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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부의 그림자, 다시 걸어 나오다
장군부의 그림자, 다시 걸어 나오다
Author: 향임

1 화

Author: 향임
창문 하나 없이, 하루 열두 시진 내내 칠흑 같은 어두운 밀실.

한아름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여기는 방 안 다른 곳보다 끔찍한 소리가 조금은 덜 들리는 자리였다.

그녀가 삼백 일밤을 견디며 몸소 찾아낸 것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햇빛 한 줄기가 어둠을 가르며 쏟아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그 빛을 가리려 했지만, 이내 멈추고 급히 팔을 내렸다.

웅크린 자세를 바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두 손을 포개고 이마를 손등에 댔다.

햇살이 날카롭게 내리쬐는 가운데, 궁녀들의 화려한 치맛자락이 스치며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는 오만함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경멸이 묻어나 있었고, 마치 칼등을 튕겨 울리는 듯했다.

그러다 이윽고 가시돋힌 경멸이 들려온다.

“고개 들 거라.”

한아름은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은 백옥과도 같아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궁녀의 눈에는 그 모습이 오히려 역겨웠다.

그녀는 한아름의 턱을 움켜쥐며 쏘아붙였다.

“소아름, 네가 장군부의 딸이라 한들 시골에서 자란 천한 뼈대는 달라지지 않아. 황후마마께서 너 같은 아이에게 정성을 쏟으신 건 하늘 같은 영광이란 말이지.”

“오늘 여기를 떠나 장군부로 돌아가면, 반드시 규율을 지키거라. 일 년 동안 배운 예법을 헛되게 만들지 말라. 네가 손가락질당하는 건 상관없지만, 황후마마의 명예는 털끝만큼도 더럽혀선 안 돼.”

“알겠느냐?”

한아름은 창백한 입술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궁녀는 손에 힘을 더 주며 말했다.

“다시 대답해야지.”

“종은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궁녀는 콧방귀를 뀌며 손을 털었다.

“여봐라, 끌고 나가 깨끗이 씻겨라!”

그러자 건장한 몸집의 마마들이 들이닥쳐 한아름을 끌어냈다.

반 시진이 지난 뒤, 몇몇 궁녀와 마마들이 그녀를 별원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쏟아지는 햇빛이 눈을 찌를 듯 따가웠지만, 그녀는 눈물을 억누르며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한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생모, 소 부인이었다.

한아름은 시골에서 잡초처럼 살아갔었다.

부모라 부르던 이들은 틈만 나면 욕설과 폭언을 일삼았다. 지옥과도 같은 생활은 그녀가 열세 살이 되도록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러다 3년 전, 장군부에서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고, 그녀가 장군부의 친자식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장군부 부인 곁에 있던 마마가 벌을 받게 되자, 원한을 품고 시장에서 아이 하나 사들이고 그녀와 바꿔치기한 뒤, 한아름을 시골에 버려 괴롭힌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뒤바뀐 삶을 산 이는, 장군부의 원래의 딸, 소미진이였다.

진주마냥 귀하게 자란 그녀는 소장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웠고 황제로부터 호걸이라는 명예를 수여받고 이미 영양 군주로 봉해졌다.

황제가 친히 내린 조서와 황후가 직접 주관한 봉작식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장군부의 진짜 딸인 한아름은 밖에서는 소 부인의 조카딸로, 장군부의 표 아씨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한아름은 너무나 기뻤다.

그녀에겐 드디어 친부모가 생겼고, 오라버니도 두 명 생긴 셈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붙이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온 힘을 다해 순종하면서 잃어버렸던 세월을 메우려 애썼다.

어머니와 두 오라버니, 심지어 영양군주까지. 비록 정식 신분은 없지만 모두 그녀에게 꽤나 잘해줬기에 그녀도 이 집안의 일원이 되었다 믿고 있었다.

그러나, 1년 전 봄 사냥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소미진이 타고 있던 말이 갑작스레 날뛰면서 그녀는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그때 소미진 곁을 호위하던 이가 한아름의 화살통에서 억지로 한 발을 뽑아 들며, 그 화살이 바로 문제의 화살이라며 몰아붙였다.

비록 그녀가 단 한 발의 화살도 쏘지 못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해명하려 했지만, 누구 하나 들어주는 이 없었다.

심지어 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소미진을 해하려 한 범인이 되었다.

큰 오라버니는 상처를 치료하고 활을 당길 수 있었던 그녀의 오른손을 직접 부러뜨렸다.

똑같일 고통을 느껴봐야 안다고 말이다.

둘째 오라버니는 직접 채찍을 들어 잘못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겠다며 피가 튈 정도로 때렸다.

어머니는...

황후가 직접 규율을 가르치겠다고 나섰을 때, 큰절을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날, 그녀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로, 소부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그대로 황후의 별원으로 끌려가 꼬박 1년 동안 갇혀 있었다.

1년 동안, 부러진 뼈는 어긋난 채로 붙었고, 채찍 자국은 딱지가 되고, 흉터로 남았다.

그 시간 동안, 소가 사람들중 어느 누구도 그녀를 찾아온 적 없었다.

그 삼백여 일밤의 ‘예법 교육’속에서 한아름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여전히 부모도, 오라버니도 없다는 것을.

“아름아!”

소 부인은 눈물에 젖은 채 다가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어미가 널 데리러 왔다. 어서 마차로 가자.”

그러나 다친 팔이 세게 잡히자 욱신거리는 통증에 그녀의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그녀는 장문경의 손길을 피했다.

하지만 통증보다 더 아픈 건 이리 조각난 마음이었다.

어찌 안 아플 수가 있을까...

그녀가 무려 13년을 기다려온,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이제 더는 사랑할 힘조차 없었다.

마치 상처로 가득한 팔처럼 포옹하고 싶어도 들 수가 없었다.

한아름의 눈빛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눈동자 속의 차가움을 가렸다.

그녀는 그저 뒤로 물러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고모님께 폐 끼칠 수 없습니다. 저는 걸어서 가면 됩니다.”

장문경은 순간 멍해졌다.

당초 체면도 세우고 안팎의 구설도 피하려고 겉으로는 한아름을 외가 쪽 친척이라 하면서 ‘고모’라 부르게 했던 것이다.

“아름아, 아직도 어미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냐?”

장문경의 눈물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때 소 부인을 부축하고 있던 마마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 부디 부인의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부인께서는 새벽부터 일어나 아가씨가 좋아하던 과일을 사 오게 하여 마차에 실으신 채 내내 울며 오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마음 아프게 하시면 안 됩니다.”

“아름아… 어미를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

소 부인은 여전히 흐느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한아름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어둠에 갇혀 지낸 탓에, 한 줄기 햇빛조차 눈을 찌를 듯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 씨 가문들 앞에서, 더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온 세상이 눈부신 햇살로 가득한 그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끝없는 먹구름만 가득했다.

온 마음을 다해 매달렸던 가족에 대한 애정과 사랑은 전부 구멍 난 틈새로 빠져나가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걸어가도 괜찮습니다.”

한아름은 낮은 목소리로 되뇌이고 뒤돌아 홀로 걷기 시작했다.

“아름아…”

소 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보았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다.

한아름은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치맛자락 아래 떨리는 다리도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은 비단에 동주가 박힌 정교한 구두였다. 도톱한 굽에 장식이 더해져 겉보기에 너무나도 예뻤다.

그러나 그 속에 뾰족한 바늘이 숨겨져 있어 걸을 때마다 살을 찌르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렇다고 하여 피가 흐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은 여전했다.

궁을 나서기 전, 송미란이 웃으며 말했다.

“1년 전엔 끌려왔지만, 이번엔 걸어 나가야지. 나중에 마마께 보고드려야 하니 잘 세어보아라.”

그녀는 반드시 걸어야만 했다.

한아름은 앞서 걸었고, 소 부인은 마마에게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라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소 부인의 눈물은 돌아가는 내내 멈출 줄을 몰랐다.

한아름은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그녀의 옷차림이 너무나 화려하고 귀티가 흘러, 지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곧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사냥터에서 영양 군주를 쏘려다 실패한 악독한 그 여인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가까이에 정차해 있던 한 마차에까지 번졌다.

귀한 흑단 목재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마차는 둥근 못으로 견고하게 고정되었고 검은 가림막이 비밀스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가림막이 살짝 들리더니 붉은 비단 소맷자락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나리.”

마차 밖에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대장군부의 표 아가씨가 귀가 중입니다.”

“그래?”

조금 길게 끄는 소리엔 냉소와 조롱이 묻어 있었다.

“그 사냥터의 희생양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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