”“제가 먼저 전화할 때도요?”“당연하죠. 발신자도 수신자도 같은 여자친구잖아요.”“긴급한 일이 생기면요?”“그땐 당연히 중요한 말부터 해야죠. 그리고 근무 중 사적인 전화는 안 하는 거, 그대로 지켜요.”태준이 웃었다. 규칙에 예외까지 붙이고 나니 꼭 사내 지침을 만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괜히 목을 가다듬고 시행 날짜는 내일부터라고 선언했다.“어기면 벌금인가요?”“벌금은 너무 식상해요. 제 이름을 세 번 부르면서 사랑한다고 하기.”“오히려 일부러 틀리고 싶어지는데요.”“대표님, 부정행위 적발입니다!”그의 웃음이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통화를 끝낸 뒤에도 나는 휴대전화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동안 바라봤다. 화면은 까맣고 방 안엔 나 혼자였지만, 내일 들을 첫마디가 이미 귀에 맴돌았다.다음 날 아침, 수아가 내 책상에 검토표를 올려놓았다. 수정된 안내문의 최종 배포 전에 용어가 통일됐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나는 표시해 둔 문장들을 원자료와 대조했고, 수아는 고객에게 보여지는 화면을 한 장씩 확인했다. 오전 내내 전화가 몇 번 울렸지만 모두 업무 연락이었다. 태준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에도 개인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다. 내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이유로 그의 일정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점심시간에 수아가 김치찌개에 든 두부를 내 그릇에 하나 더 얹어 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하고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더니 수아가 누굴 기다리느냐고 장난쳤다.“아니. 오늘은 휴대전화가 나를 기다리는 중이야.”“선임님, 그거 완전 수수께끼예요.”나
“그런데도 내일 보고 싶으면, 또 와요?”내가 묻자 태준은 대답부터 하지 않고 구겨진 휴지를 치웠다. 소파 옆 휴지통에는 내가 울면서 버린 종이가 수북했고, 그의 셔츠 어깨에는 아직 젖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런 몰골을 보여 주고도 또 만나자고 조르는 내가 어이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보고 싶다고 말해 줘요. 다만 내일은 저녁 일정이 길어질 수 있어서 직접 오긴 어려울 것 같아요.”“그럼 예약이라도 받아 줘요. 이채린 고객님, 대기번호 1번.”“내일 밤 9시에 전화할게요. 그때 채린 씨 목소리 듣고 싶어요.”나는 그의 젖은 소매를 손끝으로 펴 주었다. 오늘 같은 밤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받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니 마음이 놓였다.“좋아요. 대신 약속 어기면 벌칙 있어요.”“어떤 벌칙인데요?”“그건 내일 발표하겠습니다. 미리 알려 주면 대표님이 대비하잖아요.”태준은 웃으며 손수건을 접어 내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나는 귀가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거울에 비친 눈은 퉁퉁 부었지만, 전날보다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작은 거처에 놓아 둔 수첩에 오늘을 적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좋은 날만 기록하려던 수첩에 울었던 일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아직 모르겠어서였다. 대신 탁상달력의 오늘 날짜 아래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나중에 이 점을 발견하면 그날 울고도 다시 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싶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 때에도, 하루는 끝까지 살아 낼 수 있었으니까.다음 날 회사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수정된 안내문이 배포되기 전 마지막 확인이 필요했고, 수아는 나와 함께 표현이 서로 다른 문장을 찾아냈다. 점심도 자리에서 간단히 먹었다. 멀리서 태준이 다른 부서 사람들과 회의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지만 우리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사적인 연락을 하지 않는 약속은 그대로였다.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 시계는 8시 17분을 가리켰다. 나는 괜히 욕실 거울 앞
“내일은 제가 곁에 있어도 될까요?”태준의 물음에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책상 위에는 어젯밤 덮어 둔 소설이 있었고, 그 옆에 생일 선물로 받은 열두 번째 메모가 끼워져 있었다. ‘소원 하나를 말해 주세요.’ 그때는 이름을 마음껏 부르고 싶었다. 지금 내 소원은 훨씬 유치했다. 사진 속에서 태준 옆에 서 있던 사람을 단 하루만 잊고 싶었다.“와도 돼요. 그런데 내일의 저는 진짜 안 예쁠 거예요.”“그런 걸 미리 정하지 않아도 돼요.”“눈물 콧물 다 나올 예정인데도요?”“휴지는 제가 준비할게요.”나는 그 말에 웃다가 또 울었다. 그는 몇 시까지 가능하다고 정확하게 말했고, 우리는 근무가 끝난 뒤 작은 거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통화를 끊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내일 누군가 곁에 있기로 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면서, 그런 위로를 원할 만큼 내가 무너졌다는 게 속상했다.다음 날 출근해서는 수아와 시험 적용 결과를 확인했다. 화면별 문의 건수를 대조하고, 추가 검증이 필요한 항목에는 표시를 남겼다. 수아가 숫자 하나를 잘못 입력한 걸 발견하자 함께 원자료를 찾아 고쳤다. 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 애가 맡은 일까지 흔들리게 할 순 없었다. 점심에는 수아가 반찬을 하나 더 덜어 주었는데, 평소처럼 맛있다고 말하는 일이 조금 힘들었다.태준은 복도에서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나를 지나쳤다. 전날 기사 속 사진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나는 인사하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대로 마쳐야 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오히려 손끝이 떨렸다. 어젯밤에는 곁에 있어 달라고 해 놓고 막상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퇴근 뒤 우리는 따로 이동했다. 작은 거처의 문을 열자 태준은 미리 와 있었지만 섣불리 안아 주려 들지는 않았다. 내가 신발을 벗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차 마실래요?”“아뇨. 오늘은 차 마시면 괜찮은 척할 것 같아요.”그는 찻잔을 꺼내려던 손을 거뒀다. 나는 소파 대신 러그에 앉아 끝자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