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2. 국물에 묻은 기억

작가: 데이지
last update 게시일: 2026-08-10 16:05:17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아침이었다.

하늘은 투명하게 맑았고, 햇살은 서까래 틈새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수라간의 솥뚜껑은 이른 시각부터 덜그럭거렸고, 김은 고요히 피어올랐다.

기름 냄새, 장 향, 불에 데운 토기에서 올라오는 구수함.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수라간은 언제나처럼 부지런히 하루를 데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한 분주함 속에서도, 오늘은 어딘가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채향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궁녀들보다 말을 아꼈고, 웃음도 드물었다.

그러나 손끝은 정직했고, 항상 조용히, 깨끗하게, 단정하게 움직였다.

오늘 아침 그녀의 손은 무나 전복을 씻고 있었고, 

손바닥에 떨어진 찬물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

“이리 내보게, 찬모 윤씨가 상궁께 문책을 받았대.”

한쪽에서 궁녀들이 웅성였다.

“이번엔 곰국에서 비계를 덜 거두었다나 봐. 세자 저하께서 그 자리에서 숟가락을 내려놓으셨대.”

“세자 저하의 입이 까다로운 건 익히 아는 일이지. 사흘째, 수라를 전혀 드시지 않는다 하더라.”

“듣자 하니, 대비마마께서도 속이 타시다던데…”

그 말이 채 끝나기 전, 수라간의 대문이 세차게 열렸다.

회색 도포를 걸친 상궁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눈빛은 날카로웠고, 

손에 들린 서찰 하나가 긴장된 분위기를 더욱 꾹꾹 눌러앉혔다.

“수라간 궁녀 중, 죽을 책임질 자가 누구더냐.”

정적 속에서, 채향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고, 상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사흘. 네가 세자저하의 수라를 맡거라.”

그날 밤, 채향은 혼자 남아 국물을 우렸다.

볶지 않은 들깨를 물에 불리고, 사골을 한 번 데쳐낸 후 다시 우렸다.

기름은 걷고, 기름은 또 걷었다.

그녀는 국물의 색을 보지 않았다. 향을 맡지 않았다.

그저 온도를 느꼈고, 귀를 기울였다.

‘이 정도 끓음이면, 혀끝에선 거슬리겠지. 조금 더 낮춰야 해.’

그녀는 손등에 물을 묻혀 온기를 재며, 무언가에 귀를 대듯, 냄비의 속삭임을 들었다.

이현은 그 시각, 내전 안 깊숙한 휘장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손에는 펼치다 만 책이 있었고, 그 곁에는 식지 않은 수라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 국물엔 자꾸만 어릴 적의 향이 묻어 있었고, 

그 향 뒤에는 잊고 싶은 기억이 도사리고 있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입은 타들어 가는 듯 말랐고, 속은 비어 있었다.

“이유가 없다 하여도, 손을 대기 어려운 날이 있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시선을 천장으로 던졌다.

곁에 아무도 없는 방. 그 고요가, 마치 식지 않는 국물처럼 무겁게 피어올랐다.

다음날 새벽, 정채향은 죽을 완성했다.

사골과 들깨가 고요히 만나 서로를 가라앉히고,  미나리와 마늘쫑이 마지막으로 숨을 얹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찬그릇 위로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건… 사람을 위한 맛이 아니옵니다. 마음을 위한 온기요, 저하의 속을 위한… 조용한 숨 한 모금이옵니다.’

그렇게 준비된 죽은, 조용히 상궁의 손에 들려져 세자궁으로 향했다.

채향은 돌아서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그 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지만, 공기 어딘가를 스치듯 퍼져나갔고,

그날 밤 이현은 처음으로 국물 위에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냄새를 맡았고, 찬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숟가락을 집었다.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52. 출신은 이름이 아니고, 이름은 죄가 아니다

    수라간 어르신의 방은 늘 정갈하고 말이 없었다.채향을 비롯한 후배 궁녀들이 그 앞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다듬곤 했다.그 방은 궁녀들의 마지막 단 한 치, ‘세상의 바깥이 궁이라면, 그 안의 마지막이기도 한’ 곳이었다.그러나 지금 그 조용했던 공간 앞에서 이궁 소속 수색 인원과 내관들이 벌집처럼 뒤섞이고 있었다.왕의 명으로 내려온 지령이었다.“정채향 낭자의 출신을 증명할 서류가 이 방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하옵니다.”방은 삽시간에 뒤집혔다. 묵은 장롱이 열리고, 쌍자비단을 덮어둔 반짇고리가 들춰지고,마루 아래 숨겨진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발견되었다.그 안에는 익숙한 글씨로 적힌 봉서 하나와 조선호적 원본 문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그 문서에는 분명히 쓰여 있었다.“출신: 전라도 부안군 하서면, 무명. 생모는 이름을 남기지 않음. 조혼 기록 없음.”그 문서가 보여준 이름은 ‘정채향’이 아니었다.그녀의 과거, 그녀의 처음 그리고 그녀가 궁녀가 되기 위해 잊은 이름이었다.같은 시각. 채향은 내전 정원 앞 작은 솥에 황태포를 데치고 있었다.입궁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예비 간택상 차림 준비였다.하나의 음식이 아닌, 한 사람의 진심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오늘 올릴 음식은 단 세 가지 뿐이옵니다.”그녀는 시녀에게 조용히 말했다.“맑은 국, 짠 나물, 그리고 단 쌀떡. 한 상엔 세 가지뿐이지만 제 마음 안에 있던 것 전부이옵니다.”그녀는 몰랐다. 자신의 과거가 지금, 수라간에서 조용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내관은 바로 왕에게 보고를 올렸다.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증거는 없었으나,문서상의 출신은 ‘무명’ 왕실의 혼례를 논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그 말을 들은 왕은 오래 침묵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출신은 이름이 아니고, 이름은 죄가 아니다.”“그대들이 보고 있는 그 아이가 내 눈앞에서 국을 지어 올린 그 손의 주인이다.”“그 손이 진실이라면 나는 그 손을 믿겠다.”그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51. 사랑으로 궁에 들었사오나…

    내전의 문턱은 낮지 않았다.궁녀의 걸음으로 들어왔던 궁이었으나, 이제는 그 안에서도 또 다른 경계를 넘어야 했다.그 경계는 ‘입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고, 채향은 마침내, 사랑이 아니라 의무의 발끝으로 그 문 안을 디뎠다.내전 입궁 첫날. 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환영도 없었고, 눈에 띄는 적대도 없었다.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채향 낭자.”중궁의 시녀 중 하나가 나직이 말을 걸었다.“저하께선 오늘 아침, 상단에서 들여온 천을 살피러 가셨사옵니다.잠시 내전에서 홀로 계시게 될 터이니, 궁의 규율은 다시 한번 익혀두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말은 공손했으나, 그 말 아래에는 ‘당신은 이곳이 익숙하지 않지 않느냐’는 뜻이 깔려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소인, 잘 익히고 지키겠사옵니다.”그녀는 오랜만에 다시 그림자처럼 조용한 몸짓으로 걸었다.수라간의 뒷문에서 몰래 고추씨를 볶던 그때처럼,누군가의 발소리를 피해 볶음솥을 닦던 그 손끝처럼.이제는 궁녀가 아닌 위치였으나,그녀는 여전히 ‘낮게 숨쉬는 자의 예법’을 알고 있었다.내전 깊은 곳, 작은 정원 하나가 비어 있었다.그 안엔 반쯤 핀 모란이 한 송이, 흙을 뚫고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그 꽃 앞에서 채향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여긴, 처음 보는 공간이옵니다.”그녀는 속삭이듯 중얼이며 손끝으로 조심스레 꽃받침을 어루만졌다.“나는… 여기서 살아남아야 하옵니다.”“저하를 향한 마음을 품은 채,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감싸 안아야 하옵니다.”그러나 그 순간 정원 뒤편, 감춰진 회랑 아래서 은밀히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를 훑고 있었다.“지금 저 눈빛, 자신이 누군지도 잊은 거 아니야?”“정채향… 네가 아무리 단정히 입어도, 수라간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터.”그 속삭임은 간택 예비 후보 중 하나였던 남윤서의 입에서 나왔다.그녀는 서화령의 조카로, 한때 이현의 배필이 될지도 모른다는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50. 내 하루를 지은 자에게

    대전의 아침은 평소보다 이르게 밝았다.왕은 밤을 새웠다. 숨기지 않았다.잠들지 않은 눈으로 동이 터오는 창을 지켜보았고,자신이 등 돌려 묵인했던 세자의 사랑이 어떤 길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비로소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었다.그가 조용히 일으킨 손끝 아래, 내관이 조심스럽게 밀서를 올렸다.“서화령 마마의 외숙 가문. 남평윤씨의 집안에서 조달한‘봉제 내의’의 끈이 정문에 걸린 겉옷에 사용된 실과 유사하옵니다.”왕은 아무 말 없이 그 밀서를 불에 던졌다.다 타오르지 않은 잿더미가 붉은 숯을 남겼고, 그가 중얼거렸다.“눈을 감았기에 썩은 것이 아니다. 썩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은 것이었다.”같은 시각, 중궁의 연회장이 아닌 후원 깊은 정자에서 서화령은 또 다른 수를 놓고 있었다.고운 분을 바르며, 거울 앞에 선 그녀는 단정했다.예전과 다름없이, 조선 제일의 미모를 지닌 여인답게 우아했고,눈동자엔 미세한 초조조차 묻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는 궁 전체에 또 다른 독이 되어 퍼질 준비를 마쳤다.“정채향이… 태중에 아이를 가졌다고 하더이다.”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 들은 이는 고개를 갸웃했고, 세 번 들은 이는 고개를 끄덕였으며,네 번째부턴 입이 아니라 눈빛이 먼저 수긍을 건넸다.“그래서였군. 그처럼 얼굴이 창백하더니.”“그리 피곤하더니, 입덧이라도 있었던 게지.”“세자저하의 옷을 품에 두었던 그 밤, 무언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니라.”이번엔 향이 아니었다. 소문은 눈보다 빠르게 번졌고,그 소문은 마치 독한 술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다.채향은 자신에게로 쏠리는 시선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수라간 안팎의 궁녀들마저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릴 때 그 작은 손끝조차 힐끗거렸다.이현은 그날 밤 채향의 침전으로 찾아왔다.문밖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한참을 조용히 서 있다가 마침내 들어섰다.채향은 아무 말 없이 국을 데우고 있었다.맵지 않고, 짜지 않은 단호박과 누룩간장을 이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49. 내가 사라지면 그분의 이름은 지켜질까요

    새벽의 궁은 언제나 고요했지만, 그날은 유난히 서늘했다.차오르는 새벽달조차 연무 속에 묻힌 듯 흐릿했고,밤새 내린 이슬은 회랑 바닥에 얼룩진 발자국을 하나씩 새기고 있었다.그때, 대문 앞에 누군가의 낮은 외침이 들렸다.“이, 이게 뭐더냐!”호위군이 허겁지겁 달려왔고, 경계하던 병사들은 눈을 부릅떴다.그리고 곧, 붉은빛 도는 곤색 겉옷 하나가 정문 현판 아래 정갈하게 접힌 채,세 겹의 끈으로 묶여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누군가 일부러,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겉옷 안쪽에는 이현의 이름을 상징하는 매화 문양이 놓여 있었고,소매 끝에는 분명히 궁녀용 비단 수가 엮인 하얀 실오라기가 박혀 있었다.그것은 단 한 장의 옷이었다.그러나 그 옷이 궁 안에 던진 파문은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날카롭고도 빠르게 번져 나갔다.“세자저하의 옷이… 어찌…”“정채향 낭자라 하더이다, 그 침전 안에서 옷이 사라졌었다지요.”“설마… 잠자리까지…”“천한 궁녀가 세자저하를 유혹해…”궁은 입을 막지 않았다.오히려, 입을 벌리고 즐기고 있었다.향기롭던 이름은 순식간에 궁 안에 가장 불순한 상상으로 뒤덮였고, 진심은 곧 ‘간음’이란 말로 꺾여 버렸다.채향은 아무 말 없이 수라간 뒤편 좁은 담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그녀의 손엔 작은 접시 하나가 들려 있었고,그 안에는 보리밥 한술과, 조선간장 몇 방울이 담긴 질박하고도 서늘한 한 끼가 놓여 있었다.아무도 먹지 않을 밥. 누구도 대령받지 않을 음식.그것은 오늘, 자신이 마지막으로 궁 안에 쏟는 ‘진심의 밥상’이었다.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이것은 내가 지은 죄이옵니다.”“저하를 사랑한 죄. 그 곁을 끝내 떠나지 못한 죄.그러니 이제, 그 죗값은 제가 사라짐으로써 갚겠사옵니다.”그 순간, 별궁의 뒤편 문이 열렸다.그리고 이현이, 거센 숨결을 몰아쉬며 그녀 앞에 서 있었다.그의 눈은 타올랐고, 손엔 그 옷이 들려 있었다.정문에서 회수해 온, 세상의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48. 그대 없는 나라를 지킬 마음은 없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궁 안의 공기는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바람은 매화 가지를 흔들었고, 공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청명했으나,사람들의 눈빛은 어딘가 일렁이고 있었다.그날 아침, 왕은 일찍이 상단에서 들여온 중국산 비단을 펼치고 있었다.천의 색을 고르는 일이었으나, 그의 손길은 뜨뜻미지근했고, 시선은 먼 곳에 가 있었다.그 순간, 내관이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세자저하께서… 독대 요청을 하셨사옵니다.”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은 무릎 꿇은 채 왕의 앞에 앉아 있었다.“폐하.”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단했다.“신첩 정채향. 그녀를… 제 빈으로 삼고자 하나이다."그 말에 왕의 손이 천 위에서 멈췄다.그는 천천히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망설임은 없었고, 주저도, 계산도 없었다.“네가 감정으로 하는 말인지, 책임으로 하는 말인지 아비로서, 왕으로서 분간이 어렵구나.”이현은 그대로 대답했다.“둘 다이옵니다.”“감정이 먼저였고, 책임은 그 감정을 지키기 위해서 뒤따른 것이옵니다.”왕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멀고, 또 묵직했다.“내가 아비가 아니었다면, 나라의 사직만을 생각했다면 그 아이를 벌써 궁 밖으로 내쫓았을 것이다.”“허나, 그대의 그릇이 크다면, 그 아이 또한 그 그릇에 담길 그늘이 되어야 할 것이다.”그 말은 승낙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절도 아니었다.그 말은… ‘이제 너희가 증명하라’는 무거운 명령이었다.같은 시각. 화령은 조용히 중궁의 연회장을 준비시키고 있었다.잔치가 아니었다. 소문을 불러들이는 연회였고, 궁 안의 눈과 귀를 한곳으로 모으기 위한 장치였다.그녀는 나직하게 시녀에게 지시했다.“오늘 연회에는 간택 당시 탈락했던 사대부의 딸들을 초대하거라.”“그리고 저 여인의 침전에서 세자저하의 겉옷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우연히 흘러나가게 하거라.”그 말은 살처럼 얇고, 칼처럼 깊었다.그날 오후. 수라간에 쏟아진 시선은 이질적이었다.궁녀들의 눈은 노골적으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47. 진심 앞에서 입을 다문 자들…

    대전의 아침은 유난히 적막했다.평소보다 이른 시간, 대신들은 이미 자리에 들어앉아 있었고, 왕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치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으려는 무거운 공기가 회랑을 타고 흘렀다.중전 화령은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궁중 예법에 맞춰 고운 보랏빛 비단 치마를 차려 입었다.입꼬리엔 미소를 걸었으되, 그 미소 아래에는 매화꽃잎처럼 얇은 칼날이 감추어져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폐하. 중전으로서 감히 한 말씀 아뢰옵고자 하옵니다.”“하교하시옵소서.”왕이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지금 이 궁 안은 향기와 감정에 잠식되어 있사옵니다.허나 나라의 중심, 왕실의 위엄은 그 어떤 감정보다 무거운 것이라 사료되옵니다.”“세자빈 책봉은 감정이 아닌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옵니다. 그 기준은 피, 가문, 그리고 명분이외다.”그 말에 회의장은 잠시 조용해졌다.이현의 시선이 서서히 그녀를 향해 날카로워졌다.“중전의 말씀은 곧, 세자빈 후보의 자격을 부정하는 것이겠소?”“아니옵니다. 단지, 그 기준을 다시 되새기고자 함이외다.”화령은 조용히 웃었다.“폐하, 세자저하. 궁의 입맛은 늘 바뀌나이다. 허나 세자빈은 평생 나라의 어미가 되어야 하옵니다.”이현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허면 중전의 뜻은 정채향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보는 것이오?”“그 아이는 진심을 지녔사오나, 진심은 늘 권위 앞에서 약하오.”그 순간, 문이 열렸다. 채향이 조용히 입장했다.청연빛 치마 저고리, 머리는 단정히 틀었으되 장식 하나 없는 수수한 모습.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불초한 몸이, 부름 받지 않았으나 스스로 그 자리에 나아오고자 하옵니다.”왕이 시선을 들었다. 그 눈엔 흔들림도, 흥미도 없었다.다만, 듣고자 하는 고요한 기다림만이 있었다.“중전 마마의 말씀, 모두 옳사옵니다. 소인은 가문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나라의 어미라 불릴 그릇 또한 되지 못하옵니다.”“허나, 이 궁 안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