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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회상 속 너를 만나다.
잿빛 회상 속 너를 만나다.
Auteur: KRYSE

EP 1. 백미러 너머의 폭풍

Auteur: KRYSE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7-09 15:32:52

탁한 회색빛이 감도는 백미러 너머.

그곳에 그가 있다.

좁고 네모난 거울의 프레임 속.

일직선으로 꽂히는 두 개의 시선.

칠흑처럼 어둡고 깊은 눈동자.

아스라히 일렁이는 그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여전하구나. 이 남자. 하나도… 안 변했네. 사람 미치게……]

유진은 입술 안쪽을 질끈 씹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밀려나는 조호바루의 풍경은 온통 잿빛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채도의 흑청색 먹구름이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차 안은 푸르스름하고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 뿐이었다.

서유진은 가죽 시트 깊숙이 몸을 묻었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심장 끝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감각.

그동안의 세월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 한 치도 변하지 않은 그 무거운 눈빛.

차 안을 지배하는 특유의 침묵까지 전부 다.

애써 세운 유진의 방어벽을 허무하게 무너뜨린다.

그날도 그랬다.

6년 전, 그와 마주친 처음인 듯 처음이 아닌 것 같았던……

백 미러 속 그 기묘한 눈빛.

*

한바탕 열대성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었던.

말레이시아 세나이 국제 공항.

국제공항이라는 거창한 간판이 무색할 정도로 공항은 아담했다.

스르륵ㅡ.

공항의 유리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훅 하고 들이치는 정글의 열기는 마치 흉기 같았다.

숨이 턱 막히는 점도 높은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의 피부를 무겁게 짓눌렀다.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려던 바로 그 찰나.

유진의 시선이 한곳에 멎었다.

짙은 회색 수트를 자로 잰 듯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

끈적하고 불쾌한 열기 속에서도.

혼자만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서늘한 청색의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칼과 칼날 같은 턱선.

전형적인 일본인 특유의 정갈함이 온몸에서 흘러넘쳤다.

유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똑바로 걸어갔다.

“하지메마시테. 서유진 데스.”

(처음 뵙겠습니다. 서유진이라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선배의 추천으로 오게 된, 유진의 인생 첫 직장.

일본 대기업 전자 부품회사의 아시아 총괄 본부.

경력도 없는 깡 신입인 그녀에게.

이것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거대한 기회이자 동아줄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사전조사를 철저히 끝내두었다.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남아 성공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며.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유진의 첫 직속 상사.

머릿속으로 수없이 복기했던 그의 프로필이 시야 위로 겹쳐진다.

류 요스케. 32세.

옥스퍼드와 스위스 공과대학원을 거친 수석 엔지니어.

187cm의 거구. 무뚝뚝하게 가라앉은 강한 인상.

실물로 마주한 그는 소문보다 훨씬 선이 굵고 잘생긴 일본 남자였다.

허나 아무렇지 않았다. 어떤 떨림도 일지 않았다.

자신의 사전조사가 맞다면.

그는 2년째 동거 중인 여자가 있고 두 달 뒤 결혼을 앞둔, 사실상 100% 유부남이었다.

유진에게 그는 그저 자신의 고혈을 빨아먹을 어려운 상사일 뿐이었다.

“Yosuke Ryu. I am a senior product manager.”

(류 요스케입니다. 제품 개발 팀장입니다.)

그가 먼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옅게 박인 단단하고 억센 손이었다.

“Nice to Meet you. How was your flight?”

(만나서 반갑습니다. 비행은 괜찮았습니까?)

낮고 부드럽게 긁히는 완벽한 영국식 영어 발음.

과연 옥스퍼드 출신다웠다.

“This is Watson, who will be your colleague.”

(이쪽은 왓슨입니다. 유진씨와 함께 일할 동료.)

왓슨이 중국인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식적이고 건조한 인사가 오갔다.

억지로 짜낸 친밀감도 불필요한 사적인 대화도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함.

요스케가 은빛 손목시계를 슥 확인하더니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차로 이동하면서 설명하죠.”

그때 왓슨이 눈치를 보며 말을 보탰다.

“공장으로 가기 전에 점심을 먼저 하고 가면 어떨까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는…….”

왓슨의 제안에 요스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유진의 살짝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점심…… 괜찮습니까?”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사실 난기류 때문에 속이 뒤집혀 멀미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첫 상사가 던진 첫 질문에 감히 “No”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그럼 소피텔로 가죠.”

요스케가 툭 다가오며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유진이 쥐고 있는 캐리어 손잡이로 향하는 손길.

짐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제스처였다.

“괜찮습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유진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칼같이 거절했다.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공대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녀였다.

그들에게는 별거 아닌.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우 받는.

그 매너에 따라오는 괜한 불이익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웬만하면 물리적인 도움은 받지 않는다.

그것이 남자들 세계에서 유진이 세운 철칙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유진은 검은색 대형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블랙 SUV 차량.

트렁크가 열리자 유진은 무거운 캐리어를 힘껏 들어 올려 내부로 우겨넣었다.

쿵 소리와 함께 트렁크가 닫히고 유진이 뒷좌석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

요스케가 매끄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창밖으로는 생경하고 거친 열대우림의 짙푸른 풍경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조수석에 앉은 왓슨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쉴 새 없이 턱을 움직이며 조잘거렸다.

하지만 유진의 귀에는 그저 웅웅거리는 백색 소음처럼 멀게만 들렸다.

“Really? Umm… Ah… Sounds good…”

유진은 영혼 없는 리액션을 던지며 슬쩍 운전석에 앉은 요스케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는 왓슨의 수다를 완전히 무시하며 묵묵히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완전 전형적인 상사 맞네. 듣기 싫은 부하직원의 소리 정도야 대놓고 무시할 수 있는 포지션에 딱 맞는 태도!]

그 순간이었다.

무심코 백미러로 향했던 유진의 시선이 쿵ㅡ!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거울의 좁은 표면 너머로.

요스케의 검은 눈동자가 유진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숨막히는 차 안의 공기를 뚫고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그때 그의 단단한 눈빛이 불안하게 일렁이며 흔들렸다.

차 안의 서늘한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폭풍 같은 묘한 감정이 유진의 심장 아래서부터 훅 휘몰아쳤다.

태어나서 처음 본 낯선 남자인데.

분명 오늘 공항에서 처음 마주한 상사일 뿐인데.

왜 이토록 손끝이 저릴 만큼 익숙한 감정이 드는 걸까.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쿵쾅. 쿵쾅.

귓가를 때리는 심장 소리가 가팔라졌다.

그때 거울 속 요스케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유진의 붉은 입술.

그리고 얇은 화이트 셔츠 칼라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쇄골을.

살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순간 그의 커다란 손길이 살갗에 직접 닿은 것 같은 지독한 환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닿지도 않은 그의 손가락이 쇄골을 지나.

셔츠 안쪽을 타고 점차 아래로 향하는 듯한 기분.

화끈거리는 열감과 함께.

유진의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쳐 내려앉으며 찌릿한 경련을 일으켰다.

말도 안 되는 망상. 지독한 외설.

그런데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이 날것의 느낌이 기이할 정도로 그리웠다.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타인의 체온인데…… 그립다니.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넓은 가슴에 안겨 몸을 섞었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유진은 호흡을 멈췄다.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충격이 일었다.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되는 남자.

이미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

머릿속에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켜졌다.

하지만 몸의 감각은 이미 이성의 속도를 저멀리 앞질러 가고 있었다.

이건 지독한 사고였다.

절대 풀어선 안 되는, 너무도 틀린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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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잿빛 회상 속 너를 만나다.   EP 51. 소개팅 남, 선호

    ㅡ월요일 월차냈어요. 그리고 이번 주말, 저 한국에 좀 갔다오려고요. 다음 주말에 뵐게요.정확히 금요일 오후 5시 정각.퇴근을 알리는 차가운 전자음과 동시에.요스케의 휴대폰 화면 위로 유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단 한 줄의 건조한 문장이 그의 시야를 뒤틀어버렸다.쿵ㅡ.순간 요스케의 흉통 안에서 심장이 파열음을 소리를 내며 아릿하게 가라앉았다.주말 내내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두고 온몸의 살결을 집어삼켜도 모자랄 지경인데.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다음 주말에 보자는 선언.그리고 한국에 가는 거라면, 미리 자신과 조율해 얼마든지 함께 갈수도 있었을 텐데.왜 굳이 자신을 철저히 배제한 채 혼자 떠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요스케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두르르르ㅡ. 두르르르ㅡ.통화음만 공허하게 이어질 뿐 끝내 연결되지 않는 차가운 기계음.요스케는 미칠 것만 같았다.주먹을 쥔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 새겨진 은빛 흉터가 하얗게 질려갔다.이제는 정말로 이 거지 같은 비밀 연애를 제 손으로 찢어발겨 끝내고 싶었다.더 이상은 유진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듯 말라붙었다.유진이 너무도 절실해서 당장이라도 심장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같은 시각.유진은 싱가포르 창이 공항의 회색 바닥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유진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 방식은 단 하나, 최대한 몸을 낮추고 숨는 것뿐이었다.혹시라도 주말에 요스케와 함께 있다 꼬리라도 잡히면.지난 2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판이었다.결국 요스케의 전화를 외면한 채 서울을 향하는 비행기 좌석 깊숙이 몸을 묻었다.“어! 유진씨?”좌석 바로 옆자리에서 낮고 매끄러운 사내의 음성이 유진에게 아는 척을 했다.고개를 돌린 유진의 헤이즐넛 빛 눈동자가 놀라 얼어버렸다.바로 그 소개팅 남자, 강 선호였다.“오늘……. 서울 가세요?”유진은 하얗게 질린 안색을 숨기지 못한 채 멍하니 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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