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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 923호

작가: KRYSE
last update 게시일: 2026-07-09 15:34:46

철컥ㅡ!

호텔 차량 게이트가 닫히는 날카로운 기계음.

그 파열음이 정적을 사정없이 깨트렸다.

그 거대한 옛 기억의 해일 속에서.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빠져나왔다.

“숙소는 저희 사측에서 미리 이곳 소피텔로 잡아두었습니다. 여기서 1박 하시고 내일 오전에 싱가포르로 넘어가셔서 추가 협상안을 논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차 문이 열리고 내린 소피텔 호텔의 야외 로비.

6년 전과 똑같았다.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에메랄드빛의 열대 식물들이 바다처럼 펼쳐진 곳.

피부에 닿는 공기는 조금 습했지만.

이내 가슴 깊숙이 안정감을 선사하는 이국적인 향취가 코끝을 감쌌다.

가끔 이 곳이 사무치게 그리웠었다.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 아래.

야외테라스에서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던 그 평화로운 오전.

서로의 손가락을 얽어매며 잔잔하게 속삭였던 남자의 낮은 목소리…….

달콤해서 더 잔인한 기억들이 깨진 유리 파편이 되어 사방에서 유진의 살결을 찔러댔다.

하지만 어떤 말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임원의 옆에 차분히 서서 딱딱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럼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싱가포르에서 뵙겠습니다.”

요스케가 한 걸음 뒤에서 단정하게 목례를 건넸다.

탁ㅡ. 탁ㅡ. 탁ㅡ.

그의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붙잡고 있던 숨이 그제야 풀어졌다.

“서 과장, 출장 첫날인데 간단히 술 한잔 어때? 저기 바 분위기 좋은데.”

함께 온 박 상무가 엉큼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리려 했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그의 손을 피했다.

“말씀 감사한데, 오늘 회의된 내역 정리해서 서울 사무실에 전달하고, 내일 추가협의안 수정하려면 좀 빠듯해서요. 오늘 술 한잔은 제가 싱가포르에서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푹 쉬십시오, 상무님.”

단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거절.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상사를 로비에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직행했다.

띵.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안내데스크에서 받아 든 카드키를 내려다보던 유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923호.

방 호수를 확인한 순간.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쫙 돋아 올랐다.

플라스틱 카드키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플 때까지 꽉 쥐었다.

우연일 리가 없었다.

이번 출장의 모든 일정을 총괄한 책임자는 다름 아닌 일본 측이었으니까.

마치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그가 다시 나를 이 방으로 밀어 넣었다.

숨이 막혀왔다.

잠시 호텔키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유진은 몇 번이나 깊은 심호흡을 한 뒤 마침내 도어락에 카드키를 댔다.

띠리릭.

방문을 열자마자 통창 너머로 펼쳐진 생기 넘치는 녹색의 수림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방 안은 온통 초록빛과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깍.

방문을 닫고 스위치를 올리는 바로 그 순간.

시야가 온통 진홍빛으로 번지며.

6년 전 그날 밤의 기억이 괴물처럼 유진을 집어삼켰다.

“아…… 요스케…… 하아, 윽……!”

침대 시트를 찢어발길 듯 움켜쥔 유진의 손가락 사이로 흰 천이 짓겨졌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도.

두 사람의 젖은 피부가 찰박이며, 맞부딪히는 소리는 진득하고 뜨거웠다.

유진의 시야에 맨 먼저 들어온 것은.

미친 듯이 박동하는 요스케의 넓은 등이었다.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그의 붉게 솟아오른 등근육.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광배근이 움직일 때마다.

유진의 가냘픈 몸은 침대 위에서 사정없이 흔들리고 밀리고 끌려내려갔다.

통창을 통해 스며든 열대 노을의 핏빛 햇살이 두 사람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붉은 빛이 남자의 구릿빛 피부를 더욱 짙고 야성적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거대한 육체의 품 안에.

완벽하게 짓눌린 유진의 나신은 가련할 정도로 투명한 순백색이었다.

극단적인 색의 대비가 침대 위를 수놓았다.

요스케의 억센 손아귀가 유진의 얇은 허리를 바스러뜨릴 듯 움켜잡을 때마다,

그녀의 하얀 살결 위로.

푸른 핏줄이 불거진 그의 구릿빛 손길이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찍어내렸다.

남자의 단단한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든 자리가 여지없이 붉게 달아올라 짓물렀다.

닿는 모든 곳이 불덩이 같았다.

“Look at me, Eugene.”

(나를 봐, 유진.)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정한 그의 눈동자가.

유진의 눈물 고인 시선과 마주한 순간 완전히 깨어져 나갔다.

그의 이성이 모조리 불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억눌러왔던 날것의 본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낮고 거칠게 긁히는 짐승 같은 저음이 유진의 귓가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Eugene, 逃げるな.”

(유진, 도망치지 마.)

“하아, 요스케…… 읏, 아!”

그의 억센 손끝이 유진의 땀과 애액으로 젖어 든 여린 살결을 거침없이 짓이겼다.

이내 고개를 숙인 그가 유진의 입술을 집어삼키며 거칠게 타액을 섞어왔다.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는 난폭한 결합이었다.

데일 듯 뜨겁고 점도 높은 숨결이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오갔다.

요스케는 유진의 쇄골과 새하얀 가슴을 붉게 물들이며 짓누르고 빨아들였다.

마치 자신만의 영역을 표시하려는 맹수처럼 거칠고 집요하게 탐닉했다.

지독한 갈증에 허덕이는 것처럼.

남자는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유진의 순백의 나신을 사정없이 유린하고 흩트려 놓았다.

그리고 극상의 쾌락에 겨워.

노을빛처럼 붉게 물든 두 사람의 뺨과 교차하는 시선.

방 안은 오직 가파른 숨소리와 살과 살이 마찰하며 내는 파동.

그리고 이미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남자의 낮고 굵은 신음으로 가득 찼다.

서로가 서로를 미치도록 원하고 있었다.

마치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파멸에 가까운 쾌락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을 그 누구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밤은 그의 결혼식, 바로 전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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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챕터

  • 잿빛 회상 속 너를 만나다.   작가 한마디

    여기까지 유진과 요스케의 슬픈 운명의 여정을 따라와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두 사람이 여전히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세계에 있습니다.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지 궁금하네요.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혹시라도 기회가 되신다면, 리뷰에 독자 여러분의 결말을 올려 주셔도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제 결말은…… 글쎄요.사실 이 작품을 두 사람이 재회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더 이어 갈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이대로 두기로 했습니다.사실 이 작품은 제 개인 연애 이야기여서 이미 저는 저만의 결말에 도달했습니다.혹시나 작품의 분위기 때문에 걱정하실까 사족을 붙이자면.참고로 저의 결혼생활은 오늘도 해피엔딩입니다😊.그리고 유진과 요스케의 결말 이외에도.선호와 요스케 중 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 지도 궁금합니다.여러분도 이 작품 보시면서 옛 사랑을 한자락 기억해 보셨기를 기대합니다.그리고 유진과 요스케는 여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열심히 사랑하고 있으니, 저는 다른 작품에서 뵙겠습니다.그동안 제 작품을 즐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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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잿빛 회상 속 너를 만나다.   EP 96. 1년 후, 이별 유예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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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잿빛 회상 속 너를 만나다.   EP 95. 그 남자의 그녀.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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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잿빛 회상 속 너를 만나다.   EP 94. 그녀의 소식

    동종 업계의 좁은 바닥에 몸을 담고 있다 보니.요스케는 의도하지 않아도 아주 가끔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서유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스치듯 들릴 때마다.그의 거대하고 단단한 심장은 예외 없이 멈춰 서서 피를 흘렸다.그러던 어느 날.도쿄 본사 HQ 최고층에 위치한 요스케의 사장실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일본 본사로 정기 교육을 받으러 온 예전 부하직원이자, 과거 유진과 동료였던 왓슨.“류 사쵸 (사장님). 여전히 멋있으십니다.”왓슨은 예의 그 변죽 좋고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변함없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댔다.사장의 자리에 올라 한층 더 냉혹하고 단단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옛 상사.왓슨은 특유의 처세술로 집무실의 무거운 정적을 가볍게 깨부수었다.“오랜만이네. 자네는 이번에 싱가폴 아시아 본부에서 부장으로 승진했던데. 축하해.”“다 훌륭한 사수 덕이십니다. 류 사쵸가 제 사수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요스케는 손에 쥐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웃었다.“나 밑에 있을 때는 힘들다고 불평했던 걸로 기억하는데.”그는 농담을 건네듯 왓슨을 놀렸다.“솔직히 사쵸가 편한 스타일은 아니었죠. 그래도 사쵸 밑에 있던 직원들은 다 잘 됐습니다. 자부심 가지셔도 됩니다.”“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아…… 혹시 기억하세요? 서유진? 우리 개발실 유일한 여자 엔지니어. 왜 예전에 샤쵸가 공장 사고때 구해줬던……”순간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사정없이 솟구치는 갈증을 감추기 위해.그는 커피를 급하게 들이켰다.“그 친구는…… 잘 지내나?”그리고 아주 넌지시, 마치 지나가는 바람의 안부를 묻듯 나직한 저음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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