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 국 안에는 다듬은 무, 겨울 들깨, 밤새 불에 올려 맑게 우려낸 육수가 들어 있사옵니다.”“…아무리 추운 날에도 이 국 하나면 속이 녹고, 사람의 얼굴에 온기가 돌았사옵니다.”“우리는 이 국으로 이웃을 대접하고, 장독 속에서 자란 인내를 나누었사옵니다.”“…그 속엔 격식보다 깊은 삶이 담겨 있사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나, 뜻밖에도 숟가락을 든 이는 또 다른 사신이었다.그는 국을 한 술 뜬 후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입에 들어가자 집의 향이 났소.”“…향신료도, 사치도 없는데 이상하게…그리움이 밀려들었소이다.”그 말에 사람들의 손이 하나 둘 움직였다.그리고 연회의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그 하얀 국은 가장 먼저 그릇이 비워진 상이 되었다.고운령은 조용히 이현을 바라보다 비단 부채를 펴며 중얼거렸다.“입 하나로 세상을 살리는 여인이라…”“…허나 그 국이 늘 사람을 살릴 수만은 없을 터.”그 말은, 이 연회가 끝나도 그녀를 향한 견제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순간, 이현은 조용히 채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 손에는 국그릇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엔 국물이 단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채향. 이 국은, 조선의 품이었다.”“…그대는 오늘, 말 대신 입으로 나라의 격을 증명했소.”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연회가 끝난 그날 밤, 采香堂에 돌아온 그녀는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그 안엔 오로지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집의 맛’그녀는 그 글귀를 조용히 벽에 붙였다.그 순간, 비로소 그녀는 알았다.자신이 지켜야 할 국은 궁의 국이 아니라, 집의 온기에서 피어난 한 그릇이라는 것을.采香堂엔 아침 해가 들기도 전에 무거운 기척이 흘렀다.그날, 내명부 소속 모든 상궁들의 명단이 정식으로 채향에게 전달된 날이었다.그 명단에는 이름, 나이, 출신, 봉직 년수가 조목조목 적혀 있었고, 어떤 이는 십 년 넘게 궁에 있으면서 그저 찬모의 그릇이나
서늘한 바람이 비단 발을 스치고 궁 안으로 가을이 스며들기 시작한 어느 아침.采香堂의 마루 끝에 정채향은 조용히 앉아 손 안의 작은 반찬첩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반찬첩은 낡고 오래된 것이었고, 한지엔 번진 먹물 자국이 여러 해를 말해주고 있었다.그것은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연회 상차림의 원고’였다.그녀는 그것을 한 장씩 넘기며 익숙하고도 낯선 재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능이버섯… 홍합 말림… 밤송이 절임…”어느 것 하나, 그저 보기에 아름답거나 귀한 것이라 쓰인 것이 없었다.모두가 계절을 기다려야 하며, 손이 많이 가고, 조용히 사람의 속을 달래는 음식들이었다.그날의 조정은 ‘명문 사대부와 외국 사신’을 함께 초청하는 왕실의 대연회, 추향연(秋香宴)을 공표했다.그리고 그 상차림을 주관할 이는 이제 정식으로 책봉된 왕세자빈 정채향이었다.소식이 발표되자마자 내명부는 소란스러워졌다.“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국빈 접대 상차림이라니…!”“빈마마께서야 솜씨야 뛰어나시다 하나, 왕실의 체통이란 게 있지 않소이까!”그러나 그 비난에 답하지 않은 이는 정작 채향 본인이었다.그녀는 그날부터 采香堂에 은밀히 시식 연회를 열기 시작했다.궁중의 작은 요리 상궁들, 각 처소의 궁녀들,조용히 그녀의 국을 먹어온 병약한 군관들까지.그녀는 그들에게 먼저 상을 차렸다.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가장 오래 머물던 재료,가장 오래 기억되는 향을 적어두었다.그녀의 방식은 ‘왕실’이 아니라 사람의 국물에서 출발한 상차림이었다.이현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채향. 이 상은 그대의 이름을 넘어 조선의 얼굴이 될 수도 있소.”“…두렵진 않소?”채향은 살짝 웃었다.“두려워서, 더 정직한 맛으로 채우려 하옵니다.”“…사람은 향을 속일 수 없사오니 입안의 기억은, 그 어떤 격식보다 오래 남사옵니다.”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루에 하나씩 상을 지었다.첫째 날엔 강황 쌀을 누룩에 절인 황향주,둘째 날엔 가을 전어 살만 발라 찐 쌈찜,셋째 날엔 버섯과 매실
“채향. 그대는 궁에서 국으로 사람을 살렸소.”“…이제는 국으로 궁을 살릴 차례요.”그는 안에서 품고 있던 작은 봉투를 꺼냈다.그 안엔, 지금까지 채향이 궁 안팎으로 차린 모든 상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누가 먹었고, 언제 먹었고, 무엇을 남겼고, 무엇을 감쌌는지.그 국들엔 ‘맛’이 아니라 궁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내일 아침. 경연 뒤, 내가 이 국들의 기록을 전하께 올릴 것이오.”“…그대가 차린 상이 궁중의 정치보다 더 정직했다는 것을 그 입맛이 이 궁을 숨 쉬게 했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소.”채향은 그 순간, 비로소 국을 끓이지 않아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조용히 일어섰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솥에 물을 붓고, 그 안에 초피잎을 띄웠다.“이 국은 아무도 먹지 않을 국이옵니다.”“…그저, 내일을 견디기 위해 제 마음을 달래는 국일 뿐.”“…헌데, 이 국마저 없었다면 전 아무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다시는 부서지지 않겠다는 한 사람의 결의였다. 그날 밤, 采香堂의 작은 솥에서는 쓸쓸하지만 깊은 향이 피어올랐다.초피의 잎은 조용히 퍼졌고, 그 국은 그녀의 마음을 데우는 단 하나의 불빛이 되었다.경복궁 근정전. 새벽 안개가 서릿발처럼 돌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가운데, 조정의 대신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들어섰다.정좌한 이현은 말없이 손 안에 쥔 봉투 하나를 내려다보았다.그 속엔 정채향이 차린 41개의 국, 26개의 정찬,8개의 궁중 회식 상차림,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약선상 한 그릇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전하께선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았고,그날 경연의 첫 의제로 오른 것은 바로 ‘세자빈 교체에 관한 건’이었다.고운령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전하. 빈마마께선 명문가 출신이 아니옵니다.”“…세자의 가문을 잇기엔 핏줄도, 가풍도, 외척의 후광도 부족하옵니다.”“…왕실은 피로 이어지나, 빈궁은 격으로 유지되어야 하옵니다.”그
내명부의 정자, 소원헌(小願軒). 소찬례는 그곳에서 조용히 열렸다.소원헌은 궁의 가장 안쪽, 빛이 닿지 않는 중정에 자리한 정자였다.햇빛은 하루 중 겨우 두 시각 정도만 머물다 사라졌고, 그곳에선 항상 나무 그늘의 색이 더 짙었다.그날, 그 자리에 초대된 이들은 중전 서화령의 측근부터 고운령의 외사촌인 명휘당 부인까지.겉으론 조용했지만, 소찬례는 이미 ‘세자빈 정채향을 향한 경계심’으로 가득한 자리였다.“빈마마께선 요즘, 국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고들 하더이다.”“허면 오늘은… 그 마음을 어떻게 푸실 생각이신지요?”명휘당 부인이 은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말의 안에는 ‘누군가를 감싸지 말고, 차라리 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채향은 말없이 앞에 놓인 찬합을 열었다.그 안엔 한눈에도 투박해 보이는 두부탕이 담겨 있었다.맑은 국물 위에 들기름에 살짝 지진 두부,그 위로 파채와 실고추를 곱게 얹었고 청간장으로 간을 가볍게 맞춘 국.하지만, 그 안엔 그녀의 ‘마음’이 아니라 ‘각오’가 담겨 있었다.“오늘 올리는 국은 ‘결백탕(潔白湯)’이라 하옵니다.”“…재료는 하얗고 부드러우나, 기름에 지지는 순간 모양이 깨지옵니다.”“…그 깨어진 틈에 국물이 스며들고, 비로소 입속에 감칠맛이 피어나옵니다.”명휘당 부인의 손이 잠시 멈췄다.채향은 그 시선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이 국은 누구의 결백을 증명하려 끓인 것이 아니옵니다.”“…다만, 누구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끓인 것도 아니옵니다.”“…모두가 모양을 유지하고 살 수는 없기에 우린 언젠가 부서지게 마련이옵니다.”그녀의 말은 순하되 단단했고, 부드럽되 날카로웠다.“허나 부서진 틈 사이로 진심이 스며들 수 있다면, 그 또한 한 그릇의 국이 될 수 있으리라 믿사옵니다.”그 말에 정자의 바람이 조용히 지나갔다.명휘당 부인은 조용히 국을 들이켰다.두부는 깨어졌고, 국물은 무심하게 맑았으나 그 맛은 깊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采香堂의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이른 아침 햇살이 덜 익은 감잎처럼 기울어지는 각도로 스며들었다.채향은 그 빛 아래서 종이에 적힌 작은 이름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이름은 평소 조용히 곁을 지키던 소윤 상궁의 것이었다.“빈마마… 드디어 잡혔사옵니다.”그날 새벽, 중전 측 궁녀 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소윤 상궁, 고운령 측과 왕실 기록을 따로 열람하며 빈마마의 ‘문서’를 열람했더이다.”“…그 기록이 어떤 용도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사오나, 내명부엔 이미 소문이 퍼졌사옵니다.”채향은 말이 없었다. 입술 끝을 꼭 다문 채, 오히려 조용히 솥을 꺼내 들었다.궁중에서 ‘문서를 뒤졌다는 것’은 사람을 치기 위함이다. 아니면, 그 사람을 넘겨주기 위함이다.소윤 상궁은, 채향이 처음 궁에 들어와 상 하나를 들였을 때부터 곁에 있었던 이다.부드러운 눈매, 조용한 손,그리고 한 번도 다그치지 않던 입.그녀의 배신이 진실인지 혹은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하지만 채향은, 그날 자신을 위한 국이 아닌 ‘소윤을 위한 국’을 끓이기로 했다.그녀는 오래된 찬장 속에서 조선 팔도의 말린 나물을 꺼냈다.강원도의 묵은 고사리, 남도의 가지채, 서해의 말린 톳과 북쪽 들기름에 절인 시래기까지.그 모든 나물은 한데 어우러지면 색도, 질감도 제각각이었고 쉽게 융합되지 않았다.그러나 채향은 그것이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다 같지 않은 사람들, 다 다르게 숨 쉬는 궁중의 숨결,그 모든 것을 섞어내어 하나의 국으로 끓이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국은 오래 끓였다. 어느 국보다도 오래.물이 졸고, 향이 고이고, 마침내 국물이 어둑하게 빛날 무렵 采香堂의 문을 두드린 이는 다름 아닌 소윤 상궁이었다.그녀의 얼굴은 무언가에 시달린 사람처럼 희고 긴장에 질려 있었다.“빈… 마마…”채향은 말없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전… 전, 그런 의도가 아니었사옵니다…”“…고운령 대감 쪽에서, 그저 확인만 해달라 하였고, 저는 마마를
“작은 솥 하나, 쌀뜨물과 말린 무말랭이, 그리고 들기름을 준비해 주세요.”잠시 후, 밭 가장자리에 작은 화로가 놓이고 솥이 얹혔다.그녀는 자신의 옷소매를 걷고 직접 들기름을 둘러 무말랭이를 볶아내기 시작했다.채향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기름에 닿은 무에서 고소한 향이 피어올랐고, 그 냄새는 은근하게 사람들을 끌어당겼다.그리고 볶은 무에 쌀뜨물을 부어 끓이자 작고 은은한 탁함을 머금은 국이 하나 태어났다.“빈마마, 이 국의 이름은 무엇이옵니까?”그녀는 그제야, 웃으며 입을 열었다.“‘손을 씻는 국’이옵니다.”“…흙 묻은 손으로 먹어도, 흙의 향을 탓하지 않고 그 맛을 감싸는 국이옵니다.”“…사람의 마음에도, 이런 국 하나쯤은 있어야 하옵니다.”그 국을 받아든 이들은 처음엔 머뭇거리다 한입 두입, 국을 들이켰고곧 누군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반 위, 한 그릇의 국이 지금껏 얼마나 많은 편견을 식혀냈는지를 사람들은 말없이 느껴야만 했다.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고운령의 사촌, 한운택은 작게 속삭였다.“…대체 어디서 이런 여자가 났단 말이냐.”그는 곧 서신 하나를 꺼내 궁으로 보내는 준비를 했다.“국 하나에 사람을 얻는 여자. 그러나 그녀가 외척을 얻지 못한다면 그 맛은 곧 쓴맛으로 변할 것이오.”채향은 몰랐다. 그 국 하나가 궁의 외척 회합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그러나 그녀는 또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밭의 흙과 사람의 마음은 모두 손으로 고르는 것이다.’그날 밤, 采香堂으로 돌아온 그녀는 작은 무말랭이 한 줌을 덜어 곱게 말려 장독 위에 걸었다.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였다.“내일은, 또 어떤 흙을 안고 살아야 할까…”“…허나, 흙을 씻는 것도, 국을 끓이는 것도 모두 내 손이면 족하옵니다.”초여름의 궁은 햇살보다 시선이 더 따가운 계절이었다.오찬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궁중엔 또 다른 초대장이 돌기 시작했다.‘외척 연회’-명문가 사대부의 여식들과 외명부 부인들,그리고 왕실과 혈연으로 엮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