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경복궁 남헌당에 붉은 봉서 하나가 도착했다.그 봉서는 중전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었고,직인 아래엔 조정 대신 다섯 명의 연서가 함께 찍혀 있었다.그 내용은 간단했다.“정채향의 부친, 故 정이표는 12년 전 경상 감사 부임 중‘조정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상관을 무고하였고,당시 내통 혐의로 파직되었으나 문서 유실로 처벌을 피한 바 있사옵니다.”“그 자의 딸이 세자빈으로 책봉될 경우, 왕실의 정통성은 국민들의 신의를 잃을 것이옵니다.”화령이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외척과 구 세력을 결집시켜 만든 결정적 한 수.그녀는 오래 준비했고, 치밀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의심’이라는 향은, 한번 퍼지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소문은 마치 들녘의 냉기처럼 궁 안을 타고 번졌다.“세자빈의 부친이 역모를 꾀했단 말인가.”“그 아이는 정이표의 딸이라더라.”“진정 그러하다면, 책봉은 취소되어야 하지 않겠는가.”궁의 공기는 차갑게 변했고, 내전 앞 복도엔 감히 다가서는 이 하나 없었다.정채향. 그 이름 하나에 묻어있던 모든 향이 이젠 오해의 냄새로 바뀌고 있었다.오전 시정이 끝난 후.이현은 자신의 서고에서 그 봉서를 받았다.붉은 인장을 뜯지 않은 채, 그는 잠시 서있었다.“…너무 빠르구나.”그는 중얼였다.“내가 그 아이를 마음에 품었다 말한 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그는 문서를 뜯었다. 그리고 조용히 읽었다.그 한 줄, 한 문장, 그 속에 적힌 혐의들. 증거는 없었지만, 기록은 정제되어 있었고, 그 정제된 ‘의심’은 충분히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그는 봉서를 다시 접고 손을 내전 쪽으로 뻗었다.“채향이 있는 곳으로, 수라간 말고, 내전으로 데려오라.”하지만 그 순간, 내시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저하, 금일 낮 정각, 정채향 낭자께 정식 연행령이 내려질 것이라 하옵니다.”“의금부에서 파견된 인원이 이미 내전으로 향하고 있사옵니다.”이현의 눈빛이
궁중 시식 평의 날. 비공식이라 하나,이 자리는 향후 세자빈의 자질을 가늠하는 ‘최종 정서적 여운’의 결정적 무대였다.왕세자 이현의 어명을 받은 오래된 원로 세 명과 내관 두 명,그리고 궁중 상궁단이 모인 그 자리엔 책봉을 앞둔 채향과, 외척 가문의 명문녀 고운령,이 두 사람이 조용히 맞서 있었다.“오늘의 주제는 ‘소한상(素寒床)’이라 하옵니다.”“향과 기름을 삼가되, 마음은 담을 것. 빈자리를 채우기보다 비운 자리에 의미를 둘 것.”이현이 직접 정한 주제였다. 이 화려한 궁 안에서, 누가 더 ‘비움의 고요함’을 품을 수 있느냐.운령은 은은한 은제 접시에 백자기로 만든 떡국과, 매화 장식이 곁들어진 황금빛 온면을 올렸다.정제된 자태와 세련된 배합은 분명 눈에 띄었고, 궁중 예법에 충실한 정갈함도 느껴졌다.“예를 갖춘 음식이옵니다.”그녀는 단아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눈으로 익히고, 향으로 짐작하며, 입으로 그 마음을 익히소서.”조정 원로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운령 낭자, 이 상엔 분명 ‘품위’가 있소.”이현은 말이 없었다. 그 시선은, 고운령을 지나 채향이 올린 상으로 옮겨갔다.그녀의 상엔 단 하나. 작은 대추죽이 놓여 있었다.그릇은 백자였고, 장식 하나 없이 단출했다.그 죽 위에 살포시 얹힌 건 작게 자른 잣 한 줌과 얇게 채 썬 밤, 그리고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의 쌀눈 가루 한 자락.“하나뿐이옵니다.”채향은 작게 입을 열었다.“속을 데우되, 마음을 흔들지 않기 위함이옵니다.”“맛은 향과 같사옵니다. 보이진 않되, 한 번 스미면 그 사람의 하루가 따뜻해지나이다.”조용히 숟가락을 든 상궁 하나가 그 죽을 한 술 입에 넣었다.곧,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무엇으로… 이런 맛을 내셨습니까.”채향은 웃었다.“쌀눈을 볶아 찧은 가루에 말린 대추를 직접 손으로 갈아 넣었사옵니다.”“단맛은 대추에서, 묵직함은 밥물에서, 여운은 마음에서 우러났사옵니다.”그 말에 조정의 원로 하나가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초겨울의 궁 안. 새벽마다 내리는 서리보다 사람들의 눈길이 더 날카롭게 채향의 걸음을 베었다.그녀는 내전 입궁 후 정식 책봉이 선포되었으나,‘왕실 예법을 갖춘 여인’으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세자빈이 아니라 그저, 칭호만 허락된 자였다.“낭자, 예법훈장 윤 상궁께서 오늘도 세 시진 일찍 기다리신다 하옵니다.”“답문학, 품의례, 봉정차 세 가지를 익히셔야 다음 절차로 넘어갈 수 있사옵니다.”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예, 가보겠사옵니다.”그러나 그 말보다 먼저, 그녀의 손은 수라간 뒷방에서 끓고 있는 찹쌀탕 안으로 들어갔다.책봉 후에도, 그녀는 매일 새벽 한 솥의 국을 끓였다.궁중의 격을 갖추려 노력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삶의 중심은 ‘음식’이었다.“예가 격이라면, 온기는 삶이옵니다.”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어제 다듬어 놓은 밤과 은행을 볶아 작은 탕 안에 띄웠다.그 손끝의 일은 그녀에게 ‘숨’과 같았다.그러나 그런 숨결조차, 궁은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그날 오후, 예훈을 받는 자리.윤 상궁이 채향이 올린 다과를 들여다보더니 매서운 시선으로 물었다.“이것은 어찌 이리 진하냐.”“답문은 정중한 선에서 머물라 하였거늘, 낭자의 한 상은 너무도 사사로워 보이옵니다.”채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 손등엔, 오늘도 솥에 데인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인이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정채향 낭자께선 궁녀로 지내셔서 그런가 봅니다. 무언가를 만들 땐, 늘 손수 하시려 하시지요.”“하지만 세자빈이 되실 분은 손이 아니라 ‘뜻’을 품는 자리가 아닙니까.”그 말의 주인공은 고운령.고위 외척 가문인 고씨 집안에서 밀어낸 ‘격식의 화신’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그녀는 이미 어릴 적부터 궁의 예법 교육을 받으며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전, 숟가락을 쥘 줄만 아는 여인과 숟가락을 내미는 여인은 다르다고 배웠습니다.”그녀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안엔 분명한 선이 있었다.“채향 낭자께선
새벽의 내전. 책봉 명단이 담긴 목패가 중궁전 앞에 도착했다.금줄이 감싸진 붉은 함, 그 위에 적힌 다섯 명의 이름 중 첫 칸.분명히 그곳에는 ‘정채향’이라는 이름이 올라갈 것이었다.허나, 새벽을 찢는 문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중전마마께, 조용히 전하옵니다. 수라간 정채향 낭자의 과거…그 이름은 진짜가 아니옵니다.”비밀리에 도착한 편지 한 장. 그 안에는 지금까지 채향이 감춰왔던 진실,아니, ‘감추었으나 끝내 묻히지 못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그녀의 진짜 이름은 정채연. 채향은 어릴 적 병으로 죽은 언니의 이름이었다.그들은 어린 채연을 언니의 이름으로 입적시켰다.무명의 어린아이로는 궁녀 시험조차 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녀는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살아남았고, 지금껏 모든 하루를 그 이름 안에서 삼켜왔다.서화령은 그 기록을 들고 중전전의 향로 앞에 앉았다.매화향이 은은히 감도는 방 안에서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이제… 그 아이는 스스로 물러나야겠지.”“죽은 이름으로 살아온 자가 어찌 세자의 배필이 될 수 있겠는가.”같은 시각. 채향은 작은 손으로 떡국을 빚고 있었다.책봉 발표 날 아침, 이현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떡국’을 올리겠다고 다짐한 하루였다.그녀는 설탕도 꿀도 넣지 않았다.말간 국물에 하얀 가래떡을 얹고, 은은한 들기름 향만을 덧붙였다.그 국을 앞에 두고 그녀는 잠시, 죽은 언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채향 언니.”“난 아직도… 그 이름이 나인지, 당신인지 모르겠사옵니다.”“허나 한 가지는 분명하옵니다. 이 마음만큼은, 내 것이었사옵니다.”책봉 발표가 있던 그 시각. 대전엔 모든 대신과 궁료들이 모였고,왕세자는 정좌한 자리에서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오늘부로, 세자빈 간택 후보 5인을 고하노라.”“그 첫째, 정채향 낭자.”웅성거림이 일었다.그때, 서화령이 조용히 왕에게 납서문을 올렸다.“폐하, 이 이름은 실존하지 않는 이름이라 하옵니다.”“낭자는 죽은 자의
수라간 어르신의 방은 늘 정갈하고 말이 없었다.채향을 비롯한 후배 궁녀들이 그 앞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다듬곤 했다.그 방은 궁녀들의 마지막 단 한 치, ‘세상의 바깥이 궁이라면, 그 안의 마지막이기도 한’ 곳이었다.그러나 지금 그 조용했던 공간 앞에서 이궁 소속 수색 인원과 내관들이 벌집처럼 뒤섞이고 있었다.왕의 명으로 내려온 지령이었다.“정채향 낭자의 출신을 증명할 서류가 이 방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하옵니다.”방은 삽시간에 뒤집혔다. 묵은 장롱이 열리고, 쌍자비단을 덮어둔 반짇고리가 들춰지고,마루 아래 숨겨진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발견되었다.그 안에는 익숙한 글씨로 적힌 봉서 하나와 조선호적 원본 문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그 문서에는 분명히 쓰여 있었다.“출신: 전라도 부안군 하서면, 무명. 생모는 이름을 남기지 않음. 조혼 기록 없음.”그 문서가 보여준 이름은 ‘정채향’이 아니었다.그녀의 과거, 그녀의 처음 그리고 그녀가 궁녀가 되기 위해 잊은 이름이었다.같은 시각. 채향은 내전 정원 앞 작은 솥에 황태포를 데치고 있었다.입궁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예비 간택상 차림 준비였다.하나의 음식이 아닌, 한 사람의 진심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오늘 올릴 음식은 단 세 가지 뿐이옵니다.”그녀는 시녀에게 조용히 말했다.“맑은 국, 짠 나물, 그리고 단 쌀떡. 한 상엔 세 가지뿐이지만 제 마음 안에 있던 것 전부이옵니다.”그녀는 몰랐다. 자신의 과거가 지금, 수라간에서 조용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내관은 바로 왕에게 보고를 올렸다.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증거는 없었으나,문서상의 출신은 ‘무명’ 왕실의 혼례를 논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그 말을 들은 왕은 오래 침묵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출신은 이름이 아니고, 이름은 죄가 아니다.”“그대들이 보고 있는 그 아이가 내 눈앞에서 국을 지어 올린 그 손의 주인이다.”“그 손이 진실이라면 나는 그 손을 믿겠다.”그
내전의 문턱은 낮지 않았다.궁녀의 걸음으로 들어왔던 궁이었으나, 이제는 그 안에서도 또 다른 경계를 넘어야 했다.그 경계는 ‘입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고, 채향은 마침내, 사랑이 아니라 의무의 발끝으로 그 문 안을 디뎠다.내전 입궁 첫날. 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환영도 없었고, 눈에 띄는 적대도 없었다.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채향 낭자.”중궁의 시녀 중 하나가 나직이 말을 걸었다.“저하께선 오늘 아침, 상단에서 들여온 천을 살피러 가셨사옵니다.잠시 내전에서 홀로 계시게 될 터이니, 궁의 규율은 다시 한번 익혀두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말은 공손했으나, 그 말 아래에는 ‘당신은 이곳이 익숙하지 않지 않느냐’는 뜻이 깔려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소인, 잘 익히고 지키겠사옵니다.”그녀는 오랜만에 다시 그림자처럼 조용한 몸짓으로 걸었다.수라간의 뒷문에서 몰래 고추씨를 볶던 그때처럼,누군가의 발소리를 피해 볶음솥을 닦던 그 손끝처럼.이제는 궁녀가 아닌 위치였으나,그녀는 여전히 ‘낮게 숨쉬는 자의 예법’을 알고 있었다.내전 깊은 곳, 작은 정원 하나가 비어 있었다.그 안엔 반쯤 핀 모란이 한 송이, 흙을 뚫고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그 꽃 앞에서 채향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여긴, 처음 보는 공간이옵니다.”그녀는 속삭이듯 중얼이며 손끝으로 조심스레 꽃받침을 어루만졌다.“나는… 여기서 살아남아야 하옵니다.”“저하를 향한 마음을 품은 채,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감싸 안아야 하옵니다.”그러나 그 순간 정원 뒤편, 감춰진 회랑 아래서 은밀히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를 훑고 있었다.“지금 저 눈빛, 자신이 누군지도 잊은 거 아니야?”“정채향… 네가 아무리 단정히 입어도, 수라간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터.”그 속삭임은 간택 예비 후보 중 하나였던 남윤서의 입에서 나왔다.그녀는 서화령의 조카로, 한때 이현의 배필이 될지도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