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 뭘?”
세린은 억지로 웃으며 돌아섰다.
“그냥 화장대 구경하고 있었어. 향수도 많고 화장품도 많아서.”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내가 언제 놀랐다고 그래?”
태준은 웃지 않았다. 그는 입구에 선 채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진열장에 놓인 가방과 하이힐, 침대 근처의 여성 속옷까지 발견하자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침묵이 흘렀다.
태준은 방 안을 다시 한번 살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했다.
“뭐야.”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세린. 이거 네 물건이야?”
세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준은 옷걸이에 걸린 여성복을 바라보다가
레스토랑은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통유리 너머로 잔잔한 강물이 펼쳐져 있었고, 창가에는 작은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늦은 오후와 저녁의 경계에 걸린 시간이라 그런지 바깥 풍경은 유난히 부드러웠다.세린은 정우의 안내를 받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부담스러운 곳은 아니었다. 적당히 조용하면서도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여기 어떻게 아셨어요?”메뉴판을 펼치던 세린이 물었다.정우는 맞은편에 앉아 물컵을 옮겨 주며 대답했다.“예전에 우연히 왔다가 괜찮아서 기억해 뒀어요.”“분위기가 좋네요. 데이트하기에도 괜찮을 것 같고요.”말을 꺼내고 나서야 조금 민망해졌다.그러나 이미 늦었다.정우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메뉴판을 내려놓았다.“네. 지금 하고 있잖아요.”“네?”“데이트요.”너무도 당연하게 나온 대답에 세린은 순간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정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왜요? 세린 씨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그런 건 아닌데.”“그럼 맞네요.”정우가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리자 세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정우 씨는 꼭 말로는 못 이기게 해요.”“이기려고 하는 말 아닌데요.”“그럼 뭔데요?”정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세린 씨랑 데이트하는 게 좋아서요.”그 말에 세린은 괜히 물컵을 집어 들었다.이 사람은 정말 대단했다. 마음을 숨기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로는 아무렇지 않게 좋아한다는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적극적
출판사 건물의 유리문이 천천히 열리자 늦은 오후의 공기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하루 종일 실내에 머물러 있던 세린은 바깥 공기가 얼굴에 닿자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길었던 사인회가 끝나고 나니 몸이 조금 무거웠다.아이들 앞에서는 계속 웃어야 했고, 함께 찾아온 부모님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눠야 했다. 행사가 끝난 뒤에는 출판사 관계자들과 다음 일정에 관해 이야기까지 나누느라 쉴 틈이 없었다.하지만 마음만큼은 이상하게 따뜻했다.오늘 만난 아이들 중 한 명이 자신에게 건네준 그림 때문이었다.삐뚤빼뚤하게 그려진 토끼 그림이었다. 종이 한쪽에는 서툰 글씨로 세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아이는 그림을 건네면서 수줍게 웃었다.“작가님 책 읽으면 잠이 잘 와요.”그 말을 듣는 순간 세린은 하마터면 아이를 끌어안을 뻔했다.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잠들기 전의 즐거움이 되고, 무서운 밤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아이는 모를 것이다.세린은 아이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했다.그리고 그림이 구겨지지 않도록 종이 쇼핑백에 조심스럽게 넣었다.그렇게 소중한 선물을 품에 안은 채 건물 앞 계단을 내려오던 세린은 두 번째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가로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건물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흰 셔츠의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 올리고 차 옆에 가볍게 기대 선 모습이었다. 기울어진 햇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바람이 불 때마다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렸고, 그는 휴대전화를 확인하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자신을 발견하자 아주 느리게 웃었다.윤정우였다.세린은 한 박자 늦게 숨을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세린의 집 앞에 멈췄다.정우는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고는 세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도착했어요.”세린은 창밖을 내다봤다.매일 드나들던 익숙한 집이었다. 현관 앞에 켜진 조명도, 길가에 서 있는 나무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차에서 내리는 일이 아쉽게 느껴졌다.조금 전까지는 한시라도 빨리 이 하루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만 더 길어졌으면 했다.세린은 안전벨트를 풀고도 문 쪽으로 손을 뻗지 못했다.정우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왜요. 또 아쉬워요?”“그런 말 안 했거든요.”“표정에 다 써 있는데.”세린은 괜히 그를 흘겨봤다.“정우 씨가 먼저 안 가잖아요.”그 말에 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는 잠시 말없이 세린을 바라보다 낮게 웃었다.“그럼 큰일 나요.”“왜요?”“나 진짜 다시 붙잡고 싶어지니까.”세린은 대답하지 못했다.그의 눈빛이 너무 다정해서 조금만 더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차에서 내리지 못할 것 같았다.정우는 손을 뻗어 세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오늘 정말 예뻤어요.”세린이 눈을 크게 떴다.“갑자기요?”“울 때도 예뻤지만.”그가 미소 지었다.“웃는 건 훨씬 예뻐요.”“정우 씨.”“그리고 지금처럼 얼굴 빨개지는 건 정말 귀엽고요.”세린은 결국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금 어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대화를 이어 가지 않아도 편안했다. 정우가 엄지손가락으로 세린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 주면 그녀는 맞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우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세린 씨.” “네?” 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마를 살짝 맞댔다. “대신 약속 하나 해요.” “무슨 약속이요?” “오늘 집에 들어가서도 내 생각하기.” 세린이 눈을 크게 뜨자 정우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그리고 자기 전에 문자하기.” 그 말에 세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당연히 해야죠.” “당연한 거면 다행이고요.” “정우 씨는 안 할 거예요?” “뭘요?” “제 생각이요.” 정우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세린을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건 약속 안 해도 되는데.” “왜요?” “하루 종일 하고 있으니까요.” 세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정우 씨는 진짜 그런 말 너무 쉽게 해요.” “이것도 쉽게 한 것 같아요?” “네.” “그런데 어떡하죠. 전부 진심인데.”
“그럼 큰일인데.”정우가 낮게 중얼거렸다.세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뭐가요?”그는 잠시 세린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나도 똑같아서요.”그 말에 세린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조금 전까지는 자신만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는 게 아닐까 싶어 민망했는데, 정우도 같은 마음이라는 말을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정우는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혹시 나랑 조금만 더 있고 싶어요?”그 질문에 세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입을 열기만 하면 자신의 마음이 전부 드러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토록 망설여지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정우는 서두르지 않았다.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대답을 재촉하는 기색보다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었다. 그 사실이 세린에게 작은 용기를 주었다.“네.”겨우 들릴 만큼 작은 대답이었다.정우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뭐라고 했어요?”“들었잖아요.”“잘 못 들었는데.”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세린은 민망해진 얼굴로 그를 흘겨봤다.“정우 씨, 너무해요.”“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요?”“왜 자꾸요?”“듣고 싶어서요.”정우는 웃으며 덧붙였다.“세린 씨가 나랑 더 있고 싶다고 하는 말, 아마 오래 기억할 것 같거든요.”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을까.세린은 결국 항복하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우의 품에 기대어 있던 세린은 한참 만에 고개를 조금 들었다.차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창밖에서 간간이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세린의 귀에 가장 또렷하게 들리는 건 정우의 심장 소리였다.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으니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소리를 듣는 동안에는 조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과 혼란도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태준의 집에서 벌어진 일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십 년 동안 품어 왔던 오해가 풀렸다는 사실도, 서아의 임신을 둘러싼 소동도 아직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그런데도 정우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만큼은 모든 것을 당장 해결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세린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그제야 조금 진정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다른 문제가 생겼다.너무 가까웠다.정우의 손이 자신의 등을 감싸고 있었고, 고개를 조금만 움직여도 그의 턱이 머리카락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조금 전까지는 위로받는 데 정신이 팔려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느껴지기 시작했다.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세린은 괜히 민망해져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정우가 그녀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팔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하지만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벌써 도망가요?”세린은 고개를 들었다.정우는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였지만, 오늘은 그 안에 조금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도망가는 거 아니에요.”“아닌데. 방금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했잖아요.”“그건 너무 오래 안겨 있었으니까요.”“오래요?”