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국물은 말갛고 뜨거웠다.
숟가락에 담겨 조심스레 입술을 적신 그 한 모금,
짧은 숨이 따라 들이켜지고,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천천히 풀리는 듯한 기분.
이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똑같은 동작을 한 번 더 반복했다.
두 번째 숟가락은 첫 번째보다 더 맑게 목을 타고 흘렀고, 목울대 너머로 조용히 뜨거움이 내려갔다.
무엇이 달랐을까.
그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세 번째 숟가락을 들었다.
이후의 동작들은 생각 없이 이루어졌다.
마치 손끝이 의식보다 먼저 움직이는 듯, 그는 조용히 그릇을 비워나갔다.
죽을 다 비운 뒤, 그는 침묵한 채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깨끗이 비워진 바닥엔 단 하나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릇 가장자리엔 국물 자국마저 없이 마른 흰 테두리만 남아 있었다.
“…조용하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였고, 그 말이 어쩐지 입 안에 남은 향보다 더 오래 맴도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수라간은 그야말로 술렁이고 있었다.
“저하께서… 숟가락을 드셨다고?”
“남기지 않으셨다 들었어요. 그것도 세 그릇 중 가장 늦게 올린 죽을!”
“그게 누구 솜씨라더냐?”
그 궁녀들이 소곤거리는 곁에서, 정채향은 평소와 다름없는 손놀림으로 감자를 깎고 있었다.
말없이, 조용히, 고개 숙인 채 무언가를 다듬는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식물 뿌리를 씻는 농부 같기도 했다.
“정궁녀, 상궁님께서 찾으십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칼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자세로 상궁이 있는 안채에 들어선 그녀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너는 네가 어젯밤 무엇을 한 줄 아느냐.”
상궁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말에 담긴 울림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세자 저하께서 네가 올린 죽을 다 드셨다. 삼 년째, 그런 일이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상궁마마. 소녀는 그저… 속을 위하는 맛을 올렸을 뿐이옵니다.”
“그 속이 단순한 장부의 속이었겠느냐.”
상궁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대의 손끝엔... 무언가가 있다. 그러니 앞으로 사흘, 아니 열흘 동안은 세자저하의 식사는 네가 맡아라.”
한편, 그 시각 경복궁의 편전에서는 조정 대소신료들이 왕세자의 혼례를 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혼례를 늦출 이유가 없사옵니다. 세자의 나이, 스물둘. 마마께서도 바라시는 일이라 들었습니다.”
좌의정 민대감은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혼처로는 소신의 딸, 소희가 제격이라 사료되옵니다.
집안의 반열이야 말할 것 없고, 자질 또한 여염의 규수들과는 비교가…”
그 순간, 왕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알겠소. 혼례 이야기는 여기까지. 세자의 의중을 먼저 들어보는 것이 순리일 터.”
잠시 정적이 흘렀고, 민대감의 눈썹이 천천히 꿈틀거렸다.
그 속엔 기대와 불만, 계산과 경계가 동시에 스쳐갔다.
이현은 책을 펴놓은 채 잠시 시선을 멈추고 있었다.
글자 사이에 아무리 눈을 두어도, 마음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죽은… 누구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왜 그 국물엔, 내 속이 반응했을까. 왜, 하필 그 밤에.
그는 종이를 들고 글을 쓰다 말고, 불러냈다.
“내전에 수라를 올린 자. 그 이름을 알아보라.”
그 시각, 정채향은 찬물에 새우젓을 헹구고 있었다.
그 손끝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함이 있었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희미한 떨림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내 음식을 기억한다면.’
‘그 손끝이, 나의 국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그 순간, 찬물에 닿은 그녀의 손가락 끝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국이 끓지 않았다.수라간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솥은 조용히 비워져 있었다.그러나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날은 정채향이 처음으로 ‘국을 끓이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조용히 궁 밖으로 나왔다.머리에 쓴 흰 비단 건은 궁녀의 표식이 아니었고,몸에 두른 저고리와 치마는 수라간의 규범이 아니었다.그녀는 오늘, 사람으로서의 하루를 살기로 했다.그곳은 한강 어귀의 평지였다.봄볕이 내려앉은 들녘,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이는 보리밭 너머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이현이었다.
봄이 왔다. 아주 조용히, 마치 오래 기다린 손님처럼.새벽 공기엔 이른 쑥 내음이 섞여 있었고,골목의 아이들은 손에 마른 국수발을 쥔 채 뛰어다녔다.궁궐의 수라간에도 봄의 빛이 스며들었다.정채향은 여전히 국을 끓이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바쁘거나 절박하지 않았다.이젠 그녀 혼자만이 국을 끓이지 않았다.그녀는 이제 ‘가르치는 자’가 되었고,국을 끓이는 법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담는 법을 나누는 이가 되었다.열일곱의 젊은 궁녀 하나가 솥 앞에서 서툰 손짓으로 국자를 휘젓다곁눈질로 채향을 바라봤다.“…낭자, 이거 너무 진한 것 같사옵니다.”채향은 다가가 조
그날의 식탁은 정갈했다.금도 은도 없었고, 붉은빛 수라반도 아니었다.오직 나무로 짠 조촐한 상,상 위엔 하얀 사기 사발 두 개,그리고 국 하나가 놓여 있었다.채향과 이현은 그 상 앞에 마주 앉았다.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공기는 마치 모두가 지켜보는 듯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채향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국자 하나로 국을 퍼 이현의 사발에 담았다.맑고 잔잔한 국물 위로 얇게 저민 유자 껍질이 하나, 천천히 떠올랐다.이현은 말없이 그 사발을 들어 숟가락 하나로 국을 떴다.국물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은
수라간은 오랜만에 아침보다 먼저 불이 들어왔다.그 불은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누군가의 발걸음으로 인해 지펴진 것이었다.정채향이 돌아왔다.그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솥 앞에 섰고, 과거의 국자와는 다른 새로운 손의 무게로 국을 짓기 시작했다.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수라간의 공기마저 달라져 있었다.화로는 예전보다 낮은 불로 타올랐고,솥은 마치 그 주인을 기억하듯 조용히 숨을 죽이고 끓기 시작했다.그녀가 처음 손에 든 재료는 멥쌀이었다.쌀은 그녀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조용히 불을 받아들였고, 그 위에 채향은
바람은 그날도들꽃 냄새를 안고 마당을 건넜고, 햇살은 초가지붕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채향은 작은 초가의 뒷간 뒤편, 외양간과 연결된 작은 부엌에서 국을 짓기 시작했다.이곳엔 아무도 없었다.기록도 없고, 명령도 없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조차 없었다.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끓여본 적 없는 국을 끓이려 했다.그녀 자신을 위한 국. 그 국엔 다른 이의 기호도, 타인의 체질도, 나라의 운명도 담기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살아온 나날, 잊지 못했던 순간들,울음 삼키던 새벽의 찬물 같은 기억,그 모든 것이 쌀 한 줌에 스며 있었다.쌀은 전날 밤 미리 씻어 밤새도록 맑은 물에 불려
정채향이 궁을 떠난 날, 수라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불도 울지 않았고, 솥도 삐걱이지 않았으며, 하늘도 맑기만 했다.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은 ‘그녀가 머물던 자리에 아무도 오르지 않는 것’으로 천천히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다.수라간을 다시 돌보던 상궁들은 예전보다 국을 천천히 끓였다.하나같이 맛은 좋았지만, 그 맛은 사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이건… 채향의 국이 아니다.’그녀는 다만 국을 잘 짓는 자가 아니었다.그녀는 국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던 자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